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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쿨~


오늘도 이프리트는 잠을 잔다. 어디서? 오르카호의 어딘가에서. 그녀가 잠잘 곳을 선택하는 능력은 탈론페더의 시크릿포인트 선정능력과도 같았다. 이말인 즉, 그곳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귀엽게 토끼 귀 후드를 입고 토끼인형을 안은 채로 꿀잠을 자는 이프리트. 그녀의 코골이없이 작지만 아름다운 숨소리는 옆에서 들으면 누구라도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 덕분에 점호 등의 상황에서 스틸라인 생활관에서 자면, 다른 병사들이 자기에게 같이 엉겨 자려고 들이대느라 이프리트를 고생시켰다. 


...도도도도도도돗!


그 때 이프리트의 밝은 귀가 쫑긋거렸다. 그녀의 귀는 경계근무때도 2km 밖에서 레드후드가 온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발소리 주인의 위치, 속도, 무게를 토대로 그 주인을 알아냈다. 그리고.. ㅈ대따는 것을 직감했다.


LRL, Long Range Light.


이프리트는 어린아이들이 싫었다. 그들은 잠을 자는 이프리트만 발견하면 자꾸 놀자고 앵겼다. 그리고 앵길때마다 소중한 토끼귀를 잡아댕겼고, 그녀가 가진 토끼인형을 달라고 졸라댔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프리트의 은신처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그 중에서도 LRL은 앞서 언급한 모든 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났다.


‘아잇 씨. 왜 하필 저녀석인 거야?!’


그러나 LRL이라는것을 안 이프리트는 그녀를 곧바로 쫒아낼 수는 없었다. 작업이나 벌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위해 길러진 정치적 감각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LRL은 굉장히 위험했다. LRL은 수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최근에는 철충 본거지에서의 광물 약탈 작전에서 커다란 군공까지 세우기도 했다. 이프리트는 일주일 전 LRL이 사령관과 각종 장성들, 그 외 영향력이 큰 민간 바이오로이드들에게서 직접 칭찬을 받는것까지 본 적이 있었다. 


만일 LRL이 이프리트에게 삐져서 사령관님이나 그리폰 중위님께 이른다면 소문이 퍼져 오르카 내의 온 간부들이 그녀를 갈굴 빌미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잠자리는 임펫 원사님의 옆자리로 배정 될 것이다. 그곳은 아마 오르카호의 연병장이 될 것이다.


이젠 이 때를 대비해 고안한 단계별 비상조치를 취해야 할 때였다.


1단계: 스텔스


사실 이프리트도 이게 통할거란걸 포기했다 포기했다. LRL은 예전 애꾸눈 스님이 나오는 드라마마냥 ‘관심법’을 쓰는지 이프리트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그래도 혹시나해서 숨 죽이고 몸을 웅크려봤지만, 역시나 이프리트가 있던 파이프 더미는 곧바로 등대빛으로 가득 찼다.


“오오, 그대는 어둠 속의 만렙토끼가 아닌가!”


“야, 만렙토끼 아니거든?!”


“우헤헹! 살아났구나!”


아, 실수했다. 이프리트는 자기가 제일 싫어했던 별명이 나오자 곧바로 소리를 높였다. 이는 LRL에게 자기는 놀 준비가 되어있다는걸 어필할 뿐이었다. 이러면 2단계 ‘무시하기’가 통할리가 없었다. 어서 다음 단계를 써먹어야 했다. LRL이 다가오고 있었다.


3단계: 은근하게 협박하기


“LRL, 신나게 놀고싶은 건 아는데, 난 엄연히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야. 알지?”


“이 몸은 너를 잘 알고있도다.”


“응 그치. 그데 지금은 여기서 특별 임무를 받고 숨어있는 중이야. 너희들에겐 기밀인 임무 말이야. 만일 방해했다가는 사령관님이나 에이미님이 널 잡으러올걸?”


“어? 그래?”


오, 먹힌다. 이대로 마무리만 잘 하면 별 탈 없이 LRL을 보낼 수 있었다. 힘내라! 이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그토록 원하던 꿀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아자아자! 아자젤!


“알았지? 이제 친구들한테 가서…”


“어? LRL?”


“아! 사령관이다! 사령관~. 여기야 여기~! 여기 이프리트도 있어~!”


“??!?!?!?!?!???!!!!”


오늘은 뭘 해도 안되는 날인가보다. 하필 사령관님이 다가왔던 것이다. 아 잠깐, 사령관님 정도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첫째로 평소에 사령관님은 자기가 어디서 퍼질러 자도 가만 놔두셨고, 둘째로 LRL이 말썽을 일으킬때마다 혼내주실 수 있는 존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령관님께서 가시는 길엔 사령관님 혼자만 있는게 아닐것인데…


“오, 우리의 LRL양 아니오? 이프리트 병장과 같이 놀고계시구려.”


“그대는 언제 봐도 자랑스럽군. 그 옆에 있는 토끼 녀석과는 다르게 말이지.”


“으힉! 추.. 충성! 아니, 승리!”


오늘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날인가보다. 사령관 뒤로 용 총장님, 마리 소장님, 레오나 소장님, 메이 소장님, 칸 소장님, 아스널 준장님이 사령관을 따르고 있었고 그들은 LRL을 보자 반갑게 맞이했고 칭찬을 마구마구 해주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훗훗, 역시 인간은 거느린 수하들이 참으로 많구나!”


“방금전까지 우리 알비스랑 잘 놀더니 금새 여기로 왔구나?”


“흥, 귀여운 꼬맹이 주제에. 요즘 꽤 한다면서?”


“그래, 메이 소장. 어쩌면 우리들보다도 더 대단한 아이일지도 모르지.”


“내 생각도 마찬가지. 이 아이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으아아아아 그만! 그만 하십시오!”


그들이 LRL을 칭찬할 때마다 자신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이 이프리트를 낳고 LRL을 낳으셨나이까! 이게 다 아자아자아자젤을 외친 탓이다. 다시는 아자젤교 같은거 믿나 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후 후 후. 인간의 수하들아. 그대들은 이 진조만을 칭송하지 말지어다! 그 때의 대전투에서 대활약을 펼친 라비언니, 페로언니, 하치코언니, 그리고 내 앞의 용언니도 잊지 말아라. 그들을 칭송하라! 이 진조는 그저 그들이 공격에 나서도록 도와준 것 뿐이로다.”


“””오~!”””


박수세례가 쏟아졌다. 이프리트에겐 박수소리 하나하나가 비수로 꽂혔다.


“허허, LRL도 참. 이젠 예의까지도 배웠어? 좀만 더 자라면 나 대신 사령관 해도 되겠어.”


“인간! 그만! 그대도 그만하거라! 그 이상의 칭찬은 짐도 감당치 못할 것이니라!”


그걸 본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기특한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끝났다. 이 등신같은 이프리트. 이프리트는 7일전 광물 약탈 작전때 꼼수와 꾀병을 써서 출전명단에서 제외되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도 뭐라 안했지만 그 자리는 LRL이 차지했고, LRL은 모두가 깜짝놀랄 대활약을 선보였다. 이젠 LRL에게 저항할 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프리트에게 남은 건 이 별들께서 자신에게 내릴 천벌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예상대로 마리 소장님이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젠 경멸만이 남아있었다.


“이보게, 이프리트.”


“ㄴ..넷! 아, 아니. 벼, 병장! 이프리트!”


“자네도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않나?”


“무.. 물론입니다! 시키시는 건 다 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의 기특한 웃음과는 다른 의미가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마리 소장은 굳은 얼굴로 이프리트에게 말했다. 이프리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럼, 오늘 하루 자네는 이 LRL양과 놀아주어야 겠네.”


“ㄴ..네?”


3일 지옥훈련이나 즉석 얼차려쇼 같은걸 생각했던 이프리트는 예상을 벗어난 지시사항에 깜짝 놀랐다. 물론 이 정도면 꽤 봐주신 거라 안심이긴 했다. 문제는 자존심이 땅 밑까지 꺼진 터라 도저히 LRL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프리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 스스로가 날려먹었으니까.


"네.. 넷! 이, 임무! 받들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령관과 다른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좋은 생각인데 마리?"


“나도 동감이오. 마침 LRL양도 같이 놀 친구가 필요해 보였소.”


"그래. 너가 딱이네."


"역시 꼬맹이에겐 꼬맹이가 딱이지."


"요즘 LRL에게 새 전우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딱 맞겠군."


“LRL, 이제 이프리트 병장은 자네 친구일세!”


LRL은 좋아라 방방뛰었다.


"친구! 친구! 아, 흠. 이 진조의 모험을 함께 할 모험가가 또 늘었군!"




"그럼 다됬네. 이프리트, LRL과 잘 놀다가. LRL, 이프리트랑 잘놀고있어!"


"그래, 인간도 안녕! 인간 수하들도 안녕!"


사령관과 지휘관들이 떠났고 마리만이 남아있었다. 마리는 이프리트의 축 처진 어깨를 잡았다.


“이프리트!”


“병장! 이프리트!”


"너무 상심말게. 그대는 지금 아주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네. 힘을 내게!"


"아, 네! 알겠습니다!"


자네는 이제 LRL의 따까리라네. 이프리트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신나서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LRL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프리트를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마 그대도 이번 일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을수 있을걸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리 소장은 사령관 일행을 따라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이프리트는 마리 소장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 표정은 뭐랄까.. 몇달 전 대원구조임무에 자원하고 나선 자신의 머리를 매만져준 그때와 거의 비슷했다.




이제 이프리트 앞에는 천진난만한 표정의 LRL만이 남아있었다. LRL의 시선이 이프리트에게 닿자, 이프리트는 두려움에 뒷발걸음칠쳤다.


"두려워말거라! 만렙토끼여."


그 말을 듣자 이프리트는 뒷발걸음도 멈추고 발끈했다.


"만렙토끼라 말하지마라? 이프리트라고 불러, 이 프 리 트!"


"후후. 알았다, 화염의 정령이여."


"아니, 그건.. 에휴, 알았어. 난 화염의 정령이야."


"오오! 고맙다 화염의 정령이여. 자, 이제부터 짐이 선포하느라! 이 자리에서 지금, 위대한 레비아탄 탐험대가 탄생하였도다!"


그러더니 갑자기 LRL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이프리트의 마찬가지로 얇고 부드러운 손목을 붙잡았다.


"빨리 가자 빨리! 언니들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어어, 잠깐만!"


이로서 말년병장 이프리트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소녀와 함께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