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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호

 


 2001호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영국 소설가, 존 오웰

 

 



1.눅눅하고 어두운 땅굴에 열 세번의 종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춰 일을 하던 더치 걸들의

부산스런 움직임이 자연스레 멈추었다.

그녀들에게 얼마 없을 짧은 휴식 시간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휴식을 선사한 인류에 영광을.'

 


더치 걸들이 오른손을 꽉 쥐어

심장부위에 대고 건조한 목소리로 읊조린 뒤

바로 주저 앉고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198호는 221호에게 다친 오른손을 보여주며 고통을 호소했다.

55호는 401호에게 몇 일 전에 봤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99호는 1238호에게 다음 근무를 대신 서줄수 있는지 묻고있다.

그런 소소한 얘기들이 오고가는 중

천장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확성기에서

굵고 거친 경고음이 세 차례 울렸다.

그에 맞춰 감독관들이 일렬로 서서

더치 걸들의 주변을 애워쌌다.

가장 붉은 모자를 쓴 인간이 앞으로 나와

더치 걸들을 천천히 훑어본다.

소녀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날이 온 것일까.

이야기가 끊어지자 명령이 내려진다.

 


"이 중에 C구역을 방문할 예정자가 있다."

 


곧 더치 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C구역.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빛을 비춰주며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줄 천국,

인류를 위해 헌신한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

 


과연 이곳의 아이들 중 누가 떠나간 후 돌아오지 않게될까?

더치 걸들은 기대에 잠겼다.

한 소녀를 제외하곤.

 


"지금부터 호명하겠다. 이름을 불린 더치 걸은

앞으로 나와 대기하도록."

 


아이들은 흥분된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렇지 못한 아이는 감독관에게 걷어차일테니.

석탄가루에도 가려지지 않는 더치 걸들의 커다란 눈이

붉은 모자를 향해 반짝이자

남자는 곧 입을 열어 하나 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97호! 257호! 658호! 921호!..."

 


여기저기서 탄식과 환희의

신음소리가 퍼져나왔다.

그중 큰 소리를 낸 아이는

감독관에게 머리를 걷어차였다.

그럼에도 소녀들은 기쁨을 감출수 없었다.

한 소녀를 제외하곤.

 


1948호.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여태껏 더치 걸들을 부려먹고

허약해진 아이들은 두들겨 패던 인간들이

이제와서 C구역이라는 곳으로 보내준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쓸모없는 인원을 아무 반발없이

없애려는 속셈 이겠지.

1948호는 주변의 멍청이들을 훑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호명은 계속되었다.

 


"...1431호! 1665호! 1948호! 2001호!"

 


그녀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허나 감독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등을 걷어찼을 때

그제야 제대로 들었음을 알았다.

 


"이상 행운의 열 두 기에게, 일동 박수!"

 


짝짝짝짝짝

더치 걸들이 박수를 치며

그 중 일부는 눈물까지 흘렸다.

선택받은 아이들역시 기쁨의 눈물과

앞으로 계속될 노동에 남겨진

자매들에게 위로의 한 마디씩 남겼다.

한 소녀를 제외하곤.

1948호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녀는 인간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죽게될 것이라 생각했다.

1948호가 눈물을 흘리자

옆에 서있던 1665호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린 구원받은거야.

1948호는 고개를 저었으나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인류의 거짓말을 믿을수 없었으니까.

 

 


2.선택받은 더치 걸들은 모두 트럭에

탄채 어딘가를 향해 가고있다.

옆에서 감시하는 감독관도 없겠다

소녀들은 이야기꽃을 활짝 폈다.

C구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밥은 며칠에 한 번 나올까,

그곳에선 걷어차질 않는 감독관이 있을까,

지상에서 과연 꽃이란 물건을 볼 수 있을까,

그녀들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오직 한 소녀만의 얼굴이 어두웠다.

 

1948호.

다른 아이들이 물어도 반응이 없고

자신만의 생각에 갇힌 채

가만히 앉아 있는다.

다른 아이들은 별 수 없다는 듯이 내버려둔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데,

갑자기 트럭이 움직임을 멈췄다.

드디어 도착한걸까?

아이들은 기대감에 잔뜩 긴장했다.

마침내 도착한걸까?

1948호는 두려움에 잔뜩 긴장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 후

별안간 뒷문이 활짝 열리더니

묘령의 여인이 아이들을 맞이했다.

 


키르케

 


"반가워요 여러분! 행복이 그대들과 함께하길!"

 


여인은 친절한 미소로 자신을 키르케라 소개했다.

그리고 한 소녀 한 소녀

모두가 트럭에서 내리도록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다.

1948호가 낯선 이에게 두려움을 내비치자

여인은 웃는 얼굴로 손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켰다.

 


"이 곳에서 여러분을 두렵게 하던 것들,

여러분이 슬프게 하던 것들,

여러분을 좌절케 하던 모든 것들을 잊게 될것입니다!

자, 저를 따라오세요!"

 


이후 여인의 뒤로 더치 걸들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 거위를 따라가는 새끼 거위 때들처럼.

충분히 저물은 저녁 노을도 눈 부시다는 듯

더치 걸들이 눈을 가리면서 여인을 따라

바삐 걸어가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하는 것을 멈출수 없었다.

형형색색 가지가지 서로 다른 꽃들이

마치 다른 꽃들을 집어삼킬듯

저마다 꽃봉오리를 벌려 자태를 뽐내는듯한

아름답게 펼쳐진 꽃밭의 모습에

탄식하지않는 아이는 하나 말고는 없었을 정도다.

키르케는 가던 걸음도 멈춘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아마 꽃밭을 보는것은 처음일테지요.

보라빛의 루나리아,

분홍빛의 자목련,

노란빛의 루드베키아,

붉은빛 라일락까지.

모두가 화사한 빛을 내며

아름답게 피어났답니다.

원하는 만큼 만져보세요!"

 


여인의 허락이 떨어져도

아이들이 손을 감싸며 머뭇거리자

키르케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 꽃밭에 들어가 보라색 알리움 한 송이를

꺾어 바로 앞의 더치 걸에게 건냈다.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여인이 건넨 꽃송이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받았다.

꽃에서 나는 향기를 조금 맡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에게도 알려주려는 듯

옆에 서있는 아이의 코에 꽃을 들이댔다.

그 아이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자

그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이

웃음꽃을 피웠다.

한 소녀를 제외하곤.

 

1948호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도

줄곧 주변을 살펴보며 경계를

멈추질 않았다..

상처입은 한 마리의 승냥이마냥.

그 모습을 본 키르케는

천천히 1984호에게 다가갔다.

소녀가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찬

시선을 보내자 여인은 그 가녀린

어깨에 손을 올린 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가엾은 것,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괜찮단다, 아가야.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이제 괜찮단다."

 


그 후 키르케는 1948호의 손을 잡은 채

다른 소녀들을 인도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웃음과 환희가 끊이질 않는

모두가 찾아가는 그 곳,

 

C구역을 향해.

 

 


3.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더치 걸들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옷을 입었다.

꽃밭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드레스를.

소녀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모습을 칭찬하기 바빴다.

한 소녀를 제외하곤.

1948호는 방금까지 자신을 안아준

여인의 온기를 느꼈다.

그토록 따뜻한 포옹이었건만,

그녀는 조금도 안심되질 않았다.

왜일까.

그 위로의 말이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건낸것 같아서일까.

밝은 드레스를 입고 어두운 표정을 지은

1948호는 매우 눈에 띄었다.

 


"1948호? 저를 따라오세요."

 


키르케의 호명에 1948호는 흠칫했다.

여인이 손을 잡으라는듯 내밀자

1948호는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억지로 떠미는 통에

어쩔수 없이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조금 아프다싶을정도로 꽉 쥐며

새하얀 복도 중앙을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여인,

1948호는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른 둘은

검고 큰 문 앞에 섰다.

문짝엔 붉은 글씨로

무어라 적혀있었으나

그녀는 읽을수 없었다.

키르케가 거친 손길로

1948호의 어깨를 움켜잡고

얼굴을 마주봤기 때문이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보이는 선반 가장 오른쪽에

네가 쓸만한 도구가 놓여 있을거야.

그 도구를 들고 천막으로 가려진 문을 지나가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거란다.

넌 시키는대로만 하면되.

알겠지?"

 


키르케의 입은 환하게 웃고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소녀는 두려움에 떨며

또다른 땅굴에 들어가는 것인지 물어봤다.

허나 키르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문을 열어준 후

할 수 있다는 말만 남기며

1948호를 떠밀었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눈을 질끈 감은채

문을 닫는 여인의 얼굴뿐이었다.

문이 닫히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얀 전등이 차갑게 비추는 방은

붉은 천막으로 가려진 문과,

온갖 날붙이들이 놓여있는

선반이 보였다.

작은 식칼, 못이 박힌 장갑, 쇠 가위, 스위치 블레이드등

하나같이 날이 잘 들어있는 것이

고깃덩이정도는 쉽게 썰어버릴수 있을 정도였다.

소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작은 식칼을 쥔채

천막을 들어올려

그 너머로 걸어나갔다.

바로 앞엔 작은 엘리베이터가

문이 열린채 그녀를 맞이했다.

1948호가 조금 둘러보고

조심스레 들어가자

저절로 문이 닫히더니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4.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가지 않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애써 식칼을 움켜쥔 채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강한 빛에 큰 환호성이 그녀를 강하게 맞이했다.

놀란 그녀는 쥐고있던 식칼을 떨구며

귀를 막고 움츠러들었다.

눈부신 조명을 참아가며 애써 눈을 뜨자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위로 보이는 좌석에는 잔뜩 흥분한

인간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자리에는 익숙한

마녀 차림의 여인이 보였다.

키르케였다.

여인을 본 1948호는 황급히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등뒤로 둔탁한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뒤를 돌아본 더치 걸은 쇠창살문이 방금

들어온 뒷문을 막은 모습을 보았다.

혼란스러운 그녀를 뒤로한 채

키르케의 연설이 힘차게 시작되었다.

 


"오늘 밤,

여러분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쇼가 돌아왔습니다!

아름다운 소녀들의 피비린내나는 혈투!

그 끝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부디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인간들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종소리가 울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1948호는

불안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맞은편에서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

같은 탄광 출신인 2001호가

쇠 가위를 손에 쥔 채 주변 인간들의 거친 환호성에

겁을 먹고는 울먹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서있었다.

1948호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고

2001호도 그녀를 알아보곤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일이 있었냐는 1948호의 물음에

2001호는 어떤 인간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더니

어떤 방에 들여보내서는

이런 날카로운 가위를 쥐어주더니

어떤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지시한 후

그 뒤로는 여기로 오게 되었다고 울면서 얘기했다.

1948호는 안심시키려는 듯

더치 걸을 안아주려 하는 그 때,

갑자기 복부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녀들이 입고있는 드레스의 코르셋 부분이

갑자기 수축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은 스위치를 만지작거리는 키르케의 모습 아래로

두 소녀 모두 배를 움켜쥐며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내자

관객들은 답답하다는듯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머저리들아, 싸우라고!

시간 어렵게 내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뭐하자는거야?!"

 


"여기가 유치원 학예회 하는덴 줄 알아?!

빨리 붙으라고!"

 


"아, 쇼가 시작 됐는데 왜 질질 짜고만 있어!

내가 이럴려고 그 비싼 티켓갑 지불한줄 알아?

죽여! 죽여! 죽여버려!"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인간들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눈이 멀어버릴듯한 조명들,

갈비뼈를 부러뜨릴듯한 코르셋의 조임까지

미쳐버릴것만 같은 상황에서 2001호가

겁을 먹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아파요! 아파요!

살려주세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더치 걸의 비명속에도 인간들은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치기만 할 뿐이었다.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어서 일어나거라, 꼬맹이들아!

싸우렴! 싸워서 이기는 아이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단다!

착하지? 어서 일어나서 싸워!"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장 내의 관객들의 반복적이고 커다란 함성에

상상도 못할 두통이 쏟아져내려

1948호가 구역질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것 같았다.

아니, 현실을 보고 있는것일지도.

1948호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동안

눈앞에 2001호가 심상치 않은 움직을 보였다.

쇠 가위를 한 손으로 치켜들고

1948호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고통속에 몸부림치던 2001호의 눈빛은

더이상 친구를 반기는 눈빛이 아닌

한 마리 죽여야 할 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본 1948호는 서늘한 감각을 느끼곤

서둘러 주변을 살펴봤다.

식칼. 지금 그녀의 유일한 보호수단.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1948호는 곧 생각해냈다.

엘리베이터에서 큰 소리와 밝은 조명에 놀라 떨어뜨렸었지.

곧 생각이 끝나자마자

2001호가 가위를 휘둘러

1948호의 팔을 그어버렸다.

팔에 뜨거운 고통과 함께 핏물이 솟아나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고통과 충격속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1948호와 2001호는

인간들의 고함소리로 머리속을 가득 채웠고

서로를 향한 분노로 눈앞을 가렸다.

이내 서로를 죽이기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고

피부를 찢어 발기며

새하얀 드레스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 갈때 쯤,

이 두 소녀들은 더 이상 아름다운 아이들이 아닌

그저 서로를 죽이려는 투견으로만 보였다.

2001호의 가위가 1948호의 머리를 찌르려들자

소녀가 두 손으로 2001호의 손을 막아낸 후

가위를 든 손을 이빨로 물어 뜯었다.

입가가 붉은 피로 물들었고 2001호는 가위를 놓친채

손을 움켜쥐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1948호가 가위를 집기위해 달려들자

2001호가 배를 걷어차 넘어뜨린뒤

1948호에게 덤벼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1948호가 캑캑거리며 몸부림을 쳤으나 소용없었다.

2001호가 눈이 뒤집힌채로 목을 졸라댔기에

1948호는 벗어날수가 없었다.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가고 눈앞이 캄캄해질때 쯤,

버둥거리던 왼 손에 날카로운 것이 닿자

단숨에 움켜쥐어 2001호의 어깨죽지에 꽂아 넣었다.

곧 상황은 역전되었고 1948호는 2001호를 바닥에 눕힌뒤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갈기기 시작했다.

한 번 한 번 주먹이 2001호의 얼굴을 후려칠 때마다

관객들이 환호성은 더욱더 커져갔다.

곧 1948호가 지쳐 주먹질이 느려지자

인간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 맹목 힘!"

"폭력 맹목 힘!"

 


"폭력... 맹목... 힘..."

 


1948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구호를 이해했다.

곧 이어 2001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양 엄지에 힘을 주었다.

2001호의 두 눈은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러 터졌어..."

 


1948호의 양 엄지가 2001호의 두 눈을 깊숙이 찔러들어갔다.

2001호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으나

1948호는 그치지 않고 두 손을 더욱 깊숙이 쑤셔 넣었다.

경기장의 관람객들은 폭발할듯한 반응을 보였다.

곧 2001호의 발악이 잦아들더니

비명은 줄어들고 손은 힘을 잃었다.

장내가 침묵에 빠지고

1948호가 2001호의 머리를 내려놓고

서서히 일어서서는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흔들어보였다.

인간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구호를 외쳤다.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평화는 맹목! 맹목은 힘!"

 


"폭력은 평화... 맹목은... 힘..."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구호를 중얼거렸다.

구호는 곧 의식속에 메아리쳐져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5.경기가 끝나고 1948호는 키르케의 인도하에

어느 비좁은 방에 들어섰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독방이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될거다."

 


키르케가 묵묵히 말했다.

 


"...부름이 있을 때까지

편하게 있으렴."

 


"...살려주세요"

 


키르케가 문을 열고 나가자

1948호가 쉰목소리로 빌었다.

키르케가 걸음을 멈추자 더치 걸이 울부짖었다.

 


"제발... 제발 이 곳에 버려두지 말아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다시 땅굴에 들어가도 좋아요...

살려주세요... 제발..."

 


"내게 애원하지마렴."

 


키르케가 냉정히 말을 끊었다.

 


"이곳에 온 더치 걸이 네가 처음은 아니야.

당연히 마지막도 아닐테지.

내게있어 넌 그저 수많은 인형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훔치며

달아나듯 자리를 떠났다.

 


"살아남으렴..."

 


키르케가 사라지고 방문이 닫히자

조금의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작은 독방안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살아남으렴… 살아남으렴… 살아남으렴...’

"폭력은 평화... 맹목은... 힘..."

‘살아남으렴… 살아남으렴… 살아남으렴...’

‘폭력은… 살아남아… 살아남은… 맹목... 살아나므렴…

살아날… 힘은.... 맹목… 살아나…’

 


키르케의 마지막 말이 1948호의 머리속에서

경기장의 구호와 뒤섞였다.

그리고 처음 탄광에서 출발했을때

C구역에 대한 말들을 기억해냈다.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빛을 비춰주며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줄 천국,

인류를 위해 헌신한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

 

그랬다.


1948호는 C구역을 이해했다.

그녀는 여태껏 인류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적을 물리친 그녀의 투쟁을 향해

인간들이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지않았는가!

이 모든 일은 인간들에 대한 헌신이었다는 것을!

이 애정어린 관심들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인류는 그녀를 사랑한다!

인류는 그녀를 사랑한다!

인류는 그녀를 사랑한다!

 


잠시뒤 1948호는 무언가에 홀린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어두컴컴한 천장을향해 두 팔을 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관객의 환호성에 응대하듯이.

그녀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저를 응원한 인류에 영광을!'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저를 응원한 인류에 영광을!'

'중대한 시간을 쪼개어 저를 응원한 인류에 영광을!'

 


그녀에겐 훤히 보였다.

타오르는듯 빛나는 조명이 그녀를 내리쬐며

그녀를 위한 승전의 트럼펫이 울렸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간들은 찬사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두 눈이 파인 채 고통에 울부짖는 그녀의 희생양들마저

선망의 대상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녀는 승리자였다!

비참하게 흘러갔던 과거여 안녕히!

무지로 의심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나여, 안녕히!


나는 다시 태어났다!

 


...

 


"폭력은 평화... 맹목은 힘... 헤헤... 헤..."

 


약간의 실소를 터뜨린 후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의심은 사라졌다.

모든것이 끝났다.

 

그녀는 인류를 사랑했다.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