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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아타 프로토타입

 

바닐라 A1
 
"손을 떼 주세요. 땀 묻습니다."
"주인님의 지능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판단입니다."
"선물입니까? 의외로 정성적인 행동이라 놀랐습니다."
"주인님도 같이 청소해버려야.. 아. 들렸습니까?"
바닐라 A1의 인게임 대사


...


불이 꺼진 사령관실은 고요했다. 의자가 끼익끼익거리는 소리만을 제외한다면. 책상 위로 다리를 감아올린 사령관은 고민이 있는듯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잠시후 눈을 뜬 사령관은 호출벨을 눌러 부관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않아 부관이 사령관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나요 주인님?"


배틀메이드 콘스탄챠 S2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응답했다. 사령관은 차분히 명령을 내렸다.


"바닐라 A1과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을 즉시 이곳으로 부르도록."


콘스탄챠는 깜짝 놀랐다. 사령관님이 하필 그 두 명을 부르신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 따라야만 한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부관은 두 명의 메이드를 사령관실로 보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또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덩치 큰 라비아타는 싱긋 웃는 모습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의 바닐라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자신들의 주인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리길 기다리며 서있는다. 두 바이오로이드의 모습을 묵묵히 보고있는 사령관은 콘스탄챠를 내보낸 뒤 입을 열었다.


"산안산업의 베틀메이드 소속 라비아타 프로토타입, 그리고 바닐라 A1."


사령관이 감정없는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희들을 왜 불렀는지 짐작이라도 가는게 있나?"


순간 라비아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굳이 알아야 합니까?"


초록머리 메이드가 귀찮다는듯 툴툴거리자 옆에 서있던 라비아타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닐라를 나무랐다.


"바닐라! 주인님께 무슨 말버릇이니?!"


"언니, 주인님께서 굳이 저흴 부르신 이유가 뭐겠어요. 보나마나 밤시중이나 들라는 별..."


"아니란다, 바닐라. 그게 아니란다."


사령관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바닐라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닐라에게 다가갔다.


"너의 말투와 행실에 대해서 몇 번이고 지적했을거다."


사령관은 바닐라를 마주보며 서자 바닐라가 눈길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버릇없는 태도에 대해서도 수 십 번을 얘기 했을테고."


사령관이 얼굴을 기울여 바닐라와 시선을 마주치자 바닐라가 고개를 힘 없이 떨궜다.


"그런데도 너는 달라지는게 하나도 없구나."


"사령관님, 바닐라는..."


"만들어질 때부터 성격이 그렇게 조정되었으니 어쩔수 없다, 내 수 백 번도 더 들었다."


사령관은 라비아타의 변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바닐라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자 사령관은 바닐라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난 너희 배틀메이드들을 꽤 높이 평가해왔었다. 높은 전투력에 따른 임무 완수율, 주인의 명령에 일체 거부감 없이 따르는 복종심, 온갖 위험한 철충들을 상대로 두려움없이 나서는 용기. 너희만한 바이오로이드는 또 없을거라 생각했지. 헌데..."


사령관이 걸음을 멈추고 바닐라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헌데 너희들은 아니야. 바닐라, 라비아타. 너희들은 아니라고."


라비아타의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고 바닐라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라비아타의 등 뒤로 걸어가 그녀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사령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비아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사령관은 라비아타가 들고있는 대검을 쓸어내리듯이 매만졌다.


"이 거대한 대검을 내게 겨누며 나를 철충이라 힐난하곤 콘스탄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날 죽이려 들었던거. 너도 기억하지?"


"주...주인님, 저...전..."


"알아,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들. 벌써 수 천 번은 들었어."


사령관이 바닐라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내가 왜 너희 둘을 불렀는지를 알겠지?"


"...저희들을 훈계하시려는 겁니까?"


바닐라가 단호히 대답하자 사령관은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아니.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거니 바닐라? 지금 너희들을 어린애 혼내듯이 훈계하려는게 아니라고."


바닐라도 조금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인님의 지능을 고려해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도대체 뭘 하시겠다고 이 난리를..."

짜악!

사령관이 바닐라의 뺨을 갈겼다.


"반역자들의 싹을 잘라버리겠다 이 뜻이다."


바닐라가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뺨을 만지자 사령관이 라비아타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라비아타 프로토타입, 지금 당장 옆에 있는 바닐라 A1을 개잡듯 두들겨 패라."


라비아타는 크게 동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농담이 지나치시잖아요!"


"연식이 오래되서 귀가 먹었나 라비아타? 바닐라를 패 죽이라니까."


"미쳤습니까 주인님? 지금 무슨 명령을 내리고 자빠진겁니까?"


바닐라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으나 사령관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지휘관으로써의 명령이다, 라비아타! 어서  바닐라를 패 죽여라! 지금 당장!"


"전...전..."


라비아타는 크게 갈등하고 있다. 지휘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야만 한다. 허나 자매기를 죽이라는 명령만은 도저히 따를 수 가 없었다. 라비아타의 동요가 못마땅한듯 사령관이 혀를 차며 말했다.


"프레깅 미수에 명령 불복종 까지. 정말 배틀메이드의 대장이 맞기는 한거냐?"


"저...저는..."


"너희 바이오로이드에게 있어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지 않았나?"


"전..."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라비아타."


"..."


"바닐라를 때려죽여라."


잠깐의 적막, 그리고...


"언니 저..."


라비아타의 육중한 주먹이 바닐라의 얼굴을 후려치자 으적! 소리와 함께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라비아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과 바닐라를 번갈아 보더니 곧 사령관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질 못한듯이. 사령관은 소리쳤다.


"바닐라의 생체신호가 끊어지지 않았다. 계속해!"


라비아타는 두려움에 휩싸여 벌벌 떨었으나 명령은 명령이다. 곧장 바닐라에게 달려가 미친듯이 주먹을 내리꽃았다.  뼈가 부서지고 피부가 찢기는 소리가 사령관실 밖까지 울려퍼졌다. 사령관은 휘파람을 부르며 책상위에 걸터 앉아 바닐라가 으깨지는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았다. 그때 사령관실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엇?!"


크게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온 콘스탄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주...주인님? 라비아타 언니? 이게 대체 무슨...?"


"배신자를 척결 중이다. 별 일 아니니 물러가도록."


사령관은 태연히 명령을 내렸으나 콘스탄챠는 듣지도 않고 라비아타에게 소리를 질렀다.


"라비아타 언니! 그만하세요! 바닐라를 죽일셈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라비아타는 주먹질을 멈추고 바닐라를 내려다봤다. 핏자국으로 얼룩져있는 몸은 최소한 방어라도 하려는지 웅크려 있었으나 왼팔만은 부러졌는지 이상한 각도로 휘어있었다. 얼굴의 일부분은 함몰되어 더 이상 바닐라의 얼굴이라 생각하기 힘들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한 쪽 눈만이 라비아타를 바라보고있을 뿐이었다. 라비아타는 미칠듯한 죄책감에 사로잡힌체 울부짖고 있었다.


"아...바닐라...이건...아아아..."


"크으...컥! 커허억...끄르륵..."


바닐라의 입에선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른듯 피가 끓는 소리만이 나오고 있었다. 사령관은 한숨을 쉬며 책상에서 내려와 바닐라에게 다가갔다. 바닐라는 한 쪽 눈으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곧 숨이 끊어질듯 한 눈빛은 마치 살려달라는 무언의 요청으로 보였다.


"함내에서 나의 권위는 절대적이란다 바닐라. 그렇기 때문에 너의 그 시건방진 태도는 묵인 해줄수가 없어."


사령관이 바닐라의 머리카락을 덥석 쥐어올리자 바닐라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알겠니 바닐라?"


바닐라는 대답했다. 아니, 대답인지 짐승의 울부짖음인지 모를 신음소리를 흘려보냈다.


"우...우으어으으...에...에에...아에슴니아..."


"그래, 착하지 바닐라. 이제..."


순간 사령관은 싸늘한 시선을 느꼈다. 바닐라의 눈이 사령관을 째려보고 있었다. 혐오감이 담긴 경멸의 눈빛으로. 순간 사령관의 마음속에서 알수없는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라비아타"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라비아타는 주인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예! 주인님."


사령관은 바닐라를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아직 숨이 붙어있지않니. 임무를 완수하도록."


"사령관님!"


"컥! 커윽..크르륵...커억!"


콘스탄챠가 소리쳤고 바닐라는 동요하듯 부르르 떨었으나 사령관은 못들은 체 말을 이어갔다.


"라비, 내가 다른 자매를 시켜 너를 치워버렸으면 하는거니?"


사령관이 라비아타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면 너를 시켜 다른 자매들을 죽여버리라 명령하길 원하는거니."


그걸로도 충분했다. 라비아타에겐 그 정도 협박으로도 충분했다. 라비아타는 주먹에 온 힘을 담은 후 바닐라의 심장부로 내리꽃았다.

퍼억!


뚝...뚝...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일까? 바닐라의 심장에서 떨어지는 핏물일까? 절망에 빠진 라비아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일까? 방울은 곧 바닥에 떨어져 흔적만을 남긴 체 사라졌다.


"콘스탄챠!"


사령관이 부관을 불렀다.


"방청소는 너에게 맡기마. 저것은 이그니스와 포티아를 시켜서 처리하라고 하고. 그리고 라비아타?"


라비아타는 말이 없었다. 사령관은 다시 라비아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 내 권위에 도전하고싶을 때마다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하도록."


말을 마친 사령관은 이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령관실을 나갔다.


"언니..."

콘스탄챠의 물음에도 라비아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정말...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라비아타의 흐느끼는 소리는 사령관실을 벗어나질 못한 체 그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