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호 대원들은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인류가 멸망해서 의복을 따로 구하기도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 도구로 만들어진 그녀들에게 다른 의복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사령관은 의복 제작자 오드리 드림위버에게 모든 대원들의 평상복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옷을 받은 대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기뻐하며 고마워했다. 오르카호 에이스인 슬레이프니르도 부하 겸 친구들을 데리고 사령관을 찾아왔다.


"모두들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보기 좋다."


사령관의 칭찬에 그리폰은 얼굴을 붉혔다.


"인간, 너무 잘 해주는거 아냐? 우린 줄 게 별로 없는데."


"별로 보답을 바란 건 아니니 걱정 마라. 내 눈이 보기 좋으라고 입힌 거기도 하니까."


"피이- 그럴 줄 알았어, 엉큼한 사령관. 고맙단 말은 안 할거야. 대신 활약해 줄게."


새침한 그리폰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그리폰의 룸메이트인 블랙하운드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령관님. 이런 옷 갖고 싶었어요."


"그래. 블하도 평상복으로 입으니 더 귀엽구나. 확실히 전투복의 아빠 팬…… 줄무늬 반바지보다 나아."


칭찬을 받은 블랙하운드가 헤실헤실 웃고 있으니, 소대장 흐레스벨그가 눈을 감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가끔씩은 굿즈 말고도 이런 평범한 옷도 괜찮은 것 같군요."


그렇게 모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블랙하운드가 단말기를 들고 말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저희 평상복 입은 거랑 사령관님하고 사진 한장 어때요? 남겨 놔서 기념하게요."


"사진? 어차피 평소에도 찍을 수 있는 건데." 슬레이프니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사령관님하고 우리 모두가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잖아? 이럴 때 찍어 두자는 거지."


블랙하운드의 말에는 다른 동료들과 사령관도 찬성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아무리 에이스인 슬레이프니르와 동료들이라고 해도 인간 사령관하고 시간을 보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오르카호에는 그녀들처럼 바이오로이드만 해도 백여 명이 넘었으니까.


사진은 사령관의 옆에서 호위 중이던 리리스가 찍었다. 찍는 도중에 그리폰이나 린트블룸 등의 대원들이 돌발적으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느라 몇번이나 다시 찍어야 했지만, 모두들 즐겁기만 했다. 어차피 사진이란 찍는 과정이 재미있는 것이니까(찍어 주는 사람을 제외하면).


단체사진을 찍고 또 개인사진도 찍자는 이야기가 나올 무렵에 흐레스벨그가 단말기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아참. 사령관님. 저희 정찰 나갈 시간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오늘 모임은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깐깐한 성격의 벨은 부하 동료뿐 아니라 윗선인 슬레이프니르의 스케줄을 챙기기도 했다.


"아, 그래?"


"사령관은 할일 많지? 지휘는 안 해줘도 돼. 어차피 방공망을 보고 오는 것뿐이니까."


슬레이프니르가 거들먹거리며 함장실을 나갔다. 그녀의 동료들도 뒤따라 함장실을 나서는데, 방금 전에 나갔던 블랙하운드가 뒤늦게 다시 들어와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사령관님. 혹시 이번에 정찰을 하고 돌아오면…… 이 옷 입은 저랑 사진 한번 더 찍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둘이서만요."


블랙하운드가 주저하며 말했다. 사령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흔쾌히 승낙했다.


"고마워요, 사령관님. 꼭 이기고 돌아올게요."


"그래, 조심해."


블랙하운드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출격하러 나갔다.


슬레이프니르와 친구들이 나가고 나니 함장실에 돌연 조용해졌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까, 곁에 서 있던 경호원 리리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사령관은 의아해서 말했다.


"왜 그래. 혹시 질투라도 나는 거야?"


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저 블랙하운드라는 아이가 사진을 찍자거나, 주인님과 둘이만 만나자고 하는 건 이번이 거의 처음 있는 일 아닌가 해서요."


"그렇지. 뭐, 옷을 받아서 기뻤을 테니까."


"흐음……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좀 들기도 해서요. 출격을 앞두고 저런 소리를 하니까, 꼭 사망 플래그처럼 들려서."


리리스의 말을 듣자 사령관도 그제야 불길한 예감이 일어났다. 그는 급히 사령실로 가서 슬레이프니르 등을 멈추게 했다. 다행히도 슬레이프니르와 블랙 하운드 등은 마침 출격하려던 때였다.


함교 스크린에 비친 슬레이프니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 왜 그래, 사령관. 방공망 정찰 말고 뭐 시킬 일 또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너희들 정찰은 내가 지휘하려고 그래."


- 굳이 안 그래도 돼. 큰일이야 있으려고.


"그래도 방공망의 화력이 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야. 아무튼, 오늘 정찰 지휘는 내가 하겠어."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평소에 정찰 임무는 슬레이프니르 부대의 자율에 맡겨 오던 터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바이오로이드 대원들의 모든 것 - 지휘권부터 생사 여탈권까지 - 은 사령관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모두들 순순히 사령관의 명령에 따랐다.


사령관의 걱정이 먹혔는지 철충 공업 지대의 방공망엔 뜻밖에도 상당수 공중 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아무래도 정찰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철충들은 슬레이프니르의 정찰조를 보자 사정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사령관은 얼른 슬레이프니르 부대를 후퇴시키고 증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후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들은 사령관의 중요한 공중 부대인 슬레이프니르의 동료들을 집요하게 노렸다. 단독으로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슬레이프니르가 적의 공격을 받을 일은 희박했지만, 문제는 상대적으로 느린 흐레스벨그나 그리폰 등의 대원들이었다. 덕분에 슬레이프니르는 주특기인 공중 지휘와 초고속 기동전을 활용하지도 못하고 대원들의 보호에만 신경쓰게 되었다.


블랙하운드도 슬레이프니르를 돕기 위해 대원들을 보호하고 나섰다. 그녀의 속도나 무장은 최고가 아니었으나 기동성은 슬레이프니르 다음으로 높은 덕분이었다.


"조심해, 그리폰!"


블랙하운드가 그리폰을 잡아끌었다. 적이 쏜 기관포가 불꽃을 번쩍이며 공중을 가로질렀다.


"이크, 고마워. 하마터면 맞을 뻔했어."


"여긴 내게 맡기고 그리폰도 얼른 후퇴해."


씩 웃은 블랙하운드는 린트블룸을 도우러 날아갔다. 그녀는 현재 사령관과 원격으로 신경계를 싱크로해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블랙하운드는 평소의 능력 이상으로 동료들을 보호하고도 별 탈 없이 버텨내고 있었다. 만약 사령관이 아니었다면 블랙하운드는 무리하게 친구들을 보호하느라 벌써 격추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싸우고 있는 동안 호라이즌의 운디네와 둠 브링어 등에서 지원을 와 주었다. 슬레이프니르와 동료들은 지원군의 응원을 얻어, 추격하는 적들을 뿌리치고 무사히 귀환했다.


돌아온 자리에서 슬레이프니르가 한숨을 쉬었다.


"휴. 큰일날 뻔했네."


"거봐, 언제나 조심해야 된다고." 사령관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이 전에 없이 빠릿빠릿해졌어. 전에는 그냥 멍청해서 나 혼자서라도 농락하고 다녔는데."


"철충들의 동면기가 조금씩 끝나가고 있다는 거겠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철충들이 동면하고 있다는 지금도 고전하는 판에 적들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그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어쨌거나 블랙하운드도 돌아와서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사령관님."


"응.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서 옷 갈아입고 와. 부탁한 일 있잖아."


"아참. 그렇네요. 헤헤, 그러면 좀 있다 뵈요."


슬레이프니르와 동료들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로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들 사령관을 좋아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이니, 방해하지 않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그 길로 숙소에 돌아온 블랙하운드는 얼른 샤워와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함장실로 향했다.


배웅하던 그리폰은 문득 블랙하운드의 책상에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던 그리폰의 안색이 굳어져 갔다.


한편, 사령관은 무사히 살아 돌아온 블랙하운드와 단 둘이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다음날 사진을 현상한 사령관이 블랙하운드를 불러서 사진을 주려고 할 때였다. 웬일인지 그리폰이 먼저 사령관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니? 그리폰도 사진 찍고 싶어?"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이거 봐봐."


그리폰은 심각한 표정으로 어제 블랙하운드의 책상에서 발견한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읽는 사령관의 표정도 굳었다.


"유서잖아? 아니, 블하가 왜 유서를 써 놓고 있었지."


"모르겠어.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와 같은 블하였는데."


"혹시 그애랑 다툼이라도 했어? 아니면 무슨, 고민거리라던가?"


그리폰은 고개를 저었다.


턱을 괴고 생각하던 사령관이 눈을 감았다.


"음, 아무튼 미리 알려 줘서 고마워."


그리폰은 친구를 잘 챙겨 달라고 부탁하며 나갔다.


사령관은 유서를 두어번 더 읽어 보다가 블랙하운드를 불러들였다. 블랙하운드는 평상복 모습으로 들어왔다.


"사령관님-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에요."


"으응, 그래. 그런데 말이야. 너…… 이건 뭐니?"


사령관이 내민 유서를 본 블랙하운드가 머리를 긁었다.


"아, 이건요."


"무언가 힘든 일이 있었다면 슬레이프니르, 하다못해 그리폰한테라도 먼저 털어놨었어야지. 이렇게 유서까지 써 두고 뭐 하려고 했어. 다들 걱정했다고."


사령관은 부드럽게 블랙하운드를 질책했다.


"안 그래도 어제는 전에 없이 사진도 찍자고 했잖아. 혹시, 이상한 마음 품어서 그런 거였어?"


블랙하운드는 잠깐 입술을 핥다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까요. 그래서 언제나 임무 같은 게 있기 전에 가끔 유서를 써 두곤 했거든요. 그 뿐이에요. 무슨 화나는 일이나 슬픈 일 같은 건 없어요. 정말로요."


사령관은 블랙하운드를 한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넌 안 죽어. 걱정하지 마."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건 전쟁이니까요. 저는 전쟁으로 치면 전투기나 마찬가지고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건 분명해서. 언제라도 준비할 수 있도록 유서를 쓴 거예요."


사령관은 한동안 할 말이 없었다.


인간에게도 죽음이 삶의 일부이긴 하나, 언제나 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전투 바이오로이드로서는 더욱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 만했다.


그러니 유서를 쓰는 대원이 블랙하운드만이 아닐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안쓰러운 듯이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블하야. 넌 안 죽어. 적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넌 절대 안 죽게 할 거야. 약속하마."


블랙하운드가 빙긋 웃었다.


"사령관님이나 제가 죽으면 그 약속도 소용없어 지는 거 아닐까요?


"말이 그렇단 거야, 말이. 아무튼 난 최선을 다해서 너랑 친구들을 살릴 거니까, 블하도 앞으로 행여나 죽음 같은 건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말어. 죽음을 각오할 힘으로 살아날 각오를 하란 말이야."


사령관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하운드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하는 내 조카나 다름없어. 조카를 죽게 하진 않을 거야."


블랙하운드는 순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네? 조카요? 그건 좀."


"왜. 마음에 들지 않니?"


"그렇다기보다는…… 조카는 삼촌하고 결혼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해서."


블랙하운드가 딴에는 걱정스럽게 하는 말을 듣고 사령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이윽고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말을 수습하려고 했다.


"오, 오해하진 마세요. 말이 그렇단 거예요. 결혼 같은 건 아직 생각도 못 꾸니까. 진도도…… ." 그녀는 손짓을 섞어 가며 열심히 말했다.


사령관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나도 조카라는 건 말이 그렇단 거야. 블하도 신경쓰지 마. 기회는 충분히 있어."


"옛?"


"어쨌든 그렇게 좋은 일도 겪고 하려면…… 죽지 말란 이야기야. 알았지?"


"네. 알겠어요."


사령관은 말을 끝내자 어제 찍은 사진을 건넸다. 평상복을 입은 블랙하운드와 사령관의 다정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받아든 블랙하운드는, 눈을 감고서 사진을 품에 껴안았다.


"친구들하고 지내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외로울 때가 있었어요. 그래도 사령관님께서 주신 이 사진이 있으면 앞으로는 외롭지 않을 것 같아요."


"응. 언제나 외롭지 않을 거야. 난 항상 너희들과 같이 있을 거니까."


이어서 그는 블랙하운드와 언제 시간을 내서 만나주겠다고 약속한 뒤 돌려보냈다. 유서도 그녀 편에 딸려서 되돌려 주었다.


"이건 블하가 쓴 거니까 어떻게 처분하든 블하 마음대로지만, 되도록이면 없앴으면 해. 아니면 어디 깊숙한 곳에 넣어두던지."


"네. 사령관님. 앞으로는 유서 절대 안 쓸게요."


블랙하운드는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언제 한 번 대원들이 유서를 썼나 안 썼나 점검할까. 사령관이 이로써 한 건 해결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고 있는데, 옆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리리스가 문득 말했다.


"주인님. 듣자 하니까 과거 멸망 전의 인간 군인들도 어디 출정 나가기 전에 유서를 써 놓았다고 하더군요. 자신을 돌아보는 효과라거나, 죽음을 각오하게 되니까 더욱 경각심을 느끼고 대비한다던지요."


"아, 그랬어?"


"저 애도 그것을 본따서 그랬던 게 아닐지. 군용이니까."


"흐음…… 뭐. 그렇다고는 해도 말이 씨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야. 난 그런 유서 따위 필요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말이지."


"당연히 가능하실 거예요."


언제나 오래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죽음을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살아갈 의지를 다시 한 번 곧추세웠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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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화로운 오르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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