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1, 2편 올렸었는데 하도 오래돼서 합본으로 한꺼번에 올림














 어둠은 자비롭고, 주인님은 따듯하다. 이터니티는 눈을 감은 주인님의 얼굴을 어루만져본다. 오직 그녀만이 그 형체에서 주인님의 일생을 본다. 첫 걸음, 첫 단어, 첫 사랑, 첫 성공과 실패, 첫 사회생활. 그녀는 주인님의 모든 처음을 목격했고, 그 과정을 함께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황송하게도 주인님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날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영원함, 그 허황된 꿈을, 이터니티는 주인님과 함께한 시간 때문에 믿게 되었던 것이다.

   

 주인님은 결코 영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분은 하루가 다르게 어려지고, 젊어지고, 늙어졌다. 지금은 주인님의 얼굴에 만연한 주름살이 처음 드러났을 때, 이터니티는 심장에 비슷한 골을 새기며 그 사실을 통감했다. 주인님은 죽을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터니티는 영원함을 믿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주인님이 이터니티를 보고 이렇게 말했었다.

   

 "가끔은 어릴 때 봤던 모습 그대로인 게 참 신기해. 그게 좋아. 네가 그대로니까 나도 별로 안 늙은 거 같거든."

   

 주인님은 그 말을 하고 어릴 때 짓던 웃음을 그대로 지어보였다. 그 웃음처럼, 주인님에겐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영원하지 못한 것 속에 영원함이 있을 수 있을까? 이터니티는 대답을 정하지 않은 채 그저 그렇다고 믿었다. 주인님 속에 있는 젊음은 영원한 것이고, 그것은 이터니티 자신을 보고 얻은 것이라고. 이런 문제는 그저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어떤 문제는 답이 없어 믿는 수밖에 없다. 그건 주인님과의 삶 속에서 배운 지혜였다. 다른 지혜들도 많이 얻었는데, 그 때문에 주인님은 이터니티를 '지혜로운 할머니'라 부르며 놀리기도 했다. 주인님이 한결같은 이터니티를 보고 영원함을 얻은 것처럼, 그녀는 주인님을 보고 나이듦을 얻은 셈이다. 주인님에게 놀림 받던 기억을 떠올린 이터니티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터니티는 스스로의 지혜에 고통 받았다. 그녀는 이 세상이 변화와 폭발과 고기 파편이 가득한 곳임을 알았다.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엔 영원함이 발붙일 곳이 없다. 모든 징조는 영원한 것의 추방과 종말을 가리켰다. 영원한 것은 결국, 영원할 수 없었다. 슬프게도 그런 것은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이터니티는 세상을 떠났다. 관 속의 어둠이 그녀와 주인님을 부드럽게 감춰주었다. 더듬어 살펴본 주인님의 얼굴은 다행히 당연하게도 평온했다. 세상과의 단절은 두려우면서도 안심하게 되는 그런 일이었다. 그녀는 주인님의 손을 맞잡고 긴 잠을 준비하면서, 혹시 내세가 있다면 아주 어두운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례한 빛이 끼어들어 자신과 주인님을 갈라놓지 못할, 그 무엇도 구별되지 않는 어둠이 가득한 곳. 그것과 닮은 관 속에서, 주인님 곁에서, 이터니티는 불분명한 죽음의 경계를 의식했다. 그녀는 주인님을 따라 서서히 그 너머로 떠내려갔다...

   

 *   *   *   *

   

 감은 눈을 뜨면 언제나 눈부신 현실에 눈이 아프다. 이터니티는 입술 근처에 기대었던 펜을 내려 공책에 멋들어진 필기체를 써내려갔다.

   

 '... 그녀는 주인님을 따라 서서히 그 너머로 떠내려갔다.'

   

 그녀가 공책에 적는 것은 일기, 소설, 철학이었다. 이터니티는 지금처럼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안에 생각난 것을 정리했다. 당장 생각난 것들을 전부 적은 그녀는 사이에 펜을 끼운 채로 공책을 덮고, 그 위에 양손을 모아 얹고, 은색 의자에 다소곳이 앉은 채로 허리를 펴, 창백한 연보라색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들쭉날쭉한 도시 윤곽 위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모두가 잠에서 깰 시간이 되었다. 참으로 잔인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으로 토스트를 굽기로 결정했다.

   

 한창 토스트를 굽고 있을 때 안방 문이 열렸다. 블랙리버 사에 대한 뉴스 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가 제멋대로 뻗친 모습의 주인님이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일어나셨어요, 도련님."

   

 "잘 잤어, 할매? 음, 맛있는 냄새. 토스트야?"

   

 "예. 씻고 오실 동안 준비해 놓을게요스프레드는 뭘로 준비할까요?"

   

 "딸기잼."

   

 주인님은 옆구리를 벅벅 긁으며 욕실로 향했다. 이터니티는 프라이팬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꺼내 큰 접시 안에 쌓았다. 먹음직스러운 빵이 7개쯤 쌓인 다음부턴 프라이팬에 식빵 대신 베이컨과 계란이 들어갔다. 기름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가는 단백질이 고소한 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빵 접시보다 작은 접시 두 개에 야들한 베이컨 구이와 계란프라이가 담겼다.

   

 식탁을 차리기 무섭게 주인님이 돌아왔다. 그는 전보다 말끔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모습으로 식탁 앞에 앉아 습관적으로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주인님은 토스트 한 조각을 들어 그 위에 딸기잼을 듬뿍 바르고, 접지 않고 그대로 받쳐 들어 크게 한 입-

   

 앙칼진 전화벨 소리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 먹지 못한 토스트를 내려놓고, 일어나 세 번째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예, 어머니. - 예, 막 식사하려던 참이었어요. - 그러게요. - 해만 뜨면 전화하시는데 어떡해요? 일과 준비를 미룰 수도 없고."

   

 익숙한 일이었다. 이터니티는 주인님이 통화를 끊고 돌아오기 전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 후에 주인님이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토스트 안 식었네? 빨리 끝났다 싶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오늘은 무슨 용건이셨나요?"

   

 "평소처럼 업무지시. 오늘 아버지 점심 미팅 있으신데, 나도 거기 참석하라고 하시네. 12시 근처에 다른 일정 없었지?"

   

 "예, 오전 중에 임원진 회의가 끝나시면 오후 2시까지 공백이에요. 세탁 맡긴 정장 찾아올까요?"

   

 "음... 아냐, 집에 있는 걸로 충분할 거야. 할매는 경호 준비만 해줘."

   

 토스트 7개 중 5개는 주인님이 먹었다. 이터니티는 두 개만 섭취하고 추가로 특수 알약을 복용했다. 알약은 작은 부피 속에 막대한 에너지를 품은 압축 에너지 공급원이다. 이걸 먹지 않으면 식사를 꾸준히 하거나 한 번에 많이 먹어야 하는데, 전자는 음식을 상시 휴대하고 있는 게 미관상 좋지 않고, 후자의 경우에는 위가 팽창해 몸매가 흐트러지는 불상사가 생긴다. 따라서 알약은 밝은 세상 속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삼켜야 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주인님과 이터니티는 식탁을 치우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이터니티는 뼈 장식이 들어간 정식 근무복을 차려입고 주인님의 의상을 코디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주인님이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재검토하는 동안 그녀는 지하 주차장에 있는 차를 원격으로 준비시켰다. 그리고 둘은 집을 나섰지만, 아직 이터니티의 경호 준비는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아있었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 지하에 있는 부속 무기고에 들러야 했다.

   

 *   *   *   *

   

 "조심! 조심해서 놔!"

   

 무기 반장이 지휘하는 두 브라우니 개체가 낑낑대며 관을 가져왔다. 둔탁한 쿵 소리가 무기고의 콘크리트 벽을 울렸다. 다른 브라우니 둘이 커다란 미니건을 가지고 와 관 옆에 내려놓았다. 이터니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관을 살폈다. 손바닥으로 쓸어본 모서리엔 글귀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잠들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탈모가 심각한 중년 남성인 반장이 태블릿을 보며 정보를 알려줬다.

   

 "미니건 네 정에 무강선 박격포 하나, 교체 완료했고요. 탄약도 가득 채웠습니다. 떼어낸 건 내일 안에 손질 완료됩니다. 평소처럼 다 보험 처리 됐으니까 여기 서명만 해주세요."

   

 주인님은 서명을 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부품이 많아서 귀찮으실 텐데, 매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일인데요, 뭐. 기계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다 되어 있습니다."

   

 "엥? 어제 같이 작업 하시면서 언제 끝나냐고 투덜대시지-"

   

 어디선가 나타난 레프리콘 개체가 브라우니의 입을 막고 함께 무기고 안으로 사라졌다. 

   

 "허허... 저게 전투모듈이랑 같이 정신머리도 떼어버렸나."

   

 "괜찮습니다." 주인님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네요. 기선 제압에 이만한 것도 없어서요. 시각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아니 뭐, 이게 보여주기 용으로는 최고이긴 한데..."

   

 "보여주기 용으로 최고니까 자주 쓰는 거죠. 요즘은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니까요."

   

 앞으로도 자주 신세 지겠습니다, 하는 주인님의 마무리와 함께 이터니티는 정비된 무기를 챙겼다. 그녀는 무거운 장비를 가볍게 들고 무기고를 나서서 주인님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량은 자동주행 기능을 사용해 미리 지정된 위치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에 장비를 싣고 탄 다음 지상으로 향했다. 두꺼운 방폭문이 열리자 바깥의 빛이 밀려들어와 둘의 시야를 가렸다.

   

 *   *   *   *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이 되었다. 주인님과 이터니티는 깔끔한 고급 레스토랑의 조용한 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터니티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주인님 뒤, 벽 가까이 서 있었고, 주인님은 넓은 탁자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은은한 피아노 소리로도 감춰지지 않는 심각한 침묵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침묵의 원인은 주인님 옆에 앉은 남자였다.

   

 "너 회사는 어떠냐." 남자가 주인님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되고 있습니다."

   

 "내 비서 보고서에는 그렇게 안 적혀있던데."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명심해라."

   

 "저도 오랜만에 봬서 좋습니다, 아버지."

   

 "빈정대지 마라. 혼자 사업하겠다고 나간 건 너야. 집에서처럼 한심하게 굴 거면 차라리 다시 들어와. 나랑 네 엄마 망신시키지 말고."

   

 주인님은 큰 주인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이 다시 들려왔다. 

   

 "불 켜고 자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냐?" 큰 주인님이 또 물었다.

   

 "고쳐가고 있습니다."

   

 "그거 고친다고 병원 다닌 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27살이나 먹은 놈이 제 습관 하나 통제 못 해?"

   

 "세상엔 안 고쳐지는 것도 있나 봅니다."

   

 "나약한 소리. 완벽한 뇌 지도로 바이오도 만드는 세상에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아.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것도 다 약점이야. 좋은 사업가가 되고 싶으면 약점을 내버려 두면 안 돼."

   

 "적한테 써 먹히니까요? 하도 말씀하셔서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알면 고쳐. 아니면 포장하든. 어쨌든 적이 노리지 못하게 만들어."

   

 주인님이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큰 주인님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약속 상대가 늦는 걸까?

   

 "그럼 저는 왜 부르셨습니까?" 이번엔 주인님 쪽이 먼저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약점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사업가를 왜 비즈니스 미팅에 부르셨는지 궁금하단 뜻입니다."

   

 "난 사업가를 부른 게 아냐. 내 아들을 불렀지."

   

 "아들이요?"

   

 "그래. 내 가용자산. 너랑 저 바이오."

   

 "가용자산-"

   

 주인님은 고개를 돌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할 말을 고른 다음 다시 큰 주인님에게 말했다.

   

 "'저 바이오'는 제 겁니다."

   

 "구매자는 나야. 법적으로 따지면 내가 주인이고, 넌 실사용자일 뿐이야. 그래서 저게 널 주인이 아니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아니냐?"

   

 그건...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리고 우리 사이가 어떻든, 다른 사람들은 널 내 건실한 후계자로 본다. 사람들은 네가 있는 한 내 회사가 외부 세력에 힘없이 먹힐 일은 없다고 생각해. 안정성이 기업 가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너도 알지? 네가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야."

   

 주인님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겨우 입을 뗐다.

   

 "이터니티도 보여주기 용입니까?"

   

 "당연한 걸 묻냐. 상대는 블랙 리리스를 가지고 올 거야. 내가 가진 가장 비싼 바이오 정도는 꺼내줘야 급이 맞아."

   

 "... 제 것은 하나도 없습니까?"

   

 큰 주인님은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주인님을 쳐다보았다.

   

 "제가 이룬 것은요? 제가 운영하는 제 회사도 아버지 것입니까?"

   

 "... 이 덜떨어진 놈그걸 말이라고 하냐? 회사 세우라고 꿔준 돈 갚기 전까진 내 거 맞잖아."

   

 그는 그렇게 일축한 다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것이니, 이룬 것이니... 넌 아직 그런 거 없어. 정신 차려라. 그나마 지능은 괜찮아서 놔뒀더니, 멍청이처럼 감정만 앞서고... 뭘 했어도 보여주지 못하면,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해. 세상이 보기에 넌 아직 아무것도 아냐."

   

 큰 주인님이 곧바로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시계에서 비치는 반사광이 뒤에 서 있는 이터니티의 눈가에 아른거렸다.

   

 "가서 세수나 하고 와라. 손님 앞에서도 얼빠진 소리 하기 전에. 넌 여기 있어."

   

 마지막 말은 주인님을 따라 나서려는 이터니티에게 한 말이었다. 방문이 닫히자 큰 주인님이 단정적인 쯧 소리 한 번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한심한 자식."

   

 만약 눈이 정말 마음의 창이었다면, 닫힌 문을 바라보는 이터니티의 하얀 눈동자는 걱정으로 검게 물들었을 것이다.

   

 *   *   *   *

   

 오후 1시 반, 비즈니스 미팅이 끝났다. 블랙 리리스 모델을 경호원으로 둔 손님은 흡족한 얼굴로 주인님 부자와 악수를 나눴고, 출입구로 향하는 로비에 양 옆으로 줄지어 선 종업원 바이오로이드들이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큰 주인님은 사람 좋은 미소로 손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주인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난 지배인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 먼저 가라."

   

 큰 주인님은 주인님의 인사도 받지 않고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인님은 이터니티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님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레스토랑을 나섰다. 이터니티도 그를 따라 나가 차에 올라탔다. 자동화된 차 문이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고, 주인님은 정장 상의 맨 위를 조금 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인님."

   

 주인님이 이터니티를 보고 씩 웃었다. "주인님이라 부르는 거 어색하다며?"

   

 "기분이 언짢으실까 해서요."

   

 "약 먹어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 약 거의 다 떨어졌더라. 상담사 예약 좀 해 줄래?"

   

 "늘 하던 대로 수요일 오후 세 시로 할까요?" 

   

 "좋지. 그때가 상담실에 햇빛 가장 많이 들어오는 시간이더라. 다음 일정은?"

   

 "오후 네 시에 납품 업체 소유주와 연락해 내일 공장 견학 일정과 납품 계획 조율안을 논의하셔야 해요."

   

 "두 시간 조금 넘게 남았나... 집에 들렀다 가자."

   

 "예, 도련님."

   

 자동주행 AI가 집까지 경로를 설정했다고 알렸다. 서로 마주 보는 좌석 배치 덕분에 이터니티는 주인님이 턱을 괴고 창밖을 보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고는, 다시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 보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 밤에 일정 없으세요."

   

 주인님은 이터니티를 쳐다보고 눈을 깜빡이고는, 곧바로 얼굴에 멋쩍은 미소를 떠올렸다. "티 나?"

   

 "애틋한 감정은 쉽게 숨겨지지 않으니까요."

   

 "애틋은 무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님은 농담을 던지고 팔에 찬 팔찌를 보았다. 아무런 기능 없이, 면에 이니셜만 새겨진 은색 팔찌였다. "금요일 밤이라..."

   

 "그다음 날도 일정 없으시니, 걱정 마세요."

   

 "... 그게 무슨 의미야?"

   

 "그저 도련님께서 사모하시는 분과 잘 되시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요."

   

 주인님은 콧방귀를 뀌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잘하실 거예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뭘 잘해? 관계를? 아니면... 관계를?" 주인님은 표정을 통해 자신이 장난치고 있음을 알렸다. "할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대답을 바라시나요?"

   

 바깥소리가 차단된 차 안, 주인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다 목을 가다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차는 계속 움직였다. 바깥엔 건물 다음에 건물 다음에 건물이 이어졌다.

   

 "바보같이, 내가 말하지 말라 해놓고 내가 말해버렸네."

   

 "어느 쪽이든 잘하실 거예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옛날에, 딱 한 번 가지고 어떻게 알아? 게다가 그건 실수였어."

   

 "도련님은 잘못하신 게 없으세요. 그때도 훌륭하셨고, 지금도 잘하실 거예요. 주눅 드실 필요 없으세요."

   

 "그래... 그래." 주인님은 다시 핸드폰을 보았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우리 사이는."

   

 차가 달리고 또 달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길, 익숙한 입구가 나타났다.

   

 주인님과 이터니티는 지하 주차장에 내렸다. 

   

 "올라가서 30분만 쉬었다가 가자. 흠...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에 와인 어때?"

   

 "미리 재료 주문하고 귀가할 때 픽업해 올게요."

   

 "좋아, 좋아. 금요일... 금요일..."

   

 주인님은 흥얼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큰 주인님과의 만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즐거워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터니티는 그런 주인님의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다.

   

 이번 주 금요일 밤, 두 연인은 자상한 어둠 속에서 밀회하고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이터니티는 그들을 위해 연보랏빛 눈을 응시하는 파수꾼이 될 것이다. 그녀가 있는 한 그들의 짧은 행복을 방해할 이는 없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도시는 밤에도 밝게 빛난다. 그리고 어둠이 쫓겨난 금요일 밤은 행복 대신 혼란과 슬픔의 시간이 되리라는 사실을, 이터니티는 아직 몰랐다.

   

   

 *   *   *   *

   

 ...

 숲은 포근하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잠들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서서>

   

   

 내 오랜 벗이시여. 처음 깨어나 당신을 떠올린 뒤로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잠시나마 안식을 느끼고 삶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는 게 아직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시가 팔리지 않는 세상에서, 저처럼 비싼 바이오로이드의 머릿속에 당신을 넣은 인간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아마 그분만큼 나를 이해하는 분도 없었을 겁니다.

   

 주인님께서 그분만큼이나 나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기쁘면서도 한없이 슬픈 상상입니다.

   

   

 *   *   *   *

   

   

 금요일 밤.

 

 이터니티는 공책 첫 장에 적어둔 시를 다시 읽다가 전방에 움직임을 느끼고 공책을 덮었다. 앞에 있는 4층짜리 연립주택 중 2층에 불이 켜졌다. 사람 형체가 드러나고, 구둣발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멀리 동네 어딘가에서 개가 짖었다. 집을 나온 사람은 왠지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복도 불이 싫증이 났는지 꺼졌다가, 곧 그 사람이 다시 움직이자 빠르고 환하게 그를 반겼다. 주인님이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둣발이 콘크리트 계단을 크게 울렸다.

   

 긴 외투를 입은 주인님이 연립주택 대문을 지나 낡은 LED 등이 비추는 좁은 골목으로 나왔다. 주차된 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터니티가 그를 맞이했다.

   

 "평소보다 빨리 나오셨네요, 도련님."

   

 주인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터니티가 열어준 차 안으로 들어갔다.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뭐 해? 들어와."

   

 이터니티는 당황해서 차 안에 들어가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고 나서야 차가 문을 닫고 출발했다. 자율주행 AI가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누벼 곧게 뻗은 큰 대로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곧게 뻗은 길가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과 건물 불빛이 밖을 보는 주인님의 얼굴을 밝혔다. 밝음, 어두움. 밝음, 어두움. 빛은 주기를 따라 느리게 맥동했지만, 절대 주인님의 얼굴을 떠나지는 않았다. 빛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약병을 든 주인님의 오른손뿐이었다.

   

 주인님은 엄지손가락으로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뚜껑을 돌려 열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여는 일은 없었다. 결국 약병은 외투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빈손만이 남아 허벅지 위에 늘어졌다. 그의 왼손은 턱을 받쳐 쏟아지는 빛을 향해 무심한 표정을 고정했다. 도시 속을 달리는 차 안에는 첨단 기술로 완성된 적막만이 감돌았다.

   

 집에 도착한 주인님은 외투를 벗어 식탁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터니티는 신속하게 세면 세척을 끝낸 다음 주인님을 기다렸다. 안방 욕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왔다. 10분, 20분이 지나도 물소리는 계속되었다. 평소엔 5분이면 샤워를 마치는 주인님 기준으론 이상한 일이었다. 이터니티는 안방으로 들어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물소리가 멈췄다. "왜."

   

 "벌써 20분이나 지나셨어요. 도와드릴까요?"

   

 "됐어. 금방 나갈게."

   

 샤워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이터니티는 거실로 나가 기다렸다. 욕실 문은 10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열렸다. 주인님은 별 말 없이 방 안에서 나머지 저녁을 보냈다. 외투와 주머니에 든 내용물을 찾으러 나오지도 않았다.

   

 취침 시간이 되자 주인님은 이터니티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했다.

   

 "방 불은 끄지 마, 할매. 내가 알아서 끄고 잘게."

   

 이터니티는 집안일을 마무리하느라 1시간을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안방 문을 보니,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공책을 꺼내고 글을 적으면서 2시간을 더 보냈다. 여전히 안방엔 불이 켜져 있었다. 이터니티가 안방 문을 조용히 두드리고, 대답이 없자 천천히 문을 열었다. 주인님은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녀는 주인님을 위해 불을 끄고 나가서 문을 닫았다.

   

   

 *   *   *   *

   

   

 다음날 아침, 주인님은 평소처럼 피곤한 티를 내며 방에서 나왔다. 그와 이터니티는 평소처럼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하루를 준비했다. 주인님의 간단한 세면, 이터니티의 식사 준비, 두 사람이 함께하는 아침 식사.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일이 없는 주말에 전화가 온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주인님이 일어나서 거실로 갔다. 전화벨은 3번 울리기 전에 끊겼다. 주인님은 바로 돌아왔다.

   

 "전화 안 받으셨나요?"

   

 "응. 괜찮아."

   

 전화가 다시 울렸다. 주인님은 이번에도 소리만 그치게 하고 바로 돌아왔다. 주인님의 핸드폰이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그는 폰을 확인하고는 옆에 치워두고, 에그 스크램블을 한 숟가락 가득 퍼 접시에 담으면서 이터니티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 회사 며칠 쉬기로 했어. 월, 화, 수."

   

 "그럼 업무는..."

   

 "인수인계 잘 해놨으니까 괜찮아. 정 급한 일은 부르라고 했어. 음... 할매, 우리 여행 갈까?"

   

 이터니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숲 보고 싶어. 아니면 바다나. 좀 사람 적은 데로 갔으면 좋겠어. 생태계 보존 구역 하나 알아볼까? 그런 곳에 외딴 오두막집 이런 거 많잖아."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봐서 죄송하지만,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으셨나요?"

   

 "없었어." 주인님은 우유에 탄 시리얼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시리얼 그릇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우물거렸다. 곧 입에 든 것을 삼킨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연보라색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있었어." 

   

 남은 식사는 조용했다. 주인님의 숟가락 놀림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이터니티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었기에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주인님은 결국 식사를 대부분 남기고 말았다.

   

   

 *   *   *   *

   

   

 아무 일 없는 오후, 이터니티와 주인님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정확히 하자면 주인님은 긴 소파 위에 엎어져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이터니티는 그 옆에 ㄱ자로 배치된 작은 소파에 반듯이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도련님, 큰 주인님이세요."

   

 주인님은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으로 벨소리를 죽였다.

   

 시계 초침이 다시 공간을 차지했다.

   

 "도련님, 약은 필요 없으세요?"

   

 "필요 없어." 주인님이 쿠션 속에서 웅얼거렸다.

   

 "하지만 도련님, 약을 안 드시면 점점 더 힘들어지실 거예요."

   

 "버텨볼래."

   

 "의사 선생님 말씀은..."

   

 "괜히 고집 부리지 말고 먹으라 했었지. 알아. 오늘은 고집 좀 부려볼래."

   

 주인님이 돌아누웠다. 이터니티는 한쪽 손목을 이마에 올려놓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애써 무시했다.

   

 째깍, 째깍.

   

 "난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이터니티가 고개를 들어 주인님을 보았다. "도련님은 도련님만의 인생을 꾸릴 능력이 있으세요."

   

 "그럴까? 그런데 왜 그 애한테 이별 통보를 받으면서 아버지 생각이 났을까?"

   

 "... 왜 그랬을까요?"

   

 "내 인생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어머니가 찾아왔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 바로 그랬거든. 헤어져 달라고 하셨대."

   

 "안주인님이 그러셨다고요?"

   

 "응. 그 애 과거로 협박해서 내 재산을 뺏으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대.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박살냈는데, 걔가 또 그렇게 이용당할까봐 걱정되셨나봐. 아까 아침에 어머니한테서 긴 문자가 왔었어. 미안하다고."

   

 주인님의 손목이 이마에서 눈 위로 미끄러졌다.

   

 "걔 과거가 좀 화려하긴 했잖아. 이해는 가. 미안하다고 하시니까 화도 안 나. 그냥 뭐... 그랬던 거야. 이렇게 끝나야 했던 거지."

   

 이터니티는 주인님의 말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정말 내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잡지도 못하고 거의 도망치듯이 나왔어.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어. 약... 약 먹어야겠다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왠지 약을 먹으면 아버지한테... 내 마지막 한 부분까지 전부 내놓게 될까봐..."

   

 주인님의 목소리가 흩어져 사라졌다. 이터니티는 그가 팔을 내리고 한숨을 쉬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공책을 덮고 일어나 주인님 옆으로 가 앉았다.

 

 "주인님."

 

 그녀는 주인님의 손을 꼭 맞잡아줬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올려 주인님의 눈을 덮어줬다.

   

 "눈 가리지 마... 불안해."

   

 이터니티는 손을 떼었다. "어둠은 무서워할 것이 아니에요, 주인님."

   

 "할매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 공책에 적어놓은 거 다 봤어."

   

 "그러셨나요?"

   

 "응. 그건 틀렸어. 이 세상은 보여주지 않으면 몰라. 보여주려면 빛이 있어야 해. 어둠 속에 감춰진 것은 그냥 없는 거나 다름없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런가요, 주인님?"

   

 "그래. 그런 거야."

   

 이터니티는 양 손 모두로 주인님의 손을 감싸 다독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님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니야, 틀렸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할매는 틀리지 않았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돼. 제발."

   

 "쉬, 주인님." 이터니티가 조용히 얼렀다. "걱정 마세요. 전 알아 들었어요."

   

 "정말?"

   

 "정말이에요. 걱정 마세요."

   

 "생각 같은 건 보이지 않으니까... 모르겠어."

   

 주인님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아무래도 좋을 시간이 흘렀다.

   

 "할매. 이터니티."

   

 "네, 주인님."

   

 "나 죽고 싶어."

   

   

 *   *   *   *

   

   

 황혼녘.

   

 불꽃같은 노을 위로 암막 커튼이 덮였다. 안방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 되었다.

   

 습도도, 온도도 따스한 정도로 조절되어, 그보다 잠들기 좋은 곳은 이 세상에 없었다.

   

 침대 위, 이불은 두껍고 폭신했다. 나는 발끝부터 가슴팍까지 감싸고 있는 이불의 감촉에 매달렸다.

   

 그걸 빼면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이터니티의 부탁이었다.

   

 오랜만에 어둠 속을 응시하게 되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은 예전과 똑같이 살아나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터니티?" 나는 침을 삼키고 불렀다.

   

 "네, 주인님. 여기 있어요."

   

 "어디, 어디야?"

   

 쇳조각이 쩔렁, 바닥에 떨어졌다. 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안 보여."

   

 "안심하세요." 이터니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달랬다. 곧 살이 이불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불 너머로, 그녀의 손이 가슴팍에 가만히 얹혔다. 의식하지 못했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조금 빠르게, 보통으로, 점점, 느리게.

   

 "보이지 않으셔도 여기 있어요. 숨을 천천히 쉬어보세요. 제 손을 밀어내는 느낌으로."

   

 나긋한 속삭임이 추락할 뻔한 내 마음을 붙잡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어 가슴을 부풀렸다.

   

 "잘 하셨어요. 두려워 마세요. 어둠 속이라 볼 수 없어도, 저는 언제나 주인님 옆에 있어요. 제가 느껴지시나요?"

   

 "응."

   

 옆에 나란히 누운 이터니티가 느껴졌다. 내게 얹은 손과 바라보는 얼굴, 아마도 연보랏빛 눈. 그녀는 분명히 거기 있었다.

   

 "저도 그래요. 저는 이불 속이 아니니까 주인님을 만질 수 없어요. 주인님도 그러시지만, 어둠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어요. 어둠의 품에 있는 모든 것은 이어져 있어요. 어둠은 자비로워요."

   

 말의 힘이란. 이터니티의 설명에 어둠은 금세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 더 따듯하고, 모호한 것으로... 그래도...

   

 "그래도... 아직 무서워."

   

 이터니티의 손바닥이 내 몸을 어르듯 작은 원을 그렸다.

   

 "잠시 실례할게요, 주인님."

   

 천이 부스럭대고, 긴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무언가가 이불 너머에 안착해 내 몸 전체를 짓눌렀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으로 떠오르려는 몸을 잡아주는 듯한, 기분 좋은 짓누름이었다.

   

 숨결이-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바로 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얼굴이 깃털처럼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동그란 머리가 내게 비비대자, 그것과 나 사이에 낀 색깔 모를 머리칼이 부드럽게 사박거렸다. 이터니티의 팔이 나를 감싸 끌어안았다.

   

 "나아지셨나요?"

   

 "응..."

 

 숨이, 이터니티의 숨이 내 목 언저리를 덥혔다. 이터니티의 향기가 올라왔다. 달콤한 연보라색 향기.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어드릴게요. 주인님을 보호하는 게 제 사명이니까요."

   

 부드럽고 묵직한 것이 내 가슴팍을 눌렀다. 나를 감싼 이불이 점점 더 따듯해졌다. 그 감촉과 가슴 속까지 간질이는 숨결을 나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주인님이 느껴져요."

   

 "미안해."

   

 "아니에요, 주인님. 저는 기뻐요."

   

 내 것 위로 이터니티가 밀착해왔다.

   

 "이터니티..."

   

 "그날 이후로 절 별명으로 부르신 이유를 알아요. 저와 거리를 두고 싶으셨겠죠."

   

 "날 키워준 사람한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빛 속에서는 모든 게 명확해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숨결이...

   

 "하지만 여긴 빛이 없어요. 주인님, 어둠은 구분하지 않아요. 어둠 속에서 저희는 하나예요. 그러니, 주인님이 잃으신 것들을 채워드릴 수는 없겠지만..."

   

 이터니티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허락해 주신다면... 위로해드리고 싶어요."

   

 이터니티가 상체를 들었고, 이불이 천천히 걷혔다. 가슴팍이 드러나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왔다. 그것은... 불안? 기대? 이젠 둘을 구별할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 확실한 것이라곤, 이내 내 가슴을 덮은 이터니티의 손과 내 미약한 심장에 전해지는 온기뿐. 그녀가 말했다.

   

 "저는 주인님 것이에요." 

   

 "너는 내 거야?"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저는 주인님 것이에요."

   

 쉬잇, 쉿. 이터니티가 날 다독이며 이불을 내렸다. 쉬, 쉬. 그리고 내 몸에 직접 올라타서 제 등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맨살이 닿았다. 아아, 그 쩔그럭거리던 소리는 역시 옷을 벗는 거였구나. 따스한 파도가 나를 덮쳤다. 내게 닿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속눈썹. 쉬잇...

   

 "지금만큼은... 세상과 연을 끊어요."

   

 지금만큼은.

   

 그녀와의 입맞춤에 집중했다.

   

 그녀의 포옹 속에 나를 넣고 미끄러졌다.

   

 그녀와 내가 함께 만든 이불 속 열기가 우리 사이를 채웠다. 우리는 혀를 얽었다. 붙었던 입술 둘이 떨어지며 촉촉한 소음을 냈다. 그녀가 내 뺨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을 걷어 한 쪽으로 넘겼다. 그녀의 몸놀림에 저 아래 애틋함이 강렬해졌다. 다시 입을 맞춰온다. 눈을 감은 채,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고 서로의 부드러운 입술만 느꼈다. 간지러운 음향이 나고, 또 났다. 우리는 꼭 붙어서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연인들처럼 서로의 향취를 갈구했다. 지금껏 떨어져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팔을 풀고 몸을 들어 더 강하게 나를 받아들였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였다. 정돈된 앞머리와 그 양 옆 핑크빛 줄기가 박자 맞춰 찰랑거리고, 허리 너머까지 자라 물결치는 풍성한 은빛 머리타래도 함께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불만 망토처럼 걸친 흠 없는 육체가 춤을 추고, 그 위에서 보드라운 입술이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반쯤 감은 쳐진 눈, 하얗고 긴 속눈썹... 나를 지켜보는 연보라색 눈. 그 가운데 하얀 눈동자. 그녀와 맞잡고 깍지 낀 양손이 무게를 받치고, 격렬한 움직임에 열이 더해가고, 신음과 교성이 나를 불렀다. 애인과 헤어지고 하루도 안 되어 다른 여자, 그것도 키워준 여자와 교접하는 그 상황. 하얀 눈동자 속에서, 나는 다시 드러나고 있었다.

   

 "주인님. 일어나주세요."

   

 그녀의 말과 도움으로 나는 일어나 앉았다. 가쁜 숨으로 들썩이는 두 몸이 밀착하고, 그녀는 나를 끌어안아 내 얼굴을 제 가슴에 묻었다. 그녀의 어깨에 걸쳐있던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내 머리에 물을 붓듯 작은 숨이 잇달아 쏟아졌다.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저는 주인님 것이에요. 저는 주인님 것이에요."

   

 입술이 귓가에 속삭였다. 풍만한 향기 속에서 눈동자는 사라지고, 어둠이 다시 번졌다. 살아날 뻔했던 나는 다시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더듬었다. 그녀를 느끼고, 그녀를 알아갔다. 빛 아래에서 봤던 모습은 잊어버렸다. 그녀의 둔부, 등줄기, 가슴, 배, 안쪽의 촉감. 그녀의 젖가슴, 목덜미, 입술, 체취의 맛.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었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받아들여주는 그녀는 분명히 내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그녀의 것이었다. 음색을 토하며 수줍게 내보인 혀를,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탐했다. 그녀의 팔이 나를 붙잡고 나도 그녀를 안았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고 나도 그에 답했다. 내게서 입을 뗀 연보라색이 내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빛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안다. 어둠 속에서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

   

 "이 관계만은... 내 거야."

   

 "... 아, 주인님. 가여운 주인님."

   

 따듯한 어둠 속, 그녀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더운 숨들이 하나로 섞였다.

   

 "아아, 주인님, 주인님. 와주세요..."

   

 그녀의 속삭임은 가벼운 탄식과 떨림이 되었다.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남았다.

   

   

 *   *   *   *

   

   

 제 품 안에 잠든 주인님께.

   

 제가 손으로 뺨을 어루만져도 깨지 않으실 정도로 곤히 잠드셨군요. 고된 일을 하고 찾아오는 잠은 너무도 달콤한 법이죠. 수고하셨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이 되면 또 봬요.

   

 네, 슬프게도 내일 아침은 와요. 잔인한 진실이에요. 저 밖은 여전히 밝고, 주인님은 그곳으로 나가셔야 해요. 가여운 주인님... 어둠의 자상함을 알고도 빛 속에 나가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울 거예요. 주인님이 찾은 것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주인님을 괴롭히겠죠. 그들은 빛이 가득한 세상밖에 못 봐서, 어둠이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기운 내세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인님께 힘을 줄 거예요. 이제 세상과의 단절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시는 주인님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신 거예요. 제가 가르쳐드린 것들을 가지고 차근차근 성장하고 살아나가세요. 제가 뒤에서 응원해 드릴게요. 그러다 버티기 힘들면, 혹은 마침내 끝이 오면, 지금처럼 제가 품에 다시 안아 드릴게요. 잠들기까진 갈 길이 아주, 아주 머니까요. 지금은 모두 잊고 푹 주무세요.

   

 잠꼬대로 제 이름을 부르면서 뒤척이시네요. 옛날 생각이 나서 미소가 떠올라요. 자, 다독여드릴게요. 쉬잇, 쉬, 쉬. 안심하고 다시 주무세요. 쉬, 쉬... 밤은 아직 길어요.

   

 쉬잇,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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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냈다


중간에 끙끙대던 부분 결국 날리고 다시 쓰느라 늦음


다음엔 그냥 완성되면 올리든가 해야될덧


끝내고 바로 올리는 거라 구조가 이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야스씬만 봐... 

그런건 픽시브에다 백업할때 고쳐서 올리겠음미다


예전에 쓴 것들(픽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