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충 IN 오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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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흠.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철충 소속 이었던 팔랑스입니다. 오르카 호에 투항하고 싶습니다.”

 

잠깐의 적막, 그리고 바다 내음을 머금은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내 예상보다 앳된 청년의 목소리.

 

“네가 그 투항하겠다던 철충이구나. 만나서 반가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최후의 인간이시여.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 우선 오르카에 투항하게 된 계기라던가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니?”

 

이젠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한 시간이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잠시.....”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의를 담아 사죄의 자세를 취한다.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여러분들께 꼭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

 

“제 동족들이 여러분들에게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해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나의 차가운 철제 몸뚱아리에, 인간의 따뜻한 온도가 느껴진다.

 

“괜찮아, 팔랑스. 그것들은 너의 동족들이 저지른 일일 뿐, 네가 저지른 짓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다 쳐도 부상을 입거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된 분들도 있을텐데......”

 

“말했잖아? 네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면 그 일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

 

아, 이 사령관놈아. 진짜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눈물날 것 같잖냐. 

 

자세를 풀고 일어나, 다시 사령관을 마주한다.

 

사령관은 나를 몇 번 토닥이더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가 오르카호에 투항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제 동족들의 잔혹함 때문입니다.”

 

돌아라, 내 머리야. F의 망상력을 보여주는거다!

 

“어제 저녁의 통신에서 들으셨듯이, 저는 이 AGS에 기생한 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기껏해야 6개월, 정도일까요.”

 

“이 섬을 돌아다니며 만난 제 동족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찾는 것에 미쳐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철충이라면 원래 이러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 처럼요.”

 

지휘관들과 사령관, 그리고 호위병력들까지 내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어디선가에서 오류라도 나는 순간, 내 몸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구멍이 송송 뚫리겠지.

 

“제가 제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저는 ‘최후에 최후까지 혹시나 남아있을 인간을 찾아서 죽인다’ 라는 우리 종족의 행동원리 같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입장에선 전 불량품이었겠죠.”

 

“그렇게 섬의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던 도중, 소문을 들었습니다. ‘오르카호 라는 세력이 인간을 보호하고 있는데, 인류를 부흥하려 한다더라.’ 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멸망한 줄로만 알았던 저에겐 꽤나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게 혹시나 있을 오르카 호의 세력을 찾으러 계속 돌아다니다 임펫 씨와 2357번 브라우니, 그리고 레프리콘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말을 마무리 하자, 마리가 질문을 해왔다. 뭔가 빼 먹은 부분이 있었........아.

 

“얘기는 잘 들었네, 점착탄이 장착된 팔랑스. 하지만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자네는 철충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였지. 헌데, 기생한지 6개월, 그것도 다른 철충들과 부대끼며 지낸 것이 아닌 제주도를 혼자 돌아다녔을 자네가 모든 철충의 정보를 알고 있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마리의 위성포가 나를 조준한다. 트롤스버드를 쥔 라비아타와 블랙 맘바를 쥔 리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호드의 바퀴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침착하자, 아직 살아나갈 구멍은 있다!

 

“우선, 제가 모든 철충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다만, 저도 이 지식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오르카 호의 소문을 들었을 때, 제 머릿속으로 그 모든 정보가 밀물이 갯벌을 덮어버리듯 들어왔습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러니까, 그냥 쏴버리면 안되나? 슬슬 팔도 아프고 다리도 땡기는데?

 

-난 저 팔랑스가 살아남는다에 내 참치 몰빵한다.

 

-아오, 이 미친 양반아! 이 상황에서도 내기가 땡기냐?

 

-쫄? 쪼오오올?

 

-우리 낙타는 이런 꿀같은 기회를 그냥 버리네? 난 죽는다에 내 참치 잔고 올인.

 

-샐러맨더 넌 또 왜......으휴....

 

소란스런 와중, 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좋아. 지식을 어떻게 얻었는가는 둘째 치고, 철충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이 제주도에서 격퇴하거나 관측한 철충들에 관해서도 알고 있겠지. 한번 답해 봐라.”

 

이런 시발? 지금이 언제인지도 정확히는 모르는.......잠깐만, 레드후드가 있었으니까 최소한 세인트 오르카부터 시작이야. 근데 지금은 봄과 여름 사이. 게다가 아스널도 있네. 이벤트를 다 끝내고 날 보러 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은.....7지 바로 전이다!

 

“우선, 하급 기체들은 나이트 칙, 나이트 칙 실더, 나이트 칙 런처, 나이트 칙 캐논, 팔랑스, 강화형 칙, 강화형 칙 실더, 강화형 칙 런처 등을 격퇴하셨을 겁니다. 중급 기체들로는 레기온, 하베스터, 나이트 칙 실더 개, 빅 칙, 빅 칙 런처, 풀아머 빅 칙, 정예 레기온, 레기온 스나이퍼, 케미컬 칙, 빅 칙 실더 등, 그리고 상급 기체들로는 저거너트, 타란튤라........”

 

“됐다, 그만, 그만! 그정도면 됐다. 철충.”

 

“알겠습니다.”

 

대충 말하면 더 의심받을 것 같아서 그냥 TMI로 방출해버리길 잘했다. 내가 이놈들을 다 외우고 앉아있을 줄은 몰랐네.

 

“칸, 그 정도면 증명은 된 것 같아.”

 

“내가 보기에도 그정도로 알고 있으면 된 것 같네만.”

 

그렇게 말하곤 아스널이 내게로 다가왔다.

 

“오르카에서 포병을 담당하고 있는 로열 아스널일세. 앞으로 잘 부탁하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청하길래 일단 아무것도 없는 왼손으로 악수를 받아주었다. 역시 바이오로이드, 악력이 내가 만난 웬만한 사람들보다 배는 강했다.

 

“내 저격총이 자네를 꿰뚫는 일이 없어야 할걸세.”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이듯이 말한 아스널, 얘가 이렇게 무서웠던가. 인간 상태였다면 식은땀이 줄줄 흘렀을 것만 같다.

 

그 다음으로 온 것은 칸. 

 

“앵거 오브 호드의 지휘를 맡고 있는 신속의 칸이다. 아까의 무례에 대해선 사과하지.”

 

그녀는 최대한 정중히 허리를 숙이더니, 아까의 일에 대해서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르카의 안전을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하지.”

 

그 다음은 마리.

 

“스틸라인의 지휘관, 불굴의 마리다. 지켜보고 있겠다.”

 

“아직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그 다음은 레오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지휘관인 철혈의 레오나야. 앞으로 잘 부탁할게.”

 

“넵. 잘 부탁 드립니다.”

 

또 그 다음은 메이.

 

“둠 브링어의 지휘관, 멸망의 메이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 다음은 라비아타.

 

“통령을 맡고 있는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입니다. 모쪼록 당신의 능력이 오르카를 위해 쓰이길.”

 

그 다음은 리리스.

 

“주인님의 경호를 전담하고 있는 컴패니언 시리즈의 맏언니, 블랙 리리스에요. 아까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주인님께, 오르카에게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하네요.”

 

마지막으로 사령관이 다가와 나에게 손을 건넸다.

 

“오르카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써, 앞으로도 잘 부탁해.”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그리고 모든 지휘관 분들. 오늘부터 오르카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화목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와중, 내 소음감지센서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인간의 청력으론 들리지도 않을, 내 소음감지센서에도 겨우 잡힌 비행형 AGS들의 순항음, 그리고 육상형 AGS들의 기동음이었다.

 

“저.....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메이 소장님.”

 

“응? 뭔데?”


“혹시......현재 제주도 내에 활동중인 오르카 소속 AGS들이 있습니까?”

 

“아니? 혹시 모를 철충 감염을 피해서 일부러 바이오로이드 위주로........잠깐, 설마?”

 

그때, 각 지휘관들의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에이미 레이저! 북서쪽 방면에서 철충 2개 중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동 속도로 보아 대략 1분 후 이곳으로 도달할 예정입니다!

 

-여기는 T-14 미호! 강정마을 방면에서도 철충 2개 중대 접근중! 속도로 보아 대략 2분 후 여기로 도달 예상!

 

-여기는 37식 다이카! 월평마을 방면 상공에서 철충 1개 비행대대 발견! 약 1분 후 제주민군복합항으로 최근접 예상됩니다!

 

-여기는 AT-100 비스트헌터! 철충 접근 확인! 강정마을 방면 좌표 확인 완료! 포격 개시하겠습니다! 

 

-여기는 B-11 나이트앤젤! 북서쪽 방면 철충 확인! 집속탄 폭격 개시하겠습니다!

 

-여기는 P/A-00 그리폰! 다이카로부터 월평마을 방면 철충 1개 비행대대 정보 수신 완료! 스카이나이츠 대원 모두 교전 개시하겠습니다!

 

저 멀리 있던 운동장에서 포탄들이 폭음과 파공음과 함께 지정된 좌표를 향해 날아가고,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항공폭탄이 저 멀리 있을 철충들의 머리 위로 자유낙하하고 미사일이 제주의 새파란 하늘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장관이긴 하다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주인님! 제가 보호해드릴게요! 꽉 잡으세요!”

 

“사령관님! 오르카로 대피하겠습니다!”

 

리리스와 라비아타는 사령관을 데리고 오르카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포격과 폭격이 끝나는 대로 강정마을 방면 잔존 병력을 토벌하러 간다! 다들 시동 걸어!”

 

“알겠습니다!”

 

칸과 호드는 잔존 병력을 토벌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고,

 

“스틸라인 전원! 장갑차에 승차하라! 우리는 북서쪽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마리와 스틸라인은 북서쪽 방면의 잔존 병력을 격퇴하기 위해 장갑차에 승차하기 시작했다. 설정으로만 있던 스틸라인의 장갑차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캐노니어 전원, 차탄 발사 후 신속히 철수해! 잔존 병력 토벌은 스틸라인과 호드, 둠 브링어에게 맡긴다!”

 

아스널은 캐노니어의 지휘를 개시했다. 스토리 상이나 2차 창작이나 아스널은 보통 야스에 미친 색정마로 나왔지만, 위엄찬 목소리로 지휘하고 있는걸 내 눈앞에서 보니 색정마 같은건 떠오르지도 않고 그저 한없이 멋질 뿐이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닌데. 아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만, 아직 나를 믿지 않고 있을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호감을 쌓아야 할 때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중앙 도로를 통해 북서쪽 방향으로 출진하는 스틸라인 병력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같이 좀 갑시다!!!!”

 

하지만 장갑차의 소음 때문일지, 전투 상황으로 인한 긴장감 때문일지 내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라이,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달린다. 최후미 장갑차와의 거리가 15m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나는 다리의 유압에 동력을 집중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나는 그리 완벽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장갑차의 지붕에 올라탈 수 있었다. 지붕이 약간 찌그러지긴 했다만, 작전 중의 찐빠니까 상관 없을거다. 아마도?

 

-철컹.

 

운전석 쪽의 해치가 열리고, 꽤 고참으로 보이는 브라우니가 머리를 내밀었다.

 

“어이씨....뭐야...? 아니, 잠깐만. 아까전에 점착탄 달린 팔랑스 아저씨 아냐?! 여기서 뭐하심까?!!”

 

“지원해드리러 왔지!! 그거 말고 별 이유가 있을까?!!”

 

“아니 근데 그.....에휴, 됐수! 그 위에 아마 손잡이 있을거니까! 꽉 잡으십쇼!!”

 

그렇게 말하고는 해치를 닫은 브라우니. 

 

비어있는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방패로 운전석의 해치를 두드리자, 알겠다는 듯이 장갑차의 속도가 증가했다.

 

행렬에서 거의 반 즈음 멀어졌지만, 그 거리를 순식간에 따라잡을 만큼 빠르게 밟던 고참 브라우니의 질주는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가 된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췄다.

 

-투타타탕! 탕! 타탕!

 

-엄호!!

 

-엎드려!!

 

“하차! 전원 하차!”

 

마리의 목소리와 교전음이 겹쳐 들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장갑차 내의 병력들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차하였다.

 

느긋한 분위기였으리라 짐작되는 마을은 집속탄 폭격과 철충 잔해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이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철충 2개 소대 병력이 먼저 도착한 스틸라인 병력들과 교전중이었다.

 

호감작 하겠답시고 따라왔지만, 처음에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물론 교전 경험은 있다. 하지만 소규모 교전에 한정된 것이었지, 이런 중규모 교전을 마주치자 마치 머리를 백색 페인트로 칠한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내 시각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하필 잔해들에 걸려 발을 접질린 듯한 브라우니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압사격을 하는 다른 브라우니.

 

그리고 그녀들을 향해 달려오는 레기온.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들의 앞으로 달려가서, 자세를 잡고, 방패를 세우고, 달려오는 레기온을 받아냈다. 

 

-투쾅!

 

-????


철과 철이 부닥치는 둔탁하지만 날카로운 소리, 잠시 휘청거리더니 자세를 다시 잡은 레기온이 나와 브라우니들을 향해 미니건을 갈겼다.


-투투투투투투투투퉁!

 

-카가가강! 캉!

 

첫 전투 당시에 경험했던 칙의 30mm보단 약하지만, 나같은 저강도 분쟁용 AGS에게 꾸준한 피해를 강요하는 7.62mm 구경의 미니건.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비스듬하게 세워 경사장갑의 원리를 이용해 도탄시키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뚫릴지도 모른다. 즉, 위험하다.

 

“빨리 그 브라우니 데리고 도망쳐요! 여긴 제가 맡을게요! 어서 가요!”

 

“네...넵! 알겠슴다! 감사함다!”

 

엄호사격을 하던 브라우니가 발목을 삔 브라우니를 데리고 내 뒤로 빠지고, 그 둘이 내 시야에서 멀어져 장갑차까지 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일어나 총알을 받아내며 걸었다.

 

방패로 막고 있긴 하지만, 도비탄이 가끔씩 내 몸을 스쳐 지나간다. 점착탄도 간간히 날아온다. 하지만 전진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 

 

잘 보이진 않지만 당황한 듯한 레기온. 기세를 올렸다. 뛴다. 건물의 잔해와 철충 시체로 널부러진 바닥이 거슬리지만, 그래도 뛴다.

 

레기온도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 한다. 그런데 어쩌냐? 난 이미 네놈의 눈 앞인데.

 

-푸슉!

 

점착탄을 발사해 발을 묶고 미니건의 작동을 일시적으로나마 멈춘다.

 

-?!!!

 

그 뒤, 다시 한 번 그를 들이받는다.

 

-쾅!

 

뒤에 있던 비닐하우스에 꼴사납게 넘어진 레기온, 방패를 칼처럼 휘둘러 얼굴 부분을 내리치려 한 순간, 갑자기 이상한 문구가 나의 의식 속에서 떠올랐다.

 

-그에게 접촉해 굴레에서 해방시켜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이게 시발 뭔소리야?

 

갑자기 등장한 뇌내 개소리에 당황하고 있을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레기온이 일어났다. 몇 번 즈음 미니건을 작동시켜보려 하지만, 점착탄이 아직 효과가 있는지 모터 소리만 맹렬히 들릴 뿐 이었다.

 

레기온은 이윽고 원거리 교전은 깔끔하게 포기한 듯, 권투와 흡사해 보이는 근접격투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발, 저 새끼가 근접격투를 할 수 있다는건 금시초문인데.

 

총알과 폭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레기온이었다.

 

-슈욱!

 

놈의 미니건이 내 어깨의 구동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스쳤으면 왼팔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슉! 슈숙! 훅!

 

이윽고 몇 번의 잽과 스트레이트, 훅이 날아왔지만, 피해냈다. 내가 섭렵한 복싱 만화만 수십개인데, 어림도 없다 이 자슥아.

 

그 때, 놈이 승부수를 두려는 듯 나에게 접근하였다.

 

하지만 인파이팅이라 해도 그렇지, 레기온은 너무 깊숙이 파고들어 버렸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텅 빈 옆구리에 리버 블로를 맥였다. 철충이기 이전에 AGS고, 나나 저 놈의 특성상 둘다 같은 기종이 베이스이기에 별 타격이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타격음이 컸다.

 

“하아압!”

 

-쾅!

 

-크아아아악!

 

생각보다 컸던 타격음 만큼 타격이 컸는지, 휘청거리던 레기온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레기온....아니, 팔랑스인가? 어째서.....저놈들을........? 

 

“글쎄다...? 난 너희들과는 달리 딱히 쟤들한테 증오심이라던가 그런건 없거든. 인간에게도 그렇고 말이야!”

 

그렇게 외치며 나는 레기온에게 달려들었다. 레기온은 점착탄을 쏘면서 저항했지만, 운이 나쁘게도 다 내 뒤의 저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그를 덮친 나는 파운딩 자세로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내 손이 멋대로 레기온의 머리 부분을 잡았고, 뭔가 알수 없는 그런 무언가가 레기온에게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뭘 하는거냐!!! 그만!! 그만!!!!!!

 

레기온은 연신 소리를 질러대며 발악했지만, 난 놓아주지 않았다. 애초에 내 의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놓을 수도 없었고, 해방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쁜 의미는 아니겠지 싶은 그런 생각이었기에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몇 십 초가 지났을까, 주변의 교전음도 슬슬 잦아질 무렵, 내 손이 저절로 레기온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후우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 몸의 기가 다 빠진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는 AGS의 몸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끄으으으극.....”

 

그때, 레기온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황급히 전투태세를 취했지만, 레기온이.....아까 전과는 매우 달라보였다. 

 

철충이라면 모름지기 다들 가지고 있는 새빨간 색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모두 푸른 빛으로 변하였다. 

 

멍하니 자신의 미니건을 바라보고, 또 주변을 바라보던 레기온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어떻게.........?”

 

-풀썩.

 

이 말을 남기고는 레기온은 다시 쓰러졌다. 대체 뭐지......? 

 

-전 병력 교전 중지!!! 교전 중지!!! 

 

철충 2개 소대와 스틸라인 정예병 2개 소대의 싸움은 결국 스틸라인의 승리로 끝났는지 마리가 교전 중지를 연신 외쳐대었다. 마리 모델의 성격상 최전선에서 장병들과 같이 싸우는 것을 선호하겠지만 지금이 그럴 짬은 아닐텐데, 하필 나를 만나던 도중이라 너무 고생만 하는 것 같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로 구성된 병력들이 엄폐물이나 부서진 집에서 나와 장갑차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교전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웃고 떠드는 무리들도 보였지만, 그들도 여기저기에 부상을 입었다.

 

아까 전의 브라우니처럼 다리를 다친 경우도 있고, 손이나 팔을 다쳐 총은 그냥 멜빵으로 대충 몸에 걸어놓고 걸어오는 레프리콘도 있었다.

 

나도 가서 부상자들 좀 도울까 했는데, 일단 저 기절한 레기온부터 옮기고 해야겠다.

 

“끄흡......생각보다....무겁네..?”

 

겨우겨우 레기온의 팔을 내 어깨에 걸쳐 질질 끌고 갔다. 물론 같이 이동중이던 스틸라인 병력들의 시선은 덤이다.

 

-저거 아까전의 팔랑스 아님까?

 

-어? 그렇네요?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대?

 

-게다가 저거....레기온 아님까? 아니...잠깐만....저거 빨간색이었던 부분이 파란색으로 바뀐 것 같슴다!

 

-무슨 소리에요 브라우니. 설마..........어?

 

-탄흔이 팔랑스에게만 남아있는걸 보아하니, 근접전으로 이기고 왔나 본데?

 

-철충이지만 낭만 지렸다 진짜.

 

의무병들과 함께 솔선수범해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던 마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승리! 마리 소장님! 본 기체, 전투 과정에서 레기온 1기를 노획하였습니다!”

 

마리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을 직접 직관으로 볼 줄이야.

 

“아니...팔랑스. 어떻게 여기까지 온건가? 그전에 그 레기온은 어떻게 된거고?”

 

“최후미 차량에 양해를 구해서 지붕 위에 탑승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붕이 약간 찌그러져 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리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괜찮네. 어차피 전투 나갈때마다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바람구멍도 뚫리고 그러는게 장갑차인데 뭐. 게다가 그렇게 온걸 보니 우리들을 보호하겠다고 급하게 온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어떻게 지붕이 찌그러졌다고 화를 내겠나?”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 소장님!”

 

“그러면 됐네, 근데 그 레기온은 대체 어떻게 노획한건가? 애초에 철충들은 기생하고 있는 AGS가 파괴될 시에 본체만 탈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게다가 철충에게 원래 보여야 할 빨간색은 어디가고 파란색이 빛나는거지?”

 

이건 사실대로 말해야겠다. 여기서 뭔가를 더 붙이거나 빼면 또 의심을 살라.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레기온과의 전투 과정에서 꽤 긴 시간을 접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레기온이 작동을 중지하더니.....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것 참.....자네를 오늘 처음 보긴 했다만, 볼때마다 참 특이한 철충이야. 철충에 관한 지식을 백과사전 수준으로 지니고 있고, 인간의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게다가 이제는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말이야.”

 

“하하하......과찬이십니다.”

 

“칭찬은 아니긴 하다만.......뭐, 됐네. 일단 저 레기온은 저기 5호차 지붕에 묶어 두고, 그 후에 부상자 탐색을 맡아 줄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신다면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팔랑스. 잘 좀 부탁하지.”

 

그렇게 말을 마친 마리는 다시금 의무병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5호차로 레기온을 끌고 갔다. 마침 그곳에서 야전수리를 하고 있던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도와줘 지붕에 레기온을 올려 안전하게 묶을 수 있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에이..별 말씀을 다 하심다. 제 동기를 구해주신 분인데, 이 정도 밖에 못해드리는게 오히려 죄송함다.”

 

“브라우니의 말처럼, 우리의 전우를 구해주신 분인데. 이정도는 해 드려야죠.”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네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5호차에 아?군화된 레기온을 묶어 놓고, 아직까지 연기와 화염이 난무하는 전장으로 돌아갔다. 이미 나 말고도 꽤 많은 수의 스틸라인 병사들이 혹시 어딘가에 갇혀있을지 모르는 동료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639번! 639번 어디냐!

 

-여기! 나 다리 부상!

 

-거기 가만히 있어! 금방 갈게!

 

발견된 병사들은 대부분 다리에 부상을 입어 움직이기 힘들었던 병사들이었다. 그 이후로 약 15분 가량을 철충 잔해까지 뒤적거리며 찾았는데도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부상자 더 없나요? 이만 철수하겠습니다!”

 

그렇게 철수 하려던 찰나. 내 소음 감지 센서에 작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있다고.........제발.................

 

힘이 다 빠져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것 같은 브라우니의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 내가 있는 지금 여기 근처에서 들리고 있는 소리다.

 

위치는.............저쪽의 반파된 민가인가.

 

“잠깐만요! 저 쪽에 아직 있는 것 같아요!”

 

“어디요?!”

 

“저기 민가요!”

 

“저랑 같이 가죠! 따라오세요!”

 

“넵!”

 

내 근처에서 수색을 하고 있던 레프리콘과 브라우니의 소리가 들린 곳으로 빨리 이동했다.

 

도착해서 본 브라우니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다. 오른쪽 다리는 역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왼쪽 다리에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는 녹슨 철근이 박혀 있었다. 게다가 머리에선 밝은 갈색 단발머리의 반을 붉은색으로 색칠하고도 남을 만큼의 피가 묻어 있었다.

 

“헤.....헤헤.....소리......들었나....보네요.......저....살려주세요.........”

 

“말하지 마요 브라우니! 으으으...지혈제가 어디있더라?”

 

이렇게 심하게 다친건 처음 봤는지 크게 당황한 레프리콘. 우여곡절 끝에 겨우 지혈제를 찾아 브라우니의 부상당한 부위 중 가장 출혈이 심한 다리의 관통상과 머리의 부상 부위에 뿌려 출혈을 막았다.

 

“정신 차려요 브라우니!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대원들이 와서 도와줄 거에요!”

 

“여기요!! 여기!! 중상자 1명 발견되었습니다! 왼쪽 다리에 철근이 박혀있고, 오른쪽 다리가 꺾여있어요!”

 

“금방 가겠슴다!! 좀만 기다려 주십쇼!!”

 

먼저 복귀했던 레프리콘과 브라우니가 내 소리를 듣자 마자 들것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고, 중상자라는 소식 때문인지 마리도 같이 오고 있었다.

 

이제 좀 한숨 돌리려는 찰나,

 

-후두둑.

 

반파된 천장과 벽에서 먼지와 부스러기들이 떨어졌다.

 

“어..?”

 

그순간, 천장이 무너졌고.

 

“위험해요!!”

 

나는 부상당한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붕괴된 천장에 맞지 않도록 감싸며,

 

-콰르르르륵!!

 

무수한 콘크리트 잔해 속에 파묻혔다.


작가의 말 : 

계속 연재가 늦어지는 점 너무 미안하다. 최근에 부산에 여행도 가고 해서 그동안 글을 못 썼는데 이제야 올리게 되네......기다려준 라붕이들에게 고맙고 너무 미안하다. 그리고 2월 초에 외가 친척분들 뵈러 동남아시아 가는게 이번 주 내가 부산에 있을 때 갑자기 정해졌다. 그래서 대략 2월 중순 즈음까지 동남아시아에 있어야 하는데 블루투스 키보드하고 마우스 주문해 놨으니 거기 가서도 최대한 연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기다려주고 응원해준 라붕이들에게 고맙고 너무 미안하다.


2024-04-0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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