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퇴로도, 플랜B도 무엇하나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미친듯이 아래로 뛰어내려갔고, 마침내 우린 지하 최하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넓은 공간이었다. 지 회장이 있는 층만큼은 위생을 신경쓰겠다는 건지, 아니면 냉동수면중이라 해도 회장이랑 오드리를 결코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 층은 다른 연구층과는 달리 고문과 생체실험 따위로 더렵혀진 흔적이 없어 비교적 깨끗했다.


뭐, 더는 아니게 됐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해치운 오드리 마리오네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방공호 문을 발견한 우리는 동시에 발을 멈췄다. 저 단단하게 봉쇄된 문 너머에 문리버 회장이 보관되어있다. 문 옆에는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듯한 키패드가 붙어있었다.


"뭐야 이거, 테일러가 비번 같은건 말 안했잖아. 지금이라도 전화해봐야 하나?"


"소용없어. 지문인식에 홍채인식 장치까지 있잖아. 비밀번호만 알려줘봤자 소용없으니 말 안했던 거일걸."


"그럼... 부술 수 있겠어?"


"이러려고 아머드 메이든이 있는거지. 물러서."


나스호른이 포구를 들어올리자 나와 바르그는 거리를 벌렸다. '콰과앙-!' 대전차포를 발사하자마자 순식간에 폭음과 열기가 공간을 매웠다. 먼지구름이 가라앉고, 움푹 우그러지긴 했어도 완전히 부숴지진 않은 문이 보였다. 요새든 탱크든 왠만한 건 다 일격에 부숴버리는 나스호른의 화력을 버텨낼 정도의 강도라는 뜻이었다.


"이야, 튼튼하네."


나스호른이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대포를 이어서 쏘기 시작했다. 당장 이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우리 셋 뿐이여서 마음놓고 길을 뚫는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귀를 몇 번 쫑긋거린 바르그가 홱 나스호른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서둘러라!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다!"


"있어봐, 이제 막... 문에 구멍 뚫은 참이니까."


연신 귀에 울리던 폭음이 그쳤다. 구멍 너머로 문 건너편 공간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나스호른이 그 틈새로 두 손을 비집어넣고 양옆으로 밀어냈다. '끼기기기긱-' 육중한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려졌다.


그렇게 문을 넘어가자 우리 눈에 들어온 건 또다른 문이었다. 이중보안이었다.


"이런,"


거기다 천장에 숨어있던 터렛까지 두 대 튀어나왔다.


"망할-"


터렛이 불을 뿜기 시작하자 나스호른이 곧장 방패를 들고 응전했다. 시간을 조금 잡아먹긴 했지만 금방 두 대 다 파괴했다.


"아~ 귀찮게 됐네. 문이 한 개가 아니었어? 시간 잡고 넉넉히 포를 쏴갈긴다면 될 것 같긴 한데..."


그 순간, 우리 셋이 서있는 장소에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이미 늦은 것 같군."


눈썹을 꿈틀거린 바르그가 뒤로 몸을 돌렸다. 바르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마리오네트들이 열을 맞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예상 못했던 건 레모네이드 델타마저 직접 행차하셨다는 점이었다.



"회장님께...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델타가 시뻘개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눈 밑으로 마스카라가 흘러내린 흉한 모습이었는데, 내가 후추 스프레이 뿌린 것 때문에 저 꼬라지가 되서 화장도 못고치고 온건가. 파괴된 첫번째 문을 빠르게 둘러보고 이마에 힘줄이 돋은 델타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짓을 하려한 거냐고!!!"


델타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자 그와 동시에 마리오네트들이 발포를 개시했다.


*


마리오네트들이 집중사격을 가하자 그 인간은 쏜살같이 나스호른 뒤에 숨어버렸다. 델타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공격을 재촉했다.


"회장님의 부활재료로 쓰일 기회를 줬는데, 감히 회장님을 노려!? 더는 필요없어! 죽여! 죽여버리라고!!"


그러나 아무리 악을 쓴다 한들 마리오네트가 들고있는 기관총 정도로는 저 방패를 뚫을 수가 없었다. 나스호른이 방패 끝을 바닥에 쑤셔박아 고정시키는 걸 본 델타는 마리오네트 포병들을 앞열로 집결시켰다.


"발사!!"


일렬로 선 대구경포가 델타의 호령에 맞춰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 포격에 방패에 금이 갔을 뿐더러, 나스호른이 방패 째로 밀려나면서 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계속 쏴! 계속 쏘라고!"


포병들이 포탄을 재장전하는 사이에도 보병들은 쉬지 않고 기관총을 쏴갈기면서 두번째 인간 일행이 방패 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저 미친년은 우리 뒤에 방공호 문이 있는데도 망설이지 않는거냐!?"


"이정도 화력으로는 안부숴질 거라는 자신감이겠지...!"


나스호른은 제대로 반격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연이은 싸움으로 인해 기관포 끝이 새빨갛게 과열되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그가 이를 으득 갈았다.


마리오네트 포병들이 장전을 마치고 도로 포구를 앞으로 향했다.


"준비!"


"당장 그만둬, 델타."


느닷없는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에 델타는 몸을 뒤로 돌렸다. 거대한 가위를 등에 맨 자신의 부관, 테일러 리스트컷이 또각또각 걸어왔다.


"그만둬, 델타...? 지금 이게 뭐하자는 장난질이지, 테일러 리스트컷? 오르카 놈들이 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 와있는거냐고?"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줘야 알겠어? 멍청하기는."


델타가 황당한 듯 얼굴을 구기며 노려봤다.


"하... 오늘따라 배신자가 아주 극성이군, 그래...!"


왜 배신한 건지, 뭘 믿고 나타난건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델타가 데리고 온 마리오네트 병사들 중 절반이 총구를 뒤로 돌렸다.


"죽여버려!" 테일러를 향한 발포가 시작되자, 테일러는 초능력으로 금속판과 건물 잔해 따위를 끌어모아 엄폐물을 형성했다. 곧이어 그녀가 들고온 거대한 가위가 그녀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가까이 다가온 마리오네트들을 종이 자르듯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하도 오랜만에 안쓰던 능력을 쓰다보니 손이 부르르 떨리면서 손목을 감은 붕대에서 피가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테일러는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목을 움켜잡았다.


"멍청한 년이! 너까짓게 나를 막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


테일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까딱해 가위를 회수했다. 가위 끝에서 핏방울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 작은 핏자국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치켜든 테일러는 팔을 앞으로 내질렀다. 거대한 가위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작살처럼 날아갔다. 델타는 곧장 호위병들을 제 주위로 모이게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이 가위는 델타 가까이에도 가지 못한 채 그녀를 지나쳐 땅에 철그렁 떨어졌다. 그 꼴을 본 델타가 피식 비웃었다.


"큭, 아하하하! 이를 어쩌나? 빗나갔네?"


"글쎄, 과연 어떨까."


테일러 리스트컷이 썩소로 응수하자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델타는 휙 뒤돌아보았다. 제 발치에 떨어진 가위를 주워든 바르그가 보였다.


"그래, 난 못이겨. 그렇지만 쟤는 가능하겠지. 싸워, 멍멍아."


"...호의를 받아들이지."


바르그가 양 손에 힘주어 가위를 반으로 쪼개자 쌍검의 형태가 되었다. 스콜과 하티에 비하면 무게도 강도도 부족하지만, 누군가를 베고 찌르기엔 충분하다. 비로소 그녀는 무기를 갖췄다. 바르그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름과 동시에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 총탄이 파바박 박혔다.


테일러는 무기를 전달했으니 제 역할은 다했다는 듯 방어에 전념하기 시작한 반면, 바르그는 사나운 맹수같은 기세로 매섭게 참격을 쏟아부었다. 고기방패로 앞세운 마리오네트들이 계속해서 쓰러져갔다. 다급해진 델타는 제 케스토스 히마스를 이용해 마리오네트 병사들을 강화시키려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버벅거렸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네가 타고다니는 기계는 단말기일뿐, 케스토스 히마스는 이 연구소 자체지."


철판으로 제 주변을 둘러싼 테일러가 말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연구소 어디에서든 그 잘난 슈퍼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바이러스를 심어뒀지."


테일러가 무덤덤하게 전한 사실에 델타는 얼굴을 한층 더 일그러뜨렸다. 케스토스 히마스는 펙스 기술력의 정점인 슈퍼컴퓨터인만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건 불가능했지만, 부하가 걸리도록 만드는 정도는 가능했다.


"이 빌어먹을 년이 끝까지...!"


"워 워. 진정하라고, 아직 더 남았으니까. 이 지역 내의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려던 모양인데, 그것도 좀 힘들거야. 걔들은 때마침 도착한 손님을 대접하느라 바쁘거든."


***


"본부, 여기는 레오나. 문리버 본사 빌딩이 시야에 잡혔어."


델타의 영토 깊숙이 침투하는 데에 성공한 발할라와 몽구스 팀의 대원들은 마리오네트와 AGS로 편성된 펙스 병력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두번째 인간의 오르카폰 신호가 그 건물에서 끊겼어. 홍련, 진입할 수 있겠어?]


"저항이 거세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도시를 지킬 병력까지 집결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팅! 도탄된 총알이 홍련 근처의 벽에 박혔다. 인상을 찌푸인 레오나가 권총을 꺼내 지휘관기로 개조된 커스텀 램파트를 쏴서 맞추자, 곧이어 발키리가 쏜 탄환이 그 램파트의 코어를 꿰뚫었다.


"보아하니 델타도 저 안에 같이 있는 모양이네."


[계속 교란시켜줘. 화력지원 보낼게.]


***


델타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음에도 무기를 쥔 바르그는 가히 멈출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저 베고 또 베었다. 피가 튀었다. 고통도 두려움도 못 느끼는 마리오네트들은 사지가 떨어지고 몸통이 칼에 꿰뚫려도 비명 한 마디 없이 쓰러졌다. 도무지 살아있는 생명같지가 않은 그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오로지 적을 베는 데에만 집중했다. 바르그가 베지 못하는 중장갑병은 나스호른의 간간한 지원공격으로 처리했다.


델타의 호위병 수가 충분히 줄어들었다 판단한 바르그는 곧장 그녀에게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바르그의 어깨가 뚫렸다.


"–윽!?"


비틀거리다 균형을 잡은 바르그가 뒤돌아보면 바닥에 쓰러진 채 한 팔로 총구만 들어올린 마리오네트가 있었다. 마리오네트가 삐걱거리며 제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바르그는 할 말을 잃었다. 저 마리오네트는 분명 조금전에 관자놀이에 칼을 쑤셔박아 죽였던 놈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마리오네트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죽어있어야 할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하하하하... 늦지 않았군 그래."


바르그는 고개를 돌려 델타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케스토스 히마스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내 병력을 줄였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들개년같으니! 어디 한 번 해봐!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세우면 그만이니까!"


"...죽은 자들도 네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역겹기 짝이 없군."


조금 전 테일러는 이 연구소 자체가 델타의 케스토스 히마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이 지하 전체가 그녀의 영향권인 셈이니, 이 공간 뿐만 아니라 위층에서 죽였던 마리오네트들까지 부활해서 달려들 거다. 베어야 할 것들이 아직도 한참 남아있다. 바르그는 누적된 고통과 피로가 몸을 무겁게 하는 걸 이 악물고 무시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


한편, 스발바르 제도 서해안에 정박한 오르카호.


두번째 인간 구출 작전에 참가하지 않고 오르카호에 남게된 이들은 묵묵이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연구실에서 마리오네트들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는 닥터가 바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바르그가 두번째 인간을 납치했던 그 때, 다수의 마리오네트가 나타나 기억의 방주를 습격했었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스발바르 제도에 방치됐던 다 죽어가는 마리오네트들을 억지로 일으켜 좀비같은 꼴로 진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델타는... 정말 좀비를 만드는 기술이라도 개발한 건가요?"


한참 부검중인 닥터를 뒤에서 지켜보던 에이미가 운을 띄우자, 닥터가 고개를 뒤로 반만 돌렸다.


"세상에 좀비란 건 없어. 마리오네트들이 이런 꼴이긴 해도 움직일 당시엔 분명히 심장이 뛰고 있기는 했을걸."


그러나 에이미의 표정이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로 풀리질 않자 닥터는 수술용 마스크를 내려 입을 노출시키고서 설명을 덧붙였다.


"마리오네트는 임무수행이 불가능해질 정도의 치명상을 입게되면 자동으로 휴면상태에 들어가도록 설계되어있어. 거기다 휴면상태인 동안은 천천히 몸이 회복되는-"


"휴먼 상태? 사람이 된다는 거야?"


토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휴먼이 아니라 휴면! 호흡이나 혈액순환 등의 생체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를 말해. 흔히 동물이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사망에 이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사상태로 들어간 거지.

둘째 오빠랑 같이 들어왔던 그 마리오네트 미호 있지? 걔도 옛~날에 글라시아스 언니한테 호되게 당해서 움직일 수 없게되자 스스로 휴면상태에 들어가서 몇 달을 죽지 않고 버텼어."


"하지만 당장의 죽음을 피해도, 누군가 제때 와서 치료해주지 않고 계속 방치됐다간 그대로 죽는 거 아닌가요? 마리오네트의 수명문제도 있고 말이에요. 레모네이드 델타 성격상 낙오된 마리오네트들을 위해 의무병을 보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지. 휴면상태에서 각성한 직후의 상태를 고려해보면 그 날 바르그가 마리오네트 호출신호를 내렸어도 못움직였어야 맞아. 하지만 좀비같은 꼴이 되면서까지 방주를 공격했지.

그래서 그 마리오네트들의 시체를 부검해봤는데, 하나같이 혈액에서 특이한 물질이 검출됐어."


닥터가 손에 든 시험관을 흔들자 노란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행동불능상태가 된 몸뚱아리를 억지로 일으켜 싸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신비한 약물이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설마, 전투 자극제 인가요?"


"맞아. 마리오네트가 입고있는 슈트에 내장돼있는데, 신호를 받으면 슈트 안쪽에서 바늘이 나와서 이 약물을 주입하지.

그런데 이거... 우리가 쓰는 것보다 더 독한 놈이야. 문자 그대로 죽기 일보직전인 마리오네트를 당장이라도 싸울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줄 정도로 효과가 좋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해."


"부작용... 이라고요?"


"우리가 쓰는 전투 자극제는 복용자의 신체에 무리가 가지않는 선에서 효과를 발휘하지만, 이 마리오네트의 몸에서 검출된 건 복용자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 신체능력을 일시적으로 폭증시켰다가 시간이 지나면 내부에서부터 파괴해버리지. 그걸 수명이 다해가는 마리오네트한테 써먹었으니 신체가 버티질 못해서 결국 좀비같이 어중간한 꼴이 되버린거고."


"...저희가 쓰는 것보다 성능이 더 좋다고 해도, 저희쪽에서 쓸 일은 없겠군요. 우리 자기는 절대로 그런 걸 허용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래... 그래야 맞지. 뭐, 만약 수명문제가 해결된데다 강화시술까지 최대한으로 받은 특급 마리오네트 같은 게 있다면 부작용 없이 전투속행이 가능하겠지만..."


그런 건 그냥 가정일 뿐이니 논하는 의미가 없지. 닥터는 뒷말을 삼켰다.


***


지상 1층. 델타의 케스토스 히마스 신호가 아슬아슬하게 닿는 범위였다.


'쿠슉.' 한 마리오네트의 슈트 안쪽에서 주사바늘이 박히고 전투 자극제가 주입되자 몸이 움찔 떨렸다.


정지됐던 심장이 펌프질을 재개하고, 약물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커흑!"


목 안에 고여있던 피가 터져나왔다.


<99.1%>


삐걱거리며 손가락 마디가 움직였다. 손가락, 손목, 팔꿈치, 어깨 순으로 간신히 한쪽 팔을 움직여서 몸을 돌려 등이 천장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99.2%>


피 굳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밀어냈다. 땅에서 띄워진 몸으로부터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는 금새 멎었다.


일어섰다.


<99.5%>


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느낀 건 그가 없다는 공허감이었다. 울 수 있는 몸이라면 눈물을 한 바가지로 쏟아냈을 정도로 그 사실이 싫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를 보고싶었다. 그랬었는데.


기적이, 정말 예상치 못한 방면으로 찾아왔다.


<99.7%>


내 것 아닌 몸을 뒤짚어쓰고 살아남았다. 마치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의식이 흐릿해서 그에게 하고싶은 한 마디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줄 수 있었다. 어찌보면 예전과 그리 다르지도 않은 관계이니 이대로 살다가 죽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젠 편히 눈 감을 수도 없게 됐다.


그가 아직 저 아래에 있다.


<99.9%>


텅 비었던 안이 채워져갔다. 비로소 의식이 선명해지면서 이 몸이 나의 것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없는 세상같은 건 더는 보기 싫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저 순순히 그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100%>

<다운로드가 완료됐습니다.>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


폭음, 열기, 피냄새와 기타등등으로 인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지만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바르그는 마리오네트의 사지를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쪽으로 싸웠다. 그러나 상체뿐인 마리오네트가 끈질기게 기어와 제 발목을 움켜잡자 바르그는 그 모습을 보고선 진심으로 기겁했다. 무기를 넘겨준 테일러는 방어하는데 급급해 소극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고, 나스호른도 바르그를 도와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수많은 마리오네트들이 총을 들고 있는데도 근접전이라도 하려는 건지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직접 달려들었다. 대포 한번 쏘면 직선상에 있는 마리오네트들이 일소되지만, 델타도 그걸 알고 각자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도록 시켰다.


결국 다 막지 못하고 마리오네트 하나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나스호른은 땅에서 방패를 뽑아 그 마리오네트 쪽을 향했다. 방패에 시야가 가려지기 전에, 그 마리오네트가 입고있는 두꺼운 방탄복 같은 것에서 빨간 불빛이 빠르게 점멸하는 게 보였다.


"나오지마! 내 뒤로-"


'쿠웅-!' 나스호른이 내 어깨를 잡고 당긴 그 순간 방패 건너편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직접적으로 폭발에 휩쓸리는 건 면했으나 충격으로 인해 나는 나스호른과 같이 날아가버렸다. 자폭병이었냐.


바닥을 몇 번 구르고서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나스호른의 방패 밖으로 끌려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라진 걸 눈치챈 나스호른이 곧장 달려오려고 했으나 다수의 마리오네트 포병들이 거리를 둔 채 대포 세례를 갈겨 방패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움직임을 봉쇄했다. 거기서 고개만 옆으로 돌리면, 멀지 않은 곳에서 비틀리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델타가 보였다.


"넌 건드려선 안되는 분을 건드린 거야. 감히 회장님을 해하려 했으니 그 대가를 치뤄야지?"


"인간!!"


바르그가 제 발을 붙잡고있는 마리오네트의 손을 베어버리고 달려오기도 전에, 델타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렴."


"그건 내가 할 말이지..."


통증 때문에 일어서기도 힘들어서 그냥 마침 가까이에 있던 건물 잔해 같은것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숨을 한번 거칠게 내뱉고서 말을 이었다.


"넌 죽을거야, 델타. 네 회장도 마찬가지로. 바로 네가 한 행동 때문에."


언젠가 스토리에서 패배하게 될 악역에게 할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마지막으로 델타 기분이나 좆같게 만들고 싶었다. 싸늘하게 표정이 굳은 델타가 총구를 겨누었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바르그도, 나스호른도, 테일러도,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내게 시선을 모았다. 일순간 시간이 멈췄다고 착각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뜬 델타가 총을 떨어뜨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제 가슴 언저리로 가져갔다. 심장이 있을 위치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보라색 드레스를 적셨다. 델타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마리오네트들 사이에, 미호가 서있었다.


"너... 어떻게..."


"이미 한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영영 떠나보낼 뻔 했다가, 기적적으로 기회를 잡았어."


총구를 아래로 떨어뜨린 미호가 천천히 고글을 벗자,



"그러니 내 소중한 사람만큼은, 절대로 앗아가게 두지 않아."


자줏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델타는 더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무너지듯이 털썩 쓰러졌다. 제대로 된 유언 한마디조차 남기지 못한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녀가 죽자 주변의 마리오네트들도 일제히 정지했다. 그 중 부상이 심한 몇몇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레... 레오나 대장님."


느닷없는 돌발상황에 발할라 대원들은 공격을 멈추고 슬쩍 레오나를 돌아봤다. 델타의 병력이 일제히 공격을 멈추었다. 마리오네트뿐만 아니라 AGS에 자동포탑까지도. 무슨 함정이 아닌지 의심하기를 잠시, 마리오네트들이 하나둘 무기를 손에서 떨어뜨리자 오르카의 대원들은 슬쩍 엄폐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항복...인 걸까요?"


홍련이 물었다.


"마리오네트가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건 불가능해. 델타가 순순히 항복할 성격도 아니고... 사령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든 레오나는 더는 반응하지 않게 된 마리오네트들 사이를 지나쳐 부대를 진군시켰다.


***


미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과 얼굴을 몇 번 번갈아보다가, 손을 맞잡아 일어섰다.


"미호, 너... 어떻게 말을...?"


"응? 내가 말하는 게 뭐 어쨌다고-"


순간 미호는 놀란듯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 그리고선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나 드디어 말할 수 있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미호의 등을 조심스레 감싸안았다.


"그래... 나도 들려..."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겠군."


바르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스호른도. 미호는 포옹을 풀고 그들을 돌아봤다.


"그... 이제 다 끝난건가? ...이제 어쩌지?"


"집에 가야지. 우리 모두 다."


나스호른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 말에 미호가 생긋 웃으며 대답해줬다.


"쟤도?"


나스호른이 그리 말하며 가리킨 건 테일러 리스트컷이었다.


*


테일러는 델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정말로 숨이 멎은건지 맥을 짚을 필요도 없었다. 죽어서도 감기지 못한 델타의 눈이 더는 빛을 반사하지 못하고 동공이 풀린 게 보였으니까. 100여년간 자매들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만큼 사람이 죽은건지 아닌지는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신은 더 끔찍한 꼴로 죽었어야 했어."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지 못했다는 사실보다도, 지은 죄질에 비해 너무 편하게 갔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시체에다 침을 뱉는다거나 발길질을 하고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제와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죽은 델타보다 중요한 건, 테일러에겐 죽여야 할 대상이 하나 더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 그녀는 수없이 많은 자매들을 희생시킨 자신을 혐오했고, 용서할 수가 없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 자살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한숨을 내쉰 그녀는 몸을 돌려 두번째 인간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찌저찌 살아남았네. 축하해. 델타가 죽었으니 그녀 휘하의 모든 병력이 정지됐을 거야.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수가 없는 하이브 마인드 시스템의 가장 큰 결점이지. 이제 당신들을 막아서는 건 없으니까 그냥 나가면 돼. 설마 길안내가 필요한 건 아니지?"


"뭘 남일같이 얘기하고 있어, 너도 같이 가야지."


"...하, 하하... 나를? 델타의 부관이자 고문관인, 100여년간 자매들을 살해한 악녀인 이 나를? 내가 좀 도와줬다고 당신 편인 것처럼 보여?"


"이제와서 그런 말 해봤자 설득력 없는 거 알지?"


두번째 인간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테일라는 무심코 자신의 목으로 손을 "그만 긁어." 가져다대려다 멈칫했다. 갈 곳 잃은 손은 뻘쭘하게 손가락을 오므렸다.


"흐음, 혹시... 이 노처녀 몸뚱아리에 흥미라도 있어서 그래? 별로 만족시켜주지 못할텐데."


"테일러야, 자꾸 그러면 명령권 써서 끌고가는 수가 있다?"


저 완고한 태도에 뭐라 말하든 소용없을 거라는 걸 느낀 테일러는 이마를 짚었다.


"휴우. 좋아, 마음대로 해. 이제 할 것도 없으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다."


바르그가 입을 열자 테일러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스콜과 하티는 어디에 보관되어있지?"


"스코... 뭐?"


"내 대검 두 자루 말이다."


"...아."


테일러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길안내가 필요하긴 했었네."


*


오드리 마리오네트들의 눈을 감겨주고, 바르그의 원래 무기를 되찾고 난 뒤 드디어 문리버 본사 건물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발할라와 몽구스 팀 대원들이었다.


"어?"


"아...!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왜 그 스파이랑 같이... 거기다 옆에는... 아머드 메이든의 나스호른 대장?"


홍련은 나를 보고 안심이 된 듯 반색했고, 한편 레오나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더이상 너희들과 싸울 생각 없으니 안심해라."


"어, 그쪽은... 발할라의... 레오나 대장이던가? 음. 처음뵙겠습니다."


나랑 같이 있던 애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본 레오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모네이드 델타는?"


"죽었어. 지하에 시체가 남아있으니 가서 확인해보던가."


테일러가 대신 대답해줬다.


"그렇습니까... 결국 저희는 한 게 아무것도 없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댁들이 밖에서 델타의 병력을 붙잡아둔 덕분에 우리쪽에 좀 여유가 생겼었거거든."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그나저나 거기 미호도... 행방이 묘연해서 걱정했는데, 당신과 같이 있었던 거군요."


"안녕, 엄마!"


미호가 손을 흔들자 레오나와 홍련의 동공이 지진난것처럼 급격히 떨렸다. 미호가 머쓱하게 뺨을 긁었다.


"아차, 우리 엄마 아니지... 죄송해요."


"잠... 아니... 무슨... 어떻게...!?"


"저기, 묻고싶은 게 많은 건 알겠는데 나중으로 좀 미루면 안될까?"


"예? 아, 예. 물론입니다. 지금 사령관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곧 공군 분들이 올테니, 그분들과 함께 먼저 돌아가시면 됩니다."


"고마워. 여기서 오르카호까지 어떻게 가야하나... 걱정했는... 데..."


억지로 붙잡고있던 긴장감을 놔버린 탓인지 갑자기 수마가 덮쳐왔다. 눈이 제멋대로 감기려 들었다.


"자도 괜찮아."


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계속 곁에 있어줄게."


거기서 의식이 끊겼다.


*


미호는 두 손으로 두번째 인간을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저격총을 어깨에 맨 발키리가 다가갔다.


"제가 들겠습니다. 지치셨을 테니..."


"아니, 괜찮아. 더 들고있게 해줘."


드디어 다시 만났으니까. 그렇게 말한 미호의 눈에는 아련함이 잔뜩 담겨져있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따듯하고 푹신한 침대 위였다. 병실을 연상케 하는 하얀 방과 환자용 침대, 내 팔에 꽃혀있는 링거... 익숙한 천장이군.


상체를 일으킨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을 더듬으려던 찰나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놨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앙증맞은 손가락이 내 뺨을 콕 찔렀다.



"바보 발견!"


미호의 표정은 긴 겨울 끝에 찾아온 봄처럼 활짝 펴져있었다.



사실 나는 이 편을 쓰기위해 이 소설을 시작했다

슬슬 엔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