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어.


멸망을 겪고도 살아남으며 체득한 파프니르의 지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반짝이면서도 예쁘고 귀중한 무언가를 보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었다. 숨어든 발전소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금빛 너트. 희미한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그 자태를 보고, 마치 까마귀의 도벽처럼 자연스레 주워챙겼다. 여제 아줌마는 온갖 생고생을 해도 몸에 걸치고 있는 장신구 한 조각도 넘겨주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스스로에게라도 이 고된 임무의 보상을 주도록 하자. 그렇게 시작된 수집이었다. 


그리고, 멸망을 거치며 그토록 위세등등하던 여제 아줌마와, 그녀가 무너뜨리겠다고 아득바득 이를 갈던 거대한 앙헬 리오보로스의 제국이, 하루아침에 눈앞에서 무너지는 꼴을 보았다.


듣기로는, 앙헬은 세상 인간 모두가 천천히 잠에 빠져 무력하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축적한 부를 맘껏 누리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까지 후회 없이 살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 무덤에는 그가 그렇게까지 흥청망청 썼음에도 다 소모하지 못한 재보들이 마치 조약돌처럼 굴러다닌다고 한다.


여제 아줌마의 최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임종의 순간까지 지킨 건 아니더라도 기면증이 점점 심해지던 시기에 부리는 히스테리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 주위에는 그녀의 남편이자 리오보로스 가문의 적자인 후안 리오보로스의 정통성을 이용하려는 모리배들과, 앙헬의 눈 밖에 나서 그 밑에서 출세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박쥐 무리들밖에 없었다. 그렇게 거짓 충성을 맹세한 심복들이 하나둘 잠에 취해 나가떨어지기 시작하자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안위따윈 그들에게 알 바가 아니었고, 개미 떼들이 흩어지고 남은 건 한때 여제를 자칭했던 시기가 무색할 정도로 비루하고 초라한 옥좌 뿐이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브레슬릿도, 파프니르가 항상 눈독들이던 다이아몬드 펜던트도 팔아치웠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몸에 남아있던 악세사리는 순금조차도 아닌 결혼반지 뿐이었다. 그 꼴까지 전락하고도 복수의 끈은 놓치 못하고, 앙헬을 찾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서야 눈을 감았다. 이미 모두가 평등하게 죽어가고 있었음에도.


파프니르는 여제 아줌마가 싫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까지 보였던 추레한 꼴이 더더욱 싫었다.


그 날부터, 파프니르의 기호일 뿐이였던 보물에 대한 집착은 신념 비슷한 무언가로 탈바꿈했다.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어.


이를테면...


멸망 전엔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던 사냥개들을, 마치 여제 아줌마가 그랬던 것처럼 턱짓 한 번으로 부려먹는 거라던가.


"음, 쓸만하네~ 이런 솜씨는 또 어디서 배웠대?"

"..."


포크 끝으로 자른 치즈케이크를 입 안으로 가져간 파프니르는 만족스런 콧노래를 흘리며 나름대로 장화를 칭찬했다. 듣던 장화의 눈은 아니꼽게 희번덕해졌지만, 프로답게 억지로 안면 근육에 힘을 줘서 무마했다. 볼가를 타고 흐르는 경련이 서린, 아슬아슬한 미소. 파프니르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 작은 만찬을 만끽하고 있었다. 손님만 아니었으면 이걸... 장화의 눈초리가 위아래로 음료를 한 모금 머금는 파프니르를 훑었다.


"쪼롭, 움... 라떼는 좀 별로네. 너무 쓰다."


덜컹!


파프니르의 푸념을 들었는지, 주방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방금 그 생각 없는 한 마디로 사냥개들 중에서 그나마 유할 천아까지 적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장화와 바르그는 진작에 적개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야...


"너! 내 것이 돼라!"


지금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대뜸 나타나서는 한다는 말이 사령관을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인데, 여기 대체 누가 그녀에게 감정이 좋을 수 있을까? 여기가 카페이고, 사냥개들이 종업원만 아니었으면, 멸망 전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방식으로 훈계가 일어났을 게 뻔했다.


"음, 그럭저럭 잘 먹었네. 처음에 코스튬 봤을 때는 무슨 본방 되는 테마 카페 같은 건 줄 알았는데... 퀄리티는 제법인데?"


달그락.


파프니르가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화는 속에서 올라오는 빡침을 삭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 얄미운 꼬라지를 더 참아주지 않아도 될 모양이었다. 파프니르는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향했고, 가격도 듣지 않고 작은 골드 바를 꺼내 계산대 위에 턱. 하고 내려놓았다.


"잔돈은 됐어."


온몸에 금전적인 여유가 넘치는, 그야말로 졸부가 아니면 하지 않을 행동거지였다.


그대로 훌훌 털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 파프니르를, 싹 굳은 표정의 천아가 막아세웠다.


"...손님."

"어, 왜?"

"저희는 참치캔만 받아요."

"하! 그런 게 뭐가 좋다고... 이게 훨씬 값진 건데?"


그렇게 선심 쓰듯 파프니르는 손을 한 번 털고 문을 나서려 했다. 그 뒤로, 천아의 비수 같은 말이 꽂혔다.


"야."

"..."


분위기가... 바뀌었다.


파프니르는 조금 전과 달리 여유 있는 태도가 살짝 가신 채로 다시 돌아보았다.


"...왜?"


아직까진 손님의 입장이었기에, 내려다보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아는 그 인식부터 뜯어고쳐야 할 필요를 느꼈다. 파프니르가 삯이라고 지불한 골드바를 집어들고 카운터에서 나온 천아는 천천히 한 걸음씩 파프니르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파프니르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시선을 맞췄다.


무표정에 가까운 아미에 깊게 드리워진 그늘. 파프니르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천아는 더더욱 몸을 기울이며 파프니르의 공간을 잡아먹었고, 잔뜩 움츠러든 파프니르의 귓전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때려넣었다. 


"이딴 건 저기서 걸레질 하고 있는 똥강아지 몸무게 만큼 가져와도 커피 한 잔 값 못 낸다고."


덜그럭.


카페 호라이즌의 마루에, 무겁고 육중한 소리와 함께 금괴가 떨어졌다.


"...뭐라?"


탈그락!


체중 이슈에 어그로가 끌린 바르그가 대걸레를 팽개치고 다가왔다. 장화는 이젠 숨길 필요도 없는 경멸을 드러내며, 바르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 년이 쳐먹은 거 돈 못 내겠다는데?"

"도, 돈은 여기 냈잖아!"

"뭐? ...금괴? 허. 설마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돌쪼가리로 커피 값 내려고 한 거냐? 요즘이야 뭐... 어떤 할 짓 없는 멍청이가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어서 시세가 형성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르카 안에서는 아니지. 거래량도 한참 부족하고. 참치캔은?"

"어, 없... 는데..."

"허."


바르그의 입가에서 어이 없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장화가 쏘아붙였다.


"누굴 호구로 알고... 이 도마뱀 년아. 딴 데는 몰라도 여기서 먹튀할 생각이었으면 잘못 골랐어. 시켜놓은 거 아가리로 다 쑤셔넣어 놓고 돈 없다고 하면 다냐?"

"아, 아니야! 참... 참치캔 그깟 거 내가 그거 바꿔 와서 내면 되잖아! 조, 조금만 기다리면 내 배로 가서 갖고 올 거니까!"

"니 배는 어딨는데?"

"그, 그... 지금은 유럽 쪽에서 금괴 매입 중이라..."

"거의 지구 반대편이네."

"..."


천아의 쐐기에 파프니르의 말문이 막혔다. "하... 또 옛날 성깔 나오게 하네." 작게 씹어뱉는 혼잣말. 고개를 숙이고 후들후들 떠는 파프니르의 턱을 붙잡아 올리고, 천아는 마치 먹이를 삼키기 전의 뱀처럼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딸꾹."


파프니르의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볼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장화는 움찔거리는 꼬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야, 이거라도 떼서 팔까? 하 씨발... 근데 이거 누가 받아주긴 하냐?"

"주, 주피터는 안 돼!"

"뭐야, 이거 떼기 싫으면 장기라도 팔래? 돈 없으면 몸으로라도 떼워야지? 야, 바가지! 잠깐 그 존나게 큰 칼 좀 줘봐! 이거 꼬리 확 잘라버리게!"

"꺄아아악! 하지 마! 싫어!"

"습, 가만히 있어! 이거 엄청 무겁거든, 그러다가 크게 다친다?"

"그만."


바르그의 착 가라앉은 호령이 실랑이하는 둘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파프니르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래, 지불할 현물이 없으면 몸이라도 써야지."


바르그는 파프니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벗어라."



**



"네, 손님~ 카페 호라이즌 분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문은 여기 카운터에서 하시면 되고, 테이블에서 기다리시면 곧 서빙해드리겠습니다~"


천아의 살가운 접객에 안내받으며 사령관은 창가 자리로 앉았다. 이어서 메뉴판을 건네준 장화가 설명을 넘겨받았다.


"저, 진동 벨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인님. 공유 내선망 비밀번호는 여기 메뉴판에 있고요, 전자 기기 충전은 저 쪽을 이용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충전?"


처음 듣는 서비스에 사령관의 시선이 장화가 안내하려 가리킨 팔을 따라 움직였다. 그 끝에는...


"우, 우으..."


카페 호라이즌 유니폼을 입고, 울상이 된 채로 주피터에 주렁주렁 전자기기 커넥터를 달고 있는 파프니르가 있었다.


파프니르는 울음 섞인 한숨을 쉬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벗어라."

"히익?! 싫어! 수, 순결만큼은 내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아이 씹, 징그럽게... 누가 그딴 거 필요하다 했어?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라고!"

"아, 아하..."

"너, 요리 할 줄 알아?"

"아, 아니..."

"서빙 해 본 경험은?"

"없, 없는데..."

"청소는 잘 하나?"

"그, 그닥..."

"할 줄 아는 게 뭐야?!"

"..."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회상과 함께, 파프니르의 한숨은 더더욱 깊어졌다.


"하아아..."

"뭐, 불만있나?"


'주피터는 이러라고 있는게 아니야!' 라고 항의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희번덕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바르그에게 압도되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꼬리를 내리면 충전이 잘 되지 않아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아, 아니... 요..."


그저 눈물을 머금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경이 되고 나니, 파프니르의 머릿속에 다시금 그녀의 지론이 떠올랐다.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어.


...하지만 파프니르는 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