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앤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 LRL이 반겨 주었다. 같이 놀자는 것이었다. 리앤도 싫어하는 법 없이 웃으며 LRL을 따라갔다.


LRL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다들 리앤을 좋아했다.


"리앤- 나랑 같이 게임할래? 오늘 탐사에서 철권 71가져왔어-"


"숙제 좀 도와주면 안될까? 내가 카페테리아 한잔 살테니까."


"리앤-"


리앤은 원래 즐거운 토모라는 특수 개체를 본따서 업그레이드한 존재였다. 통찰력과 지휘력을 겸비한 능력 덕분에 특별히 높은 자리를 맡게 되었지만, 원본인 토모가 가지고 있던 붙임성 좋은 성격 덕분에 일반 대원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공적인 자리에서든 사적인 자리에서든 바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오르카의 토모는 리앤과 달리 별반 특이할 것이 없는 바이오로이드였다. 저렴한 언어 모듈 때문에 바보처럼 인식됐지만, 실상은 그다지 똑똑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은 수수하고 평범한 대원이었다.


그러던 하루는 정찰을 겸한 탐사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토모는 친구 LRL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LRL. 얼굴 보기 힘드네?"


LRL도 반가워했다. "응. 요즘 공부에 취미가 붙었거든. 히힛."


"그래? 대단하네- 맞다. 나 마침 탐사 끝나고 온 건데, 같이 만화책이라도 보지 않을래? 아이스 펀치라는 만화 가지고 왔어."


그런데 LRL은 뜻밖에도 머리를 긁으며 거절했다.


"만화책? 음. 좋기는 한데…… 미안해. 나, 오늘 리앤이 공부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


"아. 그렇구나."


"다음에 볼게. 미안."


"아냐. 공부 안하면 혼나는데 해야지."


토모는 웃으며 선선히 LRL을 보냈다.


탐사에서 만화책을 입수했지만 정작 같이 볼 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저녁을 먹은 토모는 또 다른 친구인 스틸 드라코와 게임이나 한판 할까 해서 몽구스 팀 구역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토모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드라코? 음, 드라코는 벌써 놀러갔는데. 리앤하고 게임 하러 간다고 했어." 누워서 감자칩을 먹고 있던 미호가 말했다.


"그렇구나."


토모는 미호와는 친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오는(사실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토모는 그날은 심심하게 보냈다.


게다가 그 뒤에도 친구들이 리앤과 함께 놀거나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토모는 친구들을 뺏긴 느낌이 들어 내심 섭섭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결국 리앤은 자신보다 훨씬 유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물론 친구들도 리앤을 더 좋아했으면 했지 자신을 좋아할 리 없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런 법이니까. 토모는 마음을 편히 먹으려고 애썼다.


그로부터 시일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토모는 문득 휴게실에 LRL과 드라코가 리앤과 함께 있는 걸 보았다. 리앤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는 모양이었다.


평범한 토모로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문을 슬쩍 열고 셋을 훔쳐 보았다.


"매번 생각히지만 리앤은 정말 잘 가르치는 구나. 헤헤."


"정말 인텔리한 걸. 맘만 같아선 엄마랑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 드라코가 웃었다.


"후후. 나도 그냥 지식 모듈에서 나오는 대로 알려 주는 것뿐이야."


"그래도 알렉산드라 선생보다 더 잘 가르치는 것 같아. 리앤이 가르쳐 주면 왠지 이해가 잘 되거든."


"맞아. 그 여…… 선생은 맨날 때리는 것만 좋아해."


"히.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역시 초천재 미소녀는 어디 가지 않는 법이지."


드라코와 LRL이 까르르 웃었다.


"아하하. 말하는 거 정말 토모랑 비슷해."


"그애는 내 근본이니까."


"음…… 하지만 리앤은 토모보다 훨씬 나은 걸? 공부도 잘 가르쳐 주고, 게임도 잘 하고, 못하는 게 없잖아."


LRL이 무심코 하는 말에, 드라코도 거들었다. "그러게. 토모는 바보니까. 하하하."


그러자 웃음짓던 리앤이 둘을 돌아보며 정색했다.


"너희들, 그 말은 취소해."


"어?"


"친구 보고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친구를 그렇게 흉보면 안 되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야."


돌변한 리앤의 분위기에 둘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 그게……."


"친구는 잘하든 못하든 친구인 거야. 만약에 다른 친구가 너희들을 약하다거나, 공부를 못한다고 흉 보면 기분이 좋겠니?"


두 친구는 눈을 수그렸다.


"…….미안해. 잘못했어. 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도."


그때 토모는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문을 열고 들어설 뻔했다. 문 쪽에서 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향했다.


모두와 눈이 마주친 토모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선실에서 멀어져 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LRL과 드라코는 별안간 불안감을 느꼈다.


"잠깐만!"


급히 불러세우려고 했지만 토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뭐라고 해도 스파이 바이오로이드인 만큼 신체 능력은 뛰어난 그녀인 것이다.


손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리앤이 한숨을 쉬었다.


"낮 말은 쥐가 듣고 밤 말은 새가 들어. 누군가를 험담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친구라면 더더욱 말이야."


"미안해."


"나한테 사과하는 게 아니야. 토모한테 사과해. 내겐 뭐라고 해도 좋지만 친구를 욕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응."


드라코와 LRL은 리앤과 함께 얼른 토모를 뒤따랐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토모의 종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르카호는 아직도 미건설된 부분이 있을 정도로 광대한 배였기 때문이다.


단말기로 메시지를 보내도 응답이 없었다. 메시지와 채팅을 좋아하는 그녀가 계속 답하지 않는 것을 보면 꽤 상심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이때 토모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슬퍼진 나머지 오르카호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안 그래도 요사이 리앤한테 친구들을 빼앗긴 것 같아 서러웠던 판에, 아예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무척 슬펐다.


고개를 숙이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중 문득 그녀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토모. 웬일이에요? 애들이랑 안 다니고 혼자 다니게."


눈을 들어보니 바로 토모의 동료 겸 상관인 시라유리였다. 그녀는 에이미 레이저와 더불어 080기관의 최상급 첩보원이었다.


토모는 힘없이 말했다.


"아니, 그냥. 애들이 나는 필요없는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죠."


시라유리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물었다. 평소에 토모에게 이것저것 시키는 입장이었지만, 역시 팀원이라는 의식 때문에 가만 내버려두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토모는 주저하다가, 시라유리에게 마음 속 고민과 오늘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시라유리가 한숨을 쉬었다.


"뭘 그렇게 실망을 해요. 평소에 다들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게 당신네 그룹 아니에요?"


"하지만, 모두들 내가 없어도 되는 것 같으니까. 요즘 들어서 더……."


토모는 평소와 다르게 말을 틀리게 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한동안 해줄 말을 떠올리지 못했던 시라유리는 문득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앤 때문인 거죠?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어서 시라유리가 하는 말을 듣고 토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될까? 난 평범한 대원인데."


"아이. 사령관님은 대원들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분인 거 알잖아요. 토모 양의 마음 고생을 알면 반드시 도와주실 거라고요."


그렇게 말한 시라유리는 토모의 손을 잡고 사령관에게 향했다.


토모는 반신반의 하면서 시라유리를 따라갔다.


사실, 시라유리는 내심 리앤에게 경쟁자 의식이 있었다. 시라유리는 일전에 스파이 행위를 하다가 리앤에게 잡힌 적이 있어서, 그때부터 일방적으로 경쟁 의식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사령관이 토모에게 관심을 쏟게 할 생각이었다. 리앤에게 작은 복수도 하고, 겸사겸사 자신도 점수를 쌓고.


가던 중에 토모가 물었다.


"참. 그런데 약속도 안 잡고 만나자고 하면 만나줄까? 사령관은 바쁠텐데."


"걱정 마세요. 제겐 커넥션이 있으니까요. 마침 오늘은 시간이 비신다고 하고."


시라유리는 비밀리에 내통하는 경호실과의 커넥션으로, 사령관의 여가 시간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이내 사령관에게 방문 허락을 받은 시라유리는 냉큼 토모를 데리고 왔다.


사령관의 근처에 있던 컴패니언 경호원이 시라유리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컴패니언 자매들의 리더는, 또다른 첩보원 '에이미 레이저'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시라유리와 커넥션을 쌓아 둔 것이었다.


"오랜만이야, 토모."


"으응."


사령관은 반가워 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서로 인사를 마치자 사령관이 물었다.


"토모, 무슨 일이길래 그래. 말해 봐."


토모는 얼른 말하지 못했다. 친구들을 험담하는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시라유리가 나섰다. 경쟁자인 리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친구를 잘 챙긴다는 이미지를 쌓는 게 중요한 그녀였다.


"실은……."


시라유리가 말한 토모의 고민을 듣고, 사령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으음. 친구들이 토모를 따돌리는 것 같다니. 그건 심각한데."


"따, 따돌리는 게 아니라…… 리앤을 다들 더 좋아하니까. 나보다 더 똑똑하고, 뛰어나고 그러니까…… 다들 좋아하는 거겠지만."


침묵하던 사령관은 잠시 뒤에 말했다.


"토모는 리앤이 부럽니?"


"……하나도 부럽다면 거짓말이지."


말을 이상하게 하는 토모답게 '하나도 안 부럽다면'이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사령관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토모는 애들이 널 떠나거나, 스스로가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


토모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묵묵히 있던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내겐 토모가 필요하니까."


토모가 놀라서 얼굴을 들고 바라보았다. 사령관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토모 역시 080부대의 소중한 일원이야. 토모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간 토모가 세운 공도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니까."


시라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럼요. 제가 없었을 때 080부대의 많은 일들을 도맡아서 했으니까. 지금도 많이 도와 주고 있고요."


사령관은 웃으며 토모가 해 온 일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듣고 있던 토모는 쑥스러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내심 사령관이 자신 같은 것의 공로도 기억해 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토모도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든. 리앤하고 다른 맛이 있다고나 할까." 사령관이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었다.


토모가 얼굴을 붉히며 몸둘 바를 몰라 하는데, 정작 옆에서 듣고 있던 시라유리가 웃음을 지으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흐음. 맛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뭐…… 일테면 몸매나 가슴은 리앤이 더 좋지만, 얼굴은 토모랑 시라유리가 귀엽다던지."


토모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리앤보다 더?"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리앤은 토모가 나이를 먹은 모습이잖아. 그러니까 조금 매력이 다르다고나 할까…… 잠깐, 시라유리. 뭘 웃으며 적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훗." 시라유리는 그러면서도 단말기를 타이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령관의 취향이라는 소중한 정보를 얻으니 기쁜 것이다.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토모의 어깨를 짚었다.


"아무튼, 친구들도 토모가 싫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거야. 너무 걱정하진 마."


"응."


"그리고 리앤과는 서로 맡은 분야가 다른 거니까, 토모도 리앤한테 너무 열등감을 느낄 필요 없단다. 리앤은 현장 지휘관 겸 조사와 정찰을 맡는 거고, 토모는 첩보부니까 말이지."


"그럴까."


"애들도 리앤하고 놀다가 질리거나, 리앤이 바쁘면 토모와 다시 어울리겠지. 친구잖아? 오랫동안 지낸 친구인데 토모를 그렇게 싫다고 하진 않을 거야. 게다가…… 토모에게는 그애들 말고도 시라유리도 친구고, 나라는 친구도 있잖니."


사령관의 설득을 듣고 토모는 그제야 조금 안색이 밝아졌다.


사령관은 미소 띤 얼굴로 토모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나랑 같이 놀까? 오랜만인데. 시라유리는 어때."


"앗, 정말?"


"저도 그래도 되나요?"


"어차피, 나도 언제 한번 시라유리든 토모든 같이 놀 생각이었으니까."


토모는 물론 시라유리도 기뻐서 입을 벌리는 때였다.


문득 사령관의 단말기가 울렸다. 받아 보니 리앤이 접견 요청을 해 온 것이었다.


사령관은 머리를 긁었지만, 거부하기도 뭣해서 들어오라고 하였다. 리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토모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시라유리도 얼굴이 굳었다.


이윽고 리앤이 들어오는데, 뜻밖에도 LRL과 드라코가 따라온 채였다. 사실 그들은 토모를 만나러 헤매다가, 토모가 사령관하고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두 친구들은 머쓱해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사령관의 무언의 눈치를 받자 용기를 내어 말했다.


"미안해, 토모…… 내가 말을 함부로 했어."


"바보는 토모가 아니라 나였어. 자리에 없다고 말을 함부로 하다니."


"응? 아, 아니야. 친구 사이에 그럴 수 없는 거지, 뭐."


"어?"


시라유리가 풉 하고 웃었다.


"'친구끼리는 그럴 수 있는' 거겠죠, 토모."


"마, 맞아.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헛나와서."


사령관도 빙그레 웃었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토모는 차라리 언어 모듈을 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해."


그 말에는 리앤과 시라유리 모두 동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코와 LRL은 미안한 얼굴로 토모에게 다가왔다.


"아무튼 미안해. 우리가 토모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야."


토모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우린 언제나 친구니까. 예전이든 지금이든, 앞으로든. 그렇지?"


"응. 맞아."


토모가 방긋 웃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토모에겐 그런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령관도 시라유리와 리앤과 함께 흐뭇한 얼굴로 그녀들을 지켜보았다.


이때, 리앤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자. 그럼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볼까."


"가려고? 리앤도 같이 노는 거 어때."


"됐어. 내가 그런 눈치도 없는 줄 알고."


눈치 없는 드라코가 얼른 반색했다.


"정말? 그럼 나도 사령관하고 같이 데ㅇ…… 윽."


리앤이 얼른 드라코의 옆구리를 쳤다. 그녀는 토모 등을 방해하지 않도록 LRL과 드라코를 데리고 함장실을 빠져나갔다.


뭐 하고 놀까? 어디부터 갈까? 사령관과 나가는 길에 토모는 들뜬 마음으로 시라유리와 재잘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워낙 붙임성 좋은 토모답게 친구가 적은 시라유리와도 잘 어울리는 것이다. 첩보원으로서 속이 시커먼 시라유리도 이때만은 진심으로 즐거워 하는 모양이었다.


두 첩보원 소녀를 바라보던 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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