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에휴... 원래 길이로 자라려면 몇 년이나 걸리려나..."


한 손에 손거울을 든 미호가 다른 한 손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보란듯이 한숨을 쉬었다.


"발모제랑 영양제랑... 으으, 돈 엄청 깨지겠네. 여긴 우리 엄마도 없어서 용돈도 못빌리는데. 붙임머리라도 알아봐야 하나?"


"그...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단발도 잘 어울려."


"뻥 치시네! 맨날 구미호 스킨 입혀놓고 부관으로 세워놨으면서!"


"뭐!?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난 이 폰에 깔려있는 라스트오리진의 미호니까."


돌려줄게. 미호는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내 원래 스마트폰을 꺼내 건네줬다. 나는 멍청하게 침묵하다가 잠시후 폰을 건네받았다.


"...진짜로?"


"진짜진짜로. 강화랑 코어링크도 최대치까지 찍고, 장비도 빵빵하게 채워넣고, 서약도 했지만 내 원래이름이 예쁘다고 바꾸지 않고 남겨둔 그 미호야. 뭐, 반지랑 내 전장인 총은 들고오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게 널 만나기 위한 통행료였을지도 모르겠네."


미호는 허전한 제 손등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거지?"


"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일단 우리 처음 만났던 그 날 기억나?"


"...1-8에 던져놨던 통발 회수했을 때?"


"으이구, 그쪽 말고! 여기있는 마리오네트인 나랑 만났을 때 말이야!"


나는 그 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스발바르 제도 한복판에 떨어져서 길을 헤매다가 마리오네트가 떼로 죽어있는 걸 발견했었다. 그 사이에 있던 마리오네트 미호한테 다가가서 건드렸다가 미호가 깨어났고,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만...


"그 폰을 내 몸 위에 떨어뜨렸지. 그게 시작이었어."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라오 앱이 깔려있는 그 폰과, 이 마리오네트의 몸이 접촉한 그 순간부터 내가, 말하자면 내 영혼이나 인격 뭐 그런게 이 몸으로 전송되기 시작했었어. 다른 애들 말고 내가 올 수 있는 이유는 이 육체가 미호 모델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몸이라서 그런거고."


"그럼 지금은... 마리오네트 미호의 몸에 빙의한 상태라는 거야?"


"비슷하기는 한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 마리오네트의 인격을 덮어쓴 건 아니야. 융화된거지. 마리오네트 저격병으로서의 기억도 남아있어. 기억의 방주 쳐들어가려다가 글라시아스한테 날려져버린 것도 기억나는걸."


아프더라, 눈보라 그거. 미호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되면... 바이오로이드 누구든 내 폰을 만지기만 한다면 내 폰안에 있는 같은 모델인 애가 빙의된다는 건가?"


"그건 아닐걸. 이쪽 세계의 닥터가 그 폰 검사한다고 만졌는데도 아무 일도 안일어났잖아? 이 마리오네트 육체에 내 영혼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마리오네트가 무슨 영혼 없는 빈 그릇같은 존재라서 가능했던 거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서 겨우 가능했던..."


나는 잠시 침묵했다.


"기적이네..."


"기적이지. 응."


"그런데 내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은 그게 아니거든. 그 뭐냐, 이런 말 해도 되는건지 모르겠는데... 라오는, 그냥 게임... 아니야?"


"게임 맞아. 네가 원래 세계에 있었을 때의 미호라는 캐릭터는 그냥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쪼가리였지. 근데 네 폰이 너랑 같이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서 난 데이터랑 영혼 중간쯤의 무언가가 됐고, 이 마리오네트의 몸에 안착함으로서 영혼이 형성되고 데이터는 기억과 인격으로 변환된거지."


"그...래?"


"아마도? 나도 영혼이니 뭐니 그런걸 확실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냥 당사자 입장에서 느낀 바로는 그래. 내가 미호로서 자의식이 확고해진 건 이미 이 몸에 자리잡은 뒤였거든."


데이터와 영혼의 중간쯤 되는 상태라. 여기 온 뒤로 라오 앱이 정상적으로 켜지지 않던 것도 그게 이유였었나.


"그러고보니 왜이리 오래 걸린거야? 그 뭐냐, 더 일찍 정신 차리고 말하기 시작했으면 좋았잖아."


"이씨, 나라고 좋아서 늦은건줄 알아? 너는 원래부터 영혼이 깃든 사람이니까 그냥 건너오면 되지만 난 데이터에서 영혼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단 말이야."


미호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문득 뭔가가 생각난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와서 갑자기 생각난건데, 우리 여기서 이런 얘기 해도 되는건가? 라오라던가, 빙의라던가..."


"수복실엔 도청기도 도청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괜찮아. 내가 다 확인했어. 그나저나..."


미호는 허리를 숙여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 왜?"


"이제는 사령관이라고 못부르겠네. 여기 사령관은 따로 있으니까. 난 따로 사령관 부르는 애칭이 있는 캐릭터도 아니었고."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


"그래도 되긴 하는데~ 음. 우리 서로 좋아하는 거 맞지?"


"...그렇지? 그건 왜?"


"그럼 자기라고 부르면 되겠다. 자기야~"


미호가 베시시 웃으며 날 부르는 그 모습은 상당히... 심장에 안좋았다. 입꼬리가 멋대로 씰룩씰룩 올라갔다.


"크흡...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하는구나..."


"히히, 볼 빨개진 거 봐. 귀엽다. 아님 구미호 스킨 입었을 때 처럼 서방님~ 하고 불러줄까?"


"그건, 다음에..."


"다음 언제?"


"이쪽의 네 손에 반지 끼워주고 난 뒤에."


이번엔 미호의 얼굴이 펑 하고 달아올랐다.


"다... 다시 줄거야? 반지...?"


"내가 염원하던 여친이 눈앞에 있는데, 당연하지. 뭐, 지금은 돈이 없지만 무리지만... 내가 오르카호에서 월급받는 몸이 아니여서."


"괜찮아. 얼마든지 기다릴게. 기다리는 건 익숙하니까..."


미호가 말을 끝마치고 우린 잠시동안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미호, 안에 계십니까?"


노크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미호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려는건지 손부채질을 하고선 들어오라고 했다.


"미호. 당신은 아직 움직이면- 아! 일어나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여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홍련과 장화였다. 솔직히 썩 달갑지는 않은 얼굴들이었다. 


"뭐야, 둘이 무슨 일이야?"


"사실은 미호를 찾아왔습니다. 병상에 누워있어야 하는데 안보이길래 여기 와있나 싶어서 와봤더니..."


"...? 잠깐, 너 다쳤어?"


"델타랑 싸우면서 총알세례를 받기는 했지."


"중상이잖아! 여긴 왜 온거야!?"


"왜긴, 너 보려고 왔지! 너 잠자는 내내 간병해준 게 누군데, 불만이야?"


"아니 그건, 불만이라는 게 아니고... 걱정되니까 그런거지."


"걱정 안해도 돼. 몸에 박힌 총알도 다 제거했고, 흉 지지도 않을거라더라. 애초에 철충이랑 싸우는 게 일상다반사인데, 총 맞는 건 익숙하다고."


"그게 익숙해지면 안되지..."


게임에서 데미지 입고 HP가 깎이는 거랑 실제로 총 맞는 건 천지차이잖아. 델타가 나한테 총을 겨눈 순간을 떠올리고, 그런 공포가 익숙해진다는 상상을 하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그렇네. 익숙해지면 안되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줘. 표정 펴, 응?"


걱정스런 얼굴을 한 미호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문질렀다. 손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 굉장히 자연스럽게 말하네... 이제 말하기 시작한 것 치고는..."


장화가 어색하게 운을 띄우자 미호가 손을 떼고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말하기 시작한 건 아니지? 난 원래부터 말할 수 알았어."


"아니, 너 마리오네트였잖아... 애초에 어떻게 이 모든 변화가 가능했던 거야? 다른 마리오네트도 너처럼 변할 수 있는거야 그럼?"


"음, 그건 아닐걸? 나만 가능한거지. 어떻게 이게 가능했던 거냐면~"


미호는 날 돌아보면서 싱긋 웃었다.


"우리 자기랑 전생에 연인이었으니까, 랄까?"


장화는 그게 말이 되냐며 눈썹을 치켜올린 반면, 홍련은 따듯한 눈으로 미호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다시 만나게 되서 기쁘겠어요. 미호."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너흰 왜 미호를 찾아왔던 거야?"


"이전에 저희가 했던 말에 대해 사죄드리려고 왔습니다. 당신과, 거기있는 미호에게... 못할 말을 했던 것에 대해서요. 저는 기적을 믿지 못했었는데...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군요."


"아... 그렇지. 나도 정말로 꿈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기쁘지?"


"기쁘고말고. 너는?"


"엄~청 기뻐. 히히."


내가 라오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첫 번째 기적에 이어 경험한 두 번째 기적. 한 번도 일어났으니 두 번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됐다.


"그... 그 때는 인형 취급해서, 미안했어. 거기있는 너도. 의심하고 죽이려고 해서... 미안해."


장화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겨우 시선을 마주하고는 어색하게 사과를 건넸다. 


"사과한다는 건, 나를 마리오네트가 아닌 '미호'로 보게 됐다는 거지?"


"...응."


비록 이쪽 몽구스 팀 소속은 아니지만 '미호'로, 가족으로 인지하게 된 그녀가 나름대로 반성하고 사과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를 받아줘서 고마줘, 장화.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응..."


장화는 미호가 쭉 뻗은 손바닥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당신은 이제 어쩌실 건가요? 저희 몽구스 팀으로 들어오실 의향이 있나요?"


"미안하지만 아직 내 원래 가족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건 좀 생각해봐야 겠는걸요."


"당신의 가족이라면, 당신이 속해있던 몽구스 팀...? 그것도 전생의 기억인가요?"


"히히, 믿기 힘든 얘기죠?"


"믿어요. 이미 기적을 직접 봤으니까."


홍련은 이번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푹 쉬세요."


"아, 가기 전에 잠깐만. 나랑 같이 왔던 다른 애들은 어디있어?"


"그분들은 각각 다른 수복실에 입원해있습니다만, 불러드릴까요?"


"아니. 내가 찾아가려고."


비록 하루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생사를 같이 넘나든 사이인데, 이제 정신도 차렸으니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야지. 아픈 애들을 오라가라 할 수도 없고, 애초에 나는 별로 다친것도 없어서 밴드만 좀 붙인 정도니까. 


나는 이불을 치우고 병상에서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난 패스. 허세부리긴 했지만 역시 좀 아파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는 힘들고, 그냥 누워있어야겠어."


미호는 그리 말하며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 슬그머니 들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 뜨시다~"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금방 돌아올게. 뭐 필요한 거 있어?"


"글쎄~ 울 자기는 어떤데?"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킥킥, 네가 어디를 가는 나는 있을걸. 그러면 우리 둘이 퇴원하면 방에 있는 침대 새로 맞추자?"


두 개 떨어진 거 말고 큰 거 하나로. 미호가 씩 웃으면서 꺼낸 말에 머리에 열이 확 올라 도망치듯 방을 삐져나왔다. 뒤에서 여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청춘이군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홍련의 훈훈한 시선도 견디기가 힘들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


"대장님 보러 오셨슴까?"


나스호른이 누워있다는 수복실에 방문하자 반겨준 건 블러디팬서였다.


"나스호른은?"


"여기있슴다. 병원밥 3인분을 해치우고 폭면중이시지 말임다."


그 말대로 팬서 옆을 보면 수복실 침대에 누워 코까지 골며 자고있는 나스호른이 있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대장님 깨워드립니까?"


"아니, 됐어. 그냥 무사한가 얼굴이나 보러 온 거 뿐이니까, 자게 둬. 그런데 벌써 너네들 '대장'으로 취임한거야?"


"뭐, 사실은 아직이지 말임다. 제가 도착했을땐 이미 자고있어서 말도 못붙이고 있슴다. 거 유럽에서 쇠빠지게 굴렀다고 하니 깨우기도 뭣하고..."


팬서는 나스호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나스호른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져있었다. 방 안에는 나스호른 코고는 소리만 감돌았다.


"음.. 그럼 나스호른이랑 얘기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난 이만 가볼게."


"그러십쇼. 전 좀 더 여기 있을거니까, 대장님 깨어나면 제가 대신 안부 전해드리겠슴다."


***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테일러 리스트컷이 있는 수복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불이 흐트러진 빈 침대와, 환자복 차림으로 창 밖을 쳐다보고 있는 테일러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르카호가 잠수중이라면 창 밖으로 바닷속 풍경이 보였을 때지만, 지금은 정박중이라 쾌창한 하늘만이 보였다.


인기척을 눈치챈 테일러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라, 또 보게되네.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걸까?"


"딱히 용건은 없고... 그냥 건강한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을뿐이야."


"그래?"


테일러는 몸을 완전히 돌려 등을 벽에 기대고 나를 마주했다.


"몸은 좀 어때? 어디 아프거나, 가려운 데는 없어?"


"왜, 건강하다고 하면 덮치게? 아니, 반대려나?"


저 베베꼬인 성격은 아직 나아지질 않았구만.


"글쎄. 넌 끝내주는 미인하긴 하지만 내 첫상대는 이미 정해져있어서, 다음순번을 기다려야 할걸."


"푸핫...! 그래? 그 마리오... 아니, 미호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보네."


"머리가 흰색이든 분홍색이든 미호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


"그래... 그게 정답이지..."


고개를 푹 숙이고 큭큭대던 테일러가 조용해진 게 내심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자매들이 어떤 흉한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한들 안 아픈 손가락이 되지 못했으니까.


"저기, 있잖아."


제 손을, 정확히는 붕대감긴 손목을 내려다보던 테일러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살아야 할까?"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미안. 잊어줘. 이런걸 물어봤자 곤란하기만 할 뿐이겠지."


무슨 대답이 나오든 내 결정에 변함은 없을테고 말이야. 테일러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옆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비춰졌다.


"죽으려고?"


나도 모르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져버렸다. 테일러는 전혀 개의치않았다.


"평생을 델타한테 복수하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그런데 예상못한 때에 홱하고 죽어버리니까, 그냥... 모든 게 허무해지더라고. 어쩌면 내 손으로 복수를 끝마쳤어도 똑같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테일러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해. 결과적으로 복수가 이뤄지기는 했으니까 말이야. 보답으로 한번 대줄까?"


"정말로 보답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것보다는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하... 이것봐. 난 복수를 끝마치고 나면 자매들을 따라 죽을 생각만을 했어.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는데, 이제와서 날 방해해지 말아줄래?"


"네가 죽기를 바랬다면 그 날 지하에 남겨두고 왔을거야."


"그래, 그 날. 왜 그 날 나를 데려가겠다고 한 거야?"


"그래야 맞으니까."


"맞다니, 그게 무슨 말..."


"오드리라도 그렇게 했을거야."


그리고 올리비아도. 테일러도. 너만 빼고 다 그랬을테지.


"...네가 뭘 안다고..."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테일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모르나본데, 난 거의 한 세기동안 자매들을 살해하면서 살아남았어. 델타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내 손에 묻은 자매들의 피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가 않는다고."


언니.


"사실 더 자려고 해도... 눈만 감으면 자매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더리고. 오드리의, 올리비아의, 그리고 나와 같은 테일러까지... 맏언니인 내가 지켜줬어야 하는건데, 그러기는 커녕 고문에 가담했으니... 그 아이들이 나를 얼마나 원망할지 상상이 가?"


언니, 그렇지 않아요.


"더는 내게 미련을 주지 말아줘.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야. 그냥... 델타랑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내버려둬."


언니, 그런 생각 하지마요.


"이것봐, 지금도 환청이 들려. 들릴 리가 없는 오드리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 환청이 아닌 것 같은데."


"...뭐?" 


'드르륵.' 문이 열리고 환자복 차림의 오드리가 들어왔다.


"옆방에서 다 들었어요. 듣자듣자하니 더는 못들어주겠네요 진짜."


"오드리."


테일러가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원작에서 델타는 지금으로부터 한 1년 뒤에 죽을 운명이었지만, 이번에 내가 개입된 사건으로 인해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죽게 되었다. 그 1년간 델타가 오드리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다.


다시 말해, 원작보다 더 많은 오드리들이 살아남게 되었다. 여기있는 오드리도 델타 밑에서 고문받다가 이번에 구출된 생존자 중 한 명이다. 


문을 닫은 오드리가 나를 보면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 헬로~ 그쪽 신사분이 이번에 델타를 죽이신 인간님이시군요?"


"크게 보면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결국 결정타를 날린 건 미호지? 그 때 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기만 했고."


"음, 험블한 태도 좋아요. 가산점 드릴게요. 차 한잔 마시면서 느긋히 토크나 하고싶지만, 지금은 언니랑 할 얘기가 있어서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그 직후 오드리는 미소를 거두고 테일러를 홱 째려보았다. 순간 테일러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래서 언니, 뭐라고 했죠?"


"...사실이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흴 지켜줬어야 하는건데. 결국 내가 한 선택은... 너흴 져버리는 거였어."


"퍼팩틀리 스카톨로지한 앤써네요. 언니의 다크하고 그림한 무드에 저까지 토들리 새드해져서 휴먼-체어 시절이 새록새록하게 떠오르려고 하잖아요, 정말."


"스카뭐?"


오드리는 내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솔직하게 말하자면 델타한테 고문받는 동안에는 당신에게 섭섭한 마음도 들기는 했어요. 왜 안색 하나 안바꾸고 보고만 있는거냐고. 왜 도와주지 않은 거냐고. 왜 델타의 옆에 서있을 수 있으면서 한 마디도 안해주는 거냐고."


테일러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런데 띵킹을 해보니,"


오드리는 빈 침대로 걸어가 풀썩 앉았다.


"그런 사소한 감정으로 당신을 원망할 순 없겠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야, 저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리기 위해 고문관을 자처하신 거죠? 큰언니는 언제나 경제적인 선택을 하는 성격이니까. 두 명 죽을 걸 한 명만 죽여서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도록."


"...궤변이야. 하나하나가 쌓여서... 수천, 수만이 죽었다고... 그런데도, 내가, 살 자격이 있어?"


"언니가 아니었으면 더 많이, 더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


"누구도 언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언니가 저희가 고통받지 않기를 바랬던 것처럼, 저희가 죽지 않기를 바랬던 것처럼, 저희도 언니가 고통받지 않고 살기를 바래요."


"...미아-"


"쉿. 언니는 언니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그 결정에 대한 사과를 받을 수는 없어요. 언니의 남은 삶도 저희에게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가겠다는 소리 하지 마시고, 당신의 삶을 살아주세요."


테일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고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울음을 참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자매끼리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적어도 테일러에 관해 걱정할 필요는 더이상 없을 것 같다.


***


"왔군."


바르그가 있는 곳은 평볌한 병실이 아닌 특수격리실이라는, 마치 감옥같은 곳이었다. 벽이 전부 유리로 되서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는데, 그 안에는 침대 하나랑 바르그 한 명 만이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거야?"


"바르그는 아직 우리편이라고 보기가 힘들어. 이전에도 오르카호에 사보타주를 벌이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합류하기를 완고히 거절하고 있거든. 그래서 별도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어."


내가 오기 전까지 바르그랑 면담 내지는 심문을 진행하고 있던 것으로 보였던 사령관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이거라고? 날 거기서 구해준 게 누군데?"


"무슨 심경의 변화로 델타를 배신하게 된 건지도 아직 파악중이고, 실제로 전과도 있는만큼 또 무슨 일을 벌일지 혹시 모르니까. 본인이 더이상 저항하지 않게 된 덕분에 무력화는 끝났어. 바르그의 처분에 관해서는 가장 큰 피해자인 너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와, 장화랑 천아가 나 죽이려고 했을땐 감싸주던 양반이 이번엔 자기편 아니라고 통 크게 쓰셨네."


"아, 아니 그건... 그 때는 애들이 사고치기 전에 미수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일을 벌인... 거니까..."


결국 팔이 안으로 굽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는지 사령관은 말끝을 흐렸다. 사령관 뒤에서 리리스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째려봤지만 나는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마주봤다. 그 날 니들이 사령관한테 호위 몰빵하느라 나만 무방비하게 방치했던 거 다 기억한다.


"그만, 됐다. 그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


유리벽 너머에서 바르그가 말했다. 


"나는 내 의지로 레모네이드 델타에게 협력했고, 너를 납치했다. 내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는 바이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다. 하지만 이번에 너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한 가지만 부탁하고-"


"됐어, 다 용서할게."


그러니 그런 짓 안해도 돼. 나는 사령관이 말리려는 걸 무시하고 감옥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얘기하는 데 이런 벽은 필요없지."


"...나한테 화나지는 않았나?"


"이제와서?"


"사람은 제 원수를 잊지 않는 법이라고 들었다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바르그가 가장 가까이서 봐왔을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특히나 그런 인물이었고.


"그래 뭐, 솔직히 말해서 납치된 직후엔 별별 생각이 다 들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다 좋게 끝났잖아? 델타는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지. 네가 목숨걸고 싸워준 덕분에. 죄값은 충분히 치루고도 남아. 그러니까, 고마워. 바르그."


바르그는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할 말을 정하는 듯 한참을 입을 우물거리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네가 사형을 선고하기를 내심 기대했다."


"이 세상에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더이상 없기 때문에?"


바르그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바로 방금전에 자살희망자를 만나고 와서 그런지 바르그의 심정을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건 못들어주겠는데. 난 네가 살았으면 하거든. 하지만 대신 아까 부탁하려던 건 들어줄게."


"아직 요구사항이 뭔지는 말을 안했다만."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유해를 찾아달라는 거잖아?"


바르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서 회수해오는 것보단 네가 직접 가서 만나보는 게 더 좋겠지?"


이번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풀어줄테니 프랑스 릴에 있는 연구소에 갔다와. 가서 마지막으로 하고싶었던 말도 하고, 무덤도 만들고... 길잡이 역으로 테일러도 붙여줘야 하나? 걔는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너는 움직일 수 있겠지?"


"어, 저기요? 바르그를 풀어주겠다고? 그건-"


"왜? 어차피 얘 처분에 대한 권한은 나한테 있다며?"


"아니, 그건 그런데... 음..."


사령관은 잠깐 고민하다가 바르그의 호위 겸 감시 역으로 몽구스 팀을 같이 유럽에 파견보내기로 결정했다.


***


바르그와 몽구스 팀은 프랑스 릴에 있는 델타의 생체연구소에 진입했다. 마리오네트나 경비 AGS는 전부 활동정지됐었기에 위험요소는 없었다.


연구소 최심부에 도달한 바르그는 전원이 꺼진 채로 먼지만 잔뜩 쌓인 냉동캡슐을 찾았다. 몽구스 팀은 거리를 두고 대기, 바르그만이 홀로 캡슐 쪽으로 다가섰다. 일반적인 동면장치는 45~60도 각도로 비스듬히 세워져있는 반면 이 캡슐은 수평으로 눕혀져있는 게 마치 관을 연상시켰다. 


부비트랩 따위가 없는 걸 확인한 뒤 힘으로 캡슐의 덮개를 뜯어내듯이 열자 한 여인의 유해가 눈에 들어왔다. 바르그는 시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머리엔 검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조금 붙어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여제님.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바르그, 지금 복귀했습니다. 앙헬을 암살하고 금방 다시 뵙겠다고 했는데 부끄럽게도 그 약속은 못지키게 됐군요."


바르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님."


소생불가능할 정도로 부패했다더니 정말이었다. 백골이 되는 신세는 면했지만 썩어문드러져 보존에 실패한 미라같은 모습이었다. 바르그는 무심코 시신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가, 자칫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스라질까봐 손을 허공에서 멈춰세우고 도로 집어넣었다.


"죄송... 죄송해요... 이제서야 찾아와서... 제가 어리석어서... 제가 무능력해서... 제가... 이기적인 겁쟁이라서..."


바르그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관의 테두리에 얼굴을 박았다.


"당신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더 당신께 보은하고 싶었어요... 당신께 사랑한다는 말을, 태어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엄마..."


그 날 죽음밖에 없었던 텅 빈 공동은 한 소녀가 흐느끼는 소리로 메워졌다. 오르카의 미호는 슬쩍 홍련의 옷지락을 잡았다.


그리고 수 시간 뒤, 오르카호로 돌아온 바르그는 새 주인을 섬기게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어찌보면 서브주인공


메라노하느라 소설 쓰는게 늦어버렸다..

아마도 다음화가 마지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