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늘따라 기뻐보이네, 달링."


"아하하... 그리 티가 나나?"


레오나가 새침하게 던진 말에 사령관은 머쓱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레오나도 피식 웃었다.


"기쁘지, 그야... 그 때 저질렀던 끔찍한 실책도 용서받은데다, 지휘관들에게서도 그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데에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받았으니까."


"당연한 결과지.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유럽 해방의 최대공로자가 되어버렸으니, 이젠 백수로 두고싶어도 못둬. 할 일도 많아졌으니 열심히 부려먹어야지."


"냉정한 평가인걸. 둘이 나름 친해진 줄 알았는데. 그를 구하러 갈 때도 가장 먼저 지원했던 게 너였으니까."


"일이니까 간 거지, 정말... 내가 사적으로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뿐이야."


작게 웃음을 터뜨린 사령관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곧 있을 취임식을 위해 평소 안입던 제복을 꺼내입으니 다소 어색한 느낌이 돌았다. 한편 본인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레오나는 평소 보기힘든 제복 차림의 사령관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있었다. 사령관이 거울에서 등돌려 레오나를 바라봤다.


"잘 어울리는데."


"그럼. 오드리 혼신의 역작이니까."


"거기다 옷걸이까지 완벽하니 최고의 조합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지."


레오나는 슬쩍 시계를 올려다봤다. 슬슬 갑판으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었다.


"연설문도 준비 다됐지?"


"완벽하게."


***


"오르카 저항군의 대표로서, 레모네이드 델타를 무찌르고 유럽을 해방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아직 유럽 전역에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력을 알리지 못해 안타깝지만, 그들의 목숨과, 자유와, 미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저희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 공로를 높이 사, 귀하를 오르카호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바입니다."


연설을 끝마치고, 사령관은 내 왼쪽 가슴에 별 4개가 달린 약장을 달아주었다. 오르카호에 두번째 인간으로서 들어오고, 긴 시간동안 의심받고 견제받다가 비로소 모두의 인정을 받고 부사령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부사령관님을 향하여 경례!"


""승리!!""


무적의 용의 구호에 맞춰 장병들이 일제히 경례를 보냈다. 예전같은 의심의 눈초리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승리."


중장한테도 경례받는 입장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났다. 최대한 안어색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빠르게 경례를 받아주자 모두들 팔을 원위치시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사령관 대신 나를 따르기로 결정한 애들이 있었다. 바르그, 나스호른, 테일러 리스트컷, 그리고 미호.


"드디어 정식으로 오르카호의 일원이 된 셈이군. 나도, 저기있는 미호도."


"사령관으로서도, 그리고 친구로서도 너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게. 다시 한번 오르카호에 온 걸 환영해, 부사령관. 그리고 너희들도 모두 다."


사령관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자 나는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


델타가 죽었다고 해서 유럽이 뿅하고 오르카호의 영토가 되는 건 아니다. 그 넓은 땅에 인프라가 얼마나 깔려있고 전쟁중에 얼마나 파괴됐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곳곳에 자리잡은 철충 세력권을 밀어버리고 민심장악이 덜 된 바이오로이드 집단도 회유해야 한다.


그런 관계로, 부사령관 취임식이 끝나고 대략적인 인수인계가 끝나자마자 바쁜 나날이 시작됐다.


"적응기간도 안주고 이렇게 부려먹어도 되는거야...?"


"우는 소리 하지 마. 진짜로 중요한 안건들은 내 선에서 처리하고 있으니까."


책상 앞에 늘어져서 중얼거리니 테일러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렇지. 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랑은 연이 없는 민간인이었다고... 바르그야, 내가 적당히 몇 년 정도 부사령관일 하다가 사퇴한다면 예전처럼 눈에 띄지 않고 백수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델타를 죽인 가장 큰 공로자가 주인님이라고 공표된 시점에서 눈에 띄지 않는 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내 뒤에서 뒷짐지고 서있는 바르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부사령관이 됨에 따라 바르그는 부사령관 직속 경호원, 테일러는 부사령관 직속 비서가 되었다. 나스호른도 날 명령권자로 등록하긴 했지만 그녀는 사령관 휘하에 있는 아머드 메이든의 지휘관직을 맡게 되었다. (블팬이 일은 다 자기가 할테니 그냥 대장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된다는 언질을 받고 나서야 취임했다.)


"으... 가장 급한 안건이 어떤거였지?"


"델타의 죽음을 숨기는 거. 오메가나 감마같은 다른 레모네이드가 델타가 죽었다는 걸 눈치챘다간 유럽 영토를 흡수하려고 달려들테니까."


"아, 그랬지... 위장용 가짜 델타 세우는 게 끝나면 바이오로이드 세력 회유하는 데에 집중해야겠네."


"그 전에 인프라 정리가 먼저지. 그걸 서둘러야 할 이유라도 있어?"


"철충이 야생 바이오로이드를 선제공격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 지속될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태일러는 잠깐 나를 쳐다보다 다시 업무에 집중하나 싶더니, 유럽 내의 철충 및 바이오로이드 세력 분포도 파일을 건네줬다. 미리 확인해보라는 건가. 나는 파일을 받아읽었다. 


지도상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건 완전히 철충 세력권으로 도배되어있는 영국이었다. 그걸 보자 머릿속에서 안개나라 이벤트의 줄거리가 떠올라 필름처럼 촤르륵 펼쳐졌다. 


지금은 9월이고, 안개나라는 분명 크리스마스 즈음에 시작되었으니 12월이 배경이다. 아직 좀 시간적 여유가 있군. 델타를 견제할 필요도 없을테니 원작보다 조금 편하게 진행될 듯 하다. 뭐, 내가 신경안써도 사령관이 알아서 잘하겠지.


한편 영국과는 반대로 프랑스는 델타의 본진이 있던 곳이라 그런지 철충이 거의 없었다.


"그러고보니 거기, 델타 본진 지하에 문리버 회장 남겨두고 온 것도 처리해야 하는데. 솔직히 살려두거나 부활시킨다는 선택지는 없으니까...

참, 델타가 쓰던 마리오네트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여전히 활동정지 상태니까 가만 놔두면 알아서 아사하겠지 뭐. 어차피 우린 안쓸거니까."


"...그건 좀... 뭐랄까, 좀... 그런데..."


"걱정마셔, 원래 마리오네트는 아무것도 못느끼니까. 고통도, 슬픔도, 후회도. 그래도 정 신경쓰인다면 델타가 쓰던 하이브 마인드 시스템을 써서 마리오네트들을 회수한 뒤 손수 안락사시켜줘야겠지."


"으음... 일단 말은 꺼내봐야겠네."


"주인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미호처럼 다른 마리오네트도 바이오로이드같은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합니까?"


"글쎄. 앞으로 한 세 명 정도는, 이론상으론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마리오네트 모델 중 미호를 제외하면 남은 건 브라우니, 비스트헌터, 블러디팬서다. 게임에서는 그 네 병과만 등장했었지만 여긴 현실이니 찾아보면 더 많은 종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가능성은 일단 제쳐두고.


제일 첫번째로 서약한 미호 말고도 서약한 캐릭터들이 제법 있기는 하다. 무지성으로 애호하고 싶어서든, 좆침반이 반응해서든, 변소 공략에 필요해서든. 브라우니랑 비헌, 블팬도 일단 서약은 해놨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 걔들도 동종 마리오네트의 몸을 거쳐서 이쪽 세계로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나중에 시험해봐야겠다, 더는 마리오네트를 생산하지도 않게될테니 남은 마리오네트들이 죽기 전에.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나스호른이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부사령관님은... 있으시네."


"무슨 일이야?"


"그 뭐냐, 딱히 볼 일이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냥 부사령관님 보고싶어서 왔다고 하면 안됩니까? 오늘따라 부사령관님 곁에 있고 싶은데~ 뭔가 시키실 일 같은 거 없습니까?"


"...진짜로 무슨 일 있어?"


"나스호른은 오늘 오후에 블랙리버 합동훈련이 예정돼있어. 여기 숨어서 쨀 생각인가보네. 부사령관 집무실이라면 블러디 팬서도 쉽사리 뒤지지 못할테니까."


테일러가 나스호른의 본심을 콕 꼬집자 나스호른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군인이라는 자가 상급자를 제 농땡이의 수단으로 사용하다니, 심각할 정도로 기강이 해이해져있군. 주인님.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됐어됐어, 괜찮으니까 냅둬. 저기 접객용 소파에 앉아서 시간 때워도 돼."


"오~ 명령 받들겠습니다! 부사령관님 멋쟁이~"


나스호른은 히죽 웃으며 후다닥 소파로 달려가 다리를 쩍 벌리고 털썩 앉았다. 바르그가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 주인님은 너무 무르십니다."


"같이 유럽에서 그 고생을 한 사이잖아. 그냥 봐줘."


"주인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슬슬 끝났겠네.


"난 먼저 퇴근할게."


"엥? 어디가?"


은근슬쩍 소파에 누운 자세로 바꾸려던 나스호른이 물었다.


"닥터의 연구실에."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냐아냐, 오늘은 괜찮아. 미호랑 둘이 데이트하기로 약속 잡아놨거든."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오르카호 안에서만 시간을 보낼 예정이십니까? 아님 방주에 가실 겁니까?"


"방주에도 가고, 아쿠아랜드도 다시 개장했다 하니 거기도 가볼 생각이야."


"바깥 날씨가 쌀쌀하니 따듯하게 입고 가십시오."


바르그가 옷장에서 코트를 하나 꺼내서 건네줬다.


"고마워. 그리고, 그... 그걸 어디다 뒀더라..."


"여기 있어."


테일러가 내 책상에 있던 서류뭉치를 들어올리자 그 밑에 숨겨져있던 작은 케이스가 드러났다. "아, 여기있었네." 케이스를 집어 주머니에 넣자 테일러가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굿 럭."


"하하.. 다녀올게."


***


"음, 좋아. 검사 끝! 이제 일어나봐도 좋아."


닥터의 연구실. 닥터가 해맑게 웃으며 버튼을 누르자 검사장치의 불이 꺼졌다. 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다.


"상태가 완전히 안정됐어. 아~주 건강해. 마리오네트에서 변한데다 델타표 전투자극제까지 썼는데도 이상이 전혀 없네. 델타의 유전공학 기술에서 좋은 점만 쏙 받아들인 바이오로이드 슈퍼솔져라고 해도 될 정도야."


"헤에, 그럼 나도 그 리리스만큼 강한건가?"


"아니, 그래도 리리스 언니보다는 약하고..."


"피, 뭐야 그게."


"애초에 미호 언니는 태생이 저격수잖아. 직접적인 신체능력은 그리 높게 책정되지 않았지."


한 손에 검사차트를 든 닥터는 볼펜으로 턱끝을 톡톡 두드렸다.


"그건 그거고, 끝까지 '어떻게' 변할 수 있던건지는 밝혀낼 수가 없었네. 분해죽겠어 정말."


"아직도 그 소리야? 내 영혼이 들어와서 변한 거라니까!"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본인 주장에 불과한 그런 비과학의 영역을 믿으라고?"


"바다에 영혼을 먹는 괴물도 있는데 안될 게 뭐있어?"


"별의 아이 말이지. 그것도 오빠가 일방적으로 영혼 수확자라고 칭했을 뿐이지, 우리가 진짜로 별의 아이가 밥 먹는 장면을 포착한 적은 없거든.


닥터는 검사차트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옷을 다 입은 미호가 다시 말했다.


"그러고보니 닥터, 그 성장약 있잖아, 성장약을 쓰면 머리카락도 확 자라나는 거지?"


"응. 신체성장에 따른 부가효과기는 하지만. 그런데 내가 성장약 얘기를 했던가...?"


"그거 나도 빌려줄 수 있어? 예전처럼 긴 머리로 돌아가게. 겸사겸사 엄마처럼 쭉빵한 몸매도 되고!"


"뭐, 문제될 것 같지 않기는 한데, 이거 제한시간이 있는거라 하루정도 지나면 약효가 풀려."


"약효가 풀리면 어떻게 되는데? 머리가 다 빠지나? 아님 도로 모공으로 들어가나?"


"원래 길이보다 길어진 만큼의 머리카락은 상해서 뚝뚝 갈라지거나 끊어져. 원래 머리에도 어느정도 악영향이 가게 돼."


"으... 그럼 됐어. 천천히 기르지 뭐."


"히히, 좋은 자세야. 머리는 소중히 대해야지. 아, 둘째 오빠 문앞에 왔네."


닥터를 따라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자 연구실 앞 복도를 비추는 감시카메라 화면에 한 남자가 접근하는 게 비춰졌다.


"벌써? 가봐야겠다. 다음주에 또 검사받으러 오면 돼?"


"이젠 마리오네트도 아니니까 일주일마다 안와도 돼. 크게 아픈 일 없으면 다른 언니들 건강검진하는 것처럼 1년에 한번씩 와도 충분해."


"그래? 알았어. 다음에 또 봐!"


미호가 흥흥 웃으며 연구실 문을 열자 인터폰을 누르려던 부사령관과 마주쳤다. "가자!" 부사령관이 놀라 얼타는 틈에, 미호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


둘이서 오르카호의 복도를 거닐있다. 유리창 밖으로 물고기가 지나가는 게 수족관을 연상시켰다.


"앗, 저것봐! 흰돌고래 지나간다!"


"진짜네. 저게 벨루가라고 하던가?"


포티아의 식당에 들어갔다. 볶음밥을 하나씩 시켜먹었다.


"그런데 너 볶음밥 좋아하던가?"


"무지 좋아해. 델타 밑에서 맛대가리 없는 영양 블록만 먹다가 처음으로 먹게된 음식다운 음식이니까."


"...마리오네트가?"


"마리오네트도 '나'라니까 바보야."


사격장에 들어갔다. 미호는 저격수용 사격코스에서 당당히 만점을 기록했다.


"흐흥, 어때? 끝내주지?"


"이야, 역시 굉장하네. 난 보이지도 않는데."


"원래 미호였을 때보다 이 몸에 자리잡은 뒤로 시력이 더 좋아졌더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다 좋아진 셈이지만."


카페 호라이즌에 갔다. 둘 다 엘븐 밀크쉐이크를 시켰더니 커플빨대가 꽃힌채로 나왔다.


"와오... 막상보니 왠지 부끄러워지는데."


"에이, 너 진짜 그럴래! 이제부터 서로 얼굴보고 마셔야하는데 그러니까 나까지 의식해서... 부끄러워지잖아..."


얼굴을 붉힌 미호는 빨대 하나를 제 앞으로 끌어당겨 쪼옥 빨았다.


"그러고보니 이번엔 초코맛 쉐이크가 아니네? 초코가 아니어도 돼?"


"야, 나를 무슨 초코에만 환장하는 초코돼지인줄 알아? ...별도로 초코 쇼콜라 케이크를 시키긴 했지만."


"우리 밥 먹은지 얼마 안되지 않았던가...?"


"이미 소화 다 됐지! 그리고 원래 간식용 배는 따로 있는 법이거든요~"


방주에서 나와 재개장한 아쿠아 랜드에 방문한 우리는 게임존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잘 할 수 있지?"


"당근! 그렇지만 사격장에선 내가 주연이었으니까, 이번엔 자기가 활약해봐야지? 어시스트 팍팍 몰아줄게!"


우리 둘은 각각 슈팅 컨트롤러를 하나씩 잡고 앞으로 향했다. 게임이 시작됐다.


***


아쿠아 랜드에서 실컷 시간을 보내고나니 어느덧 저녁이었고, 기억의 방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나니 완전히 해가 저물었다. 


실제 시간에 맞춰 인조하늘이 어두워지고 대신 가로등이 켜졌다. 기온도 내려가서 살짝 쌀쌀했다. 미호의 손을 잡고싶었지만 지금은 그럴수가 없었다. 내 양손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머니 안에 든 작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너무 좋다~ 정말로 이렇게 자기랑 만나서 같이 다닐 수 있을거라고는 꿈도 못꿨는데. 히히."


내가 딴생각하느라 제때 대꾸하지 못하자 미호는 내 앞에 가로섰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으, 응?"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길래 댁 여친이 눈에 안들어오는 거냐구!"


"어... 그게..."


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자줏빛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머뭇거렸다.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우물거리는 걸 반복하다가, 마침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줄 게 있어서 그래."


"엥? 줄 거? 뭔데?"


외투 주머니에서 끌려나온 내 손에는 작은 케이스가 들려져있었고,


케이스 덮개를 열자 투명한 보석이 박힌 작은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내 얼굴에서 손으로 시선이 내려간 미호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비록 여기가 화창한 햇빛이 비추는 화려하게 치장된 오르카호 갑판 위는 아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줘야 할 때라고 느꼈다.


"어, 어어...!? 지, 진짜? 벌써? 너무 빠, 빠른 거 아냐?"


내 생에 고백도 청혼도 처음이다. 얼굴이 미칠듯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만큼이나 얼굴이 빨개진 미호가 말을 더듬었다.


"아으, 그, 내가 라오에서 서약할 때 뭐라고 했었더라... 대사가, 기억이 안나네, 헤헤..."


게임상에서의 서약에서 사령관이 뭐라 말했는지 기억해내려다, 곧이어 플레이어는 아무 말도 안한채로 서약 이벤트가 진행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에 나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하기로 했다. 


"미호야."


"응?"


"난... 어느날 이 세상에 떨어져버리고, 정신을 차리고보니 고향도 가족도 전부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거 있지. 그래서 참, 춥고, 쓸쓸했는데... 옆을 보니 네가 있더라고. 마리오네트인 네가, 그리고 미호인 네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랑 같은 세상에서 온 동반자가 바로 너였어."


"..."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래?"


"......"


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긴 침묵. 미호가 마리오네트였을 시절이 떠오르는 침묵이었다.


"저는 그 날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표정을 정리한 미호가 무미건조한 톤으로 말했다.


"당신과 만나게 되고, 당신과 같이 지내고, 당신이 저를 인식하고 제가 당신을 인식함으로서 공허했던 속이 채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네. 저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갑자기 생긴 자의식이라는 것은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싫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았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만큼은."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던 미호는 이내 옅은 미소를 띄었다


"구원받은 건 당신 하나만이 아닙니다. 당신으로 인해 한 이름없는 인형도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절 흔한 마리오네트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미호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미호는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갰다.


"이제 난 사랑을 할 수 있어요."


심장을 얻은 양철 나무꾼이 그리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로서, 당신의 미호로서, 조금 전의 그 질문에 대답해드릴게요."


미호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응, 그럴거야. 영원히. 네가 어떤 세상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네 곁에 있을거야. 약속할게."


미호가 왼손을 내밀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를 보며 빙그레 입꼬리를 올린 미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양 팔을 벌려 내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미호를 마주안아 그녀의 등을 꼬옥 감쌌다.


"사랑해. 미호야."


"나도 사랑해, 자기야."


추웠었다. 어느날 느닷없이 스발바르 제도에 떨어져서 설원을 해맸을 때부터 줄곧 추웠었다.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품에 안겨든 미호의 몸은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 두번째 인간과 마리오네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