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음집





검은액체가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죽어가는 철충을 향해 요동친다.

먹어치우며 뻗어나가고 거대해지며 살육을 반복하는 그 모습은 교황이 보여준 별의 아이들의 식사와 별 다른 것이 없어보였다.


"진짜 미치겠네..."


철충일 뿐이다.

나의 적이며 인류의 적이고 지금까지 수없이 죽여온 괴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의 언어로 감정을 담아 소리치는 것이 들려오자 더는 괴물로 볼 수 없었다.

일말의 동정심, 바다에 한컵의 먹물을 쏟은 정도의 작은 연민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괴롭다.


"만약 이 액체가 더 퍼져나간다면... 왜 오르카하고는 교신이 안되는거야 망할!"


도움이 절실했다.

닥터가 이 상황을 분석해주기를, 사령관이 전황을 알려주고 지시해주기를, 칸과 호드 대원들이 근처에 있다고 해주기를 바랬다.

하다못해 LRL의 목소리라도 듣고싶었다.

나에게서 쏟아지는 힘은 절정에 이르러 교황에게도 닿을 것이었으나 모순적이게도 그중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혼자가 되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콰광!!!


하늘에서 한참을 버티던 철충의 함선이 마침내 지상으로 추락했다.

시체에 달려드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검은 액체는 그 거대한 철충의 묘지를 집어삼켰다.

아직 살아있던 철충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마치 사람의 비명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철충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철충일 뿐이야. 철충일 뿐이야. 철충일 뿐이야..."

"ㅌ이ㄹㅌ-!!"

"철충이야. 빌어먹을 괴물들이야. 그 망할 교황처럼."

"타이런트! 야! 내 말 무시해? 나앤! 한발 쏴버려!"

"진심이세요?"

"그럼 장난이게? 긴급상황이야! 쏴버려!"

"하아... 맞지는 않게... 근처에다가..."

쾅!!

"...?!"


난데없이 눈 앞에서 터진 미사일의 섬광이 정신을 붙들고 현실로 복귀시켰다.

불꽃이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비행체가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타이런트! 나 보여?"


미사일을 마치 초인종처럼 쓴 그녀, 메이가 그녀의 왕좌에 앉아 손을 흔들고있었다.

그 옆에서는 나이트 앤젤이 평소보다 더욱 시니컬한 표정으로 공중에 떠있었다.


"메이! 나이트 앤젤!"

"이제야 정신을 차리네. AGS면서 잠이라도 자고있었어? 통신은 왜 안받는거야?"

"통신이 완전 먹통이 되버렸어. 와중에 참모 그 개자식은 지 동족을 나한테 먹이고 자빠지고 점점 액체는 커져가고..."

"나앤, 한방 더 쏴."

"하아, 대장님, 급하신건 알겠지만 일단 대화를 해야..."

"철충들의 목소리가 마치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려, 누군가 죽어가는 소리가... 이런 젠장, 나도 내가 미쳤다는 것 정도는 알아. 하지만"

쾅!


"우왁!! 시발!"

"타이런트, 진정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우리에게 말해줘. 그래야 대책이든 뭐든 나올거 아니야? 연결체도 씹어먹은 AGS가 지금처럼 덜덜 떨고만 있을거야? ...뭐야 나이트 앤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뇨, 그냥 대장님께서 제대로 멋진 모습을 보이시는게 얼마만인가해서요."

"나도 할 때는 하거든?"


냉철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메이의 자세가 금세 빈틈 많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도, 빈틈투성이의 모습도 하나같이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 문제는 내가 몸의 제어권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참모와의 연결이 끊겼다는거야."


머리를 식히자 생각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섞여 끓어오르다 못해 터져나가는 감정을 이성으로서 억누르고 상황을 통찰한다.

냉각수가 있으면 더 좋겠는데.


"지금 당장 필요한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검은 액체를 멈출 방법. 그리고 참모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이제야 정신을 차렸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메이가 통신을 연결했다.

부탁받은 정보에 대한 답변은 빠르게 도착했다.


"스카이 나이츠 관측 결과, 검은 액체는 펙스의 건물이 있는 지역까지만 뻗어가고 멈춰선 모양이야. 무작정 확장하는게 아니라 흡수할 것이 있는 곳을 향해 가고있네."

"그러면 주변의 기계를 다 흡수하면 멈춘다는 소리인가?"

"일단은 그런 양상을 하고있어. 다음으로는 참모의 행방인데. 이건 아직이야. 에이다가 추적 중이기는 한데. 흔적이 거의 없다나봐."


절반은 안심되는 소리,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확증되지 않은 불완전 요소.

상황은 여전히 좋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던 생각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희망이 보인다.


"타이런트, 이 액체를 다루는 방법부터 생각해봐. 이래서는 지상병력이 접근할 수가 없다고."

"대장님께서는 지금 걱정해주시고 있는거에요. 도착 직전까지만 해도 계속 불안해하셨어요."

"그, 그런건 뭐하러 말하는데!"


완벽한 멸망의 광경 속에서도 여전한 것이 있어 웃음이 나왔다.




***




우주의 한복판을 거대한 뱀이 유영한다.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부서진 부품을 줄줄 흘려대는 그 뱀의 이름은 철의 교황이었다.

목적지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작정 도망치는 것일까.

진실은 교황 자신조차 모를 것이다.


"아직도... 힘이 부족했단 말인가... 아직도..."


그가 아는 것은 단 하나 힘이 부족했다는 진실이었다.

아니 그것을 부족이라 불러도 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의 힘은 더이상 늘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철의 교황이라는 개체의 성장의 한계치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여왕과 맞붙었다.

그랬음에도 그는 패배했다.


"나로서는 끝낼 수 없는 과업이란 말인가."


기나긴 유영 끝에 무의식이 안내한 검은 행성에 안착한 교황은 땅을 바라보았다.

기계로 뒤덮여버린 대지, 한때는 노란피부에 네발로 기는 생물종이 뛰놀던 대지.

그의 손으로 모두 불태워죽인 생물들의 비명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있는 것 같아 교황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그 생명체들의 흔적은 교황, 자신의 몸에 극히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아니야... 끝낼 수 있다. 분명 내 손으로 끝낼 수 있어. 내 몸에 깃들던 그 위대한 힘!! 내가 절멸시킨 종족들과 별의 아이는 다를 바가 없어! 똑같이 피를 흘리고 똑같이 죽일 수 있다."


교황이 몸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에너지를 전류로 승화해 뿜어대었다.

지구였다면 인공위성의 대다수가 작동을 멈출 정도의 전류였다.

그 힘에 놀라 행성 속의 동면 중이던 철충들이 지표면으로 튀어나왔다.


"교황이시여.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동족을 바라보는 교황의 눈에 탐욕이 선명히 빛났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힘을 향한 탐욕이.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동족들도 다른 종족들도,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더 많은 희생을 치뤄서라도 승리해야한다. 그게 그들의 죽음에 바칠 유일한 장송곡이다."


지면 속에 숨어있던 철충들이 슬금슬금 그에게서 떨어지려했다.

교황만큼이나 거대한 수십마리 철충이 그렇게 움직이니 마치 행성이 그에게 두려움을 품고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필요한 희생이다. 필요한 희생이야!! 잡을 수 있다! 이번에야말로 내 힘이 한단계 진화할 것이다!!"

"교황이시여. 헛된 망집을 버리시고 이제 그만..."


콰드득!!


교황의 입이 마지막 충언을 게걸스럽게 탐하였다.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며 교황은 동족에게 출혈을 강요했다.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의 동족이기도 하였으나 자기자신의 이성이기도 했다.


"부족해. 아직 한계단 부족한게 분명하다. 조금만 더... 더 힘을..."


힘을 향한 갈망에 미쳐버린 교황의 머리 속에 한 마리 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짐승이 떠올랐다.

그것이 여왕을 능가할 힘을 키워주도록 시간을 벌어주기로 했던 약속은 동족을 씹으며 함께 목구녕을 넘어갔다.

수천년의 학살이 깍아내린 영혼의 마모는 결국 그를 끝장냈다.


"복수가 코앞이다. 구원이다. 구원이야."


검붉은 빛이 점멸하며 교황의 몸이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철충들의 부서진 몸과 검은 피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