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줄 요약: 생각없이 읽으면 료나야설, 생각하며 읽는다면 상당히 준수한 수준의 인간탐구 문학(1부 한정)(234부는 가학적 쾌락으로 대표되는 온갖 정념들이 한 파트당 150개씩 열거되고 중간중간 등장인물들의 쾌락을 목적으로한 고문이나 징벌, 난교가 쉬는 시간에 간간히 껴있는 정도)



사드의 소설은 모두 특징이 있다. 바로 성적 일탈과 범죄행위, 그리고 기존 윤리 규범에서 어긋나는 가치관을 가진 방탕아들의 등장이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보다 더 중요한 중심내용이 있다면 권악징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악인은 응징당하고 의인이나 선인은 보상받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또 그것을 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악인은 "운이 없어서" 라는 뉘앙스로 악행이 들통나고 비난을 받게되지만, 정작 얼마지나지않아 비난은 수그러든다. 반대로 선행을 통해 미덕을 보인 자에 대래서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칭송과 찬사를 하지만, 그뿐이다. 그마저도 얼마가지않아 사그라들며 미덕을 보인 자에 대해 어떠한 이득도 안겨주지 못한다.


사드의 가치관은 이러한 현실세계의 부당함을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의 세상이 아닌, 현실 그 자체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시키기위해 현실세계를 해부한 그대로 솔직하게 소설을 통해 묘사한다. 이 묘사가 가장 돋보이는 소설이 바로 "소돔의 120일"이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4명의 방탕아(리베르탱)들이 150가지의 정념을 한달씩 탐구하여 4개월동안 600개의 정념을 다루면서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원리, 쾌락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또한, 이 600개의 정념을 다룰 가장 뛰어난 전문가로 창녀이자 포주인 인물 4명을 데려와 그들의 가지각색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소설은 진행되기 전부터 상당히 거북하게 시작된다. 공작과 주교, 징세청부업자와 재판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시작부터 서로 부인인 딸들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가관이다. 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이들 주인공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전부 공통점이 있다면, 극악무도한 악인이자 추악한 본성을 정당화하며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 타인을 거리낌없이 이용하거나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악행들을 행했는지 보여준다. 악행들의 묘사도 상당히 강렬하다. 공작은 모친 살해와 재산독점을 위한 누이독살, 그리고 어마무시한 정력을 가진 방탕아로 자지의 길이가 50cm가 넘으며 엄청난 호색가로 하루종일 여자든 남자든 상대할 수 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지 독살하지만 이를 딱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작은 미덕의 찌꺼기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악덕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역설한다. 공작은 말한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자연이 정한 본성인데, 그것을 벗어나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악행을 하고서 후회를 하며 죄의식을 가지는 행위는 더욱 멍청한 행동이다.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행동을 해놓고 그것을 후회한다니, 그런다고 되돌리기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덕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하여 순수한 악덕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 그렇다면, 하찮은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윤리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난 뒤에 문제를 인식하고, 후회한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또 충동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고, 비슷하게 대처한다. 결국 나아질 것도 없는 후회와 죄의식으로 고통만 받는 의미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사드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런 헛된 죄의식을 가지지말라. 그저 순수한 선한 마음이 있기만 하면 미덕을 실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런 헛된 죄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원리인 쾌락 추구의 걸림돌이니 당장에 부숴버려야한다고..


이외에도 내용이 전개됨에 따라 다양한 가치관과 철학, 사상이 나오는데 요약을 해보자면 이렇다.


공작은 쾌락의 본질은 욕망의 실현이라 생각하지만, 징세청부인은 이에 대해 반박한다. 


"욕망의 실현은 오히려 공허함과 허무함만 남길 뿐 어떠한 쾌락도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쾌락의 본질은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수많은 욕망에서 비롯된 정념을 추구할 때 생기는 걸림돌들을 파괴하며 욕망을 지속시킬때 그 본질이 있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생각을 해보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3 4시간 정도 기다려야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3 4시간동안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을 하면 신이나고 즐겁다. 하지만, 집에 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어떠한가? "이게 뭐라고 그렇게 기대되고 즐거웠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사드는 쾌락은 욕망의 지속에 있으니, 욕망은 쾌락에 가까워질 순 있지만, 쾌락에 도달할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욕망이 쾌락에 도달한다면 즉시 허무함을 느껴 쾌락을 느낄 수 없다는 모순에 도달하니, 오직 욕망의 지속만을 통해 쾌락의 다가가기만 할 뿐 달성할 순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쾌락의 본질을 탐구한 결과를 제시한다.


또한, 사드는 공작을 통해 부모에 대한 효도라는 자식의 의무에 대해 호되게 비판한다. 공작은 말한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부모라는 존재는 스스로 욕정을 못이겨내 자기들끼리 일을 저질러서 아이를 낳아놓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아이에게 행복과 은혜를 주었으니 그것을 바라는 추악한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어서는 "부모는 아이에게 행복을 준 것이 아니라, 그저 암초뿐인 세상에다가 던져둔 것일뿐 어떠한 은혜로운 행위를 한 적이 없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각자 능력이 되는대로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아이들 스스로의 몫이다. 오히려 부모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자연의 산물이다.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강렬한 쾌감을 가졌을 때가 바로 어머니를 자처하는 여자를 독살하면서 눈을 감는 장면을 보았을 때다. 나는 지금껏 그런 강한 쾌락을 느껴본적이 없다." 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개인주의적인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우려가 크지만 사드가 살던 18세기에 당연히 상식적으로 여겨지던 자식의 의무에 대해 당당하게 비꼬아 비판하였으니, 세간에서 그를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라 봤을 지는 다분하다. 조금 새어들어가는 이야기지만, 소돔의 120일에서 보여준 이 생각은 이후에 발전되어, 사드의 다른 소설인 "규방철학"에서 페미니즘적 사상과도 연결되고, 자녀의 권리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이 보완되어 사드의 사상이 가진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매개가 된다.


한편, 소돔의 120일의 메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이다. 이는 상당히 곳곳에 산재되어 나오므로, 대략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이러하다.


사드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고,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이다. 그저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하고, 자연에 설계품에 불과하며, 자연을 구성하는 부품에 불과하다.


이렇다보니 자연은 우리에게 있어서 행해야할 것에 대해서도 모조리 설계를 해두었다. 기독교는 말한다. 미덕을 추구하고, 악덕은 배제해야한다. 그렇지만, 자연의 원리는 그렇지않다. 미덕과 악덕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며, 미덕과 악덕 중 본인이 끌리는 것을 택하면 된다. 자연에 의해 이미 정해진 본성에 따라 하나를 택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종교에서의 공상처럼 미덕과 악덕에 대한 철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신이 정했다고 주장하는 절대적 기준에 따라 그것을 구분하고, 분류된 덕목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는 어리석은 짓거리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자연이 빚어내면서 자극과 쾌락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있다. 그렇기에 쾌락의 추구만이 오로지 옳은 것이다. 그것을 미덕이니 양심이니하는 잘못된 편견의 틀의 안에서 추구하는 것도 매우 잘못되었다. 이러한 생각의 틀을 부숴버리고,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쾌락과 자극을 추구해야한다. 그 대표적인 행위가 아름다움과 반대되는 추함을 추구하는 것과 온갖 범죄행위이다. 살인, 강간, 절도, 폭행, 고문, 감금, 납치는 기본이요. 거짓말과 비겁함은 개인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더욱 더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이다. 헌데, 이마저도 결국에는 자극이 서서히 무뎌지면서 쾌락도 처음과는 달리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쾌락을 다시 느낄 수 있는가? 


자살? 그것은 쾌락에 가까워지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뿐이다. 또한, 죽음 그 너머에서도 현상계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통해 신경에서 자극을 받아 감각을 가진다는 보장이 없기에 자극을 느끼지 못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가장 자극적인 생각은 할 수 있다. 바로 "자연이 정한 틀"을 부수는 것이다.


결정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사드에게 있어서 이는 말도 안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사드의 철학은 그 모순에 가치가 있다. 모순은 인위적인 행위, 즉슨 자연을 거부한다는 극단적인 자극을 추구함으로써 쾌락에 다가서기 위한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여기서 더 발전되어 보자면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자연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반자연적인 것에 다가가고자 시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는 쾌락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라고 소돔의 120일에서 알 수 있는 사드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사드는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인물이라는 것을 정말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사드의 인생만 보더라도 29년간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가면서 온갖 수난을 당했지만, 끝내 집필을 멈추진 않았다. 그는 젋은 시절 끝도 없는 방탕한 성적일탈과 신성모독을 즐기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특유의 "방탕주의"라 할 수 있는 사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물론 젊은 시절의 일탈로 갖은 범죄행위까지 행하기도 했다. 그것도 보통의 범죄도 아닌, 성범죄만 해도 수차례고 타인이 고통받는 모습에 흥분을 하는 이상성욕을 가지고 있었기에 채찍질을 하고 치료를 해주고, 다시 채찍질을 하며 고통받는 여자를 보며 쾌락을 느낀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적때문인지 현대에 들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사드가 그저 변태이고, 여성혐오자이고, 성범죄자일뿐이며 개똥철학을 가진 자기합리화만 하는 방구석 철학자에 불과하지만, 남성중심적인 사회와 가부장적 가치관이 사드를 영웅으로 만들고 신성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절대로 인정할 수 가 없다. 사드의 일생에 대해 그의 방탕함에 대해 꾸짖을 순 있어도, 그의 가치관과 철학, 문학적 공로에 대해서는 절대로 폄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드는 여러 문란한 생활로 감옥을 별장처럼 다니기는 했으나 그와 동시에 계몽주의에 대해 탐구하며 기존의 사상에 대해 비판하고, 당시 대두되었던 이신론에 기반하여 자기만의 무신론적 유물관과 결합시켜 "자연"이라는 질서에 대해 새롭게 정립하였다. 사드의 이 정립은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했으며 합리와 이성을 중심으로 이 선한 본성을 다시금 가지도록 자연으로 돌아가야한다." 라는 루소의 가치관과 완벽히 대조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루소의 관점을 따라서 계몽주의 철학들은 발전을 거듭하고, 시민혁명을 이끌어내었다. 민권과 인권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보편화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빛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이성과 합리의 추구라는 명목하에서 이민족에 대해 야만인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합리적인 인간이 이들의 "문명화"를 이끌어야한다는 제국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심화되면서, "야만인"인 아프리카와 동남아 등지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끝없는 탐욕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터져나가며 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하지만, 사드는 어떠하였는가? 인간에게 선악은 존재하지않으며 자유와 의지또한 자연에 의해 설계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더해 끝없는 자극과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 덩어리의 존재로 바라보면서도 자연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이 노력을 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뿐만인가?


사드는 당시 여성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도 제창하였다. 소돔의 120일에서 공작의 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주교가 형수인 공작부인이랑 사통하여 태어남/공작은 자기딸인 줄 알고 근친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살아남고, 나머지 근친관계인 딸들은 모조리 처형당한다. 사드의 소설의 특징인 "권악징선"의 가치관 때문이기도 한데, 공작의 딸은 매우 오만방자하며 무식하게 묘사된다. 왜냐하면 공작이 그 어떠한 교육도 시키지않았다. 심지어 가정교육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작중의 묘사를 보면 끝도 없는 방탕함을 추구하는데, 대개 천박한 수준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공작을 비롯한 4명의 방탕아들은 재능을 갖춘 이야기꾼인 창녀 4명과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곤, 모조리 징벌하고 고문을 한다. 하지만, 공작의 딸은 위해를 잘 받지 않는다. 사드에게 있어서 남녀의 구분은 딱히 중요하지 않고, 그저 "인간"이란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드가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은 수용할 수 가 없다.


개인적으로 보건데, 나는 사드가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냉혹한 현실을 솔직하게 반영하되 그것을 어떻게 봐야할 지에 대해 제대로 고민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소돔의 120일이 아니라, 사드의 유고집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유고집을 보면, 사드의 자유와 도덕에 대한 탐구와 당대의 사법제도의 무능함 비판, 사형제의 반대와 죄인에 대한 추방이나 교화를 주장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가 살던 18세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거의 백년은 앞서간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철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드는 과도기적인 모습 또한 가지고 있다.


사드는 어찌됐든 바스티유 감옥에 있다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일어나게 만드는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이 선동때문에 습격이 일어나기전에 그는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위가 커지면서 왕의 봉인장 효력이 실효되어 자유의 몸이 되게 되었다. 하지만, 사드는 일단은 후작이란 높은 귀족 작위를 가지고 막대한 자산을 가진 집권층이었기에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혁명적 변화를 수용은 하되 왕에 대해 적극적으로 몰아내는 것에 대해선 미적지근하게 대응하였다. 또한,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자신의 입장을 담은 서한을 정부에 여러 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물론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나는 나쁘게보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초졸한 모습 뒤에 잘못된 권력에 대항하는 강인함과 용기를 갖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드는 혁명기에 자신의 성씨를 갈아버리고 공화국의 시민이자 민주주의자를 자처하여 파리의 혁명지구 중 하나인 피크지구에서 공직자로 일하게 된다. 여기서 사드는 고발원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적도 있는데, 사드는 본인의 방탕한 생활을 혐오한 장인과 장모가 피고인이 된 모습을 직면하게된다. 특히 장모인 공작부인은 사드를 극도로 혐오하여 왕의 봉인장까지 받아내 그가 수십년을 감옥에서 썩게 만들었던 인물이었기에 사드로써는 복수를 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사드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였다. 그러면서 사드는 "그들을 용서를 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복수였다"라고 까지 말했다. 여러모로 방탕함과는 대조되는 그의 이면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사드는 장 폴 마라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로베스피에르 정권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정권이 끝내 반혁명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단두대로 보내는 공포정치로 변모하자 사드는 이를 규탄하며 많은 저작물로 비판하였다. 그럼과 동시에 정치에 참가하여야하는 것은 민중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대리인이 아닌 권리를 가진 민중들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해야만 한다는 직접 민주주의까지 지지하는 급진주의자로 변모한다. 거기다가 당시엔 상식이었던 사형제까지 비판하고 반대하였다.


당연히 로베스피에르 정권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이후에 방탕했던 생활과 후작 작위를 가졌었다는 사실들까지 밝혀지자 바로 수감되고 두번째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사형집행이 일어나기 얼마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자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재판은 무효가 되며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이러한 수난을 겪으면서 사드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된다. 후작인 귀족인지, 공화국의 시민이자 민주주의자인지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되자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이다. 


이를 정리해본다면, 사드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공화국의 시민이자, 옛날의 영광과 특권을 유지하고픈 왕국의 후작이라는 배치되는 두 가치관이 겹친 상당히 애매모호한 입장에 선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소설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소설에서 다수가 사회의 집권층이거나 이었던 인물들이 주요 인물이다. 그들은 상당히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짐과 동시에 매우 추악하고 더러운 악덕이 공존한다.


나는 이렇게도 생각을 해본다.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혹시 사드가 자신의 입장을 반영한 게 아닐까라고.. 혁신과 반동이 공존하는 오묘한 인위적 설정이 오히려 사드가 처한 내적인 딜레마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본다.



추가 내용)


사드의 유고 중 일부 발췌본..

독서노트 제4권 혹은 수상록


읽은 책에서 발췌하거나 그로부터 유발된 사색들


1780년 6월 12일부터 1780년 8월 21일까지 뱅센 망루 감옥에서 기록


모든 인간의 다양한 부류를 심도깊게 연구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면, 아마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되겠지만, 결국에는 가장 비천한 동물의 종으로까지 내려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밝은 색이 그보다 어두운 색의 단계적 변화에 불과하듯이, 우리 자신도 사실상 짐승의 아주 괜찮은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고찰은 인류 입장에서 상당히 괴롭지만, 그렇다고 그 현실성이 덜하겠는가? 

여기에 더해 양극단의 지적능력, 즉 짐승 중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의 본능과 인간 중에서 가장 모자란 자의 본능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이란 정말 오리무중이거니와,

우리의 어리석은 허영과 삶의 규범들 태반은 그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다는 걸 자인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이성(Resean)은? 이 빛나는 이성은? 혹자는 그렇게 반박할 지 모른다.

오. 인간이여. 그대가 내세우는 그 잘난 이성. 우리가 가진 성벽(philia)때문에 툭하면 흐릿해지는 존귀한 이성이란 자연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해로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교해보자면 우리와 비슷하기만 한 동물들보다 우리가 더 나은 점들을 한탄하게 만드는 어쩌면 유일한 자질이 아니고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른바 마음의 용기와 정신의 용기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마음의 용기는 온갖 위험의 한복판에 겁없이 뛰어들게 만드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영웅적인 면은 전혀 없는 일종의 초자연적인힘이다. 

이와 달리 정신의 용기는 진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미덕이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을 꿋꿋하게 견디고, 어떻게든 버텨내겠다는 의연함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하도록 인도하는 미덕이다. 

덧붙여 말하건대, 구체적으로 두 용기를 관찰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용기란 스스로 힘의 우세를 의식할 경우에 발동하는, 즉 짐승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월등한 사나움보다 더 나을 것도, 더 위대할 것도 없는 기질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정신의 용기는 진정으로 더할 나위없이 숭고한 정신작용,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초극하게 만드는 기질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편견은 어디서 오는가? 

마음의 용기는 그토록 중시하며, 정신의 용기가 안중에도 없는 이유는 무얼까? 

가장 손쉽고도 하찮은 미덕에 결부된 명예가 대체 무어라 생각하는가?


달랑베르의 <문학과 철학 문집>

제 4권, 18쪽에 실린 도덕에 관한 글을 읽고 난 뒤의 생각:


저자가 이 부분에서 펼친 설명은, 인간이란 따로 규칙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기 안에 필수적인 도덕적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같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원리라면 악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합리화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악인이 악행을 저지를 때 자신의 이익이나 감각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데, 그것은 결국 자기 안에 내재된 자신만의 도덕적 원리를 따른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충분한 가르침을 얻는다면, 모든 것이 합리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과 그 법률을 토대로하는 건전한 도덕에 가장 위배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자연의 운동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와 윤리에 관한 고찰


인간이 자유롭다면 법은 꼭 필요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으면서도 저지른 악행을 벌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롭지 않고, 그의 모든 행위가 원초적 충동의 결과이거나 체액의 흐름 또는 신체 기관에 좌우되는, 

요컨대 육체에 워낙 긴밀하게 결부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 현상이라면 (다수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법이란 것은 완전히 폭압적인 무엇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어서 저지른 악행을 벌한다는 것은 추악한 짓이기 때문이다.

여기 당구대 위에 계란이 하나 있고, 맹인 둘이 당구공 두 개를 굴린다고 가정한다. 당구공 하나가 계란을 피해 굴러갔지만, 다른 하나는 적중하여 깨뜨렸다.

그것은 당구공의 잘못일까? 아니면, 깨뜨린 당구공을 굴린 맹인의 잘못일까?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는 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이 이야기 속에서 맹인이 곧 자연이라고 말한다. 당구공은 우리 자신이고 깨진 계란은 범죄행위를 의미하는 셈이다.

이 때 법이 무슨 정당성을 내세우겠는가!

달랑베르씨는 말한다. 

"그와 같은 경우, 설사 법이 정당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필요한 것이다."

말장난이 따로 없다! 정당치 않은 것이 결코 필요할 리가 없다. 

바꿔 말하면, 진정 정당한 것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법의 본질은 그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에 있다. 정당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법은 단순한 횡포에 불과하다.

필요성이란 횡포의 구실이며, 부당함을 윤색할 수 있는 유일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든 법은 그것이 정당한 만큼만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악인을 사회로부터 단절시켜야만 하는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벌로써 응징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악인은 죄를 지은 만큼 벌을 받는 것인데, 만약 악인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죄를 지었다고 보기란 어렵다.

그들을 내쫒음으로써 제거하되, 파멸시키진 마시라..

법은 아주 가벼운 폐해밖에 주지 못하는, 따지고 보면 사회적 행복을 극히 사소하게 훼손했을 뿐인 무수한 범죄행위를 벌하고 있다.

그렇게 처벌받는 범죄행위 중 상당수가 풍속에 관계된 것들인 반면, 그보다 훨씬 폐해가 심각하고 현실적인, 가령 탐욕과 배신, 배은망덕, 기만 등과 같은 죄악에 대해서는 별다른 처방을 내놓지 않는다.

한 남자가 여자를 겁탈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교수형을 당한다고치자. 물론 남자가 한 그것은 악행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폐해라고 해봤자 어차피 그 여자가 언젠가는 속하게 될 계층에 처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한 수전노는 어떤 불운한 가족이 불행으로 인해 파멸하게 되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어쩌면 그 가족은 끔찍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절반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지도 모르고, 나머지 절반은 내키는 대로 온갖 일탈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불행을 외면하고 방치하려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악랄한 수전노 한 명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음으로써 그로 인해 얼마나 험악한 폐해와 잡다한 범죄가 뒤를 잇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 수전노에게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다.

한 남자가 신체적 부실함이나 어떤 악습으로 인해, 자연이 다른 기관을 통해 제공하는 보다 섬세하고 신선한 즐거움 보다 자신의 성기를 통한 쾌락에 더 탐닉한다고 치자. 그는 결국 화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한 배신자는 어떤 가정의 신뢰를 악용하여 그 가정을 괴롭히고, 결국에는 파멸시키고도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 일로 두둑한 반대급부를 챙기기까지 한다. 여기에 어떤 균형이 있다고 할 수 있나?

특정 사안들에 대해 이처럼 터무니없이 너그러운 법의 행태 앞에서, 그 반대로 법이 얼토당토않게 혹독히 다루어온 사안들의 공평성이나 정당성은 당연히 의심스러워지는 게 아닐까?

도대체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바로 구태의연한 법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존중심이 문제다.

우리는 우리 삶의 풍조를 바꾸고 싶어도, 감히 우리의 법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수세기 동안 그래왔기에 당연히 법이 아닌 우리가 부당하디고 여긴다.


오. 그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일탈하는 자들을 설득할 가장 바람직한 논거를 쇠사슬이나 장작불에서 찾는 그대여. 그대는 땅을 개간하는 데 10프랑이면 될 것을, 당장 아무 수확이 없다고 자기 땅을 2만 프랑이나 들여 불태우는 정신 나간 사람을 닮았구나. 간수와 사형집행인을 마치 교육자처럼 바라보는 짓을 도대체 언제 그만둘 것인가?

경험이 그토록 빈번히 가르쳐온 것 즉, 불관용은 맹신을 낳을 뿐이며, 같은 인간을 멸하기보다는 깨우치는 것이 낫다는 선명한 진리를 도대체 언제쯤 받아들이겠는가?

낭트칙령(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앙리 4세가 발표한 칙령; 후에 루이 14세에 의해 폐기된다.)의 폐지로 프랑스의 100만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폐지하지 않았더라면 100만의 더 많은 인명이 프랑스를 수놓았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인가!

판결을 내리거나 서명을 하는 것은 사람을 가르치거나 조언을 해주는 것보다 수월한 일이다.

전자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가능한 반면, 후자는 자칫 치욕이 될지 모르는 수고로움을 요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조국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공평무사함이 아니다. 그건 일개 가면에 불과하다.

아뿔싸! 어쩌란 말인가. 흉포한 체제에 의해 억압당하는 저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들을 억압해야 한다는 숙명적 필요성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쇠사슬로 묶어 완전히 압살해 버림으로써 얻는 이득까지 가세할 모양새이다. 전체가 반드시 뒤집히는 건 아니리라. 이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채, 그 혼란 뒤에 기필코 따라올 국가의 모습을 조용히 가늠하는 철학자라면 요나처럼 훌륭한 예언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달랑베르는 말한다.

"윤리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론의 여지없는 이 유일한 진리를 기반으로 한다. 즉,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필요에서 기인하는 상호적 의무를 가진다는 것."

따라서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윤리의 원칙을 과감하게 파괴할 수 있다.


사람들과 더불어 항상 잘 지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 나 자신


누군가로 하여금 우리에게 호감을 갖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누군가의 적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그 똑같은 감정을 도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는 보편적인 시금석이며, 한 마디로 만인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감정이다. 

그로 인해, 심지어 가장 덜 정치적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는 같은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갈 간단한 방법을 손쉽게 터득할 수 있다. 세상을 살면서 고려해야 할 것은 딱 그 두 가지 이치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다 거기에서 유래한다.

(달랑베르의 <문학과 철학문집> 제5권, 96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