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올레가 장담하며 손을 털자마자, 등 뒤에서 몇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시선을 끌었다. 방금 이올레의 손에서 떠난 화살이 폭발하며 낸 소리가 교단 사람들의 주의를 끈 것에 더해, 일이 수상하게 흐를 것 같으면 전투를 멈추고 이리로 오라고 언질을 주었던 이올레네 용병들도 움직인 것이었다.

그렇게 달려온 이들 중에는 당연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옷 곳곳에 핏자국이 묻은 크시아도 있었다. 방금 이올레가 일부러 힘만 빼고 왔다고 말한 대로 둘이 상대한 교단 전사들이 그다지 크게 다치지 않았기에, 많은 피를 보지 않고 빠르게 이리로 올 수 있었던 듯했다.


“방금 그건… 설마 먼저 손을 댄 건가요?”


크시아는 이올레의 손에 쥐어진 활이 떨리는 것을 보고,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손을 대 봤자 흠집도 안 나던데? 실제로 저쪽도 내가 공격한 건 상관없다는 것 같고?”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잠깐이지만, 이올레의 목을 아주 강렬하게 조이는 촉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도 그럴 게, 기껏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난장판을 겨우 수습하고 왔더니 더 큰 아수라장이 열리게 생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오기도 전에 그렇게 무모하게 구는 게 어디 있어요! 저쪽이 저한테만 관심이 있다는 건 당신도 잘 알면서!”

“그렇긴 했어. 하지만 그 전에 한번쯤은 직접 확인해보려고 했거든.”


라네비아까지 이올레를 두둔하자, 그 촌극을 가만히 보던 영생자도 한 마디 거들었다. 여기서 저쪽이 자중지란을 벌여 봤자 이 상황에 별로 큰 변화를 주지도 못하니, 미리 거두절미를 할 셈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일단 이쪽을 다시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이 당신 입에서 먼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원래 참을성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고, 역시 볼일만 보고 빠질 생각이지?.”

“말하자면 그렇게 되지요.”


영생자는 라네비아와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이올레의 옆에서 이쪽을 돌아보는 크시아를 주시하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 두 눈에 비치는 푸르스름한 빛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크시아의 가슴에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한 겹씩 쌓여 갔다.

당장 목숨을 가져가라는 것은 아니고 원치 않는 영생을 멈출 수 있게만 해달라는 심정은 잘 알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종류의 부탁을 들어주기는 어렵게 느껴졌다. 한창때에는 사람을 살리는 일도 하던 처지이기도 했고, 원치 않는 죽음과 그보다 더한 일마저 당해본 입장이라 배부른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생자는 그 심정을 꿰뚫어보는 말을 던져 크시아를 다시 흔들었다. 마침 이올레와는 할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나기도 했으니, 슬슬 원래 용건이 있던 사람에게 차례를 넘길 때가 되기도 했다.


“편하게 이쪽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 ‘알아서’라는 게 뭔가요?”

“간단한 시험이라고 하면 되려나요.”


영생자는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이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렇게 대강 얼버무리는 말이 아니면 상대를 설득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자신도 충분히 이해했기에,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지은 표정에 어쩐지 가벼운 우울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여, 크시아의 마음도 절로 무거워졌다.

그 무거운 마음은 크시아를 영생자와 비슷한 행동으로 이끌었다.


“그, 그럼… 저도 한 가지만 물어보아도 될까요?”

“네.”

“정말 여기서는 가능성이 있을지 확인만 하는 거, 맞을까요?”


지금까지 있었던 소란을 전부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렇기에 미리 답을 들어 두었어야 하는 말이 이제서야 나왔다.


“흠…”


영생자도 그제서야 주교들이 거기까지는 안 듣고 멋대로 뛰쳐나갔다는 진실을 떠올리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아나 미하리는 지금도 근처에 없는 듯하고, 다른 교단원들은 방금 라네비아와 크시아가 때려눕히고 와서 당분간 이쪽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신세로 보였다. 그러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입장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랬기에 영생자는 조금 ‘대담하게’ 행동해도 괜찮겠다고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네. 아주 간단할 겁니다. 일단 손을.”

“에?”


영생자는 가장 간단한 것부터 시도해보는 것이라는 말로 세 사람을 안심시키며, 자신이 먼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손을 맞대보라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맨손으로요.”


영생자가 장갑과 반지를 벗으며 오른손을 좀 더 앞으로 내밀자, 크시아에게도 일단 이 상황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왼손에 낀 장갑을 벗어, 천천히 맨손 손가락 끝을 영생자에게 가져갔다.

그러자 둘의 손가락이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건…”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영생자의 손가락이 푸르스름한 사각형으로 갈라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이올레가 화살을 날렸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고, 그 점이 영생자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꽤나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어, 그게, 너무 길어지는 건 좀 피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게 좀 곤란할 것 같아서…”


영생자는 이렇게 된 원인과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직감했기에, 크시아의 부탁에 고개를 저었다. 대신 무너져내려가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 크시아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역시 촉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번에는 손목을 넘어 팔꿈치 언저리까지 사라져갔다.


“무, 뭘 하시는…”

“흠, 역시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영생자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크시아로부터 멀어진 오른손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고개를 저은 것은 덤이었다.


“신도들은 이따가 직접 타일러 두겠습니다. 일단 따라오시지요.”

“정말로 이렇게 끝내도 괜찮겠어?”


영생자가 발을 내미는 것을 보고 이올레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떠보자, 그의 입가가 조금 내려갔다.


“끝날지 어떨지는 저도 확신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실마리는 확실히 잡혔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