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횡단보도를 등지고 섰다. 구두 위에 음영이 졌다. 흰 머리카락이 지푸라기 끝처럼 바스라지며 투명한 레이스 원피스로 둘러싸인 등을 가렸다. 여자는 눈을 뜨며 뒤로 돌았다. 벽안은 횡단보도 너머에 선 소녀를 직시했다. 소녀는 양 손에 검은색 캐논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카메라는 소녀의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이 조이개를 조였다. 신호등은 푸른 눈을 감고 붉은 눈을 떴다. 여자는 양 팔을 활짝 벌린채 눈을 감았다. 입술이 꿈틀거렸다.



소녀는 셔터를 눌렀다.




동시에 여자가 신은 구두 끝이 그림자를 벗어났다. 회색 세단 한 대가 가쁜 숨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위를 내달렸다. 졸음을 쫓던 운전자는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다. 타격음이 났다. 공기가 몸을 떨었다. 육체가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충격에 의해 바스라진 헤드라이트는 투명한 칼날로 변해 여자를 난도질했다. 차창에 피가 흩날렸다. 왼쪽 무릎 뼈는 피부를 찢고 나와 하얬던 살가죽을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 쟂빛으로 물들였다. 여자는 차체에 떨어진 뒤 튕겨져 나와 얼굴부터 도로 위에 떨어졌다.



렌즈가 햇빛을 반사했다. 소녀는 입으로 날숨을 빠르게 내뱉으며 천천히 카메라를 내렸다. 얼굴은 창백했고, 동시에 번들거렸다. 소녀가 손가락을 붉은 버튼에 가져가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꺼내 구급차를 불렀다. 어린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검은 블레이저를 입은 성인 여성 셋이 손에 커피를 든 채 빠른 발로 자리를 떠났다. 



운전사가 세단에서 나왔다. 운전사는 젋은 여자였다. 여자는 자신이 살인범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토했다. 토사물이 시체를 더럽혔다. 그제서야 소녀는 두 눈으로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리고 천을 들추면 존재할 여자의 여성기를 떠올렸다. 어젯밤 고혹적인 표정으로 양 허벅지를 벌렸던 여자가 지금 같은 자세로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있었다.



소녀는 서서히 뒷걸음질쳤다. 어지러웠다. 제대로 걷기 힘들어 비칠비칠 거리며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호등 속 빨간 불. 싸구려 홍보 문구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적색 풍선 인형. 피에 잠긴 유리 파편. 주위 광경은 서로 뒤섞이고 흐릿해져 전장의 참상처럼 변모했다. 혼탁한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얼굴을 멈춘 소녀는, 한 노인과 눈을 마주쳤다. 노인은 생명활동을 추구하려는 의지조차 상실한 무감각한 두 동공으로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리가 떨렸다.



소녀는 뒤돌아 달렸다. 땀이 뺨을 타고 내렸다. 목에 건 카메라가 명치를 쿵쿵 때렸다. 몸에 울리는 통각을 참으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가로등 밑을 지나자, 양갈래 길이 나왔다. 소녀는 왼쪽으로 돌아 계속 달렸다. 집까지 가야만 했다. ?‍⬛형태로 생긴 생명체들이 허공을 원 형태로 맴돌며 웃음지었다. 총격당한 남성. 눈 앞에서 어머니를 살해당한 소녀. 계단을 구른 임산부. 참극을 맞이한 인간들의 비명이 ?‍⬛들이 내지르는 조소 속에 섞여있는 듯 했다. 소녀는 귀를 막았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이것은 유흥이 아니다.




어느덧 여자가 살던 집 앞이었다. 소녀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도어락을 풀고 거세게 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두웠다. 바닥은 글이 빼곡히 젇힌 종이 조각과 지우개 가루, 뜯지 않은 신품 화장품, 방치된 쓰레기로 가득했다. 소녀는 잡동사니를 밟아가며 가장 안쪽 방으로 갔다. 암실이었다. 왼쪽 벽은 책장이 늘어섰고, 오른쪽 벽에는 인쇄물이나 메모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컴퓨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소녀는 컴퓨터를 켜 카메라를 연결한 뒤, 파이널 컷 프로를 열었다. 총 재생 시간이 한 시간 사십 분에 이다르는 영상 프로젝트가 화면에 나타났다. 긴 영상을 군데군데 자르고 그 사이에 다른 영상을 끼워 넣었을 뿐인 간단한 프로젝트였다. 복잡한 후처리 이펙트는 하나도 없었다. 소녀는 마우스 커서를 옮겨 영상의 맨 끝 부분을 클릭했다. 여자가 아무런 말 없이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화면에 떠오른 동공이 소녀에게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표정처럼 보였다.



소녀는 시선을 피했다.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배우 성하린 감독 데뷔작 <흰 것보다 더 흰> -  영화계가 우스웠나’ 라는 평론문이다. 붉은 볼펜으로 휘갈긴 글씨는 본문 위를 뒤덮었다. 소녀는 그 문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서 적은 문장이 아니라 난도질하기 위해서 휘갈긴 자국에 가까워보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오로지 ‘잊혀짐‘ 이라는 글자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여자와 성교를 했을 때 생긴 상처자국이 여전히 흐릿한 형체로 남아있었다.




다시 화면을 보았다. 폴더를 열어 카메라 속 데이터를 확인했다. 소녀와 여자가 성교를 하는 사진, 여자가 고개를 푹 떨구고 멍을 때리는 사진 옆에 방금 전 촬영했던 사고 현장 영상이 있었다. 소녀는 파일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영상은 여자가 목숨을 잃을 때까지 한 점도 흔들리지 않았다. 프레임 밖에서 질주한 자동차가 여자의 뼈를 박살낼 때까지. 소녀는 영상을 파이널 컷 프로 안에 옮겼다. 화면 너머로 무언가 요구하던 여자는 그제서야 만족한듯 편안히 눈을 감았다.




영화는 완성되었다. 


















엽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