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이 단어를 들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파트너가 말하길 만약 그런 세계가 있었다면 세상은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실제로 본 디스토피아는 달랐다. 그곳은 비명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으니까..


눈을 떴다, 언제나 그랬듯 차가운 석재 바닥과 다 부서진 벽을 보며 실험실에서 다시 일어났다. 일어나고 나면 그때부턴 지옥이지만 지옥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머리 부분이 파손된 로봇이 나를 상시 감시 중이고 내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내게 벌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도 파손된 침대 근처에 놓인 은빛 쟁반 위 약을 먹는다. 물 따위도 없고 그 쓴맛을 고이고이 느끼면서 삼켜야 했다. 맛도 엄청 없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약을 먹고 할 수 있는 건 고통받는 것뿐이다. 가끔씩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들이 보이지만 아무 관심도 없다. 고개라도 돌려볼까..


"뒤적뒤적~"


"!?"


옆을 보자 사람 같은.. 아니 분명 사람이 보였다. 흰색, 파란색의 무언가가 있다. 그 순간 실험실에서 경보가 울렸고 창문 넘어 실루엣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런 불만도 없고 지금이 행복하다. 우리의 조국 제노기드 만세.'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른거려.. 구역질도 나고, 어떡하지? 이런 상황은.. 아파."


쓰러져 가는 실험실 처럼 내 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가 계속 아파 눈이 감긴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이 다시 보였다.


"너 내가 보이는 거지?"


(풀썩)


......


"오~ 얼굴은 초췌한데 몸매는 꽤나 괜찮은걸? 어이, 꼬맹이! 일어나 봐!"


"으으.."


얼마 동안 쓰러져있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그 검은 나비넥타이를 한 여자가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파란 머리에 강인해 보이는 상, 그와 대비되는 흰색의 정장의 그녀.. 내가 이렇게나 주변을 유심히 의식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세상이 넓게 보였다.


주변을 보니 연구원같이 생긴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항상 닫혀있던 창문도 깨져있었다. 이 여자가 벌인 짓일까? 분명 폭력적인 사람일 거라 생각 들지만 우선 말부터 건네보자.


"당신.. 천사인가요?"


"이 여자가 미쳤나.. 천사는 무슨, 하지만! 천국의 임무를 받은 여자라 알아둬!"


"저 죽은 거죠? 여긴 천국이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내가 이 망할 실험실 땅 파고 몰래 들어와 숨어들으려 했는데.. 어머!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어디 듣고 있는 사람 없지??"


그 여자가 내 뺨을 살짝살짝 치면서 말했다. 이 여자는 내가 지금까진 본 적 없는 여자다. 수상함이 감지되면 감시 로봇에게 알려야 하는데 어째선지 이 여자에게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 침입자로군요."


"뭐! 뭐! 그렇다 왜! 어디 이르게? 미안한데 지금 이 추잡한 실험실 깡통들은 내가 전부 해킹했어. 내 존재도 모른다고."


"쉿, 넌 이해 못 하겠지만 난 좀 이상한 성향이 있거든? 네가 마음에 들어서 살려주는 거니까 허튼짓 마, 아~ 지금 상황만 아니었으면 내가 먼저 허튼짓했을 텐데."


"그리고 맞아, 난 스파이야! 홀노마 공화국에서 보낸 정예요원이고 이름은 에스피 와이! 지금 우리나라와 전쟁 중인 제노기드의 비밀을 알려고 왔지. 이걸로 플랜 1은 성공!"


오늘 아침만 해도 평소와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그 여자 에스피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다. 얼굴에 먼지와 상처가 묻어 엉망이 된 나와 달리 그녀는 매우 하얀 피부에 단정한 머릿결까지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나 제노기드 사람인데도 홀노마의 여자를 동경하고 있는 건가?


"에스.. 피.. 와이.. 전 레나에요."


"레나라 얼굴만큼이나 귀여운 이름인데? 제노기드 출신 치고는 괜찮아! 그래서 말인데 레나 이리 잠깐 와 볼래?"


그녀의 손을 잡고 아픈 몸을 일으켰다. 에스피는 천천히 나를 부서진 창문 쪽으로 데려갔고 평생 못 보고 죽을 줄 알았던 창문 밖을 보여주었다.


"저거 보이지? 실험 일지. 내가 직접 읽어줄 테니 두 귀로 들어봐."


에스피가 말하길 제노기드는 홀노마와 전쟁 중이었었다. 막강한 인구를 가진 제노기드는 자신들이 이길 거라 장담하고 홀노마를 침공했으나 전쟁은 양측에게 상처만을 남기고 제노기드는 수도에 핵까지 맞으며 위태해져 갔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 제노기드는 자신들의 AI 기술을 활용해 국민들의 머리에 칩을 심어 인간을 전쟁의 기계로 세뇌시켰다. 나라는 점점 싸늘하고 황폐한 디스토피아가 되었고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나를 막강한 인간 병기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였다.


"저는 의심스러운걸요. 그 쪽이 저를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된 말 하는 거 아니예요?"


"거 참 의심도 많은 여자구먼! 그래서 여기서 약 쳐먹으면서 있겠다는 거냐? 아님 나랑 같이 나가겠다는 거냐?"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가 지금 이곳을 나간다면 나는 국가의 배신자가 된다. 다신 고국에 돌아가지 못할 거고 누군지도 모르는 엄마 아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정을 할 수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에스피 와이란 여자, 보고만 있는데도 마음이 끌린다. 평생 아무런 ㅅㄹ도 받지 못한 내게 사랑을 줄법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직도 고민 되냐? 그럼 말이야.."


"힉!"


에스피의 입술이 내 입과 마주쳤다. 이 이게 뭐지? 홀노마만의 문화? 입으로 독약을 집어넣은 건 아닐까 두려움도 들었다. 그녀가 입맞춤을 끝내고 다시 물었다.


"이걸로 내가 널 신뢰하고 있다는 건 증명했어, 이제 결정해. 나갈 거야? 말 거야?"


..... 그 입맞춤이 신뢰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가 날 정말로 신뢰하고 있다면,


한번 믿어보겠다.


"저, 나갈게요!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 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게 해주세요!"


"좋아! 우선 나를 따라.."


"경보! 경보! 침입자 발생! 즉시 전투태세를 취하라!"


에스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보 소리가 울렸다. 실험실 전체가 붉은 조명으로 마치 살인 현장 같았다. 로봇들이 재부팅을 시작했고 곧 깨어나 우릴 공격할 것이다. 에스피는 예상했다는 듯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긴 뒤 경계하기 시작했다.


"레나, 내가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저번에 댓글 보니까 디스토피아, SF, 첩보물이 좋을 것 같아서 이 3개의 장르로 한번 써봤어.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한 3편은 나와야 할 거 같다. 장기 연재 생각은 없고 지금 2편 중간까진 썼어. 오늘은 이만 잘게, 좋은 밤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