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박한 사이렌 소리 속, 에스피는 나를 두고 혼자 창문 밖으로 넘어갔다. 그런 에스피를 보면서 두려움과 과연 그녀가 정말 나를 지켜줄지에 관한 기대감이 공존했다. 에스피는 실험실을 살펴보더니 눈을 부릅 뜨고 총을 들었다.


잠시 뒤 전구가 깨지면서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 깜짝할 사이에 총소리와 무언가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고 에스피의 옆엔 로봇의 잔해가 널 부려져 있었다. 어느 순간 사이렌도 꺼지더니 적막함이 맴돌았다.


"하~ 깡통 새끼 겁나 빠르네"


"방금 뭐였죠..?"


"뭐긴, 이 깡통이 내 대갈통 쏘려고 해서 부순 건데? 어이 잔말 말고 이리 와."


에스피는 창문 너머로 나에게 팔을 벌렸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는 내가 깨진 유리조각에 다치지 않도록 나를 껴안아 들고는 친히 바닥까지 옮겨주었다. 확실히 에스피는 내가 전혀 무겁지 않았나 보다. 우린 실험실로 향했고 에스피는 또 로봇들이 올 것을 대비해 총을 손에 들었다.


사이렌은 꺼졌지만 아직 우린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조금만 빗겨나가도 금방 무너질 것은 실험실, 특히 천장 부분은 금이 굉장히 많이 가서 에스피가 실수로 천창에 총을 쏜다면 우린 그대로 깔릴 것이다.


이쯤 되니 에스피의 말이 믿겨진다.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까지 나를 키울 정도로 제노기드의 상황이 급박했다 추측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험실 중앙으로 가자 수많은 로봇들이 붉은 불빛을 내며 어둠 속에서 다가왔다. 에스피는 귀찮은 듯이 혀를 내둘렀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그럼 여기서 어떻게 나가실 생각이세요?"


"그야 얘네들 부수면서 가야지? 원래는 실험 정보만 알아내고 나가려 했는데 너 구하느라 들켜버렸거든, 그러니 이제 스파이처럼 멋지게 나가는 건 불가능해."


"침입자 감지, 저격."


"어이 깡통들, 내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적어도... 내 여자는 건들지 말자?"


그러나 로봇들이 이를 들어줄 리 없었고 곧바로 우리들에게 돌진하였다. 에스피는 주머니에서 작은 스위치 여러 개를 꺼내더니 주변에 살포하였다. 로봇들이 전방위에서 총을 난사하자 스위치들이 터지더니 주변 전체가 잠시 파란 전류로 뒤덮였다.


"예스! 레나 서둘러!"


로봇들은 전류를 맞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잠시 동안의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에스피는 나의 팔을 붙잡은 다음 실험실 끝으로 달려가 나를 찬장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혼자 로봇들에게 다가갔다.


"아니지, 만약 레나가 살았더라도 나랑 나가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너희들 실험체였을 거 아냐? 레나는 나랑 같이 갈 거야. 알겠냐?"


로봇들이 총을 쏘자 에스피는 실험대를 방패 삼아 막은 뒤 거의 빛의 속도로 달려가 로봇 2대를 박살 냈다. 순식간에 로봇들의 감지 시스템을 교란시킨 건지 로봇들조차 그녀를 맞추지 못했고 그녀는 그새 로봇 한 대를 더 부셨다.


하지만 로봇의 수가 하도 많다 보니 에스피 역시 공격을 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로봇들과 에스피 간의 대치가 이루어졌다. 로봇들은 다시 일렬로 모아 전방위로 총을 쏘았고


"윽!"


결국 에스피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역시 로봇의 레이저 총을 버티긴 무리였는지 그녀는 땅에 주저 앉았다. 로봇들은 그녀를 조준하며 천천히 다가왔고 그러자 에스피는 금이 간 천장을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너네들 아무리 전쟁통이라도 부실 공사하면 너네만 손해인 거 아냐?"


로봇들이 달려오자 에스피는 저 천장 위에 나사를 쏘았다. 그러자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로봇들은 막대한 콘크리트 잔해에 깔려 그대로 정지되었다.


"레나! 이제 나와도 돼! 빨리 가자!"


"네.. 근데 저 몸이.."


"에? 넌 또 왜 그래?"


나 역시 로봇의 총에 맞은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복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피로 옷이 차가워져서야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레나!? 너.. 너도 맞은 거야!?"


"네.. 그런데도 그렇게 아픈 느낌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에스피가 내 옷을 들춰 상처를 확인해 보았지만 상처는 금세 자연 치유되고 있었고 살짝의 통증 말고는 정말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 통증마저 이젠 사라졌다.


"이상한 몸일세.. 제노기드 놈들 대체 무슨 실험을 하던 거지? 어쨌든 레나 너 정말 안 아픈 거 맞지? 우와! 다리에 털 하나도 없네?"


그리고 그때 또 다른 로봇 한 대가 나타나 우리를 찾고 있었다. 에스피는 부상 상태 인지라 이 상태에서 들키면 끝장이라 판단하고는 실험대 옆에 있던 환풍구를 열어 나를 피신시켰다. 에스피도 곧 뒤를 따라갔다.


"대충 여기 지도는 다 외워놨거든? 바리케이드만 뚫으면 나갈 수 있어, 망할 깡통들만 피하면 되는데 말이지?"


그렇게 좁은 환풍구 속을 기어다닌 지 얼마나 됐을까, 에스피는 자신이 기억한 대로 길을 찾아 나섰다. 에스피가 말하길 이런 폐쇄적인 장소에서 로봇들이 환풍구를 가만히 뒀을 리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각오한 표정이었다.


"레나, 잠시 멈춰봐. 아~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놈들이 환풍구에도 비밀번호 붙여놨구먼? 한심한 깡통들 같으니라고, 기다려봐."


환풍구의 출구 앞에서 에스피는 나를 조용히 시킨 뒤 환풍구 앞에서 비밀번호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음과 동시에 이 공간에 대해 고민하였다. 방금 전 연구실에서 로봇들이 판을 친 것과 달리 이 환풍구는 너무나도 조용하였기 때문이다.


"S22₩에.. 여기다 특수문자 하나 더.. 그리고 1f8%46.. 어라라? 왜 틀렸지?"


"다시 잘 생각해 봐요! 아마 실수한 걸 거예요."


잠깐, 무언가 탁탁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작고 미미하지만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물체가 오고 있는 느낌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곳에 대체 누가?


"어.. 에스피 씨..? 혹시 이상한 소리 안 들리나요?"


"엉?"


"공세 개시."


뒤를 보니 저 환풍구 먼 끝에서 바퀴벌레같이 생긴 소형 로봇 군단들이 떼거지로 달려들고 있었다. 작았던 기계음은 곧 실험실에서 들은 쥐의 비명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로 변했다.


"또 로봇들이! 에스피 씨 어서 서두르세요!"


"아!! 좀 기..기다려봐! 그러니까 여기 방정식을!! 마 맞나??"


에스피도 나도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로봇들은 점점 가까워졌고 나의 발끝에서 한 18m 떨어진 걸로 추정된다. 이 근처에 다른 통로는 없고 오로지 비밀번호로 막힌 통로 하나뿐이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았지만 폐쇄적 공포감만 거세질 뿐이었다.


"히이익!! 에.. 에스피 씨!!!!!"


"씨발.. 이 총 줄 테니까 니 니니..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벌써 7m, 에스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암호를 절반 정도 풀었고 로봇들은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기세로 쫓아오고 있다. 에스피가 준 총을 쏴보지만 아무리 쏴봐도 막대한 물량의 로봇들을 전멸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5m, 슬슬 다리를 접고 있다. 에스피는 이거다 싶은 표정으로 마지막 암호를 눌렀다. 이제 1m.


"여기서 SPYLN를 누르면!!"


[암호 해독]


암호가 풀렸고 로봇들로부터 거의 0.5m 거리에서 우리는 문을 뚫고 나와 환풍구에서 탈출했다. 환풍구 밖은 꽤나 높은 곳이었지만 우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가 떨어진 곳은 아마 연구실인 듯했다. 칠판도 보이고 여러 서류들과 약품도 보였지만 환풍구의 로봇들이 따라나와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었기에 곁눈으로만 보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