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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화들










수업 시간 동안 선생이 말한 단어들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칠판에 적힌 단어들을 문제집과 단어장에서 이미 보았다. 수업을 듣지 않은 학생들은 칠판에 적힌 단어들에 관심조차 없었다. 선생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채 혼잣말을 하며 사십오 분을 지냈다. 남은 오 분은 종례를 위해 활용했다.



차렷. 반장이 말하자 학생들이 전부 일어났다. 경례 신호가 떨어지자 학생들은 허리를 숙였다. 선생은 그 순간만큼은 공경받았다. 때 이른 종례가 끝나자 종이 울렸다. 5교시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담임은 알릴 말이 없다고 했다. 체육이 끝나면 교실에서 가방을 챙겨 안전히 돌아가라고 말하고는 교실을 나섰다.



담임이 나가자 교실은 소란스러워졌다.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반을 나가는 소리였다. 남학생들은 보여져도 딱히 상관없다는 이유로 반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반을 빠져나간 여학생들은 탈의실로 갔다. 탈의실은 화장실 옆에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반보다 작은 크기였지만, 책상과 의자가 배치된 반에 비해서 오히려 실면적은 더 컸다.




탈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학생은 누군가가 던져놓은 생리대를 발로 차 쓰레기통 옆으로 밀어놓고, 옷을 벗었다. 속속들이 여학생들이 옷을 들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학생들은 플러그에 고데기를 연결하고 쭈그려 앉아 머리를 폈다. 교복 밑에 미리 운동복을 입고 온 학생들은 팔을 십자로 교차시켜 답답한 옷을 벗어낸 뒤 바로 환복을 마쳤다. 반면 운동복을 품에 안은 학생들은 막 웃옷을 입는 참이었다.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속옷을 입었다. 민무늬 속옷이 가장 많았고, 회색 스포츠 브래지어도 있었다. 개중에는 기능적인 면보다도 어른이 색기를 과시하기 위한 용도를 더 중시해 만들어진 속옷도 있었다. 육체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키가 크고, 누군가는 체구가 작다. 누군가는 음모가 속옷 밖으로 삐져나왔고, 누군가는 털이 나지 않았다. 치마를 입은 채로 바지를 입고, 치마를 벗으면 환복이 끝났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이 분 전에는 안에 있던 모든 학생이 옷을 갈아입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자 고데기를 말던 학생들도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플러그를 뽑고 일어났다.




하윤은 모든 학생이 탈의실을 떠나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발치에 떨어진 생리대를 쓰레기통에 넣고, 바닥에 체육복 상의를 둔 뒤 빠르게 웃옷을 벗었다. 마이와 조끼를 벗어 팔에 말자 입구에 서 있던 유린과 눈을 마주쳤다. 유린은 출석부와 열쇠를 품 안에 안고 있었다.




하윤은 최대한 유린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얼굴을 피하고, 급하게 체육복 상의를 입었다. 남에게 속옷을 보였기 때문에 불안함을 느꼈다. 유린은 감정을 알아챈 듯 했다. 조금 전과 달리 불안에 스며든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모습은 어제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속옷을 드러냈을 때 보인 무심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혹여 눈이 마주치더라도 하윤은 곧바로 눈을 피했다.




“반에 놓고 온 건 없지? 내가 당번이거든.”




유린은 교복을 한 꺼풀 벗으며 물었다. 미리 입어 놓은 체육복이 배꼽 위에서 살랑거렸다. 암적색으로 물든 소매 끝이 바깥쪽으로 돌돌 말렸다. 유린은 팔을 몸 안쪽으로 굽히며 말린 소매를 풀었다. 다음으로 치마를 내렸다. 하윤은 흙이 달라붙은 신발을 벗고, 바지를 입으며, 유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응.”




“그래. 아, 종 울리겠다.”




두 사람은 함께 탈의실을 나섰다.




교사를 나설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동안 종이 울렸고, 계단이 끝났다. 두 사람은 일층에 도착하자마자 형식적인 인사만을 나누고 헤어졌다. 마른 소나무가 아치형 포치 앞에 서있다. 교문에 이르기까지 가로수로 심은 소나무는 총 열 그루로, 모두가 균일한 간격으로 나란히 서있다. 가지에 달린 이파리는 이발을 한 남자의 머리카락처럼 짧았다. 가로수 앞에 핀 튜베로즈는 마치 소녀가 잃어버린 머리핀 같았다.




운동장에는 두 축구 골대 말고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하늘에는 미세먼지가 뿌옇게 끼었다. 체육 선생이 모습을 나타냈다. 체육 선생은 팔에 주름이 자글한 사십 대 남성으로,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늙어보였다. 반장이 체육 선생의 뒤를 따라 배드민턴 채와 셔틀콕이 잔뜩 든 박스를 들고 와 바닥에 놓았다. 학생들은 선생 앞에 줄을 섰다. 유린은 체육 선생에게 출석부와 열쇠를 가져다주었다. 체육 선생은 손에 쥔 축구공을 바닥에 떨어트려 발로 잡은 뒤 출석을 불렀다. 빠진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선생은 남자는 축구, 여자는 배드민턴을 자율 학습하라고 지시한 뒤 골대에 등을 기댔다. 남학생들은 공을 가지고 흩어져 각자 팀을 나눴다. 분배는 빨랐다. 뚱뚱하거나 달리기가 느린 학생은 골키퍼나 수비수로 빠졌다. 나머지는 사실상 전부 공격수라고 해도 무방했다. 곧 경기가 시작했다. 선생은 노쇠하여 수업에 참여할 기력도 없다는 듯 그대로 서서 남학생들이 축구 경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운동장에서 소년들이 달음박질쳤다. 공을 찰 때마다 먼지는 열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처럼 흩날렸다. 여자들은 배드민턴 채를 휘두르는 척 딴짓하거나 아예 운동장 밖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몇몇 발이 넓은 학생들은 남자들을 보며 훈수를 던졌다. 빠르게! 더 빨리 뛰어! 재촉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꽥꽥거렸다.




유린은 운동장 바깥, 교문 맞은편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민서는 다른 친구와 함께 배드민턴 채를 휘둘렀다. 셔틀콕은 바람을 가르며 채 사이를 왕복했다. 축구공과 셔틀콕은 타격당할 때마다 형체를 바꾼다. 다른 궤도로 날아가고, 힘에 눌려 일그러진다. 변하지 않을 때는 오로지 가만히 있을 때 뿐이다. 유린은 단 한 번도 셔틀콕을 바꾸어낼 수 없었다. 지금은 도무지 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주위에서 핸드폰을 만지며 떠들어도 검지로 툭툭 손등을 치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시늉만 했다.




셔틀콕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서자 하윤이 보였다. 하윤은 체육 선생의 앞에 섰다. 선생은 우악스럽게 팔짱낀 채 하윤이 하는 말을 들었다. 하윤은 자기가 가져온 라켓을 들고 오고 싶다는 핑계를 대어 선생에게서 반 열쇠를 넘겨받았다. 달구어진 철이 태양광을 반사해 은빛으로 번뜩였다.




유린은 셔틀콕을 상자에 놓고 몰래 하윤을 뒤따라갔다. 하윤이 교실에 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유린과 체육 선생 뿐이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대리석 복도에 비친 두 인영 위로 흙이 떨어졌다. 신발에 묻어 있던 흙이다. 교사들이 수업을 진행하는 소리가 반 밖으로 세어나와 복도는 마치 누군가가 쑥덕이는 소리로 무성해진 것만 같았다. 유린은 사방을 감싼 벽에 눈과 입이 달려있고, 그 눈이 자신들이 할 행위를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반 앞에 도착하자, 주위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반에 도착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삼 분만에 도착했다. 하윤은 열쇠로 앞문을 열어 반 안에 들어갔다. 유린은 뒷문에 몸을 바짝 붙여 숨을 내뱉었다. 옆반에서 담임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몸을 일으켰다가는 머리카락이 보일지도 몰랐다.




문의 양창에 떨리는 눈동자가 비쳤다. 유린은 렌즈를 양창에 가져다 댔다. 렌즈에 비친 하윤이 흐려졌다가 도로 뚜렷해진 순간 유린은 촬영 버튼을 눌렀다. 하윤은 한 걸음, 두 걸음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처음 향한 곳은 자기 자리였다. 하윤은 책상 걸쇠에 걸린 라켓백을 들어 지퍼를 풀었다. 라켓백 안에는 배드민턴 채 하나가 들어있었다. 채의 테두리는 번들거렸다. 하윤은 배드민턴 채과 라켓백을 자리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 순간, 몸이 회전한 아주 짧은 순간 하윤은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절도를 저지르면서도 표정은 태연하다. 이미 예견된 항해를 떠난 항해사처럼 변함없다. 유린은 두근거렸다. 하윤은 유린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책상 하나. 책상 둘…마지막 칸의 중간 자리에서 발은 멈췄다. 같은 횟수만큼 걸으면 문을 열 수 있을 거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을 욕하던 여학생의 자리 앞이었다.





방금 전 교실에서 아이들이 합창했던 영단어들을 옆 반 아이들도 따라했다. 우렁차게 울린 영단어는 하윤이 여학생의 가방을 여는 소리마저도 지워버렸다.





방금 전 교실에서 아이들이 합창했던 영단어들을 옆 반 아이들도 따라했다. 우렁차게 울린 영단어는 하윤이 여학생의 가방 안을 뒤적거리는 소리마저도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