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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화들








(위에서부터 하윤, 유린)


유린은 카메라를 줌인했다. 물건을 주머니에 담는 손을, 그 다음으로는 냉랭한 표정으로 도둑질에 집중하는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화면을 한 번에 클로즈 아웃하자 도둑의 전신이 액정에 담겼다. 조잡한 범행이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윤은 가방 안에서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정렬했다. 델가드 샤프 하나. 반절 닳은 지우개. 전선을 돌돌 말아놓은 고데기. <헤어 디자이너를 위한 대화 강습법> 한 권. 뚜껑을 열면 손거울로 된 면이 드러나는 사각형 화장품 케이스. 그리고 바비 브라운제 섀도와 붉은 염료가 담긴 손가락 크기만한 검정 통 하나. 하윤은 목적으로 삼았던 화장품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 지퍼를 닫는 소리는 한 소녀가 내지른 장난어린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옆반 학생이 던진 농담이었다. 


하윤은 화장품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 라켓백 안에 넣었다. 손잡이 부분에 틴트를, 채가 들어가는 부분에 섀도를 넣었다. 도로 잠근 라켓 가방을 책상 걸쇠에 걸자 책상 위에는 배드민턴 라켓만이 남았다. 하윤은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앞문으로 나가 문을 잠갔다. 그대로 계단을 밟으려던 찰나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하윤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손에 쥔 라켓을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자신이 라켓을 가지고 나왔을텐데, 반에 들어간 기억이 없다. 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영상 촬영을 종료하자, 핸드폰에서 삐빅하는 소리가 났다. 유린은 앨범을 열었다. 흐릿하게 분해된 나신 옆에 영상 파일이 있다. 영상을 재생하자 유린의 숨소리가 재생됐다. 화면은 흔들렸지만 하윤이 물건을 훔치는 모습만큼은 또렷했다.


지금 자신이 흥분한 이유는 과연 악행을 하였기 때문인가. 자신이 조종한 누군가가 파멸하는 순간을 담았기 때문인가. 그 대상이 오직 한 사람이기 때문인가. 유린은 알지 못했다. 지금 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은 미증유였다. 유린은 계단을 내려가며 자신과 공범이 행한 악행을 음미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반으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종례가 없으니 바로 반을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몇몇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몰래 가방을 챙겨가 반에 올라가지도 않고서 학교를 떠났다. 유린은 물건을 도둑맞은 여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가방을 드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는 가방을 굳이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깨에 집어 들고서 친구와 웃을 뿐이었다.



유린은 가방을 챙겨 화장실로 갔다. 학원 버스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삼십 분 남았다.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으려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윤이었다. 유린은 하윤을 잡아 끌어 변소 안으로 데려왔다. 하윤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주머니에서 검정 상자와 통을 꺼냈다. 유린이 가져오라고 명령했던 물건들이었다.


“자아.”


유린은 최면 어플리케이션을 하윤에게 보이며 말했다.


“허리 숙여.”


하윤은 말하는 대로 했다. 유린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하윤의 턱을 잡았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밑에 창백한 얼굴이 있다.  턱을 집은 엄지손가락이 파르르 떨었다. 유린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제 넘어선 경계선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도덕 강박으로, 인간이 지켜야하는 윤리의 마지막 선이며,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게는 그 선을 넘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땅히 가지는 당연한 욕구이다. 미성년이 담배를 피면서 성인에게 욕설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지금껏 참아온 기초적인 욕망은 저 창백한 얼굴에 이끌려 부풀어 올라 경계선을 넘어섰다. 한 번 부러진 경계선은 지금 뺨에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처럼 부스스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무색이며 무한한 황야가 나타났다.



큰 유방에 작은 유방이 눌렸다. 유린은 틴트를 열어 하윤의 입술에 발랐다. 하윤은 저항하지 않았다. 염료 묻은 붓이 닿자 붓털은 부스스 수십가닥으로 흐트러졌다. 염료를 바르는 동안 유린의 목뼈가 꿈틀거리고 광대뼈가 움찔거렸다. 관능이 세어나온 흔적이었다. 유린은 염료가 위 아래에 완전히 배어날 때까지 손을 움직였다. 갈라진 피부가 수분을 빨아들여 색을 온전히 머금었을 때, 유린은 손을 땠다. 입술은 등대가 뿜은 불빛처럼 붉게 변했다. 입술에서 흘러내린 염료가 턱을 타고 내렸다. 유린은 턱에 번진 붉은 흔적을 엄지 손가락으로 훑었다. 등대에서 발한 빛이 손가락까지 번졌다.


둘은 붉게 더럽혀졌다. 입술은 첫경험을 마친 여성기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린은 몸을 떼어냈다. 엄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고 틴트 뚜껑을 하윤의 교복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염료 병과 아이 섀도를 전부 변기 안에 내던졌다. 변깃물은 색소를 머금은 파우더와 틴트 용액에 물들었다. 팔레트 위에 아무런 물감이나 뿌려 섞은 듯 탁해졌다. 썩은 나뭇잎에 피가 점철된 색이었다. 유린은 변깃물을 내렸다.


물살이 소용돌이쳤다. 화장품은 부서진 놋배의 잔해처럼 물결 위를 첨벙였다. 사라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허사였다. 변기는 꾸륵꾸륵 내장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내며 화장품들을 전부 삼켜버렸다. 하수구에 걸려 역류하는 일 없이 전부 먹어버렸다. 변기는 정화된 물을 뿜어내며 트름했다.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유린은 변소를 나섰다. 화장실에는 둘 밖에 없었다. 유린은 수도꼭지를 틀어 온수를 켰다. 물이 흘렀다. 세면대에 고인 물이 염료를 씻어냈다. 유린은 손을 털고, 아직 변기 앞에 선 하윤을 양팔로 안으며 말했다.


“잘 가.”


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나와 계단에서 헤어졌다. 하윤은 계단을 올랐고, 유린은 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두 사람은 멀어져갔다. 유린은 최면을 해제하고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일층으로 내려가자 마스크를 낀 여자가 계단을 박차 유린을 스쳐지나갔다. 유린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포치를 빠져나오자 운동장이었다. 비명소리가 머리 위에서 웅웅거렸다.

유린은 달렸다. 



“네, 다들 눈을 감고 집중해주세요."


이른 조례는 이러한 한 마디로 시작했다. 학생들은 모두 눈을 감았다. 소매를 스치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초침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제 반에 도둑이 들었다는 제보를 들었습니다. 누가, 무엇을 도둑맡았는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본인이 바라지 않으니까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이 소식을 믿고 싶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전하도록 하죠. 이 반에 그런 행동을 한 학생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용서를 구하면  이 실망도 잠재우고, 자백한 당사자의 용기를 크게 살 겁니다. 그러니 만약 물건을 훔쳐간 사람이 이 반에 있다면 지금 손을 들어주세요. 선생님이 나중에 비밀리로 그 사람만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혹시 물건을 훔친 학생이 있으면 지금 손을 들어주세요.”

아무도 넘어가지 않았다. 실눈을 뜨고 있는 학생이 없으리라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 손을 드는 멍청이는 없다고 믿으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자기 자신이 혹여나 눈을 떠서 손을 든 사람을 보게 되기를 두려워했다.  말을 꺼낸 선생 자신도 누군가가 손을 들어올리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선생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없나요? 알겠습니다. 아무도 안 들었네요. 그럼 다들 눈을 뜨고 서랍과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주세요. 괜찮습니다. 지금 교칙을 위반하는 물건이 나와도 지적하지 않을거고, 저는 못본 걸로 하겠습니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설령 담배나 술이 나와도 지금은 용서하겠습니다. 부디 꺼내주기를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들 꺼내주셨군요. 그럼 지금부터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방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으니, 부디 이 중 물건을 훔친 범인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학생들은 번거로워하며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선생은 자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뒤졌다. 도둑은 없었다. 아이섀도와 틴트를 훔친 범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장품은 정화조 안을 떠돌고 있었다. 선생에게는 범인을 찾을 능력이 없었다. 사라진 물건을 찾을 능력도 없었다. 어쩌면 그냥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무능한 누군가가 같은 반 학생에게 덤태기를 씌우려고 했을수도 있다. 당사자를 제외한 학생들 사이에 그런 믿음이 싹텄다.


하윤을 바라보는 사람은 유린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