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실제로 라이라랑 라네비아가 이 정도 사이가 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합니다)


잠시 후.

높은 산 위에서 찾아온 사제들은 우선 무슨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을 바깥을 어지럽히고 있는 짐승들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사원에서 그 병이 시작된 것으로 파악한 날이 크시아가 이 여관에서 깨어난 바로 그날인 것 같더라는 말이 나오자, 자리에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크시아에게 쏠렸다.


“저, 그러니까… 당장은 어쩌다 보니 시간이 겹치게 된 게 아닌가 싶다는 정도라는 거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첫 말은 조금 헛돌았지만, 크시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사제들이 말한 그날부터 어째선지 주변 시선이 덜 부담스러웠던 게 오늘도 마찬가지여서, 그 다음에 이어진 대화에서도 물 흐르듯이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대화의 결론이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좋겠다’로 끝난 것도 예측했던 대로라, 사제들과 크시아는 사뭇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그 다음으로 사제가 꺼낸 말이 문제였다.


“다음은 좀 개인적이라고 들릴 수 있는 이야기라… 자리를 잠깐 옮기죠. 조용한 방이 있을까요?”

“있긴 한데요…”


라이라가 적당히 크고 아늑한 방을 그들에게 안내해주었다. 그러고는 사제들과 이올레 일행이 자리를 잡는 것을 지켜보고 자리에서 물러나려는데, 진중한 인상의 사제 한 사람과 크시아가 거의 동시에 라이라를 돌아보았다.


“당신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라, 잠시 같이 있어주어야겠는데요.”

“그렇다는데요?”

“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자리에 내려온 사제들이 보기에 라이라의 행동은 큰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원 쪽에서 추측한 게 사실이라는 가정 하의 이야기라는 조건이 걸려 있긴 했다만, 그것만 해도 라이라와 라네비아에게는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다만 그 추측 중 하나가 이올레와 케스티의 마음에 걸렸다는 점은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신? 그 ‘왕이 신을 맞이하리라’는 소문에 나오는 그 신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쯤이면 벌써 주민들에게서 여러 번 들어서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들으셨군요.”

“그 말대로야. 당분간 여기서 일거리를 받을 생각이거든.”


이올레는 전날 자신들이 가져온 야수 시체를 떠올리며 사제의 반응을 떠보았고, 사제는 그건 맨 처음 꺼낸 화제가 아니냐며 이야깃거리를 막 입에 올랐던 ‘신’ 쪽으로 되돌렸다. 그러자 케스티는 가만히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하고, 둘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나치듯 들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입에 올려 주목을 끌었다.


“그 신을 맞이한다는 왕이 열병 왕이라 불리던데, 이번 열병이 그 왕이라는 존재의 권능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권능이라… ‘있지 않을까’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높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래저래 석연치 않은 점이 많으니까요.”

“당신들 생각도 같네요.”


그 권능 비슷한 역병을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에 관한 이야기가 짧게 더 오간 뒤, 사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다른 자리에서 주고받을 말이 많으니, 오늘은 이만 자리를 비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올레도 그러려고 생각한 바 있었기에, 양쪽은 이따가 다시 보자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훈훈하게 방을 떠났다.

그런데 라네비아는 케스티의 뒤를 따라갈 것처럼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것이라도 있는지 짧게 귓속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케스티를 먼저 내보내더니, 자신은 안에 남아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이지,”


라네비아는 혼자서 멀뚱거리고 있는 라이라의 앞에 살며시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크시아까지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조금 전 손님들을 밖으로 배웅해주기 위해 점장과 함께 떠나는 바람에 당장은 둘이서 미리 말을 맞춰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사적으로 좀 할 말이 있어서.”

“네? 사적인 거라면 설마… 혹시 요 며칠 동안…”

“응, 맞아.”


우물쭈물거리는 말에 답하는 라네비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라이라의 등골을 얼렸다. 


“뭐,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마. 나도 자초지종은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그, 그렇죠. 슬슬 다들 알아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실은 아직 그렇게 깊은 감정까지는 모르겠고…”

“정말?”


라네비아는 라이라가 우물쭈물대며 꺼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던 크시아는 시선을 짧게 마주치기만 해도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또렷한 호감을 품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는데, 라이라는 그런 수상쩍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라네비아의 머릿속에 ‘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제들이나 아키카 점장이 말한 대로 크시아가 정말 그런 존재가 되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내내 괴롭혔던 그 묘한 색기를 어떻게든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라이라를 조금은 강하게 추궁하려 했던 라네비아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져 갔다.


“정말로 정신이 흐릿해지거나 온몸이 달아오르거나 한 적은 없었어?”

“그게, 실은 크시아 쪽에서 먼저 이쪽을 배려해주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그 말은 당신이 아는 크시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건가요?”

“아, 맞아. 어떻게 된 거냐면…”


라네비아가 꺼낸 이야기는 라이라도 크시아 본인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크시아가 걱정하던, 이 마을에서 신의 샘에 다녀오기 전보다는 확연히 나아져 가고 있었다. 라이라가 그 사실을 알려주니, 라네비아의 눈동자가 천천히, 그리고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네, 지금까지는요. 그리고 오늘 새벽부터는 그…”


라이라가 중요한 말을 막 꺼기 직전에,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이어 방 문이 활짝 열렸다. 둘이 나란히 고개를 돌리니, 아직도 내려오지 않고 있는 라네비아를 데리러 온 크시아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둘이서 할 이야기는 다 끝났나요?”

“아, 아직…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게 남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