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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은 하윤과 손을 잡았다. 반 뒷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건드렸다. 두 사람은 문을 닫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 중앙에 도달하자 유린은 손을 떼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아직 교내에는 사람이 남아있다. 선생이나 경비가 지나갈지도 모른다. 혹시 학교에 무언가 놓고 온 학생이 계단을 올라올 수도 있다. 유린은 미지의 가능성을 속속들이 생각하며 떨었다. 반면 하윤은 유두를 내보이고 있음에도 조용하다. 유린은 그 모습을 보며 불현듯 전 날 하윤이 맨정신이었을 때 보인 반응을 떠올렸다. 홍조.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수줍음.




지금 하윤에게는 그러한 반응이 거세되어 있었다.




유린은 하윤에게 부끄러워하는 시늉을 하도록 지시했다. 하윤은 표정을 바꿨다. 눈을 내리뜨고 홍조를 내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윤이 지은 표정은 어색한 가식 그 이상 무엇도 아니었다. 유린은 실망하며 지시를 철회했다.




촬영을 마치고 핸드폰 속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이십 분이다. 슬슬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선생이 기다리다 지쳐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린은 하윤을 교실 안으로 데려와 옷을 입혔다. 옷매무새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보며 확인했다. 복장은 정상이었다. 착의를 마친 다음 둘은 교실을 나섰다. 하윤이 교실을 나간 다음 유린이 나갔다.



짧디 짧은 시간이 쌓여 쾌락을 음미하는 순간을 지워버렸다. few, little. 측정 가능한 개념이 측정 불가능한 개념을 지워간다. 육신은 셀 수 있다. 육신에 깃든 감정은 측량할 수 없다. 측량할 수 없기에 감정에서 기인한 행동의 결과는 완벽히 가늠할 수 없다. 완벽히 가늠 가능한 인간은 죽은 인간 뿐이다. 유린은 전 날 하윤과 옷을 갈아입었을 때 느낀 감각과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대비하며 고민했다. 가늠할 수 없다.



유린은 반 열쇠를 제출하러 교무실에 갔다. 교무실 안은 칸막이로 공간이 나누어져 마치 미로같다. 열쇠 보관함은 교무실 중앙 벽에 붙어있다. 유린은 열쇠 보관함 안에 열쇠를 걸었다. 그대로 교무실을 나서려니 옆이 소란스러워 신경쓰였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귀를 기울였다. 유린은 한 번에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예지였다. 담임과 예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CCTV라도 확인해달라고요.”




“예지야, 반 안에는 CCTV가 없어. 옷을 갈아입는 애들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복도 쪽을 뒤져보면 되잖아요?”



“다른 애들이 누명을 쓸 수도 있잖니.”



“아니, 그래도.”



예지는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 안에 넣고 말했다. 입술은 어제하고는 달리 분홍색이었다.



“찾는 게 중요하죠. 누가 훔쳐갔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말은 드센 어조로 빠르게 나왔다. 싸움을 거는 말투로도 들렸다.



“아무것도 안 하지는 않았어. 그냥 그걸 학생에게 말하게 되면...”



담임 선생은 변명조로 말했다. 일이 커지려고 하자 또 다른 선생이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수학 선생이었다.



“네가 잊어버린 거 아니냐.”



“뭐라고요?”



목소리는 오히려 더 커졌다. 수학 선생은 덤덤함을 유지했다.



“수업시간에 핸드폰도 하다가 걸렸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애초에 왜 그런 비싼 물건을 학교에 가져왔지? 아니, 가져왔으면 하다못해 더 제대로 간수라도 했어야지.”




예지는 분에 못이겨 욕설을 내뱉었다. 욕설은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다. 교무실 내에 앉은 선생들은 전부 민폐라는 듯 예지를 바라보았다. 전부 똑같은 눈빛이었다. 아무도 예지가 그곳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두꺼비 같은 얼굴에 화장을 바른 여자 국어 선생도, 올해 학교에 새로 부임한 윤리 선생도 예지를 바라지 않았다. 예지는 수치스러워하며 얼굴을 돌렸다가, 유린과 눈이 마주쳐 더 큰 수치를 느꼈다. 유린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예지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터벅터벅 교무실을 나섰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유린은 교문을 빠져나가며 안도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CCTV에 모습이 찍혔더라도 화장품은 이미 어디에도 없으니 잘하면 넘어갈 수 있다. 설령 사실관계를 추궁당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다. 적어도 하윤이 최면에 걸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학원 버스가 덜커덩거리며 다가오는 소리보다도 빨랐다.




유린은 저녁 여섯 시가 될 때까지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었다. 여섯 시가 됐을 때 같은 학원 학생들과 저녁을 먹으러 잠시 외출했다. 학원 학생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들 담배를 피고 욕을 했다. 성적 이야기를 하고 선생을 욕했다. 유린은 밥을 먹으며 이야기에 동조했다. 일곱 시가 되자 식사 시간이 끝났다. 학원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각자 갈라졌다. 영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영어 반으로, 수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수학 반으로. 집으로 가는 아이들은 학원 버스로. 유린은 영어 반으로 가서 단어 시험을 봤다.




defective. 결함이 있는. fall, 하락하다, 추락하다. 유린은 영단어 옆 빈 칸에 뜻을 적어넣었다. 이미 외워 아는 단어들이었다. 아는 단어를 적고 선생이 떠드는 말을 듣다가 열 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하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무런 말이나 적어서 보냈지만 하윤은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하윤은 음악과 책 이야기만 했다. 요즘 유행하는 가수. 구십 년대에 유행하던 미국 락 밴드. 최근에 읽은 소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 그래도 앨범마다 스타일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기는 해.



- 그래?



- 아티스트도 항상 같은 곡만 할 수는 없을테니까.




- 그렇구나.



- 분명 같은 느낌인 곡이더라도 좋은 게 있고 안 좋은 게 있기도 하고.



- 신기하네.



유린은 흥미가 없다. 집이 돌아갈 때 연락이 끊겼다. 하윤은 연락을 잇지 않았다.




월요일, 예지는 악기 창고에서 담배를 피며 욕설을 내뱉었다. 유린은 민서와 나란히 앉아 예지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항상 몰려다니는 패거리가 다 와있었다.




“수학 그 씨발 새끼를 찌를거야. 진짜 찔러버릴거야. 어떻게 기회만 있으면 진짜로 좆되게 만들어버릴거야.”




예지가 말했다.




“이번에는 또 뭐 왜 그러냐? 그 잊어버린 거 때문에 그러냐?”




안경을 낀 남자가 물었다.




“내가 잘못해서 잃어버렸다고 하잖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거 자체는 그래, 그렇다고 쳐. 그런데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내가 병신처럼 간수해서 잊어버렸다고 하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적어도 선생이면 씨발 애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그건 걔가 나빴네. 쓰레기 같은 새끼 아니야, 완전.”




후드를 쓴 여자가 공감했다.




“찌를거야. 좆같은 새끼. 애미도 그 새끼 배에 깔려서 뒤졌을거야. 그런 새끼 인생 좆되도 어차피 아무도 좆도 신경 안 쓰잖아?”



“야, 그냥 인스타그램에다가 올려. 아니면 렉카한테 찌르던가.”



목소리가 경박한 남자가 크게 말했다.



“그럴까?”



“해. 야, 조회수 빨아대려고 하는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후드를 쓴 여자가 말했다. 안경을 쓴 남자는 그 옆에서 애써 눈을 아래로 내린 채 묵묵히 궐련을 태웠다. 바닥에 재가 떨어졌다. 버려진 담배곽이 늘었다. 담배 불씨가 담배곽 옆에서 아스라이 빛난 뒤 완전히 꺼졌다. 예지는 목소리가 경박한 남자에게서 담배 한 개비를 넘겨받았다. 후드를 쓴 여자가 지핀 불이 담배 끝을 태웠다.



“나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예지가 중얼거렸다.



“기분 나쁘기는 하지.”



후드를 쓴 여자가 적당히 맞장구쳤다. 유린은 후드를 쓴 여자가 예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민서는 담배를 끄고 유린과 악기 창고를 나섰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자기가 잃어버려 놓고 저러는 거 아니야? 듣기 싫어.”



민서가 말했다.



“비쌌나보지.”


유린이 말했다.


“비싼 걸 발라도 그 정도야?”


민서는 비웃었다.


유린은 반으로 돌아가 하윤에게 인사했다. 하윤은 몸을 움츠러트리며 인사를 받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인사 외에 다른 말은 나누지 않았다. 유린은 자리에 앉아 손거울을 기울였다. 하윤은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혹은 모르는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애쓰듯 안절부절거렸다. 유린은 굳이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혼자서 손깍지를 끼고 무언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