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장의사한테 값을 치루고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일기를 샀다. 이 일기는 아가씨께서 보지 못할 곳에 놓고 가능한 날마다 적어나갈 예정이다.


한 메이드가 목숨을 끊었다. 나무 껍질을 꼬아 만든 밧줄로 목을 맸다. 사흘 뒤 공동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한 달 전 생일을 맞이한 열 세 살 짜리 견습 하인 소녀가 사체를 발견했다. 아가씨의 명을 받들어 애완 푸른 박새에게 먹일 꿀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져가는 은방울꽃과 덩굴을 다듬지 않은 장미, 무심히 핀 수국으로 가득한 정원을 빠져나온 뒤 소녀는 곧은 흙길과 마주했으리라. 새로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무리 하나 발에 걸리지 않는 길 양 옆은 아직 잎이 푸른 단풍나무로 가득하다. 가을이 되면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보다도 진한 적색이 바람을 타고 내려와 땅을 뒤덮는다.


소녀는 한 여자가 곧 절경을 이룰 장소를 바라보듯 까치발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발견했으리라. 반가움에 말을 걸기 위해 발을 뻗고 나서야 여인이 하늘에 떠있다는 사실을, 푸르른 나무가 동족으로 만들어진 줄을 여인의 목에 매달아 피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챘을 것이다. 여인의 발이 허공에 떠있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소녀는 달음박질쳤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이끌면서. 소변이 허벅지를 타고 뚝뚝 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가면서.


미, 미시즈 웰링턴, 미시즈 웰링턴. 보고를 하러 온 소녀는 먹먹한 목소리를 냈다. 그 때 나는 집무실에서, 일을 그만두기 위해 찾아온 키친 메이드 코퍼양을 설득하던 도중이었다. 


더 이상 아가씨의 횡포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까다로운 분이시라고요. 왕궁에서 일하더라도 이보다는 더 쉬운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시즈 웰링턴도 이해하시겠죠.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거쳐갔을테니.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소녀가 들어왔다. 나는 처량한 몰골로 들어온 소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떨리는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용무를 묻자 자살한 하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안색이 어두운 키친 메이드에게 잠시 소녀를 보살펴 달라 청했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서 소녀가 말한 곳으로 갔다. 사체는 철제 울타리가 만든 경계선 앞에 매달려있었다. 겁에 질린 토사물과 침이 시궁창을 이룬 입 안에 나비가 날아들어 나앉았다. 사체를 아래로 내리는 일은 내 역할이었다. 나는 사체를 나무 그늘 뒤에 두고 저택으로 돌아가, 로비를 청소하던 메이드를 불러 마을로 가 급히 장의사와 의사를 부르도록 시켰다. 메이드는 새파랗게 질려 알았다고 했다. 나는 메이드를 정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정문에 도착한 메이드는 입을 가리고 달려나갔다.


나는 아가씨께서 사용하시는 별실 문을 두 번 노크하고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껏 고용한 레이디스 메이드가 전부 일을 그만뒀기에, 이 저택 내에서 아가씨를 직접 보필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방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문을 열었다. 피츠로이 아가씨께서는 다리를 침대 아래에 내려놓고 뺨 위에 손을 올려두셨다. 나는 무심코 긴장했다. 아가씨께서는 마음에 안 드실 때 뺨에 손을 올리는 버릇이 있으시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잘못할 시에는 그 손을 떼어내 내 뺨으로 옮기신다.


"프레이아, 점심 식사는 언제 준비 되지?"


이럴 때에는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된다. 최대한 공교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실을 말하는 편이 피치못할 사정이라는 인상을 아가씨에게도 주어, 진노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끝낼 수 있다. 아가씨와 긴 친분이 있는 나이기에 더욱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낫다. 만약 어설픈 거짓을 늘어놓았다가 발각된다면 더욱 큰 벌이 쏟아진다. 한 메이드는 접시를 깨고서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몇 시간이고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접시 가격은 봉급에서 차감되었다. 또한 아가씨께서는 해당 메이드에게 접시 조각을 전부 모으도록 시킨 후, 손으로 조각을 퍼즐처럼 잇도록 시켰다. 오늘 스스로 목숨을 끊은 메이드가 바로 그 메이드다. 안젤리카 위즐리 양이다.


"죄송하지만 저택 내에 공교로운 일이 생겨, 조금 늦어질 듯 합니다. 숭구하지만 이십 분 가량 더 기다려 주신다면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나는 치맛자락을 위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 그래."


어느 정도는 노하며 질책하시리라 예측했지만 뜻밖에도 고분고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평소와는 달리 잠을 제대로 주무셔서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 제대로 잔 날이 드문 모양이시니 말이다.


아가씨, 그러니까 피오나 피츠로이 아가씨를 곁에서 보필한지도 어느 덧 십 사 년이 넘어간다. 나는 일곱 살이 되었을 적부터 이미 아버지와 함께 이 저택에서 종속 사용인으로서 일해왔기에, 나름대로 이 가문을 지키는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렇기에 두 주인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아가씨에게 생긴 신경 쇠약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젋은 나이에 명을 받드는 입장에서 명을 내리는 입장으로 올라간 나로서는 솔직히 무거운 책임이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식사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나는 내 방으로 가 코퍼 양과 나머지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이 떠나고 싶다면 나도 더 이상 잡지 않겠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러나 챙겨야 할 짐도 있을테니 오늘까지는 직무를 수행하고, 내일 저택을 떠나면 어떠겠느냐. 코퍼 양은 알겠다고 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코퍼 양처럼 다양한 요리를 수준 높게 구사하는 인재를 구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주인님께서 돌아가셔서 항상 자금난에 허덕이는 현 사정으로서는 더더욱 어렵다. 우리는 주방으로 내려가 식사 준비를 했다. 


아가씨는 입맛이 까다로우시다. 두 달 동안 매일 다른 음식을 먹고 나서야 같은 식단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음식에 관한 열의가 굉장하다. 어렸을 적에는 알렉세이 주인님께 ‘편식은 죄’ 라고 여러 번 꾸중을 들어가며 교정하였지만, 요즈음 들어서는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가차없이 혹평을 늘어놓고 접시를 던져버린다. 방에 들어가서 보았을 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기색이셨으니, 이십 분 내로 가능한 조찬으로도 만족하시리라는 사실만은 다행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선반에서 계란을 꺼냈다. 코퍼 양은 베이컨을 구우며 말했다.


“저는 다음 주부터 서부 지방으로 내려가 일할 거예요. 봉급은 줄어들겠지만요.”


나는 고개를 돌려 코퍼 양을 바라보았다. 코퍼 양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저택은 죽어가고 있어요, 미시즈 웰링턴. 주인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이 저택에는 유령 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당신은 정말로 영리하고 훌륭한 분이에요. 어디라도 갈 수 있을 사이에 얼른 나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참으로 경솔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5월 13일


어젯밤 일기를 전부 적고 나서 사체를 본 메이드 소녀 - 그러니까 엘시 양 - 가 내 방으로 왔다. 엘시 양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비칠거렸다. 나는 넘어지려는 엘시 양의 몸을 붙잡고 침대에 앉혔다. 엘시 양은 착란상태에 빠진 채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아아, 미시즈 웰링턴, 어떻게 해야하죠. 죄송해요. 잠이 안 와요.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해요. 나는 엘시 양을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나요. 괜찮습니다. 단지 누구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해선 안 된답니다. 알겠죠? 네, 네. 엘시 양은 더듬으며 답했다.


"저어, 미시즈 웰링턴. 오늘은 함께 잠을 자도 괜찮을까요?"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개인이 사용하는 장소에 다른 사람이 깊게 발을 들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소녀는 아직 내가 한창 일에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고 다녔던 시절과 같은 나이 밖에 되지 않았고, 그런 소녀가 하는 말을 구태여 거절하기는 양심에 걸렸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엘시와 떨어졌다.


“오늘은 이렇게 허용해주고 있지만, 원래라면 당신은 이 시간 이 방에 있으면 안 된답니다. 그런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겠죠? 저는 당신에게 누가 될 법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군요.”


“그, 그렇죠. 죄, 죄송해요.”


사과하면서도 엘시 양은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엘시 양을 침대 위에 뉘이고 옆에 누워 등을 마주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