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녀와 나눴던 대화 중 하나.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 알아?" 


맥주를 마시며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한 그녀, 토오루를 어이없다는듯이 바라보면서, 나는 손바닥을 등 뒤로 뻗어 바닥에 대었다. 작은 선반 위에는 노란 상자 안에 담긴 1시간 전에 시킨 치킨 조각들이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분명 허니 뭐시기 하는 치킨이다. 


"몰라." 내가 답했다. "유통기한이라니, 치킨처럼?" 


토오루는 그렇다고 했다. 


"치킨보다야 길다더라. 보통은 화장품처럼 2년에서 3년 정도라고 해." 


"그렇구나, 전혀 들어본 적 없어." 


나는 아사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뭔가 슬프지 않아? 3년이라면, 고작 고등학교 시작할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인걸." 


토오루가 말했다. 


"짧기야 짧네. 100세 시대인데." 


내가 답했다. 


"그렇지." 


토오루가 말했다. 나는 닭다리를 하나 손으로 집었다. 


"토오루는 그런 경험 풍부하지 않아? 어떻게 생각해? 정말 3년인건가." 


"몰라. 애초에 나는 3년조차 이어진 적이 거의 없으니까." 


토오루는 자조하듯 말했다. 


"뭔가 거기까지 이어지기 전에 다들 떠나버리고 말았거든. '뭐야 너, 생각한 거하고는 달라.' 라니... 다들 너무하지." 


"뭐야, 그건 너무하네." 


"그렇지?" 


"이렇게 착한데." 


맥주캔이 비자 토오루가 옆에서 뚜껑을 딴 아사히 캔 하나를 건넸다. 나는 감사히 그걸 받아 입에 맥주를 흘려 넣었다. 


"하나는 어때?" 


"응?" 


나는 맥주를 내려놓았다. 


"유통기한은 있는걸까?" 


"글쎄...경험 없으니까 잘 모르겠어." 


내가 대답했다. 


"연애에 흥미 없는거야?" 


토오루가 얼굴을 내밀었고- 


"지금은 없으려나." 


-나는 허리를 뒤로 뺐다. 



알딸딸한 정신으로 멍하니 토오루가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뭐 어떤 것이든 영원히 이어지는 건 없기 마련이니까 사랑도 영원하지 않은 건 당연하겠지만, 왠지 지금까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이어지는 감정이라고 막연하게 여겨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직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내가 연애를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숫처녀라 그런걸까. 


부끄럽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여기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더 무겁게 여기고 있다. 데이트를 한다고 하면 제대로 나만 봐줬으면 하고, 전에 생겼던 애인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싫을 것 같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왠만해서는 기왕이면 잠을 먼저 자느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과 천천히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며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이런 말을 하면 뭔가 보수적이니, 마음이 무겁다니 하는 말을 듣는다. 요즘에는 한 두 번 자보고 만나는 것 정도야 괜찮다나. 


마음이 무거우면 안 되는 걸까. 인간 관계에 무거움을 바라고 마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 가치관인걸까. 요즘 시대적으로 말하자면 이 가치관은 틀니를 오들오들 떠는 노인을 부양하는 것과 같은 귀찮기 짝이 없는 가치관인걸까. 



예컨대 무거운 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제 아무리 시속 160km 남짓한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도 타이어를 질질 끄는 쇼와식 훈련을 하다보면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것처럼. 철학자들이라면 그 무거움을 견디면서 생기는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멋들어진 소리를 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무거움에서 비롯된 고통을 견딜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오히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고통이란 절대로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가벼워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가벼워지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초콜릿 라떼와 마카롱으로 넘어갈 수 있을 법한, 그런 가벼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덩달아 가벼워져야만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그런 가벼워지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는 캔이 텅텅 빌 때까지 그런 식으로 중학생이 할 법한 고민을 했다. 로맨티스트냐고, 정말이지. 나는 쭈그러들은 캔을 보다가, 말을 툭 내뱉었다. 


"있는 거 아닐까, 유통기한." 


"그렇구나." 


토오루가 말했다. 


"아, 잘 먹었다." 


뭔가 정신이 몽롱해져, 몸을 비틀거리며 소파 위에 기어올라갔다. 


"자는 거야?" 


토오루가 아까운 듯 물었지만 솔직히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졸려..." 


뚝. 어젯자 기억은 여기서 끝난다. 여기서부터 오늘 내가 일어나기까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모른다. 알 방법도 없다. 비유하자면 영화의 씬과 씬 사이, 우리는 볼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이야기. 



그래서 잠에서 깼을 때는 팔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불쾌한 감각이 들어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었다. 하지만 어제 마지막으로 본 천장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분명 이 천장은 토오루의 방 천장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평소와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빛이 전혀 들지 않아 시간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몇시간이나 잔 거지? 시계를 확인하려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전혀 몸이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지. 의아한 마음에 손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몸을 일으키려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팔목과 발목이 답답했다. 마치 운동선수가 뒤에서 몸을 허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목을 이리저리 돌려, 내 팔과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숨죽였다. 


경찰서에서 볼 법한 은빛 수갑이, 내 양 팔목과 양 발목에 걸려 있었다. 사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거." 



내가 중얼거리자,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토오루였다. 


"뭐야, 토오루."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혹시나 내가 자고 있는 사이 괴한이 침입해 나와 토오루를 묶어놓은 건 아닐까 걱정했으니까. 토오루가 멀쩡하게 돌아다닌다는 건 이건 토오루가 한 거겠지. 뭐 평소에도 이런 저런 장난을 치는 여자애니까 이 정도야, 싶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이것 좀 풀어줘." 


"..." 


"아파팟, 너 말야, 장난이라도 너무 세게 조인거 아니야?" 


토오루는 아무 말 없이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토오루?" 


"하나." 


침대가 덜컹거렸다. 토오루는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밤을 샌 것처럼 눈 밑에 짙은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장발을 조용히 늘어뜨리며 나를 보는 얼굴은 정가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야." 


"뭐?" 


"앞으로 하나는 영원히, 영원히...여기서 사는거야." 


토오루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몸을 껴안았다. 


"잠시만, 무슨..." 


"나, 하나가 좋아." 


토오루가 말했다. 


"하나가 좋아. 정말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는걸.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건 하나 뿐이었어. 갈색 머리카락이 좋아. 느긋한 태도가 좋아. 목소리가 좋고, 얼굴이 좋아. 전부 좋아..."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연애에는 관심이 없지. 거기다가 나는 마음이 무겁다고 계속 차이고, 차이는 형편없는 사람인데다가, 하물며 동성인 걸. 이런 나를 좋아해줄리가 없잖아. 고백해도 받아줄 리가 없으니까......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어... 토오루."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줘." 



이제는 아주 줄리엣이 된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이었던거야. 머리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차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어.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을 들으면...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우연찮게도 나도 지금 머리가 엉망진창이다.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망가진 TV한테 말을 거는 것 같다. 갑자기 이게 전부 잘 짜여진 대본 하에 진행되는 시트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토오루는 인간이니까, 이성을 가진 존재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하면 단 30초 정도는 멈추지 않을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을 잠시만..." 


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설득을 시도했다. 자, 1, 2...... 


"듣고 싶지 않아!" 


놀랍다. 솔직히 10분의 1에서 말을 끊을 건 각오하고 있었는데, 15분의 1에서 끊었다. 


토오루는 다짜고짜 내 입을 자신의 입으로 틀어막았다. 첫키스인데 무드고 뭐고 없다. 침냄새하고 술냄새가 섞여서 솔직히 지독하다. 대체 첫키스에서 레몬맛이 난다고 한 사람은 어떤 작자일까? 만약 그 작자가 이런 상황에서 레몬맛을 느꼈다면, 그 인간이 미각 장애를 가진 건 아닐까? 


"얼굴 치-워-!" 


나는 버둥거렸다. 


"거부하지 말아줘.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그게 아니라, 아! 아! 야! 이슐 할쥐먀!" 


(작가 주석 ※ 구강과 구강에 존재하는 점막을 서로 밀착시켜 행하는, 성적 흥분을 얻기 위한 애무 행위를 당장 정지하라는 정중한 권고를 하려다가 상대의 재압으로 인하여 어영부영 무마된 모습을 묘사한 문장이다.) 


나는 계속 저항했다. 그런데 세상에, 얘는 뭔 수갑을 진짜 강철로 된 걸 사왔나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풀릴 기미가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더 아파질 뿐이다.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고 확신한 나는, 그냥 토오루가 이...애무를 끝내는 걸 그냥 기다렸다. 토오루는 한 30분 동안 계속 내 입술을 핥거나 빨았다. 정확한 시간은 나도 모른다. 나는 생체 시계가 아니다. 그냥 체감상 긴 시간이니 이 정도는 했겠지? 싶어 적당한 시간을 부른 것 뿐이다. 


이래서야 입술이 닳아버리는 건 아닐까 싶다. 참 신기했던 건, 이런 비윤리적 감금을 점짓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키스할 때 혀를 집어넣는 건 모르는 건지 - 아니면 알고도 치킨이라 못한 건지 -  버드키스만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입술을 떨어뜨리고 과호흡하는 토오루에게 묻는다. 


"진정했어?" 


토오루는 슬퍼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가 끝나니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뭔가 어색했다. 이런 때가 되면 피치 공주처럼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나름 재미있는 반응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딱히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 잡힌다. 


지금이라도 뭐 큰 반응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돌연 토오루가 내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저기, 왜 그렇게 담담한거야?" 


"응? 아." 


나는 대답했다. 


"그야, 너 딱히 이것보다 심한 건 안 할 거잖아? 3년 동안 만났으니까, 네가 그런 거 못한다는 건 아는데." 


"..." 


"물론 막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놀랐겠지만, 너라면 뭐." 


팔을 붙잡은 손이 강세를 더한다. 상당히 아프다. 토오루가 악력이 이렇게까지 센줄은 몰랐는데. 


"...항상 그래." 


토오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째서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는거야? 항상 항상 가벼운 말투야. 그렇게 가볍게 사람의 마음에 멋대로 들어왔다가 나왔다가, 너무하네, 하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달라고. 항상은 바라지 않으니까, 조금만이라도. 나는 진심인데. 언제나 진심이었는데..." 


"나도 딱히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조금 상처다. 이런 말투를 취하는 건 어디까지나 토오루가 편한 사람이니까, 토오루가 착한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그런건데. 누구에게나 이러지는 않는데. 말투가 이럴 뿐이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는 진지하게 고뇌하는데. 


무언가 따지기 전에 퍼뜩 어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제 술을 마시며 일전에 '생각한거하고 달라.' 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 토오루. 그런 토오루에게 가벼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은 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척 타인을 이미지 속에 가두려는 우리들. 



"역시 풀어주면 안 될까?" 


나는 말했다. 그러자 토오루는 절망적인 감정을 느낀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 말을 듣고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좋아, 그렇다면 역시 지금..." 


"알겠으니까, 풀어." 



"이런 짓을 해놓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네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보면 정신이 이상해져. 계속 붙잡고 따질 수도 있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정말 정말 정말로 좋아해서 미쳐버릴 수도 있어." 


"뭐, 너무 가벼운 것보다야......" 


"거짓말이라면 죽일거야. 헤어지자는 말을 들으면 칼로 찔러버릴거야. 유통기한이 다 됐다는 이유로 환불해주지 않을거야." 


나는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할까? 대충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돌연 어제 먹었던 치킨 생각이 났다. 허니- 허니- 


"...꿀은 썩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 침만 넣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썩지 않는다더라." 


토오루를 본다. 꽉 깨문 입술. 내 가슴 위로 떨어지는 눈물. 


이상하다. 이런 모습이 왜 이다지도 귀여운걸까.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망설이는 걸 보고 흥분하는 일그러진 성욕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볼 수록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상관없이 그녀를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쉬운 인간인걸까. 그렇다면 이런 내 마음은 가벼운 걸까, 무거운걸까. 


굳이 무게를 평한다면 중간 아닐까? 


"분명 다들, 관리를 못 한 것 뿐이야." 


나는 답한다. 


"...역시 안 돼. 좋아한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토오루는 망설이며 말한다. 


"어떻게 해야 믿어줄래?" 


내가 묻는다. 토오루는 어리광부리듯,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모르겠어? 


다시 묻는다. 


"응." 


대답을 듣는다. 


"그렇구나." 







과거 그녀와 나눴던 대화 중 하나. 아니, 그녀와 처음으로 나눴던 대화. 


1학년 때, 대학교의 미술학과 신입생 발표회에 간 날이었다. 발표회는 예체능 계열 학과들이 수업을 듣는 건물의 1층에서 이루어졌다. 



별로 좋은 그림은 없었다. 내가 문외한이라서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주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사진을 찍으며 탄성을 내뱉을 만한 그림은 좀처럼 없었다. 사실 평론가가 된 것처럼 '역시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으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인걸까.' 하는 오만한 생각까지 했다. 그야 그림이 다들 비슷했으니까. 거기다 나야 교수 사정으로 교양 수업이 갑작스레 비어 전시를 보러 간거지 딱히 예술에 흥미가 있던게 아니라, 비 전문가의 가벼운 시선으로밖에 그림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캔버스 사이사이를 걸어다니다가, 전시장 가장 외딴 곳에 방치되어 있는 한 그림에 무심코 눈을 빼앗겼다. 


ー캔버스 속에는 나체를 드러낸 식물이 있었다. 식물에게 나체라니 웃긴 표현이지만, 이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얼핏 보면 썩 빼어나지 않은 삐뚤빼뚤한 흰색 나무 기둥처럼 보이지만, 집중하고 보면 그 형상이 상당히 인간의 나체와 닮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배꼽이 있었고, 다리가 있었고, 유두가 있었다. 한 번 그렇게 인식하자, 껍데기의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그렸다고 생각했던 선들이 마치 성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그림이 나타낸 것은, 나체를 드러낸 식물이자 고통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인 인간이었다. 


그 그림 앞에 서서 멍하니 있자, 누군가 나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나는 뒤돌아봤다. 


"네?" 


"그, 마음에 드시나요?" 


"아, 네." 내가 말했다. "굉장하죠. 누가 그린 걸까요." 


"그, 어떤 면이?" 


"네?" 


무심코 되물었다. 


"어떤 면이 좋으신가요?" 


"..."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 기묘한 그림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이 나를 사로잡았나.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짧막하게 답했다. 


"외로워보여서."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정말 옛날에 중반부를 적어놨길래 대충 완성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