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니까 마음껏 쉴까. 

라는 생각이 손끝까지 번졌을 때 

잠깐의 졸음이 몰려왔다. 무거워진 눈꺼플에 못 이겨 붙잡고 있던 책을 내려 두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분명 그랬었다.



투둑 - 하고 얼굴에 달라 붙은 물방울에 평소처럼 입을 조금 벌리고 자는 탓에 

흘러내리는 침이 축축하게 얼굴을 스쳤다 라고 생각했다. 입 좀 다물고 잘걸.

애써 무시하고 두눈을 질끈 감은체 입을 슬그머니 말아 올렸다. 


음 그래 이제 좀 낫네

뒤집어 놨던 모래 시계가 한바퀴 돌 시간이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칠 때, 나는 따스한 햇볕의 간지러움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반쯤 감긴 눈으로 평소처럼 핸드폰을 꺼내야지 하면서 머리말 쪽을 손을 뻗어 더듬 거리니 허공에 손이 휘적인다.


허공?


딱딱한 침대 대신 허공이라니. 분명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적거리자 땅에 발을 내딛고 있는 감각이 다리를 타고 흘러든다.

잠들었던 신경들이 등허리를 타고 깨어난다.


가벼워지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 보는 장소 위에 서 있었다.


조용히 흐르는 물 위에 찰랑거리는 나무다리, 그 위로 담쟁이덩굴 같은 잎들로 가득 덮인 천장.


새들이 지저귐으로 재잘 거린다. 물가를 스쳐 지나가는 날개짓. 


여기가 어딜까 그리고 난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분명 조금 전까지 달달한 만화 한 편 읽고 있었는데


일단 뭔지는 모르겠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습관처럼 쓸어내리는 가슴 위에서 손이 멈추어 선다.


어라? 왜 손이 걸리는 거야? 내 가슴이 이렇게 커진 거야?


아니 이건 내 몸이 아니다.


그건 확실할 수 있다. 그렇게 가슴을 키우고 싶어서 고생했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신했다. 


그리고 처음 느껴보는 어깨의 뻐근함에 이상하게 입가가 풀린다.


혼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찾아든 현실감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옆 기둥을 붙잡는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살던 일상은 아닌 게 분명하니까.


인수인계도 못 했는데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슬쩍 고개를 돌려 흐르는 물 위로 얼굴을 바라본다.


그래, 당연히 내 얼굴일 리가 없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근데 다시 보니 상당한 얼굴이다. 이곳 저곳 얼굴을 주물거렸다.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올려도 보고

눈웃음 쳐보니 안넘어올 사람이 없다라는 확신이 머리 속에서 터져 나왔다.

속눈썹도 길고, 몸매도 나올 곳은 확실하게 나와 자기 주장이 강하다. 


거기다가 교복같아 보이는 옷까지.


앞으로의 성장이 두렵다.


살면서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쁘다? 아니 그 이상이 아닐까.


나는 내심 진지하게 '나'를 관찰했다. 


그렇게 곰곰히 감상 할때, 누군가 뒤에서 조금씩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에 잔뜩 긴장하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지? 어떻게 반응해야하지?


다행이라면 물가에 슬쩍 모습이 비쳤다.


여자애?


아 맞다 나 교복 입고 있지.


"릴리! 뭘 멍하니 봐?"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잔뜩 놀랐겠지! 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몸을 끌어 안는다.


내 가슴께나 올 것 같은 조그마한 체형에 찰랑거리는 머리로 부비적 거린다.


사랑스러운 아이 콘테스트를 열면 분명 투표했을 텐데.


근데 누구지?


아냐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침착하게, 침착하게.

마른 침을 슬쩍 삼키며 시선을 멀리 뒀다.


"그냥 뭐, 이것저것 생각했어. 그것보다 조용히 다가와서 깜짝 놀랐어"


내 입에서 나온 아름다운 목소리에 살짝 놀라게 된다. 이런 목소리 까지 가지고 있다고?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은데?"


"아냐 정말 놀랐어. 봐, 움직이지도 못했잖아?"


"맨날 놀리기만 하구!"


여자애는 뾰로통 해하면서, 입술을 잔뜩 내민다.


입술을 우물 거리면서 올려다보는 맑은 두 눈에 쓰다듬고 싶어지는 충동을 참아 낸다.


슬쩍 가슴 쪽을 내려다보니 이름표 같은 게 보였다. 읽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읽을 수 있었다.


"엘라, 음…. 여기가 어디일까?"


"여기가 어디냐니. 여기는 우리 학교 호숫가잖아. 뭐야? 왜? 뭔가 있어?"


학교 안 이구나. 하긴 교복을 입고 있는데 학교 안이겠지.


"왜?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어? 음,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게."


"뭐야 정말, 릴리는 매일 호수만 보면서 멍하니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투닥 거리면서도 더 강하게 내게 안겨 투덜거린다. 작은 강아지 같은 그녀에게 장난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왜일까?


그리고 그 순간 어떤 기억 하나가 흘러 들어왔다.


이 몸의 기억들.


그리고 나와 엘라,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


이 아이 보기보다 더 성실하구나.


그래서 그렇게 엘라를 향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던거고.


너가 바라는게 솔직한 마음이라면 내가 대신 이뤄줄께.


마음속으로 환하게 웃으며 엘라를 내려다본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엘라는 조금 상기된 얼굴이다.

작은 복숭아 같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말한다.


"잘 생각해 줘 그럼. 별거 아니면 나 가버릴꺼야."


"네, 네 걱정하지 마"


음,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할 때 엘라의 주머니에 과자 같은 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나쁜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것 보다 엘라. 입에 묻은 부스러기부터 정리해"


"어 정말? 으- 내 정신 좀 봐. 조금 전에 과자 먹은 거 때문에 그런가 봐. 근데 어디? 어디 붙어있어?"


"내가 때 줄 테니까 눈감아봐."


"눈? 눈을 감으라고? 왜?"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 해한다. 딱 봐도 귀여운 초식동물이 늑대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니.


"싫어? 싫으면 말고."


"아냐! 눈감을 테니까 얼른 때 줘."


눈을 질끈 감은 체 입술을 가볍게 내민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 


경계심 하나 없이 무방비한 이 아이를 


나를 믿는 이 아이를


부르르 떨리는 팔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머리 한쪽을 넘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엘라의 입술을 맛본다. 스치듯, 그렇지만 맛은 잊지 않도록.


살짝 혀로도 맛보고 싶지만, 그 부분은 참는다.


이런 건 절제하는 능력도 중요하니까.


잘 참았다 나.


뭔가 이상한 걸 눈치를 채도, 그게 뭔지 모를 거다.


분명 아직 키스를 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배덕감이 신경을 타고 흘러 쭈뻣 거린다.


내가 말할 때까지 꾸욱 눈을 감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기 강아지.


"이제 눈떠도 돼."


"고마워 릴리! 근데 릴리 손 말랑말랑하구나. 뭘 바르는 거야?"


"글쎄? 비밀이야."


"아 정말, 알려줘!"


그래


릴리. 네가 나를 이 세계로 환생시켰다는 건 네가 바라는 걸 이뤄달라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


손으로 아는 이 귀여운 초식 동물 여자아이가, 나중에 이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를 기대하면서


잘 먹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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