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레인 왕국 사람들의 신앙이 부서졌다.

 

왕국의 무역 산업 전체가 의존하던 발라르크 화산으로부터 재앙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화산으로부터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용암은 바르샤레인에 철의 은총을 내렸었다.

가뜩이나 영토가 모자란 섬 왕국이 무역의 중심이 되어 부를 축재할 수 있었던 건, 해상 교역권을 지배해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르샤레인이 하루에 생산하는 철만 강철 검 오백 자루.

바르샤레인이 하루에 생산하는 청동만 해도 거울 삼백오십 장.

바르샤레인이 하루에 생산하는 황금만 해도 금화 이백아흔 닢.

 

그야말로 세계의 광물 산업을 손아귀에 넣은 주역이 바로 대륙 동부 해역에 위치한 섬 바르샤레인인 것이었다.

그들의 허락이 없다면 맨손으로 전쟁을 해야 할 나라마저 존재할 정도이니 그들의 세계적인 입지야 말로 설명해서는 입이 아플 것이었다.

 

그러니 바르샤레인의 국민들은 화산을 신앙했다.

그들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준 발라르크 화산을 향해 성스러운 태양의 날마다 기도를 올렸다.

 

엄밀히 말하면 발라르크 화산의 주인을 향한 기도였다.

 

 

“제발… 제발 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현재 바르샤레인의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이 신앙해 마지않던 화산을 등지고서 바다를 향해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산의 주인이 쏟아내는 분노가 거리를 무자비하게 불태웠기에 화산의 성도들은 그들의 신을 등지고서 새로운 성전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모습을 드러내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제사장의 간절한 외침은 해안의 암반에 부딪히는 맹렬한 파도에 지지 않을 만큼 해역 전체를 아우르며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아콰비스!”

 

 

 

 

 

**********

 

 

 

 

 

한때 대양의 보석이라 불릴 만큼 찬란했던 문명이 한 줌 잿더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드넓은 광장과 활기가 넘치던 시장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가득한 주거지가 전부 불살라지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오!

 

 

멸망의 실재가 도시를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아가리에서 터져 나온 포효는 지축을 뒤흔들었다.

 

한때 바르샤레인 왕국 모두에게 찬양을 받았던 군주였지만, 이제는 폭군으로 영락해 버린 멸망의 불길.

발라르크 화산의 주인, 블라즈니르.

 

그것은 드래곤이었다.

 

작열하는 화염을 닮은 붉은빛의 비늘을 가진 실존하는 전설.

강철마저 녹이는 화산의 중심부를 둥지 삼아 시뻘건 용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화신(火神)이었다.

 

 

콰르르르르르!!

 

 

드래곤의 아가리에서 불길이 치솟을 때면 장엄한 도시의 일각이 어김없이 소멸했다.

뜨거운 화덕 안에 처박힌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문명을 벽돌 삼은 거대한 성채가 단 하나의 불합리한 폭력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치익…

 

 

세찬 비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는 것처럼, 불길의 장막이 일렁이는 요란한 소리만 가득했던 폐허.

그 시끄러운 폭풍의 불비를 뚫고 손님이 찾아왔다.

 

 

치익… 치익…

 

 

걸음을 내딛는 소리라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발이 지면에 닿고 떨어지는 소리라기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이에 블라즈니르는 처음으로 다리를 멈췄다.

수많은 인간들의 애원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던 멸망의 진격이 처음으로 멎은 것이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드래곤의 동공 위로 일렁이는 시뻘건 불길이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불길을 뚫고 나오는 인영 하나의 모습이 불길의 상 위로 덧씌워졌다.

 

시뻘겋게 녹아내린 지면을 맨발로 걸어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진작에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었어야 마땅할 용암 지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순간 블라즈니르는 그 성채만 한 몸을 크게 진동시켰다.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을 만큼의 거대한 힘이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어온 것이었다.

 

 

그르르르르릉

 

 

블라즈니르는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차가운 혹한에 몸을 내던진 것처럼 심장까지 전해지는 한기.

그 섬뜩한 느낌에 잇따른 오한.

 

유일한 절대 강자로 살아온 드래곤이기에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나약한 자들만의 감각이었다.

 

 

쿠드드득

 

 

순간 블라즈니르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싸늘한 감각에서 비롯된 몸서리가 아니었다.

결코 있을 수 없었던 현실을 마주하고서 빚어진 경악이었다.

 

블라즈니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을 친 것이었다.

자신의 발톱 하나보다도 작은 가련한 여인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벌린 것이었다.

 

이는 곧 블라즈니르가 격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건방지구나, 인간!! 재도 남기지 않으리라!!!”

 

콰우우우우우우!!

 

 

블라즈니르의 포효와 함께 지진처럼 거대한 울림을 가진 음성이 함께 울려 퍼졌다.

 

그리고 포효하기 위해 하늘 높이 치켜들어 쩌억 벌어졌었던 아가리에서는 시뻘건 화염의 빛이 이글거리며 치솟기 시작했다.

블라즈니르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화기를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전력을 다한 불의 숨결로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불청객을 치워버릴 셈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비로소 행동에 옮겼을 때, 폭군이 마주한 것은 시원한 승리가 아닌 냉혹한 현실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칠흑과 같은 불길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그녀가 섬뜩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었다.

허물어지는 산맥의 산사태처럼 쏟아진 맹렬한 화염을 향하여 그 보잘것없이 작은 손을 뻗은 것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치솟아 나타난 대량의 물결이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암반조차 녹이는 불길의 아가리에 정면으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투콰아아아아아앙!!!!!

 

 

블라즈니르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터무니없이 강대한 폭발이 전신을 강타한 것이었다.

 

고온의 불과 다량의 물이 부딪치면 발생하는 폭발.

분명 자신은 그것에 휘말린 것이었다.

 

과거의 경험에 따르면 블라즈니르는 진작에 튕겨 나가 어딘가로 처박혔어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깊은 용암 속을 유영하던 드래곤은 현재 거대한 물결에 휘말려 물속을 빙글빙글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부글부글부글부글

 

 

굳이 직접 닿지 않더라도 근처에만 다가가면 나무고 풀이고 모조리 불타버리는 초고온의 거체.

 

그것이 대량의 물과 닿아 급격히 식혀졌음에도,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은 잔열의 여파로 주변의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기포가 많이 생길 뿐,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폭발도 없었고, 물이 메말라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그토록 거대한 드래곤이 한순간이나마 정신을 잃을 정도의 폭발이 있었음에도, 심지어 인간의 도시는 전혀 휘말리지 않고 온전한 상황이었다.

 

블라즈니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하늘이 이토록 아른거리는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가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하늘까지 닿을 정도의 거대한 물.

불타고 녹아내린 참혹한 대지 위로 거대한 물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지상 위에 강림한 대양(大洋)이었다.

 

 

쿠르르르륵

 

 

블라즈니르는 비로소 이해했다.

 

드래곤이 정신을 잃을 정도의 막강한 폭발조차 완벽히 집어삼켜 도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물.

끊임없이 휘몰아치며 드래곤의 행동을 무력화하는 물.

드래곤이 전력을 다해 힘껏 다문 입을 기어코 비집어 열고서 밀려 들어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화염의 근원마저 꺼트려 버리는 물.

 

애초에 녹아내린 대지를 유유히 걸어올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다.

 

자신에게 다가온 검은 머리의 여인은 신에 준하는 존재였다.

 

 

 

 

 

**********

 

 

 

 

 

블라즈니르는 호흡을 유지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평소엔 자랑거리이자 힘의 원천이었던 거대한 육체가 힘을 잃고 나서부터는 견디기 버거운 무게로 다가와 폐부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의 거대한 몸은 허파마저 찌부러트리며 숨통을 죄는 바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여인의 허락이 있었기에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지면에 몸을 누일 수 있었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가 베푼 자비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것이었다.

 

블라즈니르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적의 자비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긍지 높은 드래곤이 구차하게 적의 호의를 구걸하고 생을 연명해서야 죽어서도 잊지 못할 수치를 남기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기에, 죽을 만큼 싫었지만 생존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생을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블라즈니르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선택을 마친 블라즈니르의 몸은 급격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후후… 그게 네가 택한 길인가?”

 

 

검은 머리의 여인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작아진 블라즈니르를 내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유쾌하다는 듯, 전에 없던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닥… 쳐… 짐을 살려둔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이글거리는 화염과 같이 붉은 비늘을 지녔던 드래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여인 앞에 놓인 것은 그녀보다 더욱 작은 체격을 지닌 붉은 머리의 소녀뿐이었다.

 

 

“발라르크 화산의 군주도 이렇게 놓고 보니 영락없는 소녀였네. 후후, 멋져.”

 

“닥치라고 했잖아…!!”

 

“드래곤 중에서는 나이가 꽤 적은 편이었지? 귀여워.”

 

“지, 짐을…! 짐을 우롱할 셈이냐…!!!”

 

 

블라즈니르는 어떤 수치를 겪더라도 끝까지 감내해 힘을 모으자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 결심이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서 후회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의심을 할 지경인 것이었다.

 

 

“아아, 뺨도 보들보들해…….”

 

“이익…! 이, 이거 놔아…!!”

 

 

검은 머리의 여인은 이전에 보였던 냉혹한 모습은 씻은 듯이 지우고서 살갑게 다가와 블라즈니르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블라즈니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무례도 어느 정도껏이어야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블라즈니르는 당혹감에 젖어 발버둥을 칠 뿐 그럴싸한 경고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평생을 인간이란 미물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절대자로서 살아온 그녀가 누군가에게 제압되어 귀여움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해 보지 못한 미래였던 것이었다.

 

블라즈니르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할 정도로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건 그리 의아할 일이 아닌 것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주제에 몸만큼은 무시무시한걸?”

 

물컹!

 

“히윽…!! 짐에게서 떨어지거라…!! 당장 떨어지란 말이다…!!!”

 

 

끌어안기만 해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충격이었건만, 검은 머리의 여인은 더 나아가 블라즈니르의 젖가슴을 주무르기까지 했다.

 

블라즈니르는 평생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던 타인의 손길에 당황하여 체면 불고하고 바닥을 길 정도로 달아나고 싶어했다.

그저 당혹감을 보일 뿐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것이었다.

 

 

꿀렁 꿀렁 꿀렁

 

“으읏…!!”

 

 

순간 허공에서 긴 물줄기가 넷 뻗어 나와서는 블라즈니르의 사지를 속박했다.

바닥을 기어서까지 달아나려 애쓰던 블라즈니르의 발버둥은 무의미하게 끝나버렸다.

 

필사적이었던 저항이 무색하리만치 힘없이 허공으로 떠오른 블라즈니르의 모습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다시금 가해진 제압의 손길에 블라즈니르는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으로 검은 머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체구를 지닌 드래곤의 모습으로 대량의 물에 저항하던 때와는 달리 현재의 제압 앞에서는 상당히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

 

 

“흐응…….”

 

 

검은 머리의 여인은 블라즈니르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무척 흥미롭다는 듯,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미소를 지은 채 블라즈니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칠흑 같은 머리와 같은 색채를 지닌 검은빛의 드레스.

세련된 오픈 숄더 드레스의 위로 선명히 드러난 어깨가 무척 요염했다.

 

가늘고 긴 목.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어깨.

길고 선명하게 형태를 드러낸 쇄골.

 

그리고 그 아래에 펼쳐진 크고 보드라운 젖가슴의 계곡.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었음에도.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음에도.

 

블라즈니르는 순간 현실을 망각하고서 마음이 혹할 정도로 검은 머리 여인의 자태에 지고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만큼 그 여인의 자태는 실로 매혹적인 것이었다.

 

 

“흐흥. 마음에 드니?”

 

“……!!”

 

 

그러나 블라즈니르가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이 고운 음색을 지닌 여인의 말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드래곤의 시선은 지면을 향해 급격히 추락해 버렸다.

 

불꽃의 내면을 그대로 새긴 것처럼 아름다운 앰버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색채의 노란 호박(琥珀) 가운데에 새겨진 길고 가느다란 동공이 갈 곳을 잃고서 헤매고 있었다.

 

블라즈니르의 조용한 태도는 체념 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대고 있는 건 분명 두려움이었다.

 

이에 검은 머리의 여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싱긋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제야 겨우 경청할 준비가 되었나 보네.”

 

“…….”

 

 

블라즈니르는 자존심 때문에 적의를 드러내며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건 가장된 적의였고, 노려보는 눈빛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정처 없이 떨리는 눈빛으로 위협을 해봐야 아무런 수단도 없이 무력하다는 현실만을 인증하는 꼴이었지만, 오로지 드래곤의 긍지를 지킬 생각 하나만으로 보잘것없는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검은 머리의 여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의 이름은 아콰비스. 인간들의 간절한 애원에 못 이겨 이 유치한 난동을 중재하러 온 바다의 정령왕이다.”

 

 

블라즈니르의 눈동자는 더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정령왕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느껴져, 한 가닥 겨우 남은 의지마저 꺾이기 직전이었다.

 

아콰비스의 푸른 눈동자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블라즈니르는 그것에서 깊고 어두운 심연을 엿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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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여기서 가끔가다 업로드 하던 소설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벤트는 참을 수 없지.

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