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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지민은 리트빙의 이름을 두어 번 곱씹어보다가, 무언가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을 입에 올렸다.


“당신, 그 사람 딸이야?”


그새 지민의 옆자리에 앉은 리트빙은 그 반문을 듣자마자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민의 고향 별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작명법이라서 금방 알아챌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지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이리로 불러낸 높으신 분 본인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에 혼란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미리 확인해야겠다고 보는 것도 그리 부자연스럽지는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그 불안을 풀어주는 게 먼저일 터. 그래서 리트빙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세로로 흔들었다. 그간 관찰한 바에 따라, 지민에게 익숙한 ‘긍정’의 표시를 해주는 것이었다.


“원시적인 번식밖에 할 수 없는 너희들의 표현대로라면 그 관계가 맞아.”


정작 자신들도 조금 더 ‘진보된’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게 리트빙의 얼굴을 달구었다. 그래도 겉보기엔 그다지 심하지 않은지, 지민은 리트빙의 얼굴에서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듯 차갑게 한숨을 쉬었다.


“네, 아주 잘났어요. 그 원시적이지 않은 번식이라는 거 말인데, 통에서 아기를 만든다는 거야?”

“응, 몇 년 전부터.”

“아, 그래…?”


지민은 카트나네가 지구를 ‘따위’로 취급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그걸로 지구를 침략하겠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나고, 어차피 삶을 등질 생각이나 하고 있던 자신에게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장소기도 해서 그랬다.

그래서 지민은 ‘뭐 상관없나’ 하고 말하는 것처럼 입을 뻥끗거렸다. 목소리는 일부러 내지 않았지만, 아까 카트나가 전광판으로 방송하는 것을 보면 리트빙도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게 뻔했다. 그 대신, 지민은 카트나가 아니라 리트빙에게 해야 의미가 있는 말 한 마디를 목소리에 담았다.


“왜 굳이 금방이라도 숨을 끊고 싶다는 사람을 살려주는 거야? 어차피 침략당할 거라면, 그냥 거기서 죽게 내버려두는 게 편하지 않아? 왜 하필 나 같은…”


그 시점에서, 리트빙의 입술이 말을 더 이으려는 지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지민은 리트빙이 자신의 생각을 읽는 건 그렇다고 쳐도, 아무 전조도 없이 추행에 가까운 행위를 해온 것은 참기 힘들었다. 기껏 자신이 당했던 비극과 그로 인한 고통을 털어놓을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딱히 관련도 없는 행위로 뚝 끊어버린 셈이 되는 까닭이었다. 심지어 이 방에 막 들어온 직후에도 자기가 ‘알아가는 시기’라고 말해 놓고 그랬으니 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지민은 화들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리트빙의 명치를 밀쳤다. 리트빙의 손이 침대를 받치고 있을 뿐 입술 외에는 지민의 몸을 침범하지는 않았기에, 밀어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 갑자기 들이대는데?”
“그야…”

밀쳐진 리트빙의 얼굴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구애가 실패한 것에 대해 ‘이럴 줄 몰랐다’고 생각하는 듯한 당혹감밖에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뜬금없이 희롱을 당한 지민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앞으로 나랑 같이 지낼 사람을 미리 찜해놓는 거잖아?”


애초에 리트빙은 지민을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 전리품에 가까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한두 번은 지금처럼 지민에게 거부당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걸 받아들일 준비도 안 돼 있고 그럴 생각도 없는 지민에게는 여기로 끌려오기 전에 당했던 일과 별 차이가 없는 희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걸 굳이 내 말을 끊으면서 한 이유는 뭔데?”

“하기 싫은 말을 입 밖으로 내게 하는 건 내 입장에서도 듣기 불편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리트빙의 눈이 괜히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침략 대상으로서 지구를 관찰하면서 지구 사람들의 감성에 물든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지구 사람들과 비슷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민의 사정이 굉장히 참담하고 슬픈 이야기라는 것은 아는 듯했다. 이렇게 애태우듯이 속삭이며 말하는 것을 보면 일단 제딴에는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 보였고, 그것까지는 지민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리트빙 쪽 사정이고, 지민의 입장에서는 그저 굉장히 뻔뻔한 위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원하기는 커녕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을 멋대로 데려와서 장난감처럼 다루겠다는 심정이 뻔히 보이는데, 그러는 주제에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보니 좀처럼 리트빙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세요?”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서 짜증을 뽑아내는 것 같기에, 지민은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 남의 말은 잘만 끊어 대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당신네가 우리 별을 침략하겠다고 해서 인간을 우습게 보는 거야? 아니면, 어차피 잠깐 변덕이 들어서 데려온 애완동물이니까 대충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건가?”

“저, 그게…”


지민은 리트빙에게 말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아서, 입을 움찔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독설을 계속 쏟아부었다.


“그게 뭐? 뭐가 잘못됐냐고? 솔직히 말해서… 잘못됐니 뭐니 하는 것보다 그냥… 짜증난다고!”


본심일까, 아니면 그냥 멋대로 튀어나온 말일까, 지민의 생각이 거기서 잠시 멈추었다. 여전히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당혹감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체념인지, 뭘 해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인지, 혹은 그 전부 다인 건지, 생각이 길어질수록 목이 점점 조여 와서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곱씹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 눈물이 괜히 약하게 보여서 리트빙을 자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리트빙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힌 모습이 지민의 눈에 들어왔다.


‘아, 얘들은 마음을 읽는다고 했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금 전부터 리트빙이 계속 급발진하는 것처럼 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동안 계속 자신의 마음 속 생각을 전부 읽고 있었으니, 저쪽 입장에서는 일일이 지민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그러니까…”


결국 지민에게는 리트빙에게 토를 달지 않고 원하는 대로 받아주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지민의 눈에서 떨어지던 눈물이 멈추지 않고 기나긴 자국을 남기며 흘러내렸다.


“...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죽게 두지도 않을 테니까, 차라리…”

“차라리…”


지민이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사이, 리트빙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망설이지 않아도 멋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차라리 지민 자신이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대뜸 저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덮쳐버리라고, 이 모지리야!”


그 말과 뒤이어 할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어차피 자포자기한 참이라, 지민은 리트빙이 무슨 생각이나 말을 하며 어떻게 나올지 지켜나 보자고 생각하면서 리트빙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정말 해버린다?”

“그래, 까짓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표정은 리트빙이 보기에도 오만가지 불편한 감정을 한없이 쏟아내며 펑펑 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저 불쌍한 아이를 더 안아주고 싶어서, 리트빙은 지민이 팔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다가갔다. 팔을 벌리고 다가가는데도 움직임이 없자, 안심하기보다 측은함이 앞섰다.


“그럼 따라와.”

“어?”


그 모습을 언제까지고 내버려두기 싫어서, 리트빙은 지민의 손목을 잡고 욕실로 들여보냈다.


“뭐 하려고?”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뭐든 해도 괜찮다면서?”

“그게 뭔데?”

“기다려봐.”


리트빙은 그 짧은 한 마디로 지민의 물음을 일축하고 살며시 문을 닫았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뒤 욕실 문이 다시 열리자, 그 너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리트빙이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무, 무슨…”


지민이 당혹감과 의문을 채 입에 담기도 전에, 리트빙의 입술이 다시금 지민을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