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집에서 지도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뚝.
전화를 끊었다.

초여름 오후 네 시의 누런 햇살이 창문으로 비쳐든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비틀린 시간대가 맞물리는 지금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다녀왔습니다."

"이혜영."

내뱉듯이 말을 꺼냈다.

"앉아 봐. 방금 선생님이랑 통화했는데, 점심시간마다 밥도 안 먹고 자꾸 사라진다면서. 1학년 때에 비해 성적도 떨어지고 중요한 때에 뭐 하느라..."

"별일 아니야.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기는, 앉아 봐!'

"알아서 한다고!"

높은 목소리가 오갈 무렵.

"...도서관에 있다가 학원으로 갈게."

방금 내려뒀던 가방을 거칠게 집어들고 집을 나서는 소녀.

검은 머리카락이 철문 사이로 사라지고, 쿵 하는쇳소리 이후 도어록의 전자음만 남았다.




이런 일은 짐작했다.

성인이 갓 된, 이른 나이에 낳은 딸이었지만 남편은 어엿한 직장을 가진 건실한 청년이었다.

체격은 왜소했지만 운동신경은 괜찮았던 그와는 스키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다섯 살 연상에, 내가 다니던 대학을 졸업한 선배였고 아는 동생을 따라 동아리모임에 참석했었다.

집안의 미묘한 반대 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지만 부부관계, 출산 이후 재개한 학업, 태어난 딸의 건강 등 뭐 하나 문제없는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있었다.

도미노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날 떨어졌던 단 하나의 부탁이었다.

술에 취한 머리가 벗어진, 내가 임신했을 때 과일을 보내기도 한 키가 작은 상사가 집까지 운전해달라던 부탁.

보통은 그런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는 법이지만, 금요일 저녁의 순환도로 초입을 모두 우습게 본 것이었다.

면허취소 수준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지닌 운전자를 태운 검은색 세단은, 전조등도 켜지 않고 쇳소리를 내며 가로등을 스치고 지나가-

-남편을 태운 회색 경차를 들이받고, 굴러가는 경차 위로 달려나가 가드레일 너머로 뒤집어져 폭주를 멈추었다.

내 시간은 멈추었지만, 주변에서는 폭력적으로 시간이 지났다.

생명보험, 운전자보험, 회사의 보험처리, 두 차례의 장례식, 음주 운전자 가족과의 만남 등.

그럼에도 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딸아이가 겨울방학 중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데려간 눈썰매장 행사에서 찍은 사진을 받아들었을 때였다.

평균 키에 마른 체격, 친구가 던진 눈뭉치를 털어내면서 웃고 있는 그 눈매는 내가 대학 생활 때 마주친 눈매와 쏙 빼닮아 있었다.

그날, 나는 약 열 달간 회복과 성장해준 딸에게 감사함과 슬픔을 느꼈다.

오래 가지 못할 용기와 앞으로 다가올 풍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중학교 2학년이 된 현재, 가장 엇나가기 쉬울 무렵.

최근 부쩍 행실이 불안정해진 것이다.

귀가한 딸은 초등학생 시절과 달리 피곤해 보였으며, 집에 와서도 방문을 닫고 누군가와 한참을 통화하듯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의 평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학교에서도 사라지는 일이 잦다거나 학원을 땡땡이친다는 등 험한 생각도 가능케 하는 행동들.

"...화장도 하거나 해?"

"그건 아니지만요."

"그래? 이상하네. 아, 그거 오이 빼달라고 했는데."

'좀 노는 아이' 가 되었다면 그것은 각오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화장도, 담배 냄새도, 주변 친구들도 가설을 반박하는 요소들 뿐이었다.

학원이야 안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지만.

"...생활은, 괜찮아?"

학원 이야기를 했더니 머뭇머뭇 말을 꺼낸다.
괜찮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사망보험금, 남편이 다니던 회사의 위로금, 나라의 지원금 등. 딸이 초등학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생활비는 모녀가 살기에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 무렵 일을 찾던 내가 소개받은 곳이 지금 있는 레즈비언바.

요리만 내고 가끔 손님들과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었을 뿐이라지만 처음에는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딸과의 평범한 삶, 그리고 딸이 부족함 없이 자라도록 도와준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고 통장을 보니 그만둘 생각 따위 사라졌다.

이제 와서 수입이 줄어, 편모 가정에 돈 문제까지 생긴 딸의 학교생활을 상상하면 더한 일까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하지만 '더한 일' 까지 맡게 되지는 않았다.

"얼굴은 괜찮지만 생긴 거에 비해 나이도 많고, 애엄마니까" 하는 이유에서.

나도 불만은 없었다.

"...그래, 또 다른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새벽 세 시, 스물여섯 살의 여사원은 다음 날의 출근이나 내 나이 같은 것은 아랑곳않고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퇴근 언제 해?...네 시? 데려다줄게."

익숙지않은 허세와 반말을 하는, 어찌보면 당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

"여름은 냄새나고 더워서 싫지만, 밤에 걸으면 괜찮거든."

딸이 있다는 것까지 말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는 듯 보였다.
지난달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서툰 자신감 표현에 어느샌가 미소가 지어졌다.

뭔가가 흐릿하게 겹쳐 보인다.
딸의 모습을 보는 건가, 하고 갸웃거렸다.

시야가 희끄무레한 것으로 덮여간다-

"어, 맥주 한 잔 마셨잖아?! 잠깐만!"





그렇게 눈을 다시 떴을 땐 거실 마룻바닥이었다.
11시의 햇빛이 쳐진 커튼 사이로 들어와, 잿빛 먼지가 흘러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보자 '모르는 언니가 집까지 데려다 주셨어 기억 안 나겠지만' 하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새벽녘, 내가 철문 사이로 비틀거리며 들어가고 그것을 받는 딸의 모습이 기억난다. 땀방울에 젖은 와이셔츠로 딸과 대화하는 여사원의 모습까지도.

멍하니 생각하며 마룻바닥에 떠다니는 먼지, 머리카락을 보다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청소나 하자.

거실, 부엌, 안방 환기를 시키고 머뭇머뭇 닫힌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색연필로 합판에 그린 표지판에는 '이혜영' 이라는 노란색 글씨와 빨간 태양, 파란 물고기-그리고 지금은 멀리 떠난 발랄한 동심이 달라붙어 있다.

표지판을 건 순간을 회상하며 문을 열었다.

참고서, 단어장, 읽지 않는 세계문학전집...

그리고 지저분한 방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분홍 포유류를 보고...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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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lily/82312957

뭐가 백합이고 제목은 왜이래? 하시는 분들을 위한 글의 기원입니다.


짧게 써볼까 했는데 길어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