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1화

2화


다음 날 아침 - 어디까지나 지민이 평소의 시간 감각으로 어림잡았을 뿐이지만 - 지민이 눈을 뜨니, 침대 옆에서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촉촉한 온기가 전해져 와서, 지민은 그 뜨뜻미지근한 숨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저 은발 여자가 이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는지 떠올리자, 지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리트빙이라는 여자는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지민의 온몸을 만지작거리며 자기 욕구를 채우다가, 자신에게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뒤에야 저 혼자서 스르르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이다.


“하… 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부끄럽고 낯뜨거운, 조금 더 생각하면 치욕스럽기까지 한 기억은 지민의 목을 찢을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을 일으켰다. 방금 인형뽑기를 하듯이 데려온 사람을 마치 몇 년이나 사귄 연인처럼 어루만지는 리트빙이나, 아무리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몰려 있었다고는 해도 거기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간 자신이나, 서로의 감정에 휩쓸려 무절제하게 정욕을 휘둘러댔으니 말이었다.

그렇게 지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은 주변 공기를 찢고, 기진맥진해서 잠들었던 리트빙의 뇌리를 찔렀다.


“왜, 악몽이라도 꿨어?”


정작 그 부끄러운 비명의 원흉인 리트빙이 별일 아닌 것처럼 되묻는 말이 지민의 머리를 더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그 전에 있었던 게 더 심한 악몽이었다는 생각은 안 해봐?”

“악몽? 그게 그렇게 무서웠어?”

“무섭다는 게 아니라!”


지민은 리트빙에게 무어라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춘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여기서 더 말을 꺼내 봤자 대화가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라,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민은 다른 방법을 떠올려보기로 마음먹었고, 의외로 꽤 빠르게 괜찮은 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리트빙이 당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고?”


문제는 그렇게 생각했던 카트나도 그다지 신통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생각한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괴롭히는 거라니까?”

“그래도 말이지, 리트빙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기념품이라면 대놓고 선을 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보는데…”


역시 살고 있던 세계 자체가 다르다 보니,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이쪽 사람들은 상대의 마음을 읽고 직접 나누는 데에 익숙하기에 공감도 잘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다른 문제라는 느낌이었다.

그런 데다가 카트나는애초에  리트빙과 지민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 여유는 물론이고, 그런 ‘개인적인’ 일에 개입할 여유도 없었다. 지민이 카트나에게 다가온 지금도 부관들이 추려낸 공격 후보들 중 가장 먼저 타격할 대상을 고르던 도중 리트빙이 급한 일이라며 억지로 끼어든 상황이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미안하지만, 지금은 ‘못’ 한다고 말해야겠군. 막 중요한 일을 마치기 직전이거든.”


카트나는 짧은 한숨을 쉬면서, 금빛 금속으로 만든 직육면체 모양의 물체 하나를 지민에게 내밀었다. 아까 지민과 리트빙이 카트나의 집무실에 들어올 때 들여다보고 있었던 물건이었기에, 지민도 그 물건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던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가 생각하는 ‘가장 강한 자’에 대해서 할 말이 있나? 여차하면 보여줄 수도 있어.”

“딱히. 그런 걸 나 같은 게 봐 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게다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사용법도 금방 알려줄 수 있어.”

“하긴, 처음엔 그러려고 부른다고 했었지…”

“맞아.”


하지만. 카트나도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지민이 본 것은 별로 큰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대로 고르긴 했네. 뭐, 그럼 알아서 해.”

“우리가 제대로 판단한 건 맞았다는 말이군. 더 할 말이 없다면, 나가도 좋아.”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라는 말이지?”

“그렇지.”


-


잠시 후.


‘나, 결국 여기서 계속 살아가게 됐구나…’


지민은 카트나에게 부탁해 얻은 개인실의 침대에 가만히 걸터앉아, 자신이 미소를 짓는 줄도 모르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오만가지 악감정이 머릿속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목숨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그만큼 깊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누군가 밖에서 부르기 전에는 방을 떠날 수 없다는 것도 함께 전달받은 탓에, 그 웃음은 지민 자신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다. 아무리 이전의 지옥 같은 삶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 대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옥 같은 곳에서 평생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호화로운 감옥도 있다고 했던가…’


그런 가십거리는 자신의 일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지민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어도 좋은 감상이 전해지는 방, 의외로 입에 잘 맞고 몸에도 좋은 듯한 먹거리, 의외로 친절한 사람들, 어느 하나 이전에는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것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겨우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준 것이 언제라도 예전 고향을 파괴해버릴 속셈인 침략자들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때마다 어색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자신은 이렇게 파격적인 특혜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된 것이 어디까지나 그들의 작전과는 무관한, 어느 한 명의 사심 때문이라는 것이 더 어이가 없었다.

“저, 들어가도 될까?”


바로 그 범인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와, 지민의 머릿속을 뒤섞던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든가. 안 잠갔어.”

“어… 아무리 우리가 너를 안전한 사람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도 너는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리트빙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들어와, 지민의 맞은편에 등을 돌리며 앉았다. 아직도 지민이 자신을 돌아볼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같아, 제딴에는 조금 조심스럽게 배려한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물론 지민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해주는 게 편하긴 했다. 하지만 침략자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상대의 의사를 깔아뭉개면서 저쪽의 뜻을 관철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약간 앞섰다.


“뭐해? 여기까지 와서.”

“잘 지내나 해서. 뭐, 그쪽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

“걱정할 게 생기면 바로 손 쓸 거잖아.”


그 말을 들은 리트빙은 잠시 말을 멈춘 채, 손을 뒤로 움직여 지민의 손목에 가져갔다. 방금 지민이 말한 ‘걱정할 것’이 있는 것마냥, 그 손가락 끝에서 느껴진 냉기에는 어쩐지 측은한 감성이 녹아 있었다.


“뭐 해?”

“다시 생각하니 불쌍해서…”

“네, 어련하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내 위에 올라타는 사람이 생판 모르는 다른 별 여자애로 바뀐 게 전부…”


거기서 지민은 자기 입으로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채고, 그 흉흉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것에 잠깐 충격을 받으며 그대로 멈추었다. 리트빙이 차갑게 굳은 지민의 상태를 느끼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침대가 제법 크게 출렁거리는데도 지민은 움직일 줄 몰랐다.


“전, 부…?”

“그게 전부가 아니게 하면 되잖아. 내가 잘해줄게, 응?”

“...큿, 그게 그거 아냐…?”


이번에도 말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리트빙은 실례를 무릅쓰고 몸에서 몸으로 직접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번에도 큰 역효과가 나리라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지민을 여태껏 망가뜨렸던 누군가와 똑같은 파렴치한으로 기억될 게 뻔하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이 겨우 살려낸 사람이 직전의 일에 얽매여 있기만 하는 것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리트빙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겨, 다리는 지민에게 닿지 않도록 무릎을 꿇듯이 벌린 자세로 앉은 채 살며시 손을 뻗었다. 어디에 손을 대는 편이 지민을 가장 덜 자극할지 생각해보지만, 등을 돌린 채 이쪽을 무시하는 사람의 감정을 알아내는 일은 리트빙에게는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번에는 그런 감정을 어떻게든 해결할 방책을 챙겨 왔기에, 조금은 대담하게 나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 받아줄 수 있을까?”

“...”


일단 지민이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라, 리트빙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은 리트빙의 손길을 편하게 해주었다.


“...괜찮아?”

“...알아서 해.”

“하…”


리트빙은 차갑게 굳은 목소리를 듣고 한숨을 쉬며, 품 안에 숨겨 둔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소리가 지민에게도 들렸지만,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그걸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잠깐이라도 돌아봐줄 수 있어?”

“니가 이쪽으로 오면 되잖아.”

“그럴까…”


잠시 후, 지민은 자신의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리트빙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잠깐 사이 입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은 것이 눈에 선하고, 그걸로 무엇을 할지도 머릿속에 뻔히 그려지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생각이 지민의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아예 자기가 먼저 무언가를 함으로써 여기를 흔들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제 지민은 뭘 더 잃을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꿀꺽 하고 무언가가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머릿속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리트빙의 입술이 잠시 지민에게 닿았다가 멀어진 뒤의 일이었다.


“뭐… 한 거야?”

“그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지민은 짧지 않은 현기증을 느끼며, 자신도 비틀거리는 리트빙을 바라보았다. 분명 제 마음이 앞서 이상한 일을 벌였겠거니 싶어 노려보려고 했지만, 목을 시작으로 몸이 점점 달아오르는 통에 정신을 날카롭게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리트빙 또한 비슷한 상태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리트빙이 자신에게 다가가기 직전에 떠올렸던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영영 당신에게 먼저 마음을 전해주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 이랬다고?”

“어, 응…”

“당연하잖아. 난 생각이 없…”


지민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반대로 슬그머니 일어나자, 리트빙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민 또한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상대의 애욕을 읽어냈다는 웃음을 지은 것은 물론이었다.


“...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