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https://arca.live/b/lily/81776559




한 종교가 몰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종말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처참히 허물어지고 녹아내린 폐허의 반석 위에 인간들은 새로운 종교를 세웠다.

 

불과 쇳물을 섬겼던 자들은 이제 광활한 바다를 섬긴다.

 

 

“화산이라는 옥좌에 앉아 철의 은총을 내리던 화염의 군주여. 그대는 이제 불을 토해내는 거대한 악마로 영락했구나.”

 

“… 신경 안 써.”

 

“흐흥. 정말이야? 너를 그렇게 떠받들던 인간들이 전부 내게로 돌아섰는걸? 정말 신경 안 쓰여?”

 

 

아콰비스는 블라즈니르의 주변을 맴돌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연신 흘려댔다.

 

분명 놀리고 있는 모양새였기에 블라즈니르가 지닌 본래 성격 같아서는 이를 결코 인내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블라즈니르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외면해 버리는 최소한의 반항만을 택할 수 있을 뿐, 결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인간들이 바치는 신앙이란 이렇게 감미로운 것이었나……. 바다의 신전에 신도가 뜸해진 지도 벌써 수천 년이어서 한참이나 잊고 있던 맛이야…….”

 

“… 잘 됐네. 실컷 먹지 그래?”

 

“응. 그러려구. 네가 드래곤 치고는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신격을 지닐 수 있었던 건 다 신앙이 있기 때문이었구나?”

 

 

아콰비스는 자신을 외면하는 블라즈니르의 면전에 자신을 들이밀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광활한 대양을 담아낸 것 같은 아콰비스의 푸른 눈동자.

이에 작열하는 용암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던 노란빛의 눈동자는 급격히 기세를 잃어버렸다.

 

 

“안돼. 내게서 눈을 돌리는 걸 허락한 기억은 없는걸?”

 

 

반항은 꿈도 꾸지 못할 강대한 존재를 앞에 두고 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마저 아콰비스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콰비스는 블라즈니르의 턱을 잡고 그녀의 고개가 자신을 향하도록 강제했다.

 

비로소 앰버가 사파이어를 마주한 것이다.

 

 

“이, 이거… 놓거라…….”

 

“흐흥.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뭔가 겁먹고 당황하면 그러더라?”

 

“뭐, 뭐가 말이냐!”

 

“네 말투 말이야. 오래 산 에인션트 드래곤이나 진짜 군주인 것처럼 흉내 내잖아.”

 

“지, 짐은 군주가 맞느니라!!”

 

“아아, 진짜 귀여워. 후후.”

 

 

블라즈니르는 성이 잔뜩 났다.

 

발라르크 화산은 그녀가 사는 궁전이었다.

작열하는 용암은 그녀가 앉는 옥좌였다.

인간들이 바치는 공물은 그녀가 받는 세금이었다.

 

바르샤레인 왕국은 그녀의 것이었다.

온당히 그녀의 것이였었다.

 

그렇기에 블라즈니르는 지금의 수모를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짐을…!! 짐을 우롱하는 거냐…!!! 용서 못 한다!!!”

 

“그래. 과거의 네가 군주였다는 건 그러려니 납득해 줄게. 화산의 군주였나? 아하하하하. 진짜 대단한 위명이야.”

 

 

블라즈니르의 눈동자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찬연한 불씨를 품은 호박(琥珀)이었다.

본래라면 눈부시게 작열하고도 남았을 드래곤의 정념이 물에 잠겨 열기를 잃어가는 것이었다.

 

 

“네가 머무르고 있는 이 심해의 신전은 내 거야. 네가 입고 있는 드레스도 내 거야.”

 

“…….”

 

“… 패배했음에도 아직도 붙어 있는 네 목숨 또한… 이제는 내 거야.”

 

“치잇…….”

 

 

블라즈니르는 눈물이 잔뜩 차올라 아른거리는 눈을 하고서 아콰비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몇 번이나 용기를 잃고 땅에 떨어지려 했으나, 그때마다 블라즈니르는 드래곤의 타오르는 심장에서 곧장 터져 나온 것 같은 분노를 앞세워 몇 번이나 적의를 불태우며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너무 자존심 내세우지 말란 얘기야. 가시도 적당히 세워야지. 장미의 가시 정도는 오히려 꽃을 돋보이게 해주는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엉겅퀴의 가시 정도면… 나도 적당히는 할 수 없는걸.”

 

“어린애 취급하지 마라!! 감히… 감히…!!”

 

 

블라즈니르는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조금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직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이었기에, 눈가에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보면 이미 울고 있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블라즈니르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정념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콰비스는 그녀의 가상한 용기가 싫지 않았다.

 

 

“너무 미워하지 마. 심해 깊은 밑바닥에 존재하는 이 신전에 모든 바닷물을 물린 것도 화염의 드래곤인 너의 안위를 지켜 주기 위한 나의 배려였고, 네가 입고 있는 내열 마법의 드레스도 너의 품위를 지켜 주기 위한 나의 호의였잖아.”

 

“큭…….”

 

“대기의 은혜가 가득 머무르는 이 신전을 예전처럼 만들면 넌 어떻게 될까? 차가운 물이 한가득이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힘을 쓰지 못할 테고… 온전한 힘을 되찾지 못한 너의 몸뚱어리는 익사는커녕 심해의 수압 앞에 산산이 으스러지겠지?”

 

짜악!!

 

“누가… 살려달라고 했어…? 네 알량한… 보잘것없는 동정심에… 내가 감사를 전하길 바랐다면……. 너는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블라즈니르는 아콰비스의 손을 힘껏 쳐냈다.

그리고 그녀의 억압에 불복한다는 최소한의 증명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이는 분명 위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블라즈니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의 보잘것없는 몸부림이 아콰비스에게 명분을 쥐여 주었다는 것이었다.

 

 

“분명 내게서 눈을 돌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했을 텐데?”

 

 

이전과 달리 차갑게 낮아진 온도.

온화했던 신전의 내부가 싸늘하다 못해 피부가 에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화산 심층의 용암 속에서 목욕하기를 즐겼던 화염의 드래곤에게 이런 혹한은 너무도 가혹한 환경이었다.

본신의 강대한 힘을 간직했던 때였다면 만년설의 빙하 속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겠으나, 대부분의 힘을 잃고서 본래의 모습으로 현신하는 일조차 요원할 정도로 나약해진 현재의 상황에서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블라즈니르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 옷도 압수야.”

 

쫘악!!

 

“히윽…!!”

 

 

아콰비스의 완강한 손길에 블라즈니르의 드레스가 처참히 찢어졌다.

그 찢어진 드레스는 오직 블라즈니르만을 위해 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콰비스의 배려가 녹아든 것이었다.

이따금 격정이 치밀 때면 상승하는 그녀의 체온에 타오르지 않도록 내열 마법이 깃들어 있었던 데다가, 인간의 모습이 되어버린 블라즈니르의 신체 사이즈에 정확하게 일치할 정도로 완벽히 맞춰 제작된 드레스였던 것이었다.

 

그런 드레스를 아콰비스가 손수 찢어버렸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 의미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너는 내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어, 블라즈니르.”

 

“으웃…….”

 

“이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도마뱀아.”

 

 

완벽한 나신이 되어버린 블라즈니르는 훤히 드러난 자신의 젖가슴을 감싸 쥔 채 바닥에 웅크렸다.

하반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가리기에는 팔이 모자랐기에 다리를 꼬아서 가렸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감춰본 적이 없는 드래곤임에도 인간의 몸을 가지게 되고 나서 생겨난 수치심.

블라즈니르의 몸을 가리는 행동은 분명 수치심에서 파생된 본능이었다.

 

그러나 아콰비스는 그 최소한의 방어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햐읏…!!”

 

“누가 가리라고 했어?”

 

 

아콰비스는 블라즈니르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그녀의 양팔을 강제로 벌려 나신을 가리기 위해 둘러졌던 보잘것없는 무장을 해제시켰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는데… 몸만은 한껏 무르익었구나.”

 

“ㄴ… 놔줘…….”

 

“이 음탕한 도마뱀.”

 

 

블라즈니르의 나신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앳되고 귀여운 얼굴과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농익은 매혹적인 여체.

 

그녀의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젖가슴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수치심과 혹한의 추위에 그녀가 몸을 떨 때마다 흔들리는 접시 위의 푸딩처럼 말캉말캉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는 너무도 가련했다.

군살 하나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형태의 허리였으나 그렇다고 잘 가꿔진 신체에 대한 표현처럼 탄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대한 드래곤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던 것이었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었던 하반신.

그렇기에 가장 지키고 싶을 다리 사이의 계곡을 위해서 한껏 꼬아진 다리.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림으로써 그녀의 튼실한 엉덩이가 측면으로 힘껏 내밀어지며 탐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아… 누구 보라고 이렇게 야한 거야…….”

 

 

아콰비스는 블라즈니르의 무방비하게 드러난 육체를 감상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차가운 바다의 빛을 닮은 그녀의 눈동자에 뜨거운 열기가 깃들기 시작한 건 보는 이의 착각이 아니었다.

 

 

“으흑…….”

 

투둑

 

 

순간 블라즈니르의 신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아콰비스가 여전히 그녀의 두 팔을 붙들고 있었기에 바닥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으나, 늘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그녀의 몸은 아콰비스의 손길에만 의존한 채 힘없이 늘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참고 또 참아 끝까지 차올랐던 눈물이 비로소 넘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를… 끅… 나르을…….”

 

“…….”

 

“나… 를… 끄흑… 이렇게 괴롭혀서… 뭐가 즐거운 거야아…….”

 

 

아콰비스는 잠시 블라즈니르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을 한껏 흘리고 있음에도 그녀의 앰버는 여전히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원망.

 

그 쓰라린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에 아콰비스는 자신이 붙들고 있던 블라즈니르의 손을 밀치듯 놓아주었다.

 

 

털썩

 

“으웃…….”

 

 

블라즈니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당혹감을 느꼈다.

 

당연히 신전의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녀는 현재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침대.

다섯 명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의 커다란 체리목의 침대.

프릴과 불투명의 커튼이 한껏 달린 캐노피 침대.

 

그 위에 그녀가 주저앉아 있는 것이었다.

 

 

“미안해.”

 

 

블라즈니르는 아콰비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과의 말이었다.

 

이에 블라즈니르는 고개를 들어 아콰비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콰비스는 블라즈니르와 마찬가지로 나신이 되어 있었다.

블라즈니르는 이토록 커다란 침대가 나타나는 순간도 전혀 목격하지 못했으나, 아콰비스가 그녀의 의복을 벗은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넋이 나간 모습으로 올려다보는 블라즈니르에게 아콰비스가 몸을 숙여 다가오며 말했다.

 

 

“너를 이렇게까지 괴롭힐 생각은 없었어……. 단지 조금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

 

 

신전의 대기가 온화해졌다.

서리가 낄 정도로 얼어붙었던 신전의 내부는 따스하다 못해 한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더워졌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위를 느꼈던 블라즈니르의 신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더울까? 화산에서 살았던 네게 어느 정도가 적당한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

 

 

아콰비스는 눈물범벅으로 엉망진창인 블라즈니르의 뺨을 닦아주었다.

조금 전까지의 냉혹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따스한 온정만이 남아있었다.

 

블라즈니르는 혼란스러웠다.

 

 

“내게서 뭘 원하는 거야…?”

 

“…….”

 

“그렇게 괴롭히고… 무섭게 하다가… 왜 친절하게 대해줘…? 왜…?”

 

 

아콰비스는 블라즈니르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숙인 채, 그녀의 뺨을 쓸어주던 정도의 거리가 아니었다.

 

서로의 감촉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

의복을 입은 채라면 결코 느낄 수 없을 여체의 보드라운 속살이 맞닿을 정도의 간격.

 

아콰비스의 뜨거운 숨결이 블라즈니르의 피부를 타고 전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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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분량이 너무 긴가 싶기도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단계는 다 밟아야 하고…….

 

여하튼 다음 편은 viva sexual carniv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