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떠돌이 



비가 내린 후의 여름 밤이었다.


이리스 가문의 정원에서클레어 이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투성이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을 가진붉은 머리의 여성여성은 힘겹게 새액 새액 숨을 내쉬며 이리스 가문의 석상에 기대 앉아있었다.


피투성이기에 피비린내가 진동하여클레어와 동행하던 하녀들은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클레어는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으며오히려 가까이 다가갔다.


얼어붙은 수정 같은 눈을 반짝이며클레어는 천사처럼 고운 목소리로 잔혹한 말을 뱉었다.



"어디서 개가  마리 기어들어왔네."



힘이 하나도 없는듯  늘어진 그녀가 입에 비릿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소리내어 웃었다.


힘아리는 없었지만 분명 호쾌하며 허탈한 웃음이었고 끝끝내 그녀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하하… 하하하… 쿨럭크흡크으…."



웃음으로 인한 떨림으로 고통을 선물 받았는지 피를 닦았다면 나름대로 아름다웠을 얼굴이 일그러졌다.


몸을 살짝 웅크렸던 그녀는 그러다 다시 웃음을 머금고는 석상에 다시 기대었다.


조금 갈라진그러나 매혹적이고 어두운 느낌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귀족 아가씨들은 사람을  취급하는게 취미인가?"


"미안하게 됐어전혀 사람의 행색이 아니라서."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과 말투였지만여성은 그저 가벼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클레어는 보았다달빛 아래에서여성의 눈동자가 밝게 빛나는 것을.


아침 해가 뜨는 순간까지 묵묵히  빛을 뿜는 샛별 같았다 샛노란 눈동자가 클레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성은 기력 하나 제대로 나지 않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고가새벽에는 없을 테니까… 죽여도 좋고…."



여성은 눈을 감았다호흡이 전보다 고르다잠든  같았다.


클레어는 벌벌 떠는 하인들을 보고는 하고 혀를 차며 명령했다.



"사람 데려와서 씻기고의사도 데려와."





——————





여성이 오랜시간동안 잊고 있었던 따스함이 느껴졌다.


죽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분정도 누워있었다.


이내 전해지는 아릿한 고통은 여성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여성은 이를 뿌드득 갈며 눈을 떴다.



"… 내가 그냥 두라고 했잖아."


"내가 떠돌이 개새끼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서유감이네."



여성은 으르렁거리듯 클레어를 노려보았다클레어는 막무가내로 일어나려하는 여성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려고?"


"감사하다고 손등에 키스라도 해줄까?"


"개는  은혜를 갚는다던데."



여성은 클레어의 가녀린 목을 잡고는 위협적으로 찡그린 얼굴을 들이밀었다.


노란 눈동자가 어둠 속을 거니는 늑대의  같았다.


그녀는 클레어에게 변치않는 사실을 알려주듯 또박 또박 말했다.



"나는개가아니야."


"… 어련하셔라."



클레어의 눈동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클레어는 그녀를  아래로 흩어보더니 약간의 비웃음을띄며 말했다.



"옷부터 입고 뭐든 하는게 어때?"


"…!!"



붕대로 어느정도 중요한 부분은 가려졌으나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그녀는 허둥지둥 탁자에 놓인 옷을 입고서 유유히 방을 빠져나가는 클레어를 뒤쫓았다.





——————





향기로운 허브 향이 여성의 코를 간질였다여성은 김이 모락 모락나고 있는 차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이내 안심하고 홀짝이기시작했다.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클레어였다.



"이름이라도 묻고싶네."


"없어."


"거짓말."


"버렸으니까 없는거야."


"그럼 지금 하나 지어."


"…… 레나."



  번의 망설임 끝에 탄생한 이름이었다클레어는 여성레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많이 가지고 싶던 이름인가봐?"



레나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다시 차를 홀짝였다.


클레어는 레나에게 초콜릿이 박힌 머핀을 내밀었다레나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머핀을 보다가 다시 냄새를 맡고는   베어물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오독오독 씹히는 초콜릿의 감각에 레나는  노란 눈동자를 휘동그레 떴다.


클레어는 레나가 다소 급하게 먹는 모습을 보며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레나는 그런 클레어의 표정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머핀을 가득 물고있어 레나의 발음은 어색했다.



"… 머야."


"아니그냥사냥개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해서."



레나의 얼굴에 상당히 불쾌하다는 뜻이 드러났다레나는 입안에 가득  황홀한 달콤함을 삼키고 나서 물었다.



"  살린거야?"



클레어는 자신이 사교계에서 배운 것들  가장 쓸데없다고 생각한 '호의 가득한 미소' 지었다.



"이리스 가문의 넓은 아량이라고 해둘까."



레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여전히 콧잔등을 구기고 있었다.


클레어는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역시믿지 않는 표정이네."


"귀족은 믿을게 안돼."


"배가 불러서 이것저것 많이 한다는건 인정할게."



레나는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클레어를 이상하다는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그래서 목적이 뭔데."


"목적 말이지."



클레어의 푸른  눈에 잠시 빛이 반짝거렸다레나는 클레어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클레어의 금발을 스친 바람이 화이트 머스크 향을 실어왔다.



"나의 개가 되어줘."



레나는  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 그게 전부?"


"그냥 주인을 위해서 놀아주면 그게  할일이야."



레나가 콧잔등을 찡그리자클레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잖아귀족은 배가 불러서 이것저것 신경을 쓴다고."


"… 알았어."



레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녀' 말했던  처럼 인연이리라그렇게 레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