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레나의 모습



"예전에 당신 같은 아이를 만난적이 있었어요, 붉은 머리에, 노란 눈동자."


"… 그렇습니까."



레나는 약간의 쓴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앨린, 그녀가 레나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착각할 뻔했어요. 정말 닮았거든요, 이름이 레나이기도 하고. 혹시 우리 만난적 있어요?"


"… 전 그저, 클레어 아가씨의 경호원일 뿐입니다. 만난 적도 없고요."



다소 차가운 말투였다. 앨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갑자기 말 걸어서 미안해요."



달콤한 무화과 향이 멀어져갔다. 처음으로 제대로 느껴본 향이 멀어지자, 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저, 아가씨."



앨린의 녹색 눈동자가 레나를 향했다. 역시나 처음의 따스함은 놓칠 수 없었다.



"… 조금만, 걸으시겠습니까?"



앨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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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레나가 이테르오 가문에 들어선 때였다.



"안녕?"



순진무구한 얼굴로, 레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사람은 앨린이었다.


레나는 처음 느껴보는 호의에 눈을 반짝였다.



"어딜 더러운 것이!"



이테르오 공작은 앨린에게 다가가던 레나에게 호통을 치며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그녀를 내쫒았다.


앨린은 당황하며 숨어버린 레나를 보았다. 이테르오 공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앨린에게 말했다.



"친하게 지내서는 안돼. 짐승이란다."



레나는 앨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남 몰래 수풀 속에 숨어 꺄르르 웃는 앨린을 지켜보았다. 사랑스러웠다. 가끔 마추치고 나서, 호되게 맞은 것을 기억하며 몸을 숨기려하면 앨린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기에, 레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앨린은 예쁜데… 자질이 없어. 누군가의 아내로 지낸다면 그 예쁜 미소나 방긋 방긋 지으면 되니까… 괜찮지 않을까? 붉은 개.'


'… 원하시는게 뭡니까.'



그 마음을 알고 있던 레베카는 그런 레나를 이용해먹기도 하였으나, 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르는 것 뿐이었다.



"… 레나 경?"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네요."



처음으로, 그 지옥에서 빛을 내려준 사람. 그 사람이 앨린이었다.



'그리고 난 곁에 있어서는 안 될 짐승이지.'



"레나."



고혹적인 장미의 향. 레나의 뒤에는 클레어가 있었다. 클레어는 인상을 쓰며 레나의 손목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네요, 앨린. 전 레나에게 볼 일이 있어서."



레나는 클레어의 질투를 느꼈다. 클레어가 이끄는 대로, 레나는 이끌려 앨린에게서 멀어졌다.


더 이상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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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넌 나의 개잖아."



마치 분하다는듯, 클레어의 목소리는 격양되었고, 호흡은 거칠었다.



"왜 계속 다른 사람이랑 있는거야?"


"… 난 개가 아니야."



레나의 표정은 진지했다. 클레어는 레나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 곁에 있어."


"… 넌 내 모습을 몰라."



탁.


클레어가 꼬옥 잡고 있던 레나의 손은 쉽사리 빠졌다.



'괴물새끼.'



그 단어는 계속 레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넌 내 진짜 모습을 몰라, 클레어."



앨린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 있다. 짐승의 모습.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괴물이라고들 한다.



"그럼 보여줘."


"뭐?"



클레어의 눈이 그정도로 확신에 차있던 적은 없었다.



"여기서, 네 진짜 모습을 보여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 당신은 절대 나의 모습을 보고 도망가지 않을거야. 나의 자유로움을 사랑해준 당신은 이것 까지 사랑해주겠지.



'그래서 두려운거야.'



네가 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삼켜지면, 그때야말로 나의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이니까.



"… 달이 가장 밝은 날에. 보여줄게."



레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 클레어의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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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선박을 노릴거야. 동방의 물건을 실은 곳이지. 그쪽이 끊기게 되면 타격이 클거다."


"… 용병을 고용해야 할까요?"


"그래야겠지."



이리스 부인, 클레어의 어머니가 맑은 눈빛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칼 끝 하나 스쳐본적 없는 전설의 여기사. 지금은 은퇴하였으나 어머니의 자태는 여전히 강인했다.


클레어가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책임은 제게 있으니."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이고는 말했다.



"너를 믿기에 보내준단다. 조심하렴."


"… 배에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클레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머니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물어보는구나. 괜찮고 말고. 칼 끝 하나 스쳐본적 없는 여기사 아니더냐? 이까짓 상처야 벌써 9년 전에 나았단다."



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때 클레어 자신이 멈추지만 않았어도, 전설은 여전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아 습관적으로 물어본 탓이리라.



"그렇… 겠지요…."


"그 붉은 개가 아니었다면 그 순간이 아주 악몽이었을거야. 그렇지?"



붉은 개. 클레어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의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강해졌구나, 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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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바로 출발해. 새벽에 도착하는 선박이니까."


"… 알겠습니다."



레나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어, 레나경?"



방심하고 말았다. 레나의 샛노란 눈동자에 앨린이 비쳤다.



"… 안녕하십니까, 앨린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앨린, 그녀가 레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심장이 더 이상 사무치지 않았다.


아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클레어.'



그녀를 사랑하는 탓이리라. 레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앗, 아, 잠시만요."



앨린이 사랑스럽게도 레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잠깐 시간 있나요? 조금만요."



흔들렸을 마음이다. 그러나 레나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송구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은 웃긴 말이었다. 스스로 개를 자처하는 순간이라니.



"충성스러운 개는 주인만을 바라보니까요."



레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 이테르오 가문의 저택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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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마지막 용병이 갑판 위에 널브러졌다.


레나의 동료들은 갑판 위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물들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동료 중에 한 명이 레나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오늘도 한 건 해보자고, 붉은 개."


"레나야."

"뭐?"



레나는 그 동료의 얼굴에 바로 주먹을 꽂으며 말했다. 레나의 표정은 상당히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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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가 알아차릴만큼 선박 위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명확히도 밝았던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어둠을 불러왔다.



"… 여긴 왜 왔어? 위험한데."



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레어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노란 눈동자를 마주했다.



"여기 있을 것 같았어."



어둠의 유일한 광명은, 더 이상 클레어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클레어가 말했다.



"보여줘. 네 모습."


"두려움에 떨게 될 거야."


"난 내 개를 무서워하지 않아."



정적.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클레어의 볼을 스쳤다.



"어서, 레나."



구름이 걷힌 달빛 아래로, 커다란 늑대의 발이 나왔다. 점점 그 강렬했던 금빛 눈동자가, 클레어를 향해 다가왔다. 달빛 아래에서, 조금은 피에 젖어버린 붉은 늑대. 클레어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무 두려움 없이 레나에게 다가갔다.


클레어는 레나의 귀 사이를 쓰다듬어주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중요하지 않아. 넌 레나야."



레나는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클레어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너의 충성스러운 개가 될게. 절대로 변치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