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달과 별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보네카는 요정 같은 여자이다.


 보네카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녀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하면 다양한 말을 들을 수 있다.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어깨까지 내려온다, 호박빛 눈동자는 보석처럼 아름답다, 키가 조금 크다, 보이는 것보다 힘이 세다, 처음 입학할 때는 햇볕에 탄 갈색 피부였는데, 지금은 대리석처럼 피부가 하얘졌다, 처음 배우는 내용도 바로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 학년 차석을 차지할 정도로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 배려심이 많아 인기가 많다, 뭘 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한다, 항상 웃는 얼굴이라 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평민 출신이지만 귀족 자녀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 먹는다, 품위 없이 걸핏하면 뛰어다닌다, 출신이 천해서 그런지 넌지시 꾸짖어도 눈치를 못 챈다……. 보네카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수많은 답변이 나오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말이 있다.


 보네카는, 요정 같은 여자이다.






 페르베카 역시 보네카를 보며 남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차이점이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날것'을 보고 평가했다는 점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은 관리가 되어있지 않아 생각보다 푸석푸석하다.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는 평소에 크게 뜨고 다닐 때보다 눈물에 젖어 반쯤 감겨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 키가 커 보이지만 막상 직접 맞대고 비교해 보면 남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모르지만 만져보면 느껴지는 잔근육이 많아서 힘이 세다. 수녀복인지 학생복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펑퍼짐한 남색 교복에 가려진 속살은 언제나 하얬다. 모르는 것을 배우면 이해하거나 외울 때까지 계속해서 복습한다. 마법을 다루는 방식은 투박하고 어설픈 데다 비효율적이지만 타고난 마력이 많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고난 천성이 착해서 남들을 많이 도와주지만, 역으로 자신이 도움을 받는 건 거북해한다. 요령 피우는 방법을 몰라 무얼 하든 전력을 다해 금방 지친다. 남들 앞에서는 곧잘 웃지만 혼자만 있을 땐 별로 웃지 않는다. 평민이라는 자기 위치를 언제나 자각하고 있다. 음식은 맛을 느끼는 것보다 배를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에서는 천천히 뛰어야 해서 답답해한다.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게 답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보네카를 가까이에서 보는 페르베카는 남들과 같은, 하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보네카는, 정말로 요정 같다.






 "베카, 무슨 생각해?"


 보네카는 자신을 등지고 누워있는 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너."


 나직한 대답에 페르베카의 머리카락을 따라 움직이던 손이 멈칫했다.


 "그래."


 평상시와 같은 어조로 말한 보네카였지만, 페르베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비비는 보네카의 손에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읽어내고 말했다.


 "왜? 내가 너무 솔직했어?"


 "…… 응,"  페르베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보네카의 손가락들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짧은 대화 이후 찾아온 침묵은 보네카가 페르베카의 머리카락을 비비는 소리를 더 크게 만들었다. 페르베카는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지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대의 감정을 추측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숨기는 감정을 읽어내야 했던 귀족 아가씨에게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의 감정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페르베카가 그동안 해왔던 것이 은은한 차의 향기를 맡으며 어떤 종류인지 알아맞히는 것이었다면, 보네카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크림과 설탕이 듬뿍 들어간 부드러운 케이크를 입안 가득 베어 무는 것과 같았다.

 그랬기에 페르베카는 보네카의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흘리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작고 희미한 감정의 편린들에 익숙해진 그녀에게 보네카가 보여주는 감정의 덩어리는 지나치게 컸다. 입안에 들어온 케이크가 혀가 저릿할 정도로 달다는 건 알 수 있어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단맛인지 ― 이를테면 설탕, 꿀, 과일, 크림, 시럽 등 ― 알 수 없는 것처럼 보네카의 감정이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알 수 있어도,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페르베카는 지금 보네카의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짜증일까, 서운함일까. 어쩌면 실망일지도.' 복잡한 건지 단순한 건지 애매한 감정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던 페르베카는 마지막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보."


 "왜?"


 "얼굴 봐도 돼?"


 "아니."


 페르베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화가 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페르베카는 천천히 그녀의 회색 눈동자로 보네카의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육구를 생각나게 하는 도톰한 분홍색 입술, 살짝 들어가 있지만 직접 만져보면 나이에 맞는 탄력이 느껴지는 볼, 짙고 곧게 난 갈색 눈썹, 그리고…….


 "안 된다고 했잖아." 쿡, 보네카가 검지를 들어 페르베카의 미간 사이를 가볍게 찔렀다. 아프거나 불쾌할 정도로 강하진 않았지만 페르베카의 눈을 깜빡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강제로 눈을 한 번 깜빡인 페르베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부끄러워하기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네 눈빛이 소름 돋아서 그래."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보네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가벗기는 거 같은 눈빛에 어떻게 익숙해지라는 거야?"


 "이미 전부 벗고 있으면서?" 페르베카가 몸을 뒤집어 보네카를 향하자,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코발트색 이불이 살짝 흘러내리며 풍만한 가슴의 윗부분이 드러났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보네카는 페르베카의 몸에 이불을 다시 덮어주면서 말했다.


 부드러운 이불이 살갗에 스치는 간질거림에 기분이 좋아진 페르베카가 몸을 꿈틀거리며 보네카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아가씨가 응석을 부린다는 걸 알아차린 보네카 역시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페르베카가 보네카의 하얀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보네카도 봉제인형을 만지작거리듯 자신의 다리를 가지고 노는 페르베카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페르베카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즐기던 보네카는 금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귀를 발견했다. 검지와 엄지로 머리카락을 벌려 귀가 완전히 드러나게 한 그녀는 말랑말랑한 귓불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페르베카가 보네카의 다리를 조금 끌어당겨 자신의 볼을 붙였다.


 "무릎베개 해줄까?" 보네카가 자신의 다리에 붙은 페르베카를 보며 물었다.


 "아니. 괜찮아. 이거면 충분해."


 말을 마친 페르베카는 보네카의 다리에 이마를 대고 숨을 조금 크게 들이쉬었다. 공기에 섞인 살냄새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까지 섞여 들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 페르베카는 이 냄새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품에 안겨 마음껏 맡을 수 있었던 냄새였지만, 그녀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후로는 그 기회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파티에서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를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고르게 되고서는 전혀 맡을 수 없게 된 냄새였다. 

 "흐응……." 페르베카가 보네카의 살냄새를 맡으며 무의식중에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자 보네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보네카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든 페르베카는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왜 웃어?"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페르베카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보네카가 계속해서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페르베카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자신을 놀리는 친구를 노려보았다.


 "진짜 별거 아니야." 그 눈빛에 위기감을 느낀 보네카가 급히 말했다. "지금 상황이 재밌어서 그래."


 "뭐가?" 페르베카는 만약 그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허벅지를 물어버릴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학생회장님이 이렇게 어리광쟁이라는 거."


 "…… 너한테만 이러는 거야." 페르베카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럼, 알지." 자신의 다리를 휘감은 팔에 힘이 빠진 걸 느낀 보네카는 안도감을 느끼며 말했다. 


 작은 위기를 넘긴 보네카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뜨지 않은 달을 대신하듯 무수한 별들이 짙은 남색 하늘에 가득 떠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하늘을 길게 가로질러 흐르는 푸르른 은하수였다. '흐른다기보다는 그저 떠 있을 뿐이고, 강물이라 하기에는 오히려 구름에 더 가까운 모습이 아닌가?' 보네카는 고향에서 은하수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강이든 구름이든 아름다운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처음 아카데미에 왔던 날, 보네카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어디를 둘러보아도 드넓은 평야와 야트막한 언덕만 보이던 고향과는 달리, 이곳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높게 솟은 건물과 벽뿐이었다. 건물이란 당연히 나무로 짓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아카데미의 건물은 전부 매끈매끈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건물의 벽에는 그 어떤 선조차 보이지 않으니, 미장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그녀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돌을 깎아내서 만든 것 같았다.

 난생처음 겪는 웅장한 건축물의 압박에 숨쉬기조차 어려운 그녀와 달리 그녀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는 것도 보네카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나름 자신의 가문에 자신이 있는 귀족들조차 차원이 다른 아카데미의 위용에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함부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예절 교육을 받은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던 건 오랜 세월 동안 몸에 익은 예절뿐 아니라, 품위 없이 입을 작게 벌리고 충격받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평민 여자아이와 똑같은 취급을 받기 싫다는 선민의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순간부터 기가 죽어버린 보네카는 자신을 조여오는 공기를 피해 도망치듯 기숙사를 찾았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 안쪽이 흔들리는 것 같아 멀미가 났다. '들어가서 가장 안쪽, 들어가서 가장 안쪽, 들어가서……' 보네카는 기숙사의 위치만 되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그녀에게는 자신이 똑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는 올바른 길을 따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숙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입사 수속을 전부 마친 보네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지친 심신을 이끌고 방문을 연 보네카는 다시 한번 놀랐다. 옅은 노란색 커튼이 쳐진 크고 긴 창문과, 그 창문 앞에 놓인 티테이블, 사람이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로 긴 녹색 소파, 바닥에 깔린 마룬색 러그, 그리고 닫힌 방문 두 개. 보네카는 자신이 기숙사 방이 아니라 엉뚱한 방문을 열었나 싶어 다시 복도로 나왔지만 명패에는 분명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심조심 방 안으로 들어간 보네카는 혹시 누가 있을까 싶어 닫힌 방문을 두드렸다. 두어 번 문을 두드린 후에야 아무도 없음을 확신한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건조한 햇볕에 말려진 이부자리의 부숭부숭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히며 그녀를 맞이했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연노랑 커튼이 쳐진 창 아래에 코발트색 이불로 덮인, 사람 서넛이 동시에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었고, 그 옆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체리색 원목으로 만든 선반 달린 책상이 놓여있었다. 그 건너편인 보네카의 옆에는 커다란 하얀색 옷장과 화장대, 그리고 전신 거울이 있었는데, 옷장이 얼마나 큰지 보네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동생들이 모두 그 안에 들어가 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창문 반대편에 놓인 또 다른 문을 본 보네카는 그 안을 열어보았다. 그 내부는 화장실과 욕실이었으나 보네카는 아예 용도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욕조와 세면대는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수도의 손잡이를 돌리니 물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눈치챌 수 있었지만, 변기는 끝까지 어떤 용도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이 빨려 나갔다가 들어오는 걸 본 후에 세탁을 하는 장소라고 잘못 넘겨짚어 버렸다.

 거실 반대편에 있는 방도 똑같은 구조임을 확인한 보네카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양쪽 방이 완전히 똑같이 생긴 데다가 명패도 없어서 어디가 자신의 방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그냥 먼저 온 사람이 아무 곳이나 먼저 들어가면 되고, 보네카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으나 혹시라도 정해진 방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에 보네카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거실을 오가며 갈등하던 보네카는 깊은 한숨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가, 그 푹신한 감촉에 놀라 일어났다. 자신이 앉은 바람에 소파가 망가진건가 걱정하던 보네카는 소파의 다른 부분들도 그렇게 들어간다는 걸 알고 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앉았다. 소파에 몸을 기댄 보네카는 양쪽 방문을 보고 작게 세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두 사람이 사는 기숙사 방이 여섯 가족이 사는 고향 집보다 넓고 고급스럽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쉴 곳에서조차 낯선 감정에 휩싸인 보네카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두려움과 불안함, 막연함이 섞인 눈물이 그녀의 눈에 차올랐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세상에서 자신이 그 완벽함을 깨트리는 불순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보네카는 마음을 다잡았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곳에 남아야만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이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모두를 편하게 해줄 수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떠올리며 보네카는 작은 훌쩍임과 함께 눈물을 닦아냈다.






 페르베카는 유리창 너머로 은하수를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투명한 다홍색 찻물이 선홍색 혀를 감싸면서 따뜻한 쓴맛이 감돌았다.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으로 숨을 뱉은 페르베카는 찻잔을 손 위에 내려놓았다. '벌써 집이 그리워지네.' 그럭저럭 괜찮긴 했지만, 그래도 집에서 전문가가 내려주던 맛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차맛에 페르베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따뜻한 차의 온기를 느끼던 그녀는 다시 한 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직접 내린 차는 맛이 조금 아쉽긴 해도 속을 따뜻하게 하기엔 충분했고, 지금 그녀가 바라는 건 딱 그 정도였다. 낯선 환경에 놓여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정도의 온기.

 여기에 시원한 밤공기도 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창문을 열 수 없었다.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가 찬바람이 들어오면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룸메이트가 깰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가의 일원으로서 항상 누군가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던 그녀였기에, 지금처럼 곁에 아무도 없는 생활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낮 동안에는 다른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을 만나며 그 불안함을 잊을 수 있었지만 밤이 되어 기숙사로 돌아오니 밀어두었던 마음이 확 밀려들며 그녀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그 허전함을 룸메이트와 수다를 떨며 잠재우려고 했으나, 그녀의 룸메이트는 한참 전부터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으나, 페르베카는 보네카를 보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 물론, 어디까지나 페르베카의 입장에서 ― 재질의 옷에, 관리가 안 된 ― 이 역시, 페르베카의 입장에서 ― 짧은 갈색 머리카락과 태양에 그을린 피부, 그리고 품위 없이 ― 막상 당사자는 그것이 품위 없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 거실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 온몸으로 자신이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 여자가 자신의 방에 잠들어 있다면, 그건 분명 룸메이트일 것이고, 평민임에도 왕족인 자신과 한방을 쓴다는 건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니, 그 모든 것을 만족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역대급으로 막대한 마력량을 가지고 있다며 특별 입학한 평민, 보네카뿐이었으니까.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페르베카는 아쉬움을 느끼며 자신이 쓸 방을 찾았다. 먼저 들어간 방이 비어있는 걸 본 페르베카는 보네카가 반대편 방을 사용하는 걸로 착각하고는 자신이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한쪽에 매고 있던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온 짐을 전부 정리한 페르베카는 난생처음 해본 육체노동에 지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대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고 싶었지만, 그래도 룸메이트와 인사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거실로 나와, 그때까지도 잠들어 있는 보네카에게 자신의 담요를 덮어주고 차를 마시며 그녀가 깨어나길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긴 하루에 지친 페르베카가 그냥 자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소파에 누워있던 보네카가 눈을 떴다. 잠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곧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다가 몸을 덮은 담요에 엉켜 다시 소파 위로 쓰러졌다.

 처음 보는 담요에 의아해하는 보네카의 순수한 반응을 본 페르베카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웃는 건 그렇게 예의 있는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르베카가 미처 웃음을 다 삼키기도 전에, 인기척을 느낀 보네카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보네카에게 은하수는 고향의 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시원한 바람에 섞여 들려오는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밤하늘을 갈라놓는 별들의 구름이 언제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네카는 그런 밤하늘을 볼 때면 종종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먼 옛날에는 하늘에 오직 해와 달만 있었다. 그렇기에 낮의 모습은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었지만, 밤의 하늘은 너무나도 삭막했다. 이를 안쓰럽게 여긴 여신은 해와 달을 만들고 남은 빛무리를 모아다가 요정들의 왕에게 밤하늘을 장식할 무언가를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요정의 왕은 여신에게 받은 빛무리를 사흘 밤낮 동안 쉬지 않고 마법으로 연마하여 별들을 만들어 냈다. 고된 작업을 끝낸 왕은 가장 발이 빠른 요정을 불러 여신에게 별을 전하라 명령하고 잠에 들었다. 

 요정은 왕이 만든 별을 지고 여신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갔다. 높은 산과 깊은 숲조차 순식간에 지나친 요정은 어느 강 위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요정이 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무렵, 요정은 강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강 건너편에 있던 건, 강줄기를 따라 산책하고 있던 여신이었다. 요정은 난생처음 본 여신의 아름다운 외모에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힘이 풀린 요정의 손에 들린 자루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요정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자루가 요정의 손을 완전히 벗어났고, 별이 담긴 자루는 풍덩 소리와 함께 강에 빠져버렸다.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요정이 급히 자루를 다시 건졌지만, 이미 대부분의 별이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간 뒤였다.

 자신의 실수에 망연히 주저앉아 버린 요정의 앞으로 여신이 다가왔다. 요정은 여신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어떤 벌이든 받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신은 작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는 말과 함께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별을 품은 강물이 그대로 떠올라 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다. 이어 여신이 다시 한 번 손을 움직이자, 자루에 남아있던 별들이 비어있는 공간에 박히면서 오늘날의 별자리가 되었다.

 은하수와 별자리를 만든 여신은 요정에게 덕분에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게 꾸며졌다면서 감사 인사를 했고, 요정은 여신의 자비에 감복하였다.


 이 전설을 처음 들었을 때, 보네카는 속으로 '대체 여신님이 얼마나 예쁘길래 저 많은 별이 강에 빠지는 동안 눈치채지 못한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페르베카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그 의문의 답을 체득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 갓 수확한 밀을 정성 들여 빻아 만든 고운 밀가루보다 더 희고 고와 보이는 피부, 장인이 직접 깎아 모양을 만들어 낸 것 같은 콧날, 수줍음을 담은 듯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는 분홍빛 입술, 그리고…….

 보네카는 멍하니 여신의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페르베카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지만 그 모든 아름다움은 진정한 보석을 위한 배경에 불과했다. 뭇 여인들이 탐낼 정도로 길고 촘촘한 속눈썹조차 보석을 가리는 가림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느껴졌다. 달빛을 품은, 아니, 달 그 자체를 옮겨놓은 듯 신비로운 빛이 보네카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그 빛에 홀린 보네카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흘러 내리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페르베카가 보네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보네카의 눈에 있는 황금빛 일렁임이 페르베카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을 부드럽게 태워버렸다. 그녀가 보네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첫인상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황금빛이 차올랐다.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페르베카는 멍하니 보네카의 눈을 바라보았다.

 영원과도 같이 짧았던 둘의 눈맞춤은 보네카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끝났다. 시야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걸 본 페르베카의 눈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본 페르베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고작 저딴 담요 때문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조차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차오르는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이전까지 없었던 격한 분노에 페르베카가 휩쓸리려던 찰나, 그녀의 시야에 다시 보네카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 은하수 전설을 들은 페르베카는 다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빛무리를 강물에 거의 다 흘려보내 버린 요정을 용서해 준 여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며칠 전 좋아하던 드레스 소매가 찢어진 것이 아직까지도 서운하고 억울해서 정원에 있는 나무에 삐진 마음이 남아있는데, 여신은 그 자리에서 전부 용서해 줬다니.' 한 아이의 어머니가 속상해하는 딸을 달래기 위해 들려준 이야기는, 그렇게 소녀의 마음에 깊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페르베카는 마침내 여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 신경 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정말로 아주 사소한 ― 잘못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흔들리는 요정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보자마자, 페르베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저 요정을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그 어떤 시험을 치를 때보다도 바쁘게 페르베카의 머릿속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예의와 가식과 어휘를 총동원하여 적절한 말을 찾아야 하는 페르베카보다, 복잡한 몸짓과 미사여구를 하나도 모르는 보네카의 행동이 더 빠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자신이 담요를 땅에 떨어트렸기에 페르베카가 화났다고 생각한 보네카는, 땅에 떨어진 담요를 재빨리 주워 들고는 자신의 품에 꼭 안은 채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녀는 어떠한 변명도 없이 그저 자신의 진심 어린 사죄로 상대방의 화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길 간절히 바랐다. 다만, 그녀가 평민이고 페르베카가 귀족이기에 그런 건 아니었다. 보네카는 처음 만난, 그리고 앞으로도 쭉 같이 지내야 할 룸메이트에게 미움받기 싫다는 마음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 그 마음에 비하면 둘의 신분이 다른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둘의 신분이 달랐더라도 보네카는 분명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페르베카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상대의 사과를 받아줄 땐 어떻게 해야 했더라?' '상대의 잘못이 아닌 일에 괜찮다고 말할 땐 어떻게 해야 했지?' '위로의 말을 건넬 땐 어떻게 해야 했지?' '미안하다는 표현은 어떻게 하더라?' '친해지고 싶은 상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방법이 뭐였지?' 수많은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팟하고 피어났다가 퍽하고 사라졌다. 무언가 빨리 해야 한다는 초조함은 도리어 족쇄가 되어 점점 페르베카의 혀를 묶고 입을 꿰메가기 시작했다.


 [덜컹]


 그때, 창문이 작게 흔들리는 소리가 자신의 생각에 잠식되어 가던 페르베카의 주의를 끌었다. 놀란 그녀는 자유로워진 목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점 없어 고요히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 위로 조용히 흘러가는 은하수가 그녀의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름답지 않나요?"






 '페르베카님은 여신님 같지.'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페르베카에 대해서 얘기할 때면, 언제나 여신 같다는 말이 따라왔다. 그러면 모두가 공감하는 말을 한 다음, 페르베카라는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찬란한 금발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신비로운 회색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거 같다. 도자기 인형처럼 피부가 매끈하다. 모든 과목을 다 잘한다. 우아하다. 기품 있다. 고결하다. 성스럽다…… 처음에는 그나마 이유를 붙여서 칭찬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좋아 보이는 말은 전부 갖다 붙이기 시작하다가, 끝에 가서는 거의 꺅꺅거리는 소리만 반복한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진짜 페르베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 멋대로 '왕가의 보석'이니, '현자의 환생'이니, '여신의 천사'니 하는 별명을 붙이고서는 그 별명에 맞춰서 페르베카의 이미지를 고정시킨다. 그들이 찬양하고 추종하는 건 진짜 페르베카가 아니라 자기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의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보네카는 그들과 달랐다.


 보네카는 그날 밤 페르베카에게서 진정으로 여신의 모습을 보았다. 또,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배우며 페르베카가 왕실의 일원으로서 존엄함을 유지하는 모습도 보았다. 무엇보다, 동거하는 과정에서 같은 또래이자 친구인 페르베카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기에 보네카는 알고 있었다. 페르베카가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하는 모든 노력을 알고 있었다. 외모를 유지하기 위하여 티 파티조차 철저하게 계산하여 식단을 조절하고, 긴 머리카락을 매번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자신의 한계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수많은 마법 기술을 연마하고, 다 사용한 팬과 종이가 의자 높이까지 쌓일 정도로 공부하고, 손발이 부르틀 정도로 훈련을 하고……. 남들과 같은 평범한 소녀가 비범한 인물이 되기 위하여 하는 모든 노력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보네카는, 자신에게 페르베카가 어리광을 부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페르베카는 나만의 여신 같다.'라고.






 "예쁘네."


 어느새 보네카의 허벅지 위에 뒤통수를 올려놓은 페르베카가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보네카는 살짝 시선을 내려 페르베카를 보았다가, 이내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침대에 들어오기 전보다 조금 더 서쪽으로 기울어진 은하수가 희끗한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은하수를 보던 페르베카는 머리카락에 얽혀오는 손가락의 느낌에 살짝 턱을 들어 보네카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자신을 부르는 건가 했지만, 보네카는 저 멀리 시선을 두고 있었다. '또 무의식중에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구나.' 페르베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얇은 머리카락들이 하나의 줄기로 엮이는 간지러운 느낌이 좋았다.

 문득, 페르베카는 인형은 주인이 놀아주는 만큼 행복하다는 옛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분명 행복이라고 할만했다. '그렇다면, 보네카가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 때마다 행복한 나는, 보네카의 인형인 걸까?' 페르베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쿡쿡 웃었다. '그것참 엄청나게 비싼 인형이네.'


 "무슨 생각 했어?" 보네카는 여전히 은하수를 바라보며, 검지 손가락에 페르베카의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휘감았다.


 "나는 얼마쯤 할까 궁금해서." 페르베카가 창문 너머 은하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네카는 언제나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룸메이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보네카는 페르베카가 하는 것처럼 그녀를 분석해 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페르베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페르베카는 그 손길에 담긴 조용한 배려와 따뜻한 애정을 느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페르베카가 잠든 걸 확인한 보네카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베개 위로 옮겼다. 친구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자세를 조금 손봐준 보네카는 마지막으로 페르베카의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밀어내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날 밤도, 서로를 생각하는 두 별이 은하수를 타고 조용히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