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럴 수도 있지.”


이올레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록을 머릿속에 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알키데스를 발견하기 전 어느 역사서에서 읽었던, 먼 타국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60년쯤 전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민간인 구호에 자원한 이들이 반군에게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더 큰 전쟁으로 번질 뻔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일이라면 저렇게 기겁할 만도 했다.

그래서 이올레는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고 생각을 정리하고, 조금이나마 더 밝은 쪽으로 말을 돌렸다.


“어차피 사제였다고 했으니 장례를 주관하는 일도 많았을 거고.”

“그러기도 했죠.”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크시아가 반해버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부드러웠는지,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한 번 돌아보며 반응을 살펴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일 같은 건 저한테도 전례가 없어서…”

“그렇지. 뭐,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없는 건 아니잖아.”


이올레가 말을 마치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올레가 꺼낸 말대로, 자리에 모인 세 사람 모두 지금도 조금씩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 자리에서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갈지, 바카사에서 영원교단과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혹은 상대편인 영원교단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등, 셋이 모인 김에 대화에 올려야 할 화제 하나하나가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가 누군가를 짓눌러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세 사람의 입을 더 강하게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그 중압감 때문인지, 셋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케스티의 말에서 조금은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잠깐 뭐라도 좀 가져올게요. 괜찮죠?”

“응, 그렇게 해.”

“좋아요.”


다른 두 사람도 기분을 돌릴 게 필요했기에, 케스티가 꺼낸 말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 덕분에 케스티는 아무 저항 없이 둘의 승낙을 얻어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이올레는 어쩐지 가슴이 미지근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져서 옷이 몸에 달라붙은 크시아의 모습이 괜히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매혹시킬 정도로 아리따운 사람이라 어쩔 수 없긴 해도, 이올레에게는 이미 마음에 두려 하는 사람이 있기에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흠흠, 뭐, 아무튼…”


그래도 이올레는 별일 없는 것처럼 떨리는 손가락을 가만히 맞잡고, 겨우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잘 될 거야. 잘 할 수 있을 거고.”

“말은 쉽네요.”

“말이라도 쉬워야지, 안 그러면 어떻게 버티겠어?”

“하긴…”


이올레는 크시아가 왼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가는 한숨을 쉬었다. 저 손에 원치 않는 피를 묻힌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마음을 내려놓으러 온 여행길에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무게감이 꽤나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 무거운 걱정을 어떻게 덜어내는 게 좋을까 잠시 생각해보니, 벌써 한 가지 좋은 방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라네비아랑은 잘 지내?”

“네, 요즘은 꽤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올레와 케스티 사이만큼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크시아의 목구멍 안에서 잠시 맴돌았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일 없이 사라졌다. 그걸 입 밖에 내기로 마음먹을 만큼의 여유조차 없는 탓이었다. 이올레가 보기에도 어지간해서는 크시아가 먼저 그렇게 밝은 농담을 꺼낼 거라고 생각했던 만큼, 이번 일이 주는 무게감은 생각할수록 크기만 했다.

그래도 대신 다른 말을 꺼내서 마음 속 응어리를 털어낼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아, 며칠이나 됐다고 ‘요즘’이란 말이 튀어나온 거지…”

“그렇게나 많이 힘든가 보네.”

“그렇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크시아의 머리카락 끝이 조금 옅게 바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