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키지도 않았는데 룸메이트가 배송 왔다 








"아.. 죽겠다.." 


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무거운 한 발을 내디디며 우리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아니.. 무슨 학부생한테 학술지 논문 수준의 퀄리티를 요구해.."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었다. 


우리 교수님은 대체 평범한 대학생 1의 졸업 논문에 뭐 그렇게 바라는 게 많으신 걸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검은 화면을 내려다보니 웬 초췌한 얼굴이 자신을 맞이했다. 




조금 긴 검은색 보브 단발컷의 머리에, 고양이 느낌이 나는 살짝 날카로운 모양의 눈매. 

그리고 그 눈 밑으로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정답! 밤샘!"이라고 외칠 만큼 짙은 다크서클이 한창 자라는 중이었다. 


휴대폰 액정인데. 검은 화면인데. 다크서클까지 비춰 보이는 느낌이라니. 


우리 과 교수들은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이 정도 논문이면 최소 석사 학위는 받아야 수지가 맞지. 




그렇게 한바탕 마음속으로 푸념을 쏟아내던 우리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제는 투덜거릴 힘도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잠. 잠, 오직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한다고 밤샘 천체 관측만 벌써 연이어 오 일째. 


더는 몸이 버티질 못한다. 

그래도 열심히 달린 덕에 당분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모았으니, 관측한 자료들만 얼른 정리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야지. 




오늘 하루만큼은 침대에서 단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각오를 다지며, 

마침내 살고 있는 투룸의 문 앞에 도착한 우리는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곤 안으로 쓰러지듯이 들어갔다. 














*** 













'타닥, 타닥..' 




경쾌한 타자 소리에 발맞춰 눈에 들어오는 전혀 경쾌해 보이지 않는 표정. 


불과 몇 시간 전에 마음먹었던 침대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도 무색하게, 

이제는 내가 타자를 치고 있는 건지 타자가 나를 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중간 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것만 끝내면 당분간은 꽤 널널해지니까..' 


제출 기한은 오늘 오후 8시 정각까지. 이제 30분 정도 남았다. 

덕분에 얼마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는 건 덤. 




"휴, 그래도 어떻게 지각은 면했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리는 마침내 눈앞에 마주하게 된 메일 전송 버튼을 주저 않고 클릭했다. 




졸업 논문에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제를 정신없이 끝낸 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7시 47분. 




'꼬르륵~' 


그제야 밥때를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우리는 들어오자마자 처박혀서 나오지 않던 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오랜 작업으로 푸석해진 앞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의자에 걸쳐놓았던 과잠을 걸친다. 


ㄱ대학교 천문학과. 

우리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이름이었다. 




오랜 재수 끝에 합격해 꿈에 그리던 천문학도가 될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던 시절도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런 피곤에 절어져 있는 피폐한 인간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정말 세상사 부질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좋아하던 천체 관측은 질리도록 할 수 있었으니 역시 잘 온 것 같기도 하고. 

졸업 시즌에 담당 교수님이 조금만 덜 의욕적이기만 했어도 만족도는 최상이었을 텐데. 


그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학교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우리는 방을 나와 앞에 있는 간이 거실과 주방을 지나, 현관에서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풀옵션 집이라 주방은 훌륭히 갖춰져 있는 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도 그럴 게, 난 요리 따윈 하지 않으니까. 


당당하게 말한 것과는 반대로, 사실 안 한다기보단 못 한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까웠지만. 


그러고 보니,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혼자 살기에는 꽤나 사치스러운 자취방이었다. 

여대생 혼자 투룸이라니. 




풀옵션에, 연식에 비해서도 꽤나 청결한 편인 알짜배기 건물. 

작지만 엘리베이터도 있고. 




훗. 

이게 다 능력 있는 외사촌 언니를 잘 뒀기 때문이리라. 




원래 이 집은 우리의 외사촌이 운 좋게 헐값 매물로 구매한 집이었지만, 

직장과 멀다는 이유로 본인은 거주하지 않아 근처 대학에 진학하게 된 우리를 잠시 살게 해 준 것이었다. 


한 번씩 용돈도 주고, 정말 좋은 언니다. 



'매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현관문을 나선 우리는 작게 하품을 했다. 




빨리 먹고 와서 마저 자야지.. 졸업 논문만 없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편의점 앱을 켜 근처 매장을 검색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건강 한상 도시락. 


요즘 편의점 도시락은 영양 밸런스가 나름 훌륭히 맞춰져 있어 이거 하나면 충분해서 좋다. 

종류도 다양한 편이고. 


이름처럼 건강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단백질이랑 채소가 들어있으니 아니라고 보기도 힘들겠지. 




'오늘은 사람들 없었으면 좋겠네..' 


낯도 많이 가리고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우리였기에, 동석자가 있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사서 들어온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사 들고 오면 쓰레기가 생기니까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먹고 오는 게 당연지사.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잠시만요! 저 내릴게요!" 


그 말에 우리는 반사적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서 문을 잡아주었다. 


한눈에 봐도 짐이 많아 보였기 때문. 




'그런데, 캐리어에 박스에.. 이사라도 온 건가? 

이 밤에..' 




..뭐, 내가 알 게 뭐람. 




잠깐 호기심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여자가 짐을 다 내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타 서둘러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감사합니다!"하는 인사말과 함께 여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아, 안녕하세요! 혹시 한우리 씨세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던 여자를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마주치게 된 곳은 자신의 집 문 앞. 




"어.. 네.."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라가지 못하는 머리와는 반대로, 

우리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어디로 이사 오는가 했더니, 우리 집이었구나! 

요새 너무 정신없던 나머지, 나도 모르는 새에 룸메이트 공고라도 올렸었나 보다.' 




드디어 고장 나버린 머리를 뒤로 한 채, 

우리의 시선에는 이내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컬이 살짝 있는 갈색 세미 롱헤어에, 밝게 웃는 상의 얼굴. 

둥근 눈매에 작게 올라간 입꼬리는 소위 말하는 '강아지상'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키가 작았다. 


우리랑은 머리 한 개 정도 크기 차이. 

물론 우리의 키가 170cm 정도로 평균에 비해서 꽤 큰 편이었지만, 저쪽도 당연히 평균보다는 좀 작아 보이는 신장. 

150cm 중반 정도 되려나? 


한 마디로 우리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외모였다. 




그리고 비록 만난 시간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성격까지도 정반대일 것이라는 99%의 확신이 들었다. 

왜 99%라는 숫자가 나왔는지는 묻지 마라. 어디선가 풍겨나오는 아우라가 딱 그러했으니까. 




어디서 이런 사람이 튀어나온 걸까. 하고 우리가 아픈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와중에,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다행이다! 제대로 찾아왔네요~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으시길래 엉뚱한 데로 왔나 하고 있었어요!" 




"아.." 


밥 먹고 있는 동안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건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얘기를 들으니 따져보면 자기 잘못은 아닌데도 우리는 살짝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시길래 절 찾아오신 거죠? 




"헤헤.. 아까 마주쳤던 분이 우리 씨일 줄 알았으면 한번 물어나 볼 걸 그랬네요. 

지금 보면 나름 닮기도 했는데 말이에요." 


"네..?" 


"아, 천서현 언니 외사촌 동생이시라면서요? 서현 언니 소개받고 왔거든요." 




천서현. 우리가 경애해 마지않는 외사촌 언니의 존함이었다.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물주이자, 앞에 서 있는 이 집의 진짜 주인. 

그런데 왜 그 언니의 이름이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지? 




"미리 얘기해두겠다 하던데, 언니한테 들으셨죠?" 


..천서현. 




"당분간 신세 지기로 한 사람이에요!" 


천서현..!!!!! 




..그래. 




우리는 언니의 이런 점이 정말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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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을입니다.


이곳저곳에 연재 중인 소설인데, 홍보라고 해야하나 여기도 정기적으로 올려보려고요!ㅎㅎ

아마 하루에 1-2편 정도씩 올리다 다른 곳 연재주기랑 맞추지 않을까 싶어요

(한번에 쭉 올리면 도배같아서..)


아래는 포스타입 주소입니다!

https://sun3-lily.postype.com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