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왜, 관심 있어? 








"아니이, 언니.. 좀 들어봐. 

이 사람 진짜 너무하다고.." 


어딘가의 시끌벅적한 술집. 

가장자리의 테이블엔 두 여자가 맥주잔을 하나씩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하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거긴 했지만. 




"너무 힘들어.. 완전 스파르타라고. 아니, 일주일에 책을 열 권 넘게 읽어오라는 게 말이 돼? 거기다 공부하는 건 또 별개고. 쪽지 시험도 맨날 보고, 오답 정리도 하래. 아니.. 난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까지 열심힌 안 했는데. 그리고 사람은 또 얼마나 빡빡한지.. 수업 중에 말 걸면 제대로 답도 안 해주고, 표정도 무미건조하고, 융통성도 없고.. 이 정도면 그냥 나 싫어하는 거 아냐?" 


맥주잔을 들고 꿍얼꿍얼 최근 우리와의 과외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은하. 

아무래도 불만이 꽤나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하하.. 우리 걔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긴 하지.. 

얘기는 해봤어?" 


"안 들어! 이렇게 해야 빨리 는대. 이만큼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난 못한다고.. 내가 자기 같은 공부 기계인 줄 아나 봐.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며칠 전엔 또 말야, 어쩌다가 카페를 같이 가게 됐는데, 내가 개랑 고양이 중에 뭘 더 좋아하는지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진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이번엔 어딘가의 조용한 카페. 

살짝 구석진 테이블에서, 서현과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초반엔 좀 열심히 하나 했지. 근데 이 사람, 닦달 안 하면 잘 안 해. 하기로 한 것도 잘 까먹고, 하기 싫어하고. 이런 것도 한두 번이지, 이건 그냥 불성실한 거라고. 아니, 자기 일이잖아. 하면 확실히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는데 왜 안 해? 수업 중엔 또 얼마나 잡담이 많은지..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해. 근데 애도 아닌데 막 뭐라고 하는 것도 또 그렇고.." 


표정을 찌푸리며 이러니저러니 궁시렁대는 우리. 


한 시간째 이러고 있다. 얘도 쌓인 게 많았나 보네. 


하긴, 은하만 불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고 있긴 했다. 

얘네는 뭔가 잘 맞을 거 같으면서도 이렇게 되는 것 같다고 할까.. 




..근데. 




슬슬 둘 사이에 껴서 서로에 대한 푸념과 험담만 내리 듣고 있자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서현이었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난 너네 클레임을 들어주는 고객 센터가 아니라고요. 

그렇다고 좋은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 




"자. 둘이 직접 얘기해. 나 중간에 끼지 말고." 


서현은 결국 둘을 끌고 와서 앉혀놓았다. 




오늘은 우리와 은하의 자취방 거실. 


처음엔 좀 당황하고 우물쭈물한 느낌이더니, 

이내 두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서로를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사이 안 좋은 꼬맹이 둘을 붙여놓은 것만 같다. 

너네 왜 이렇게 유치하니.. 




"..난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불만이든 뭐든 둘이서 해결해. 

싸우지 말고. 끝나면 불러." 


그렇게 통보하듯이 얘기하고는 서현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같은 집, 바로 옆방에 있으면서 꼭 누굴 거친다니까. 




손이 많이 가는 동생들이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현관을 나서 근처 공원의 벤치에 자리 잡았다. 




'얼마 안 걸리겠지.' 




그리고. 




그러고 앉아있길 한 시간. 




'추워..!' 


어느덧 해가 지고, 밖은 어두컴컴해진 시간. 

아직 초봄이라 밤은 좀 쌀쌀했다. 


낮엔 더웠어서 외투도 안 입고 왔는데. 


추위에 떨며 옆자리를 보니 묵묵부답인 휴대폰은 도무지 울릴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아직 얘기하나? 

10분 정도 지나면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설마 또 싸우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든 서현은 결국 반신반의하며 서둘러서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 언니! 이제 막 끝나서 연락하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벌컥, 하고 문을 열자 은하가 서현을 반겼다. 


방 안쪽을 보니 거실 책상에 앉아 있는 우리와 은하. 

그리고 둘 사이에는 웬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둘의 눈치를 살펴보니 다행히 싸운 것 같진 않고, 

대신 어딘가 상당히 지쳐있는 모습. 


한 시간 내내 떠들었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책 읽는 건 일주일에 다섯 권, 쪽지 시험은 되도록이면 안 보기로 했고, 대신에 숙제는 딱딱 맞춰서 하고 수업 시간엔 집중해서 공부하는 거로 극적 타협했어." 


'무슨 협상 하냐..' 


우리가 책상에 있던 종이를 들고는 적힌 내용들을 읊어주었다. 

저건 서약서 같은 건가. 




..뭐, 그래도 어떻게 둘이서 잘 해결한 모양이었다. 


'너네도 하면 할 수 있잖아..!' 




서현은 조금이나마 성장한 동생들의 모습이 기뻤다. 


그래, 좀 잘 지내봐봐. 




그날은 둘에게 저녁으로 소고기를 사줬었다. 













*** 













며칠 뒤. 


다시, 여느 때와 같은 맥줏집. 


서현과 은하가 이번에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은근히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은하였기에, 

이렇게 둘이서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서현도 가벼운 음주는 선호하는 편이었고, 

이런 자리로 미팅을 대신하는 편도 많았어서 그녀 입장에서도 어떻게 보자면 일석이조였던 것. 


그런데 평소에도 앞뒤 자르고 말해서 간혹 사차원적인 느낌을 주는 은하였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우리 쌤, 애인은 있을까?" 




"..왜, 관심 있어?" 


그렇게까지 잘 지내기를 바랬던 건 아닌데- 하고 서현이 대꾸하자, 

그 말에 은하는 뜨거운 반응을 보내주었다. 




"미쳤어?!" 




물론 그녀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단 건 누구보다 잘 아는 서현이었지만. 




"언니도 알잖아, 내 이상형은-" 


밝고 다정하고 귀여운 사람. 

그녀를 품어줄 수 있는,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 




여러 번 들어봐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스타일이랑 정 반대란 것도. 

마지막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서 우리를 마음 놓고 소개해 준 것이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래." 


그러면서 은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애인 앞에서는 어떠려나- 싶어서. 

상상이 안 돼." 




은하가 보기엔, 사람이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다. 

아니, 아직 낯을 가리는 건가. 


한 번씩 감정이 격해질 때나 의외인 면을 보여줄 때가 있긴 했지만, 

그런 때는 너무 드물었다. 


이쯤 들이댔으면 좀 친해져야 히는 거 아닌가. 

아직도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것이 은하 입장에서는 좀 서운했다. 




"누굴진 몰라도 우리 쌤 애인은 고생 좀 할 듯-." 


그 말에 서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으면서, 누가 누굴 걱정해. 




그리고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우리 입장에선 은하 정도면 이젠 꽤 편한 상대일 것이었다. 

너무 불편한 상대라면 본인이 어떻게 해서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성격이니까. 


물론, 친한 거랑은 또 다르긴 하지만. 


둘이 친해질 수 있을진.. 음.. 




그렇게 생각한 뒤 서현은 짐짓 한숨을 쉬고는 화제를 돌렸다. 




"너 걱정이나 하세요. 


이번 신작, 기획서 준 지 좀 됐잖아. 

잘 돼가?" 




작년 말에 발매했던 최신작을 끝마치고, 한동안 작품 준비에 들어갔던 은하였다. 


준비를 시작한 지도 이제 4개월쯤. 

하지만 서현은 지지난달에 받았던 기획서를 제외하곤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담당 작가를 재촉하는 건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이젠 작업 진행 상황을 물어봐야 할 시기긴 했다. 




"..똑같지, 뭐. 


전체적인 틀은 잡혔는데, 디테일한 부분이랑 세부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들게 안 뽑히네. 

그래도 내일 중으로 끄적여 놨던 자료들이랑 파일들 정리해서 보내놓을게." 




그러면서 은하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요새 작업하랴 공부하랴, 죽을 맛이야-." 




"그래도 이젠 열심히 하고 있나 보네? 공부." 


그 말에 은하가 힘없이 반발했다. 




"원래 열심히 하고 있었어..! 우리 쌤이 기준치가 너무 높은 거야.." 


알지 알지, 농담이야. 하고 웃어넘기는 서현. 

은하는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었다. 




"너무 힘들면 그만둬도 돼. 그래도 네 본업이 먼저니까. 우리한텐 내가 잘 말해놓지, 뭐."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은하가 성장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무리하게 스타일을 바꾸려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다, 과도하게 노력하다 

오히려 예전보다 기량이 떨어진 작가들을 여럿 봤었다. 


지금의 은하는 확실히 조금 지쳐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뭐.. 그건 아닌데.."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는 은하. 




..호오. 


이건 의외였다. 




방금 서현의 말은 평소의 은하라면 얼씨구나 하고 냉큼 받아들였을 제안이었기 때문. 




실제로, 앞서 은하를 공부시키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그녀가 너무 하기 싫어해서, 힘들어해서, 그만뒀던 것이다. 


이번에도 좀 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계속하겠다고 스스로의 입에서 얘기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흐음.' 




꽤 하는데, 한우리. 




서현은 그렇게 살짝 미소 지으며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