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가 좋다.


물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바닥을 보고 걷는 사람들.

비에 젖어 풍기는 흙 내음.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적이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맞춰 우중충한 색을 띠는 사각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

그 아래로 살며시 들어가자, 우산을 때리던 빗소리가 사라지고, 계속 맴돌던 소리가 사라져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는 아무도 쉬어가지 않는 비 피하기 나무.

예전부터 비가 많이 내리던 우리 지역에 옛날부터 심겨 있었다는 나무다.


우산을 접어 나무에 기댄다.

촘촘히 자란 거대한 침엽수의 아래에선 비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


나무 뒤편의 마른 벤치에 앉아 책을 꺼낸다.

이곳은 도서관, 건물과 나무의 그림자에 숨겨진 나만의 공간.


비가 올 때만 개장하기에 평소에는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 시집이나 단편집을 가져와 읽지만, 오늘은 장편.

7월, 장마철의 특권이었다.


첫 장을 펼치자 풍겨오는 새 책 냄새가 흙 내음과 섞여 문학의 향기를 조향했다.

그 향기 속에서 첫 문장을 곱씹으며 음미한다.

첫 문장이 만들어낼 이야기를 상상하며.


“빨리 넘기거라, 궁금하단 말이다.”

“꺄악!”

갑자기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려와 벌떡 일어났다.


머리 위, 그러니까 나뭇가지 위에 파란 머리의 소녀가 앉아있었다.

하얀 우비를 입은 작은 체구가 그녀를 언뜻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지만, 바다를 품은 듯한 연륜이 느껴지는 파란 눈과 말투가 나이를 종잡을 수 없게 했다.


“오, 계집. 내가 보이는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내 치마보다도 짧은 우비가 위로 올라가 그녀의 맨다리가 드러난다.


멍하니 깨끗한 피부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양팔을 내밀어 그녀를 받아냈다.

그녀는 덧없이 가볍고, 몰캉거렸다.

그래, 마치 거대한 물방울을 만지는 느낌.


“흠, 이번 한 번만 내게 손을 댄 걸 용서하마. 당장 내려놓거라.”

내게 붙들려 아직 공중에 떠 있는 채인 그녀가 그렇게 말해 바닥에 내려주자, 마른 바닥에서 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왜 거기 계셨어요?”

반말해야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초면인 사람에겐 존댓말이 당연하다 생각해 그렇게 물었다.


“비를 피하는 것 외에 어떤 이유가 있겠느냐.”

하지만 이 소녀에게는 그런 상식이 없는 모양이다.

만났을 때부터 어딘가 깔보는 말투를 써와서 짜증 난다.


방해꾼이 생겨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말없이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우산을 든다.


“자, 잠깐! 그대, 벌써 가려는 겐가!”

“네, 볼일이 생각나서요.”

“채, 책을 보여달라고는 않겠다! 조금만 더 비를 피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전해져 왔다.

하아, 나는 왜 여자아이의 이런 표정을 무시하지 못하는 걸까…


“알겠어요. 대신에 조용히 하셔야 해요.”

“고, 고맙다! 감사를 표하마!”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소녀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멀리 떨어져 이쪽을 바라봤다.

잘 보이지 않는 듯 까치발을 하고 서는 모습이 귀엽다.


“가까이 와도 돼요.”

“저, 정말이냐? 그대의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

“방해는 되는데… 뭐, 괜찮아요.”

“그대는 착한 사람이로다!”

조금 작은 벤치에 두 사람이 앉자 빈 곳이 없어져 몸이 닿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흙 내음이 퍼져 나왔다.

우리는 그 향기에 감싸져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이 없어서일까.

아니, 책은 원래 혼자 읽는 것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넘기는 타이밍을 잘 모르겠어 집중되지 않아 다 읽기도 전에 끝 문장을 읽고 넘기기를 계속했다.


“그대, 평소보다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느냐. 그렇게 읽었다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느니라”

“네? 아하하, 오늘따라 집중이 안 되네요.”

“혹시 나 때문인 게냐? 나는 신경 쓰지 말거라. 느려도 투덜거리지 않으마.”

그렇게 말해도 이렇게 가까우면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도저히 안 되겠어 책갈피를 10페이지 앞에 꽂고 책을 덮었다.


“죄송해요. 책은 여기까지 읽어요.”

“이, 이제 돌아가는 게냐?”

시계를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평소보다 빠르지만, 집에 돌아가기로 하자.


“음… 이만 돌아가 볼게요.”

“이별은 언제나 빠르다고 하지만 오늘은 더 빠르구나. 내일도 비를 피하러 와주면 좋겠노라.”

“네, 알겠어요. 도망 안 갈게요.”

아무래도 책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읽던 책이 대출 당해 일주일이나 읽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흔쾌히 승낙했다.


우산을 펼치고 나무 밖으로 나간다.

뒤를 돌아보니 그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간 걸까?

정말 신기한 아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그 뒤로 나와 그 소녀의 만남은 계속됐다.

우리는 자연스레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이름도 알게 되고, 말도 트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야로 예전부터 이 주변에 살았다고 한다.

취미는 시간을 때우기, 책도 시간을 때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책을 그렇게 보여줬는데 시간 때우기 용이라니 어딘가 배은망덕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장편을 들고 오늘도 나무로 향한다.

오전에 비가 그쳐 향긋한 흙 내음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우산을 나무에 기대고, 벤치에 향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마야는 오늘따라 우울해 보였다.


“마야, 무슨 일 있어?”

“아, 서우인가. 비도 오지 않는데 비를 피하러 온 겐가?”

가벼운 농담으로 대꾸할 생각이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닌 듯하다.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줄게.”

“하하, 자연의 섭리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장마가 끝나서 그래?”

“음, 그러하다. 비가 그치면 비 피하기 나무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 따위 없지 않겠느냐.”

마야의 말은 당연했다.

비가 오지도 않는데 비를 피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것과 마야의 기분이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무가 쓸쓸해 하는 게 싫어?”

“음, 혼자가 되면 쓸쓸하느니라.”

“나는 매일 올게.”

“…고맙노라.”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 그런 조용한 분위기여서 그런가 얄궂게도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가고 우리가 함께 읽던 책은 끝이 났다.


“다 읽었네.”

“음, 재밌었느니라.”

“마야, 다음 책은 뭐 읽을래?”

평소라면 여운을 느끼며 의미를 곱씹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마야와 함께 다음 책을 고르는 설렘을 느끼고 싶었다.


“서우여.”

“응? 왜?”

“내일부터는 오지 않아도 되느니라.”

하지만 마야의 말에 내 설렘은 산산이 부서졌다.


“갑자기 왜?”

“그대가 오는 건 괜찮지만 나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 설명해달라니까.”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계속해서 따지게 된다.

그야 매일같이 책의 감상을 말하며 즐겁게 지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를 당하니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다.


“이젠 질렸어? 책이 읽기 싫어?”

“그런 게 아니다.”

“그러면 내가 시간 때우기도 안 된다는 거야?”

“하아…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 터이니 말하지 않았을 뿐이니라.”

“뭔데.”

“나는 요괴이니라.”

뚱딴지같은 소리.

나와 만나기 싫다는 핑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충격적이라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비 피하기’가 구현된 요괴이노라. 그렇기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느니라.”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이니라. 나를 들어본 적 있는 서우라면 알지 않느냐. 아니면 다시 들어보겠느냐?”

조심히 다가가 마야를 든다.

가볍고 몰캉한, 언젠가 느껴본 감촉.

그녀는 정말 인간이 아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사라진다고?”

“음, 조금 다르니라. 사라진다기보다는 희미해진다.”

“그럼 만날 수 있는 거 아냐?”

“그대가 흔히 아는 투명도 같은 희미해짐이 아니니라.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쓸쓸한 표정.

마야의 그 표정으로 그것이 억지도 거짓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못 만나는 거야?”

“한동안은 그럴 테다. 하지만 연일 비가 내려 비를 피하는 사람이 나타나 힘이 모이면 다시 만날 수 있느니라. 아마 내년이면 볼 수 있을 터이다.”

“내, 내년?”

어린 나에겐 너무나 긴 시간, 이렇게나 같이 있으면 마야와 일 년이나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서우여, 미안하구나. 그대의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아니야. 네 덕분에 행복했어. 책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눠야 한다는 걸 알았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비 오는 날 언제나 책을 읽어줘서 고맙노라.”

마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꼭 안아왔다.

옅어졌던 흙 내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물줄기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게 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도, 마야도 그것이 비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물줄기는 더 강해졌다.


“서우여, 내년에 보자꾸나. 정말 미안 하느니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몸을 덮던 물방울은 사라졌다.

그제야 내가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을 깨닫고 입에 담는다.


“마야, 나 너를 사랑하나 봐.”

그 소리가 그녀에게 닿기를 바라며 나는 계속 비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어느새 비는 그쳐 하늘은 내가 싫어하는 맑은 날씨가 되어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터덜터덜 걷는다.


너무 많이 울어 눈이 뻑뻑하다.

그런 눈을 비비다 문득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쩌면 저거라면…


다음날, 나는 짐을 싸서 나무로 갔다.

가지고 간 것은 실과 탁구공 여러 개와 손수건 몇 장.


곧바로 작전을 실행한다.

탁구공을 손수건으로 싸 실로 묶고, 얼굴을 그려 넣는다.


맑음이 인형.

그걸 몇 개나 가지에 걸었다.


눈을 꼭 감고 기도한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비를 피할 수 있으면 하고.


“그대는 바보인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맑은 날에 비를 피하려 들다니, 정말 바보이니라.”

거기에는 눈물을 흘리는 마야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아무리 날이 맑아도 내가 매일 비를 피해줄게.”

“놓거라, 나를 만지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거늘!”

말로는 놓으라 하지만 마야는 저항하지 않는다.


“마야, 사랑해.”

내 말을 듣고 마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섭노라. 사람을 사랑하는 게 두렵노라.”

“그래도 이미 품은 감정은 어쩔 수 없는지고. 그러니 말하노라. 나도 그대를 사랑한다고.”

어느새 나는 몰캉한 물방울 속에 있었다.


장마가 끝나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

그 나무 밑에서는 억센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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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체 어렵네.

나중에 후일담도 적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