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이 하얀 입김은 구름이 되는 걸까.


“온아! 기다렸어? 미안, 전철이 막혀서!”

멍하니 하얀 김을 바라보는 나를 멀리서부터 부르며 누군가 다가온다.

위를 향하던 눈을 옮겨 그녀를 바라본다.


분홍색의 귀여운 코트와 하얀 목도리.

그리고 그 귀여움에 딱 어울리는 앳된 얼굴을 한 그녀는 늦어서 미안하다면서도 설렁설렁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설 다연.

중학교 입학식 때 서로 알게 된 우리는 벌써 4년째 사귄 친구다.


“전철이 막힐 리가 없잖아.”

“아니~ 그게 되더라고, 아하하…”

뭐든지 설렁설렁, 약속을 하면 기본 10분은 지각.

이런 애랑 어떻게 4년이나 사귄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으응~? 온 씨, 오랜만에 만나는데 롱패딩은 아니지~!”

“친구 만나는데 꾸며야 돼?”

“후후, 여친이니까?”

“나 들어갈게.”

획하고 뒤돈 내 팔을 잡으며 “에이, 어디가~”라며 끌어당긴다.

뭐, 언제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런 장난스러운 대화의 사이에서 다연이가 전혀 변하지 않은 걸 알아 마음이 놓인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리던 다연이는 예고로 진학하고, 나는 평범하게 인문계에 진학.

우리 지역에 예고는 없기에 다연이는 이사를 하게 되어 조금 멀어지게 됐다.

그래도 계속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다 조금 긴 연휴를 기회 삼아 시내에서 만나 놀기로 한 것이다.


“보드게임 할래?”

“좋지. 응? 어디가? 저기 있지 않았어?”

“아, 거긴 문 닫았고 햄버거집 위에 새로 생겼어.”

“우와… 나 아직 쿠폰 다 못 썼는데…”

이사 간 사이에 가게가 망했다는 게 조금 충격인 모양이다.

실망하는 다연이를 데리고 새로 생긴 보드게임 카페로 향한다.

카페 가서 잘 달래줘야지.



***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게임을 하나씩 들고 왔다.

나는 조금 정통파인 추상 게임, 다연이는 북극곰 얼음 깨기였다.


“개인적으로 그건 보드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해.”

“근데 그건 게임이 아니잖아.”

“반쯤 인정.”

다연이가 들고 온 게임을 지적하자, 다연이도 내 게임을 지적했다.

뭐, 머리를 잔뜩 쓰니 게임이라기보다는 퍼즐에 가까울지도.


우선 내가 가져온 게임을 후딱 해치우려는 듯, 다연이가 패키지를 열었다.

조금 심플한 컴포넌트를 나열하고 게임을 시작한다.


“어려워~”

“10분이면 끝난다니까 좀만 참아.”

이런 머리를 많이 쓰는 게임을 하면 자연스레 말이 사라진다.

그게 싫은지 다연이는 계속 투덜거렸다.

심지어 이긴 것도 다연이라 조금 머쓱했다.


“그럼 이제 북극곰을 바다에 빠트려보자고.”

다연이는 순식간에 게임판을 정리하고 자기가 가져온 게임을 열었다.

고민도 안 하고 집어온 걸 보니 어디서 보고, 재밌어 보였나보다.


빙하 가운데에 북극곰을 올리고 룰렛을 돌린다.

룰렛과 같은 색의 빙하를 망치로 쳐서 떨어트리면 되는 간단한 게임.

게임이 간단한 만큼 게임보다는 대화와 벌칙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고는 어때?”

“으응? 솔직히 중학교랑 별 차이 모르겠어~ 아, 미술 시간이 많아.”

“좋겠네. 남자는?”

“관심없수다~”

딱하고 빙하를 친다.

깔끔하게 하나만 떨어져 북극곰은 가운데에 서 있다.


“너는 친구는 사귀었어?”

다연이도 빙하를 톡톡 친다.


“음, 한 명 정도? 이름은 주희.”

“그래? 걔랑은 자주 놀아?”

이번에도 깔끔하게 빙하가 떨어진다.


“뭐, 그럭저럭? 가끔 여기서 놀아. 아, 이따 쿠폰으로 네 음료 값 내줄게.”

“우~응. 알았어.”

사실 이 게임은 북극곰을 떨어트리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빙하를 톡 쳐서 여유롭게 떨어트렸다.


“아, 저번에 걔랑 통 아저씨 게임 했는데 반응이 진짜 웃기더라.”

“그래?”

다연이가 이번에도 빙하를 톡톡 친다.


“응, 다음에 같이 만나보자.”

우르르.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북극곰이 바다에 빠졌다.

불쌍해라.


“싫어.”

“응?”

갑자기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다연이를 보자 어느새 표정이 흐려져 있었다.


“가끔 만나는데 너랑만 놀래.”

“풋, 뭐야 그거. 질투?”

“네에~ 질투 맞아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볼을 부풀린 모습이 귀엽다.

하긴 예전부터 조금 욕심쟁이였다.

내가 다른 곳에 한눈팔면 옆구리를 찌른다거나, 왁하고 놀래킨다거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았지.


다연이의 머리에 손을 조심스레 가져간다.

다연이는 내 손을 보고 무언가를 기대하듯 눈을 꽉 감았다.


딱!

“아얏! 씨… 갑자기 왜 때려!”

“벌칙.”

“짜증 나~ 한 판 더 해!”

그 뒤로도 다연이는 계속 딱밤을 맞았다.

나중에는 이마를 빨갛게 물들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한판 더하자며 앵겨 와서 조금 귀찮았지만.



***



결국 게임은 내가 억지로 한 판 져주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다연이는 여태까지의 복수라는 듯 혼신의 힘을 담아 이마를 때렸지만 조금 빗나가 스치기만 했다.

물론 본인은 그걸 모르는지 아픈 척을 조금 하니까 엄청나게 좋아했다.


보드게임이 끝나고 밖에 나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했다.

벌써 헤어져야 한다 생각하니 조금 쓸쓸하다.


“온아, 저거 먹자.”

다연이가 가리킨 손끝에는 붕어빵 집이 있었다.

오랫동안 게임을 하느라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엔 딱인 것 같아 앞에 가서 붕어빵을 샀다.


봉투를 한 손에 들고, 붕어빵을 건네준다.

다연이는 한 손으로 그걸 받아 들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았다.


“손 놔, 이럼 못 먹잖아.”

“내가 먹여줄게. 아앙~”

입을 조금 크게 벌리자 다연이가 붕어빵을 내 입 앞까지 가져다준다.


“읏…!”

“풋, 아~ 맛있다.”

앞에 온 붕어빵을 덥석 물었지만 다연이는 그걸 획 가져가 자기 입에 넣었다.

바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을 누가 봤을까 부끄러워져 바닥을 쳐다본다.


“자, 이번엔 안 할게.”

“진짜?”

“응, 진짜.”

고개를 숙인 내 눈앞에 한입 베어 문 붕어빵이 돌아왔다.

베어진 단면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라 아까보다 맛있어 보인다.

이번에는 정말로 붕어빵의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다.”

“그치, 사길 잘했어.”

어느새 역 앞.

붕어빵도 남았고, 바로 헤어지기는 조금 아쉬워 역 앞 공터의 벤치에 앉았다.


“다음엔 언제 만나?”

“음, 1월 1일 어때?”

“네가 오니까 나는 언제든 오케이.”

“그럼 그날로 결정!”

다연이는 그렇게 말하며 으으 하고 기지개를 켠다.

아무래도 조금 멀리서 오느라 지친 모양이다.


“일찍 들어갈래?”

“응? 싫어. 내가 가는 게 좋아?”

“그럴 리가.”

그걸 신경 써 말했더니 다연이는 그 말을 트집잡아왔다.

하여간 욕심쟁이다. 


“붕어빵 하나 남았다.”

“6개 샀는데 하나 서비스로 넣어주셨나 보네.”

“나눠 먹자.”

“아냐, 너 먹어.”

다연이가 나눠 먹자는 걸 거절한다.

딱히 나는 배고프지도 않고, 밖에 오래 있을 다연이가 더 많이 먹는 게 좋아 보였다.


다연이가 말없이 붕어빵을 입에 넣더니 조금씩 다가온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내 입에서 갑자기 붕어빵의 달콤한 맛이 났다.


어느새 다연이의 얼굴이 가까이 붙어 코가 닿고 있었다.

부드러울 터인 붕어빵에서 어쩐지 말랑한 촉감이 느껴진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팍하고 다연이를 밀쳐낸다.

내, 내 첫 키스가…

팔로 입술을 닦자 다연이가 찌릿하고 노려봤다.


“흥, 나눠 먹은 거야. 빨리 와. 아직 붕어빵 남았어.”

머리가 사라진 붕어빵은 이제는 거의 다 식어 김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여자끼리여도 이건 아니지.”

“난 여자 끼리라 한 거 아닌데?”

“뭐?”

갑작스러운 기습에 머리가 빙빙 돌아 다연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 너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한 다연이는 다시 붕어빵을 입에 넣고 입술을 겹쳤다.

다시 느껴지는 달콤한 맛.

첫 키스는 달콤하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얼굴을 붉게 물들인 다연이는 그대로 도망치듯 역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붕어빵 봉투를 치우려 옆을 돌아봤다.


“아, 저 바보!”

벤치 위에는 다연이의 지갑이 올려져 있었다.

지갑을 들고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 개찰구 앞에 있는 다연이를 찾았다.


“허억… 허억…”

우리는 둘 다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야, 지갑 두고 갔어.”

다연이는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지갑을 받아서 개찰구를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친다.

“1월 1일에 만나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다연이는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

눈물을 글썽이며 짓는 그 미소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



다연이가 사라진 개찰구 앞.

나는 핸드폰을 꺼내 캘린더를 열었다.


내일 날짜에 적혀있는 ‘주희, 보드게임 카페’를 지운다.

아무래도 내일은 감기에 걸릴 것 같으니까.


그대로 핸드폰을 닫으려다, 문득 생각나 글자를 적어 그 화면을 다연이에게 찍어 보냈다.


적은 글자는 D+1.

사귄 지 4년이 된 우리는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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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야 미안하다. 다음에 좋은 사람 만나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