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소복이 쌓인 산속.

아름다운 산장과 따듯한 온천은 한 번 온 사람은 계속 오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아빠가 여기에 오면서 매일 하는 말이었다.


우리 가족이 여기에 놀러 온 건 몇 년 전부터더라?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가장 오래된 기억이니 8년은 넘었을 것이다.


“민하야, 우린 씻으러 갈 건데 너는 어쩔래.”

“응, 나는 좀 이따 갈게.”

콧노래를 부르며 온천을 향하는 부모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핸드폰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그런 마력을 느끼기엔 내가 너무 어린 걸까.

같은 장소를 8년도 넘게 다니니 나는 이미 질려버렸다.


멍하니 친구들의 SNS를 구경한다.

다들 연휴를 맞아 가족끼리 놀러 갔는지, 국내, 해외를 불문하고 타임라인은 여행 사진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무심하게 '좋아요'를 누르며 화면을 스크롤 한다.


그때,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이 딱 멈췄다.

옆 반의 아린이의 게시물.

중학교에 입학하고 대화도 나눠본 적 없지만 이름은 잘 알고 있다.


긴 생머리와 맑은 눈, 깨끗한 피부.

인형 같다는 칭찬이 전혀 아깝지 않은 외모로 학교에서는 이미 유명인이었다.


벌써 고백했다 차인 남자가 남학생 수의 절반을 넘는다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과장이겠지만, 이렇게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얘기해보고 싶네.

겨울에 산장이라, 로망을 아는 여자야… 응?


다시 한번 사진을 바라본다.

눈에 익은 산장, 사진 한구석에 보이는 산장 이름의 앞 두 글자는 지금 내가 있는 산장과 같았다.


“엥? 말도 안 돼!”

아린이는 지금 나와 같은 산장에 있다.



***



그 사실을 깨닫고 산장을 조금 돌아다녀 봤지만, 좁은 산장에 아린이의 모습은 없었다.

터덜터덜 방에 돌아온 나는 온천에 가기 위해 옷을 챙겼다.


하긴, 전국에 산장이 얼마나 많은데 이름 두 글자가 같다고 같을 리가 없지.

만나도 제대로 말도 못 걸게 뻔한데 나는 왜 낙심한 걸까.


가볍게 몸을 씻고, 한심한 나를 벌하기 위해 뜨거운 탕에 바로 몸을 담근다.

어렸을 때부터 이걸 왜 시원하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몸을 바로 담그면 살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서 항상 수영장에서 준비 운동하듯 가슴에 물을 뿌리고 들어갔다.

그럴 때면 엄마가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면서 뭐라 했었지.


뜨거운 탕에 살이 타는 기분이 들 때쯤, 탕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탕도 많은데 왜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오는 걸까.

뭐, 그 사람이 들어오고 싶었다면 어쩔 수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너 같은 학교 다니지?”

그렇게 생각하고 탕을 나가려는데 처음 듣는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아, 아린이다!”

“뭐야, 무슨 괴물 본 것처럼.”

귀엽게 눈웃음을 지으며 씨익 웃는 모습, 인터넷에서 본 여우의 웃는 모습 같은 귀여운 표정에 마음이 확 풀린다.


처음 봤지만 아린이가 왜 유명인인지 알 것 같다.

그녀는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그만 봐. 부끄러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몸을 살짝 숨기며 탕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내밀었다.


“미, 미안.”

“이름, 뭐야?”

“민하! 김민하야.”

“이름 이쁘네. 6반 맞지?”

“어? 응, 맞아!”

그 외에도 “가족이랑 왔어?”, “취미는 뭐야?”, “남친은 있어?”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해왔다.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즉답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호구조사가 끝났는지 아린이는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왔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네~”

“그, 그러게.”

“서로 알몸도 본 사이고.”

그렇게 말하며 다시 여우 같은 웃음을 짓는 아린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눈은 그녀에게로 향해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게 된다.


확실히 알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 큰 가슴에, 얼굴만큼이나 깨끗한 피부, 털 하나 나지 않은 매끈한 몸은 길거리에서 모델 제안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 완벽한 몸이 눈앞에 들이밀어지니 내 몸과 비교되어 조금 비참하다.

아린이가 그랬듯이 탕 속에 몸을 숨긴다.


“왜 숨어~ 민하도 예쁜데~”

물속에 숨은 내 몸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가슴 만지지 마!”

“말랑말랑하니까 기분 좋아.”

“읏, 말하지 마!”

탕 속에서 이곳저곳을 만져져 조금 멀리 도망친다.


“나는 만져도 되는데.”

“아, 안 만질 거야!”

또다시 여우 같은 웃음.

그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미소에 어쩌면 나는 이미 홀려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방금 만났는데도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해졌으니까.



***



그 뒤로 우리는 잠깐 탕 속에서 술래잡기한 뒤 밖에 나왔다.

그때는 이미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아, 나 들어가 볼게. 슬슬 저녁 시간이니까.”

“응, 다음에 봐.”

방에 들어가는 아린이를 배웅해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유명인인 그녀와 이야기 할 수 있어 행복했다.

학교에서 만나도 이렇게 장난칠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방에 들어간다.

탁자에는 이미 많은 접시가 깔려있었다.

해산물, 고기, 과일, 다채로운 요리가 잔뜩 깔린 저녁은 이 산장의 자랑이었다.


밥을 먹으며 식탁 밑에서 몰래 핸드폰을 확인한다.

아린이의 SNS에는 나와 같은 식탁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둘이서 같은 메뉴를 먹는다는 게 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두근거린다.


“아린아, 핸드폰 그만하고 밥 먹어라.”

“네.”

가족 같다는 건 취소, 그래도 두근거림은 사실이다.


부모님은 밥을 드시자마자 침실에 들어가시고, 나는 혼자 작은 거실에 남았다.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잠들기는 싫었다.


[아린아, 뭐해?]

무슨 용기인지 아린이에게 DM을 보냈다.

아직 읽음 표시가 나타나지 않은 메시지를 지울까 고민하던 중, 읽음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놀러 가도 돼?]

아린이의 답장은 조금 뜬금없었다.


[지금, 엄마아빠 다 자는 중.]

[그럼 갈게. 몇 호실?]

거절의 뜻으로 보냈는데 아린이에겐 OK 사인이었나 보다.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기엔 좀 그래서 방 번호를 알려줬다.


아린이는 정말 조용히 방문을 열고 살금살금 내 옆으로 걸어 들어왔다.

왠지 첩보영화를 보는 것 같아 나까지 조마조마했다.


“조용히 말하자.”

귓가에서 아린이가 그렇게 속삭였다.

공기가 많이 섞인 말소리는 온천에서 들었던 그녀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와 다르게 탁해서 조금 농염하게 들렸다.


“여기 밥 맛있더라.”

“벌써 8년째라 나는 질렸어. 사실 매년 요리는 같거든.”

“진짜? 이런데 알았으면 빨리 알려주지.”

“알았어도 알려주진 못했어.”

시시한 얘기, 친구들과 하는 소소한 잡담도 부모님 몰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재미있었다.

마치 수련회에서 밤에 조교 몰래 얘기하는 느낌?


“수련회 같아서 재미있다.”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아린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둘이서 같은 탕, 같은 메뉴, 같은 생각.

나와 다른 세상을 산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같은 게 이렇게 많다니, 나도 그녀처럼 빛나는 것 같아 행복하다.


어느새 할 이야기도 떨어졌는지, 방에는 우리의 숨소리와 얇은 벽을 뚫고 들리는 부모님의 잠꼬대만이 남았다.

부모님의 잠꼬대 소리를 들려주는 게 부끄러워 일어나려는 나를 아린이가 확 잡아끌었다.

넘어지려는 나를 그녀가 와락 안아서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깔리고 말았다.


“이 뒤에 부모님 계시는 거지?”

말 그대로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에 말문이 막혀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나쁜 짓 할래?”

“아읏…”

그렇게 말하며 귓불을 깨문다.

통증이 속삭임과 함께 고막을 타고 흘러 들어와 찌릿한 소름을 전신에 흘린다.


“그, 그만해…”

“나 싫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조금 비겁한 화법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그녀는 내게서 말할 권리를 빼앗았다.


갑작스럽게 겹쳐진 입, 입안에 느껴지는 말랑한 이물질.

내 혀를 멋대로 껴안고 끌어당기는 게 혀마저도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 숨을 참고 눈을 꽉 감고 있으니 그녀가 천천히 입을 떼주었다.

우리 사이에는 살짝 노란빛의 전등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거미줄이 주욱 늘어나다 툭 끊겼다.


“하아… 하아…”

그 모습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몰래 나쁜 짓 할래?”

그녀는 누워있는 내 위에 올라탄 상태로 귓불을 깨물며 아까와 같은 말을 해왔다.

나쁜 짓의 쾌감을 알아버린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해달라고 말 안 하면 안 해줄 거야.”

그 말이 짜릿한 쾌감이 되어 귀를 때렸다.


“해줘.”

“뭐를?”

“나쁜 짓…”

아린이는 얼굴을 가린 내 손을 잡아 바닥에 붙였다.

여우 같은 미소.

그래, 나는 여우에 홀려 나의 소중한 것을 먹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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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달한 게 쓰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