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슬플 수 있으니까 주의


------------------------------


비록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죽기 전에 뭘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딱히 저 명언이 싫어서도 아니고, 내가 삐뚤어져서도 아니다.

정말 진심으로 궁금해서지.


“저는 사신, 죽기 전 가장 원하는 것을 이뤄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흰 생머리, 파란 눈, 그리고 살아있지 않은 듯한 창백한 피부는 정말 그녀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런 외관이 무슨 상관일까.

검보라색의 거대한 낫, 그녀의 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 보이는 낫이 그 말을 증명한다.


“아, 낫은 장식용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길. 이게 없으면 안 믿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낫을 붕붕 휘둘러서 나는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웅크렸다.


향년 23세, 아직 대학에 다니며 꽃다운 연애도 해보지 못한 나는 곧 죽는다.

그 사실을 이해하자 후회가 왈칵왈칵 흘러넘친다.


마음이 있던 선배에게 고백이라도 할걸, 알바해서 번 돈 모으지 말고 명품백이나 살걸, 23살에 죽을 거였으면 수험공부도 안 하고 맨날 놀았을 텐데…!

딱하고 머리에서 차가운 통각이 느껴지자 그런 번민이 사라진다.

고개를 들자 붕붕 돌리던 낫의 뒷부분이 내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었다.


“실례, 조금 재밌어져서 계속 휘둘러버렸네요. 소원을 이루러 갑시다.”

“어디로?”

아까 전의 후회가 항목이 되어 떠오른다.

후회란 곧 소원.

과연 그중에 내가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은 무엇일까.


“연서 씨를 만나러 갑니다.”

연서, 박연서.

그 이름을 듣자 그립고 따듯한, 하지만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미련이 남았구나…


죽음의 공포마저 날려버릴 정도의 강렬한 기억.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다.



***



중학교, 아직 무엇이 될지도 모른 채로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학원을 전전하던 때.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학원에서였다.


“너 처음 본다. 연이 중학교 학생 아니야?”

“응, 나는 대선 중학교.”

“와, 우리 반에 너 빼고 다 연이중이야!”

놀리는 말이 아니고, 그저 순수하게 재밌어서 하는 말이라는 게 전해지는 순수한 아이.


외곽지역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연서가 다니던 학교와 다르게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학교였다.

그래서 학원에 다니면 보통 B반이나 C반에 들어가고, 그녀가 속한 A반에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나는 목적도 없이 그저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그런 A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음 쉬는 시간에 컵떡볶이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그, 그래!”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A반의 수업 분위기는 B반이나 C반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돌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인 것 같았다.


쉬는 시간, 둘이서 학원 아래로 잽싸게 뛰어나가 분식점에서 컵떡볶이를 샀다.

5분이라는 짧은 쉬는 시간이지만 1등으로 살 수 있다면 이 정도 군것질을 하기에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너 이름은 뭐야?”

“나는 다민, 정다민. 너는?”

“나는 박연서야. 잘 부탁해.”

“응.”

우리는 분식점이나 문구점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기소개했다.

처음 만났지만 둘이서 같이 뛰어 1등으로 컵떡볶이를 샀다는 소소한 일이 서로 잘 맞는 것 같다고 느끼게 했다.


“떡볶이 맛있네.”

“여기꺼 안 먹어봤어?”

“맨날 늦어서 떡볶이는 못 먹어봤어.”

“오늘부터 매일 먹자!”

“매일은 질릴 거 같은데.”

“그럼 떡꼬치도~”

재잘재잘 서로 얘기를 나눴다.

검은색의 살짝 웨이브 탄 머리.

조금 평범해 보이던 그녀는 웃을 때만큼은 빛나는 별 같았다.


씨익 웃으며 보이는 새하얀 이빨, 쏙 들어가는 보조개와 귀여운 눈웃음.

그녀가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녀를 항상 웃게 하고 싶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본 시시한 농담을 잔뜩 모아 그녀에게 들려줬다.

나도 재밌을까 싶던 이야기를 그녀는 깔깔 웃으며 반응해줬다.


학교에서 조금 겉돌던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계기로 말하는 게 재미있어져 친구가 많아졌다.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도 많아져, 그녀의 웃는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A반에 계속 있고 싶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처음부터 낮지 않던 성적은 계속 올라 내신은 290점을 가볍게 넘겼다.


연서를 만나 내 인생이 바뀌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 그런 마음을 나는 그녀에게 전했다.


“응, 나도 너 좋아해.”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 사이에 스킨십이 많아졌다.

맞잡던 손이 손깍지로 바뀌고, 가끔 장난삼아 하던 뽀뽀는 키스로 바뀌었다.


친구 여럿이서 놀러 가기로 했다고 말하고 둘이서 간 놀이공원에서 우리는 서로의 몸을 탐했다.

조금 성장이 느린 연서의 몸은 나와 다르게 탄탄하고 매끈해서 안기고 싶었다.

연서는 내 몸을 만지며 말랑해서 기분 좋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그런 연서보다 내가 더 기분 좋았겠지, 그날 나는 처음으로 절정을 경험했다.


점점 더 격정적이고, 그리고 과격하게 변해가던 우리 사이는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식었다.

내 높은 내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부모님은 나를 도심의 명문고에 넣으려 했고, 연서는 그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지는 않아 근처의 일반고로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대들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맞았다.

내 첫 번째 반항은 그렇게 간단히 꺾였다.


명문고에 들어가고 내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사를 해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된 나는 공부가 재미없었다, 사람을 사귀는 게 재미없었다.

유일한 위안이었던 그녀의 문자도 고등학교 중간부터 더 이상 오지 않게 됐다.


그 뒤로는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

나는 손목에 붉은 줄을 긋고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목욕을 했다.

퇴근하고 나를 발견한 부모님이 가까스로 나를 살렸고, 나는 이런저런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학교도 바뀌었다.

명문고에서 바닥을 기던 나는 일반고에서 그저 그런 학생이 되었다.

목표가 사라져 꼭두각시처럼 살다 대학에 들어가 곧바로 독립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이 정도.

그녀는 내 인생을 바꾼 고맙지만 미운 사람이다.


“정말 그게 소원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게 내 소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다시 물어봤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그녀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보니 그녀를 꼭 만나고 싶어졌다.


“난 어떻게 하면 돼?”

“순천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옷을 입고 밖에 나섰다.

그녀에게 따지기 위해, 그녀와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의 웃는 표정을 보기 위해.



***



순천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열차를 타고 약 4시간, 심지어 도착하고서 연서를 찾아야 한다.

갑자기 주어진 미션은 나를 조급하게 했다.


“그런데 넌 뭐라 불러야 돼?”

“그냥 사신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사신아, 난 어떻게 죽어?”

“저도 모릅니다.”

조급함을 없애기 위해 사신이와 이야기하려 했지만, 사무적인 태도의 그녀는 오히려 조급함을 키웠다.


소원을 이루는 게 맞을까?

사신이의 말대로라면 내가 소원을 이루면 죽는다, 그야 죽기 전 소원이니까.

오늘까지처럼 그녀를 보지 않고 산다면 천수를 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해 이미 죽었으니까.

죽는다면 그녀를 보고 죽고 싶다는 기묘한 감정이 내 속을 뒤집고 있었다.

그건 어떤 의미로는 그녀에 대한 복수심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없습니다.”

덜컹, 기차가 크게 흔들리고 사신이가 그렇게 말했다.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모자랍니다. 이제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덜컹, 덜컹 기차의 흔들림이 거세진다.

깜빡깜빡하고 전등이 점멸한다.

그리고 한쪽으로 지나가던 바깥의 풍경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나는 이대로 죽는구나.

연서를 보고 싶다는 내 마지막 소원은 몸에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튕겨 날아갔다.



***


학생, 학생!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깨를 톡톡 치는 기분 나쁠 정도로 난폭한 손길이 기분 나쁘다.

눈이 억지로 열려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눈부셔…


“학생, 정신이 들어?”

조금씩 돌아오는 의식 속에서 눈을 뜨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를 맞이해줬다.

순천○○○병원, 의사의 명찰을 통해 적어도 순천에는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먼저 느껴졌다.


“이야, 다행이네. 다리를 삐끗한 정도로 끝나다니 기적이야.”

“아야야… 기차를 타고 있었는데…”

기차에서 이상한 충격을 느낀 뒤로 기억이 없다.

왼쪽 다리가 아파 잘 움직이지 않는다.


“기차가 전복됐어. 아, 부모님 전화번호랑 주소 좀 적어줄래? 이쪽으로 데리러 오라고 하게.”

“아, 네.”

기차가 전복? 정말 그의 말대로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다.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멀리서도 왔네”라고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다민 씨, 여기입니다.”

“응? 뭐라고?”

문 옆에 서 있는 사신이가 그렇게 말해왔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연서 씨가 있는 곳이 이 병원입니다. 지금이라면 의사한테 안 들키고 갈 수 있습니다.”

“저, 정말?”

“예, 어서 갑시다.”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사신이를 따라 움직인다.

사신이가 안내해준 층은 7층이었다.


그 층은 내가 있던 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분명 어디선가 밝은 노래가 들려오지만, 그 노래가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무겁고 조용하다.

사신이를 따라 복도를 걷는데 내 발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듯했다.


그 가장 안쪽 구석의 작은 방.

그 안으로 사신이가 들어왔다.


“사신아, 왔어?”

그 목소리는 확실히 연서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발이 움직였다.

당장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 소원 들어줬구나?”

“예, 그게 제 업무니까요.”

연서의 웃는 표정.

새하얀 이빨, 쏙 들어가는 보조개와 귀여운 눈웃음.

별 같은 그 표정이 눈앞에 있지만 어째선지 눈물이 나왔다.


그녀에겐 털이 없었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들어본 적 있어서 알고 있다.


“오랜만이야, 다민아.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뛰쳐나갔다.

복도에서 울리는 내 발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이 들렸다.

옥상으로 올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뒤에서 사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설명해줘,”

“저는 연서 씨의 소원을 들어줬을 뿐입니다.”

“너, 너!”

그녀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 번도 내가 죽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죽는지 모른다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사신은 곧 죽을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지?”

“그렇습니다.”

바람에 조금 큰 소매가 흔들린다.

소매 안쪽의 흉터가 눈에 들어온다.


“연서가 건강해지게 해줘.”

넓은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진다.

시골 마을과 도시가 섞여 재미있어 보이는 풍경은 천지가 뒤집혀있어 더 재미있어 보였다.

그리고 세상이 검게 닫혔다.



***



검은 세상 속에서 연서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다민이를 봐서 좋은데 너는 나를 봐서 싫어?”

“아니 좋아.”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친다.

그녀와 다시 만나서 정말 기쁘다.


“미안해, 연락 못 해줘서.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를 생각하면서 힘냈어. 피를 한 뭉텅이 뽑혀도 참았어.”

“이 악물고 힘냈는데 안 된다더라, 헤헤…”


“나는 싫어.”

“응? 뭐가.”


“차라리 내가 죽을래.”

“그건 안돼.”

“왜? 나보다 네가 더 좋은 사람이잖아. 그리고 나는 이미 죽었어.”

소매를 걷어 흉터를 보여준다.

연서의 표정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녀가 내게 하는 말은 사과뿐.

내 소원을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화가 난다.


“그거 알아? 사신은 착한 사람한테만 소원을 들어준대.”

“뭐야 그게. 동화야?”

“그러니까 나랑 약속해줘.”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착한 사람이 돼서 후회 없이 죽어줘.”

“너는… 후회 없어?”

“후회가 아예 없지는 않지.”

“근데 왜…”

소리치려는 내 말을 그녀가 끊었다.


“나 때문에 다민이가 아파했잖아.”

연서가 내 손목을 붙잡고 별처럼 웃는다.

그 웃음에서 태양 같은 따스함을 느꼈다.


“알았어. 소원 꼭 이룰게.”

“착하다, 착해. 소원에 한발 다가갔네.”

연서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그녀에게, 내 소원을 향해 한발 다가가 입을 맞췄다.


그리웠던, 사랑했던, 미워했던 감촉.

우리는 그대로 별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혔다.



***



“학생!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내 머리 위에 살포시 얹어진 연서의 손을 치우며 조심히 일어났다.

그녀의 환자복은 내 눈물로 축축이 젖어있었다.


“아아… 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전부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연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잔잔한 호수의 파도보다도 잔잔하게.


간호사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아는 사이였다는 걸 알고는 금세 용서해주셨다.

오히려 사탕을 선물로 받았다, 달콤한 복숭아 맛이었다.


“이야, 기차가 넘어졌는데 사람이 딱 한 명 다쳤다고요?”

“그래, 게다가 웃긴 게 기차도 멀쩡하단다.”

“진짜 기적이네요.”

멀리서 중년 남성 둘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탔던 기차의 얘기인 것 같아 귀를 기울여본다.


“기적은 무슨, 그 일이 안 일어나는 게 기적이지.”

“그건 그렇네요. 아, 그 다친 애는 괜찮대요?”

“음, 멀쩡해 보이던데… 아, 검사하러 가야 하는데! 고생해~”

“네, 고생하세요.”


누구도 기적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사고야말로 기적이라는 걸 안다.


그 기적을 일으킨 사신을 떠올리며 나는 살아가기로 한다.

언젠가 그녀와 다시 만나기 위해서.



--------------------


쓰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울었음.


크리스마스에 쓴거랑 조금 비슷한데 내 마음 속에선 많이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