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군요. 사정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영생자는 이젠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등골에 서늘한 식은땀이 맺히게 만들었고, 어지간한 일로는 주눅들지 않는 이올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함에도 일부러 시간을 끄는 모습이 그 긴장감을 더 길게 유지시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이올레도 제자리에 멈추어 영생자를 바라보는 사이,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주변의 사제들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렸다. 말 한 마디 없는 손짓뿐으로 보이는데도 사제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니,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필요한 지시를 척척 내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올레와 케스티의 생각은 ‘영생자가 그렇게 조용한 방법으로 내린 지시가 무엇인지’로 옮겨갔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먼저 입을 열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두 사람 모두 군침만 삼키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흠…”


한참 동안이나 손과 몸을 움직여 주변 사제들을 움직이고 난 뒤, 영생자는 낮은 목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드디어 무언가 할 말이 떠오른 건가 싶어서, 케스티가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영생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여전히 크시아를 휘감은 사슬을 잡고 있던 이들에게도 이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괘, 괜찮겠습니까?”

“예, 어디 적당한 곳으로 옮겨 두세요. 되도록 사람이 뜸한 곳이 좋겠군요.”

“알았습니다.”


그렇게 인부들이 떠나고 네 사람만 남게 되자, 영생자의 시선이 그제서야 케스티에게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이 자리에서 할 말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고는, 누가 먼저 입을 열지 몰라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저기,”


그 고민을 먼저 끝낸 건 케스티 쪽이었다.


“혹시 목숨을 거두거나 하지는 않는 거겠죠?”

“누구의 목숨을 거둘지는 말하지 않다니, 역시나 저쪽이라고 지레짐작한 거군요?”

“네?”


영생자의 답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맨 뒤에 서 있던 라네비아가 그 반문에 담긴 의도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오니사에서 출발하기 전날, 크시아도 비슷한 의심을 했던 것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런 건가.”


다른 세 사람의 눈길이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라네비아가 자신들을 둘러보는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이올레는 물론 케스티도 라네비아의 생각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당신네 신도들을 멀리 물린 거지?”

“그래서? 뭐가?”


이올레의 반문을 들은 라네비아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마치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다른 셋은 떠올리지 못한 건지’ 조소하는 듯했다.


“자신의 영생조차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같던데?”



한편, 영생자의 지시에 따라 다른 교단 인원들이 수레를 끌고 간 반대편 끄트머리.


“저, 루아 사제는 이쪽으로 오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쉴 사람은 쉬는 게 어떻겠냐고 하던데요?”


차가운 인상과 목소리가 인상적인 고위 사제 미하리가 팔짱 위에 가슴을 걸치고 걸어와,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수레를 둘러싸고 있던 경비병들을 뒤로 조금 더 물렸다. 방금 한 경비병이 입에 올린 루아 사제는 오늘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안내하느라 힘을 많이 뺐기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로 보낸 참이었다.


“그래서 살펴보니, 제가 보기에도 제때 쉬어줘야 할 것 같아서 보내드렸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지금부터는 제가 저…”


미하리 사제는 경비병들이 서쪽에서 가져온 ‘것’을 잠시 올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요물이니 마귀니 하며 다들 꺼린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정작 실물을 직접 보니 유려한 금색 머리카락을 빼면 자신을 쏙 닮아서 마음에 드는 미소녀가 차가운 얼굴로 한숨을 쉬고 있는 모습이 굉장히 큰 괴리감을 안겨주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나면 그럭저럭 괜찮게 여겨지는 호칭이 한 가지 있어, 미하리 사제는 금방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 수 있었다.


“...사람을 맡아서 지키도록 하지요. 여러분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괜찮을까요? 조금만 경계를 늦추어도 주변을 자기 색으로 물들이는 마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말입니다.”

“글쎄요… 저도 그걸 염려하고 있긴 하지만, 저라고 준비를 안 한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적어도 당신이 걱정하는 것보다 심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죠.”

"저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미하리 사제는 병사들이 살짝 놀라면서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동그란 호박 장식을 매단 사슬을 손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정신간섭을 막아주는 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물건이라 챙겨 오긴 했는데, 저 ‘괴물’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을 상대로도 효과를 볼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이 병사들은 그런 준비를 미리 갖추는 것과는 거리가 있기에, 자신보다 더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그냥 끌리기도 한단 말이지…’


그래도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서, 미하리 사제는 조금 빨라진 말투로 경비병들을 더 멀리 내보냈다. 물론 직설적으로 그들을 내쫓기보다는 넌지시 권유하는 형태를 취해서, 병사들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더 덜어주기로 했다.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압니다. 하지만 혼자서 지키는 게 오히려 불상사를 줄일 수 있을 것 같군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말려드릴 사람이 없다는 뜻도 되는 만큼,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단둘이 남게 되자, 미하리는 한숨을 쉬며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역시 몇 번을 보아도 그때마다 새롭게 마음이 들뜨는, 일부러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두지 않으면 이성이 무너질 법한 미인이 그 위에 묶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는 것 이외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일 텐데, 한 번쯤은 풀어줘야지…’


실없는, 하지만 누군가는 두어 번 정도 떠올려야 했을 법한 걱정거리였다. 마침 미하리 자신이나 병사들이 생각한 불상사를 예방해줄 수 있는 물건도 쥐어져 있기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기도 어렵지 않았고, 그 답에 이의를 제기할 법한 이들도 방금 자신의 손으로 내보낸 참이라 방해꾼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몸에 묶인 사슬을 풀고 손에 쥔 것을 달아주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에 일이 터졌다.


“큿.”


몸에 손이 닿았을 때, 미하리의 가슴과 머릿속이 동시에 찌릿 하고 울린 것이었다. 미하리 자신도 저 사람과 같은 여자라서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일단 한 번이라도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든 이상 성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