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오 페이지.



야마자키 히카루는 눈을 감고 두 소녀를 떠올린다. 먼저 웃으면서 뒷모습을 보인 소녀를 상상한다. 나나세 나유다. 96화에서 나온 모습이다. 체육대회에 나갈지 망설이는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주는 에피소드다.


그 다음으로는 코이즈미 마치를 떠올린다. 마치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채 컷 너머로 눈을 향하고 있다. 눈동자에는 수정액으로 묘사한 눈물이 그려져 있다.


히카루는 그 다음으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린다. 너도 이제 마음을 결심해야지. 언제까지 피하면서 다닐 수는 없다고. 히카루는 눈을 뜬다. 







마지막 페이지.




단독 컷이다. 마치는 바로 전 페이지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 사랑을 고백한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얼굴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오른쪽 아래에 편집자가 적은 간단한 문구가 적혀있다. 선택의 기로, 히카루는 과연? 다음화로 드디어 마지막!










“마치가 진 히로인이네.”



나유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유의 친구인 쿠로는 소년 점프를 눈으로 훑고는,




“마치지. 봐, 나유는 딱 봐도 실연한 느낌으로 그려져있잖아. 저거 배경에 붙은 거 몇 번 톤이야? 히로인 뒤에 사고로 죽을 때나 쓰는 걸 붙여놓고…”



라면서, 정면에 앉은 나유를 놀리려는 듯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나유는 태연히 콜라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마치가 선택받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한 나유로서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코이즈미 마치는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히로인이다. 마치는 흔히 츤데레라고 불리는 캐릭터들이 정석으로 보이는 성향을 보여주면서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당당히 사랑을 선포하는 모습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고급스러워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빈곤한 집에서 태어난 소녀 가장이라는 사실도 인기에 영향을 주었다.



2위인 나나세 나유와는 50표 가량으로 얼마 인기 차이가 나지 않지만, 3위인 야나기 쿠로나 4위인 사사키 사치코와는 큰 폭으로 차이 난다. 사치코는 어디까지나 서브 플롯 하에서 작품 진행을 돕는 캐릭터니 논할 가치도 없었고, 쿠로는 페이크 히로인이라는 평이 많았다. 마치나 나유 중 한 사람이 히로인이 되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타이틀 히로인인 마치가 나유보다 확률이 높다는 사실도, 나유에게는 명확해보였다.




쿠로는 빅맥 세트를 놓아둔 식판 바로 앞에 소년 점프를 올렸다. 


“아쉽지? 인기 많았잖아.”


“응? 아. 뭐 어때. 어차피 서브 히로인이었는데…”


“그래도 인기는 있어서 다행이네. 야, 나는 1화부터 나왔는데 인기 없어.”


나유는 콜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 먹은 햄버거 봉투 옆에 둔 감자튀김 조각을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눅눅해진 감자튀김은 허리를 축 늘어트렸다.


“다들 보는 눈이 없는거야.”



사실 이 작품은 마치와 쿠로, 히카루가 자아내는 삼각관계가 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명목상 새로운 히로인을 추가했을 뿐이지, 주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히카루가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자 어느 순간 쿠로의 친구이자 조역에 불과했던 나유가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작가가 조연으로 쓰기 위하여 힘을 빼고 그린 간단한 캐릭터 디자인이 오히려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나유는 인기를 의도하지 않은 덕에 오히려 자연스럽고도 미려한 디자인으로 완성되었다. 검은 앞머리는 눈썹을 반쯤 덮고 뒷머리는 어깨 위에 닿는다. 몸은 인체 비례 책에 이상적인 비례의 견본으로 나올 법하다. 여러 문호들은 어느 정도 상한선을 넘어선 미는 몰개성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고 서술한 바 있는데, 나유가 정확히 그 사례에 속했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나유가 쿠로보다 더 훌륭한 “서사” 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설정상 나유는 평소에는 소심하지만 친구를 위해서 적극성을 발휘하고, 실수가 잦지만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항상 열심히하는 노력가였다. 독자들에게 보이는 나유는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항상 타인에게 기회를 양보하지만, 이면에서는 항상 분해하는 소녀다. 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을 탓하지 않는다. 


그런 소심한 소녀가 아무에게도 남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에 많은 독자들이 마음을 움직였다.



나유가 상담을 들어주던 도중 히카루에게 반하였다는 명목으로 메인 히로인으로 편입되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자들은 히로인들을 보며 이런 평가를 내렸다. 정실은 마치. 불륜은 나유. 연애는 쿠로. 첩은 사치코. 독자 투표에서 인기가 역전되자 마치와 나유 중 히카루와 이어질 캐릭터가 누구인지 떠들며 다퉜다.



“그건 그렇고 역시 스쿨럼블은 아직도 먹힌다니까. 따지면 마치하고 나유도 에리랑 야쿠모 같은 스타일이고.”


“굳이 따지면 에반게리온이지. 아스카하고 레이가 있잖아.”


“그것도 그렇네.”



나유는 케첩에 반으로 끊긴 감자튀김을 찍었다.



“이제 어디가?”




쿠로가 물었다. 잘 대답을 이어나가던 나유도 이 질문에는 뭐라 마땅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야 할 한 마디가 오늘따라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연재가 시작된 지도 3년이 넘게 흘렀다. 그 동안 나유는 일주일에 한 번 씩 핸드폰 메세지로 전달되는 시놉시스와 콘티에 따라서 살았다. 연기한 내용은 매 주 소년 점프에 실려나왔다. 두 사람 다 콘티를 거역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얼추 알고 있었다. 시놉시스를 벗어난 사람들은 누군가 존재했다는 희미한 인식만을 남긴 채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땅에 떨어진 채 잊혀져버린 지우개처럼 된다.


두 사람에게 사라지리라는 불안은 없었다. 애초에 콘티 내용에 불만을 가진 적 자체가 없다. 적힌 내용 대부분은 자기가 할 법 한 일이었으니까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단지 마지막이 다가오니 연재가 끝난 뒤가 신경쓰일 뿐이었다.


나유는 지금껏 본편이 끝난 다음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설령 끝난다고 하여도 지금과 별로 다르지는 않을듯 했다. 히카루가 연애를 시작하겠지. 그게 유일한 변화다. 세상이 서비스 종료를 선언한 게임처럼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갑자기 좀비가 출몰하지도 않을테다. 적어도 졸업식이 되기 전까지는 감자튀김을 입 안에 집어넣으며 심심풀이로 소년 점프를 읽는 일상이 계속되겠지. 눅눅한 감자튀김처럼 늘어진 일상이. 나유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집에 가야지.”



케첩은 질척한 피처럼 손가락 끝에 들러붙었다.








*




콘티는 저녁 일곱 시에 도착했다. 왠지 모르게 설정화가 함께 첨부되어있었다. 나유는 의아했다. 설정화를 먼저 볼까 콘티를 먼저 볼까 고민하다가, 평소대로 콘티를 먼저 확인했다. 



특별한 회차라 그런지 평소보다 분량이 많았다. 나유는 콘티를 읽어나갔다. 첫번째 페이지. 두번째 페이지. 전부 나유가 예측한 대로였다. 일 페이지부터 히카루는 마치에게로 다가간다. 마치는 눈을 감으며 발을 뻗는다. 아름다운 얼굴은 연모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전한다. 부드럽게 닫힌 입술은 새어나오려 하는 사랑을 애써 막아낸다. 나유는 마치가 고개를 들어 키스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돌연 시야가 넓어진다. 한 페이지에 집중되어있던 시야가 갑자기 두 배로 확장된 탓이다. 양면 가득 두 사람이 서로를 안은 그림이 양면 페이지 전체를 할애하여 그려져있다. 히카루는 마치를 안은 채 무언가 속삭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유는 그렇게 느꼈다. 마치는 전 페이지외는 달리 눈을 크게 떴다. 벌어진 입술은 죽음을 선고받은 시체 같았다. 예상과는 달랐다. 무언가가 일그러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종이가 넘어간다. 사선으로 번진 잉크가 자취를 남긴다. 히카루는 계단을 내려간다. 마치는 옥상에 홀로 남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다시 히카루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사람은 누구였는가. 하는 대사와 함께 파편화된 컷으로 나누어진 추억이 양면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히카루는 파편 사이를 헤집어가며 달려나간다. 텅 빈 교정. 복도. 거친 선으로 그려진 한숨. 문이 열린다. 페이지가 바뀐다.



만화가 막을 내리기 십 페이지 전. 그곳에는 거울이 있다.


새로운 캐릭터 설정화에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페이지 구석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십 년 후 외전에서 등장할 예정.





핸드폰이 꺼졌다. 나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 위에 누웠다.



현실성이 없다. 1화에서 등장한 타이틀 히로인마저 이기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원래 히로인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한 히로인으로 선택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히로인이 된 이후를 상상해본 적도 당연히 없다. 그저 막연히 5년, 10년 뒤에도 쿠로나 마치, 사키코를 놀리며 살아가리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쿠로가 이겼을 때 결혼식장에서 어떤 축사를 내뱉을까 고민해본 적은 있다.



나유는 기뻐하려고 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히로인들은 다 히카루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누군가는 밤을 세어가며 화장을 했다. 누군가는 일부러 치마 속을 보여줬다. 사랑을 위해 달려온 연기자들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은 나다. 기뻐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을 거듭할 수록 환희는 커녕 허망한 감정만이 밀려왔다. 과장 광고된 디저트 가게를 긴 시간 기다려 방문한 뒤 몰려오는 허탈함과 비슷했다.



허탈함이 가라앉은 뒤에는 죄악감이 몰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자리를 도둑질한 기분이었다.


나오는 다툼을 싫어한다. 싸움보다는 시덥잖은 일상을 더 좋아한다. 나오는 직접 경기장을 달리는 선수보다는 경기장 밖에서 응원을 던지는 관중이 되고 싶었다. 우승자에게 부케를 건네주는 역할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이미 경기장 위였다. 이 상황은 경쟁할 생각도 없이 참가한 경주에서 승리해 친구를 제치고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게 된 셈이다.



왜 쿠로가 아닐까. 나유는 모로 누워 중얼거렸다.



날림으로 만들어진 탓에 생긴 오류가 아닐까 싶었다. 필요하지 않은 캐릭터를 크게 고민하지 않는 작가는 많다. 장인처럼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나유는 정신을 추스리려고 했다. 조역이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래도 해내야만 했다. 그래.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하지만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래는 확정되었다. 본편 뒤를 배경으로 한 결혼 외전까지 히카루와 함께 나와야만 한다. 독자들이 바라는 모습은 행복이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 싱글벙글 웃어야한다. 무엇 하나 받아들일 수 없지만, 쿠로와 쌓은 관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점이 가장 두렵다. 학교를 졸업한다면 쿠로와 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수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행복을 가장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유는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 앱을 켜서 숫자를 입력해나갔다. 네 번째 숫자를 입력했을 때 쿠로의 번호가 화면에 나왔다.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덜커덕, 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 같았다.



“여보세요.”


쿠로가 말했다. 나유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무작정 건 전화였다. 전화를 건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나유. 나유? 항구에서 미아를 찾는 어머니 같은 목소리가 귀를 건드리자 나유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 빨라졌다. 


목소리가 나왔다.


“만나고 싶어.”


…쿠로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바람이 마이크를 스치며 조개 껍질이 바스라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머지 않아 층계를 밟는 진동이 바닥을 울렸다.


초인종이 울렸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쿠로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 서있었다. 반쯤 가려진 눈동자는 축하와 어떠한 질척이는 감정 사이에서 망설였다. 나유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본 지 고작 네 시간 만이었다. 영화 두 편을 보면 끝나는 사소한 공백이다. 그런데도 쿠로를 보자마자 나유는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소녀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 뿐 아니라, 한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가 영영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자칫하면 억누른 언어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면 내려놓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기는 커녕 마음 속에서 무언가 확실해졌다. 알아버렸다.




바람은 문 밖에서 떠도는 소리를 실어 방 안으로 올려보냈다. 자동차 배기음, 밑 집에서 세어나온 액션 영화 효과음, 참새가 우는 소리 등이 한 데 섞여 세상을 울렸다. 나유는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고 느꼈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쿠로는 그 표정을 보고서 슬픈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전화했어?”


“…모르겠어.”


목소리는 명백히 흔들리고 있었다.


“…놀리는 거야?”


“아니야.”



즉답이었다. 나유는 손을 늘어뜨린 채 눈을 치켜떴다. 불안이 담긴 얼굴을 보자 쿠로는 숨죽였고, 발을 뻗었다. 장창의 머리처럼 예리한 빛이 두 사람을 찔렀다. 나유는 빛의 폭력에 저항하듯 인상을 구기고, 눈에 비를 머금어 시야를 가렸다. 


“…잡아줘.”


긴 그림자가 삼각 지대를 만들어 소녀들을 감쌌다. 쿠로는 조심스럽게 나유를 안았다. 나유는 몸을 떨었다. 체온은 대기의 온도보다도 따뜻했다. 




쿠로의 팔이 허리춤에서 올라와 나유의 양 귀를 막았다. 소음은 점차 먹먹해졌다.



“가자.”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달렸다. 꺼진 가로등 밑을 지나갔다. 마을을 나가는 통로에 들어가자 세상은 커튼콜을 마친 무대 뒷면처럼 어두워졌다. 땅거미에 젖은 도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인도를 밟아 생긴 잔향. 박동하는 심장. 고양된 호흡. 민감해진 감각은 사소한 일상음마저 전장의 폭격음으로 바꿔버렸다.



통로를 반 지났을 때였다.



“기다려.”



굵은 목소리가 통로 안을 가득 채웠다. 익숙한 목소리는 조용하고 건조한 어조로, 확고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발을 멈추고 뒤돌았다. 터널의 시발점에 히카루가 서있었다. 대로변에서 흘러들어온 빛이 히카루의 몸에 스며들었다. 동공에 머금은 노을은 통로에 가득 찬 어둠을 꿰뚫으며 두 도망자를 포착했다. 굳게 닫힌 입술 끝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나유는 쿠로의 옷 소매를 꽉 부여잡았다. 등에 드리운 그림자 뒤에 숨어 몸을 가렸다. 나유는 히카루가 이미 자신이 하려는 행위를 간파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비록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히카루도 나유가 바라는 미래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쿠로를 붙들은 이유도. 눈썹 밑에 드러낸 호소도. 이 행위가 세상을 거스르기 위해 벌인 일탈이 아니라, 개인이 바라는 바를 위해 나아간 필연이라는 사실조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쿠로는 손을 올려 나유를 가로막으려다가, 몸에 힘을 풀었다.


“나하고 마치까지 휘말릴거야.”


히카루가 말했다.


“미안.”


나유가 답했다.


“그럼 돌아와.”


히카루는 발을 내딛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소리는 끝없이 팽창했다. 나유는 놀라 뒤로 움직였다.



“쿠로.”


히카루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세번째 발소리가 울렸다.


“후회할 일은 하지마. 이제 알잖아?”



쿠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말려버린 타인에게 차마 어떤 말을 해야할 지 고를 수 없었다. 


“미안.”


두 사람은 다시 걸어나갔다.




히카루는 두 사람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히카루는 끝없이 이어진 그림자가 인영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광경을 보고 나서야 터널을 떠났다. 차라리 날카로운 말로 힐난해줬다면, 하고 히카루는 생각했다.






*






나유는 어디갔어? 쿠로는?



…교정 밑이 혼란하다. 히카루는 시계를 봤다. 콘티에서 다룬 장면은 삼십 분 후에 시작한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받치자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내팽개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나약한 속삭임을 머리를 흔들어 지운다.


히카루는 내일 나올 소년 점프에 어떤 내용이 그려져있을지 예상해보았다. 의미 없는 빈 교내가 잔뜩 그려진 페이지. 준비되지 않은 대사들. 조화되지 않은 텍스트. 여러 풍경이 떠올랐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 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의무를 저버린 존재는 사라진 다음 어떻게 되는가. 플롯에 의하여 고정된 엔딩을 마주한 이들은 막을 내린 다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대로 멈춰 독자들에게 잊혀지는가. 아니면 살아나가는가.



히카루는 항상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해왔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어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뿐인가. 주인공인데도 확정된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세상은 히카루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히카루는 자신이 선분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도 사치코도 쿠로도 나유도 다르지 않다. 지워지더라도 다시 찍어낼 수 있는 무언가. 이 정도가 한계다.



히카루는 마지막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다. 문 너머에 마치가 서있다. 마치는 충실하게 콘티를 연기해나간다. 천천히 위 아래로 얼굴을 끄덕인다. 고개를 든다. 난간 위에 팔을 올린다. 이미 마치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다. 히카루는 천천히 마치에게로 다가간다.


잠시 소음이 멈춘다.



…히카루는 옥상을 떠나 계단을 내려간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장소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어둑한 복도는 마치 사형을 집행받으러 가는 길 같다. 공포와 안도가 뒤섞여 혼란스럽다. 히카루는 지쳐 복도에 나앉아 벽에 등을 기댄다. 



사치코는 히카루 옆에 앉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사라지겠지.”


“히카루 씨는 사라지겠죠.”


“그렇지.”


사치코는 어조에 힘을 담는다.


“저는 괜찮았어요. 지금까지 하라는 것도 다 했잖아요. 그런데…”


숨을 고른다.


“당신들은 제멋대로예요. 쿠로 씨도, 나유도, 마치 씨도, 다들 그래요. 왜죠? 왜 멋대로 굴었나요?”


히카루는 눈을 피했다.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다.



“미안했어.”



마치는 계단을 내려와 히카루와 등을 기댄다. 사치코는 부르고 싶은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었다.




사토 히카루. 코이즈미 마치. 나나세 나유. 야나기 쿠로. 계속 반복했다. 사토 히카루. 코이즈미 마치. 나나세 나유. 야나기 쿠로. 히카루. 마치. 나유. 쿠로. 쿠로, 쿠로……





통로를 빠져나온 뒤, 두 소녀는 눈을 뜬다.





“바다다.”



넓은 해안이 쏴아아, 하고 날숨을 내뱉고 있다. 눈송이가 포말 위에 떨어진다. 뒤를 보아도 출구는 없다. 그 대신 침림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존재하지만,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한 발걸음 가까워지면 가로수도 한 발걸음 멀어진다. 이 현상이 무한히 반복된다. 뒤돌아보면 여전히 해안은 눈 앞이다. 제자리 걸음과 다를 바 없다.



나유는 포기하고 모래사장을 밟는다. 재처럼 보이는 모래 위를 걸어가 파도 앞에 선다. 그리고 신발을 벗은 뒤 양말을 아래로 돌돌 말아 신발 안에 넣은 다음, 바다에 맨발을 담근다. 바닷물은 식은 온수처럼 미지근하다. 나유는 쿠로를 본다. 쿠로는 터널이 있던 장소 앞에 그대로 서서, 하늘을 보고 있다. 나유는 그 시선을 따라간다.



밝은 밤하늘이 나타난다. 검푸른 하늘은 유성우가 남긴 궤적으로 가득하다. 떨어진 유성은 자신이 남긴 자취를 따라 역행하여 시야 너머로 사라지고, 다시 추락한다. 아스라이한 은빛 안개가 창공에서 춤추고, 수면은 그 아래에 누워 고요히 잠을 청한다.



나유는 이곳이 사라진 끝에 도달하는 장소인지, 아니면 상실을 기다리는 대기소인지 알지 못한다. 쿠로도 마찬가지다. 모른다. 어쩌면 세상은 두 사람이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고통을 영원히 헤아리도록 하기 위해 이 장소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답을 주지 않는다. 변화할 징조를 보이지 않고 느긋하게 헤엄친다. 일어난 일들이 무한히 반복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쿠로.”


나유는 묻는다.


“나를 원망해?”


쿠로는 답한다.


“…모르겠어.”


나유는 쿠로와 손잡는다. 맥박이 엄지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다.


소녀들은 의아하다. 금 밖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은 분명 찰나인데도, 긴 시간이 흐른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생각보다는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상반되는 두 사실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두 소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확실하게 인지한 사실은 하나 뿐이다.




삶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































중학생 때 적은 단편

이 때부터 여자 둘이 뽀뽀하는 거 좋아했구나 싶더라

네번째 히로인이랑 소재가 겹쳐서 올리기 전에 망설였다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테마가 유사할 뿐 아예 다른 내용이라 걍 몇 부분 고치고 올림

이런 식으로 주요 테마가 겹쳐서 못 올린 습작이 몇 개 더 있다 수녀원에서 고해성사하는 내용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