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이올레 주변을 휘감은 빛이 천천히 밝아졌다가 꺼진 자리에 또다른 세 사람이 나타났다. 세 사람 모두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때려죽일 수 있을 법한 살기를 두르고 있어서, 이올레 또래의 여성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드디어 우리가 손을 쓸 때인가, 성주?”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 당장은 이야기부터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그런가…”


그 모습을 꾸며낸 이올레를 제외하고,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상황에 놀라 잠시나마 멀뚱거렸다. 말하는 태도로 보아 여기서는 이올레가 일행을 데리고 모습을 감출 것처럼 보였으나, 그 예상과는 반대로 앞서 말한 쪽을 실행해서 허를 찌른 것이었다.

물론 이올레 본인은 그런 반응이 나올 것까지 예상하고 말을 꺼낸 것이었기에, 이만하면 다른 이들을 손쉽게 압도해버릴 수 있겠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일단은 자신이 불러낸 용병들에게 하는 말부터였다.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까, 길부터 뚫을까?”

“좋지. 어디로?”

“저쪽?”


이올레는 턱을 가볍게 튕겨, 어느 새 다시 전사들과 기싸움에 들어간 라네비아 쪽을 가리켰다. 라네비아와 주위 전사들이 그 몸짓의 의미를 알아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 무슨 짓을!”

“뭐긴, 아까 했던 말을 지키려는 거지!”


이올레가 맨 앞으로 뛰어가, 라네비아의 시야 오른쪽을 막고 있던 전사를 어깨로 밀쳐냈다. 워낙 갑작스러운 습격이었기에 전사들의 대응이 늦어지는 사이, 이올레네 용병들과 케스티가 라네비아의 옆으로 뛰어들었다. 그 네 명은 라네비아의 뒤에 쓰러져 있는 전사를 무시하고 그대로 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내 머리부터 손끝까지 온몸이 흐릿하게 바랜 모습을 보고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괜찮으세요?”

“그, 그게…”

“설마?”


케스티는 크시아의 발목 아래에 엎어져 있는, 갑옷이 까맣게 그을린 전사를 내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그 전사는 이미 숨이 끊어진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 상태를 보니 라네비아가 굉장히 거친 몸싸움으로 제지하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크시아의 옷매무새가 굉장히 거칠게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니, 어째서 라네비아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케스티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빠르게 한 가지로 좁히고 이올레를 돌아보았다.


“성주, 빨리요!”

“그래!”


라네비아를 둘러싼 전사들이 손을 뻗기도 전에 이올레 일행을 감싼 빛이 먼저 꺼지고, 그와 함께 이올레와 다른 여섯 명의 모습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 무슨…”


-


“후…”


케스티가 용병들을 돌려보낸 뒤 이올레의 부름을 받고 손님용 침실 앞으로 달려가니, 라네비아도 이올레의 옆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얼굴이 차갑게 식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 방 안에는 여기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을 것 같았다.


“설마 그때 정말로 죽은 거예요?”

“그래, 단 한 방에.”


라네비아는 케스티의 물음을 듣고, 거친 숨이 섞인 목소리로 몇 마디 내뱉었다. 모두가 살아서 자리를 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이 머릿속에 다시 맴돌았고, 그게 자신의 손으로 이뤄지고 말았다는 충격이 손에 진동을 가했다.


“정말로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도 사람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더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건 이해해요. 영생자의 진의를 알았건 아니건 간에, 저쪽에서도 그만큼 백방으로 손을 댔을 테니까.”

“그랬겠죠…”


케스티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워들었던 것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는 들었고요?”

“못 알아듣겠던데?”


라네비아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성난 기색을 흘렸다. 영생자에게 기대 권세를 천년만년 누리고 싶을 주교들이 멋대로 손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뒷이야기부터는 라네비아가 알 수 없었기에 이 자리에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나마 자신의 눈앞에 지나간 광경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올레가 그럭저럭 이해해준 덕분에, 케스티가 머릿속에서 사태를 정리하는 수고를 그리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죠? 저쪽에 피해가 생긴 이상, 우리에게 칼을 겨눌 텐데.”

“간단해. 그쪽에서 바라는 대로 해주자고.”

“그쪽이라면 영생자 본인?”

“그렇지.”


라네비아가 이올레 대신 케스티의 두 번째 질문에 답했다. 그러는 라네비아의 눈빛에는 라네비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과 살의가 가득 담겨 있어서, 케스티는 자신도 모르게 한 가지 바보 같은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나저나 말인데요… 어쩌다가 이번 일에 이렇게까지 진심이 된 건가요?”

“무슨 일로 이번 일에 이렇게 마음을 쓰게 됐냐고?”

“네. 좀 갑작스러운 듯해서…”


케스티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잠시 이올레를 돌아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고받기에는 다소 껄끄러운 말이라 이올레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이올레도 그 뜻을 알아채고, 자신은 상관없다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그 덕분에 케스티는 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라네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라네비아도 다른 둘 사이에 오가던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서, 오랜만에 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당신 말 그대로야. 정말 갑작스럽게… 신경을 쓰고 있더라고.”

“신경이라… 그게 전부는 아니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라네비아의 얼굴은 마치 이올레가 케스티와 단둘이 있을 때에만 보여주는 표정처럼 따스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입꼬리는 눈썰미가 안 좋은 사람도 웃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다.


“아무튼, 여기서 신경만 쓰고 있을 순 없으니까 우린 일어나자고.”

“그래야지. 케스티도 준비해줘.”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