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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로니카와 셰인이 15살이 되던 무렵의 한 날에 베로니카는 부왕의 명령으로 인근 귀족의 영지에 시찰을 나가던 중이었다.


  그 날은 사계절을 갖고 있는 제국의 계절들 중에서도 무더운 여름이어서, 나뭇잎은 초록빛으로 생그러웠지만 태양빛이 달구는 땅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와 베로니카도, 셰인도 모두 불쾌감에 잠긴 채로 제국의 가도街道를 가로질러 가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불쾌함 가득한 목소리로 베로니카가 말했다.


"멈추어라."


"예!"


  베로니카의 말 한 마디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히 정지했다.


  베로니카가 마차를 멈춘 곳은 모험가들의 야영지였던 것으로 보이는 어느 한 공터.


"모닥불 흔적이 보이는구나. 이봐, 부관."


"예, 황녀님."


"이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얼마나 걸리지?"


"음…, 대략 하루 정도가 걸릴 것 같사옵니다."


"그럼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테니 여기에서 미리 야영하고 가는 것이 낫겠군. 여봐라!"


  베로니카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야영 준비를 해라. 병사들은 공터에 추가 공간을 확보하고 기사들은 먹을 음식들을 꺼내라. 빨리 움직여라!"


"옙!"


  황녀님의 명령에 병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텐트를 꺼내오고, 냄비를 준비하며, 황녀 전속 마법사는 야영 준비를 위해 장작에 마법으로 불을 붙인다.


  셰인도 그 행렬을 따라 야영 준비를 하러 발을 떼며 앞으로 나가려는 찰나.


"어디 가는 거지, 셰인?"


  황녀의 말 한 마디가 셰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황녀님의 명을 따라 야영을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네가 벌써 기사던가?"


"아닙니다."


"그럼 네가 대 라티느 제국의 병사던가?"


"…아닙니다."


  베로니카는 셰인에게 그런 일을 시킬 생각 따윈 애초부터 추호도 없었다.


"잘 들어라. 너는 장차 나의 전속 호위기사가 될 몸이다."


"예."


"내 팔, 다리, 손가락처럼, 내 수족의 일부가 되어서 날 지키면서, 내 명령을 듣는 가장 처음의 가장 위의 사람이 될 자가 바로 너란 말이다."


"예."


"그런 네가 저런 잡일을 하겠다고? 나의 '셰인'이?"


"…송구했습니다."


  셰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베로니카의 얼굴도 조금 풀렸다.


"알면 됐다. 자리로 돌아가라."


  베로니카는 그리 말하며 마차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예."


  셰인은 그리 대답하며 마차의 문 앞에 섰다.


  베로니카는 가끔 셰인을 저렇게 '나의 셰인'이라고 불렀다.


  다른 귀족 영애나 평민 출생의 평범한 여자 아이가 남자를 저렇게 불렀더라면, 아마 로맨틱하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는 풋풋한 표현 중 일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베로니카에게 한해서, 저런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셰인은 그녀의 것이었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영혼마저 저당잡힌 베로니카의 소유물.


  그럼에도 셰인은 그녀의 저런 표현에서 어딘가 정말 귀족가 여식들이나 사용할 법한 그런 성격으로서의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약간의 이성적인 애정이 담긴 것만 같은….


"무슨 생각을."


  셰인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때였다.


"뭐가 무슨 생각을, 이란 거지?"


  황녀는 자신의 물건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황녀의 물건인 셰인의 행동에도 또한.


"죄송합니다. 불경한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은 이럴 때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뗄 만도 하건만 셰인에겐 그런 것도 없었다.


  황녀님은 나의 주인. 나는 그 분의 것.


  물건이 주인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었으니.


"말해보거라."


"황녀님께서 제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고 계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착각을 한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


  의외로 베로니카는 마차 안에서 잠자코 셰인을 내려다 보기만 했다.


"정말 내가 네게 이성적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치도 않습니다."


  셰인은 곧장 부복하며 말했다.


"요리사가 잘 드는 칼에게 갖는 애정은 남녀 사이에 갖는 애정이 아닙니다. 황녀님께 제가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일어나라. 나는 내 물건에 흙먼지가 묻는 걸 아주 싫어한다."


"예."


  일어난 셰인의 가죽 갑옷은 베로니카의 말처럼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베로니카는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흙먼지가 엉망진창으로 묻어있구나. 더럽기 짝이 없게."


"…송구합니다."


"너를 주워왔던 그 날에도 넌 흙먼지로 엉망진창 더럽게 얼룩져 있었지. 마치 지금처럼."


  베로니카의 핑크빛이 감도는 금발 사이로 황녀의 보석빛 눈이 스산히 빛났다.


"하지만 그 때의 너와 지금의 너가 같더냐?"


"아닙니다."


"나도 그렇다."


"…예?"


  짜악!


"…말대답하지 말 것. 죄송합니다."


  베로니카가 말했다.


"흙먼지가 아주 많구나."


"송구합니다."


"물건을 닦는 일은 물건의 주인이 해야할 일이지."


  베로니카의 손길이 곧 셰인의 몸 구석구석에 닿았다.


  머리부터 갑옷 속까지 베로니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들어와 흙을 파내고 먼지를 쓸었다.


  섬섬옥수가 지나가며 자신의 비부까지 훑어가는 그 기묘한 청소 과정을, 셰인은 미동도 없이 받아내기만 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셰인의 몸을 모두 청소한 베로니카가 말했다.


"다음부턴 함부로 네 몸을 더럽히지 마라. 알겠느냐?"


"예."


"물건이 스스로를 더럽혀 주인을 귀찮게 만들다니, 주인 노릇도 하기 힘들군."


"송구합니다."


"이제 쉬고 싶구나. 마차 안에서 기다릴 동안 밖에서 내 경비를 서도록 해라."


"예."


  그 말을 남기고 베로니카는 마차 안으로 다시 들어가버렸다.


  셰인은 생각했다.


  요리사가 잘 드는 칼에게 가지는 애정은 장인이 자신의 도구에게 가지는 신뢰와 애착의 영역일 뿐, 남녀 간에 인간이 가지게 되는 고차원적인 애정과는 영역이 다른 감정이다.


  그러므로 베로니카가 셰인에게 종종 보여주는 애정도 분명 요리사가 칼에게 갖는 애정처럼, 주인과 도구의 관계일 따름인 일차적인 감정일 것이다.


  헌데 셰인이 알던 대로와는 다르게, 셰인의 말에 반응하는 베로니카의 반응은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를 보는 짝사랑하는 아이처럼….


  철썩!


"또 이런 불경을."


  셰인은 양손으로 자신의 양뺨을 때렸다.


  그리고 병사들과 기사들이 부리나케 야영 준비를 할 동안, 베로니카의 앞에서 보초를 설 준비를 했다.


  야영 준비는 오래 걸리니까, 그 시간 내내 보초를 서야 할 셰인도 나름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


  셰인은 아까 전의 상황을 생각했다.


  요리사가 칼에게 갖는 애착은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다. 익숙함과 편리함의 영역.


  하지만,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하지만….


  정말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요리사가 칼에 이성적인 감정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멍청하긴."


  그 때 마차 안에서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요리사가 아니다. 너 역시 칼이 아니고."


  조금 토라진 것 같은,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특이한 감정을 실은 목소리로.


"제국의 황녀인 나와 그런 황녀의 물건인 너를, 이상한 하잘것 없는 예시에 빗대지 말아라. 알겠느냐?"


"…예."


  그것은 약하긴 했으나, 분명 '서운함'이었다.





  셰인이 대련에서 이긴 다음날은 제국의 제2황녀가 대외적으로 발표할 것이 있다 하여, 장성한 황녀가 제국민들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최초의 날이었다.


  제국의 사람들은 온통 황녀의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드디어 제국의 늦둥이께서 할 얘기가 생기셨다는 모양이더군! 아기 모습이실 때 황제께서 안고 계시던 모습이 선한데."


"예끼, 이 사람아. 이젠 그 분도 나이가 열일곱이실세."


"벌써 세월이 그리 됐나? 허참, 정말 빠르군."


"우리야 이곳에서 보초 서기만 하는 게 일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그래."


  그건 제국의 국경에서 보초를 서는 경비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국경을 모조리 둘러싼 거대한 방벽.


  먼 옛날 여섯 나라의 연합 침공을 이 벽 너머에도 모두 막아냈다 하여 '여섯 나라 방벽'이라고도 불리는 이 방벽은 라티느 제국민들의 자부심의 상징이자 라티느 제국이 가진 강력한 국방력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서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두 명의 병사는, 오늘도 여섯 나라 방벽의 보초를 서는 라티느 제국의 보초병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보초를 서는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군."


"하긴, 그렇긴 하지."


  보초병 하나가 성벽에 몸을 기대며 픽 웃었다.


"근 100년 간 다른 나라에서 우리 나라를 침공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보초를 설 이유라도 있나?"


"그러니까. 우리가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거지만, 윗사람들도 괜한 병력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건가?"


  그 말대로였다.


  전란의 시대가 지나더라도 대륙 곳곳에선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토를 빼앗거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일어나는 그 모든 전쟁들은 여전히 대륙의 어딘가를 전란의 겁화로 불태우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라티느 제국만은 그것에서 예외였다.


"그 이유를 아느냐?"


"예…, 옛? 허헉!"


  그 때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


  무심코 뒤를 돌아본 두 보초병은 목소리의 주인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렷 자세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커트베인 장군님!"


"어허, 누가 그냥 '장군님'이라 부르나? 직책명을 안 부르는 거 보니 이거 병사 교육을 시킨 기사에게 찾아가봐야 하나?"


"…제국 국경 방위 제2사령관님!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제국 국경 방위 제2사령관 당사자, 커트베인 장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병사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핫, 농담일세, 농담. 이미 힘겹게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 힘을 빼려고 어떤 장군이 그런 짓을 하겠나?"


  병사들은 멋쩍게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


"당, 당연하지요, 하하…."


  경직된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커트베인 장군은 혀를 쯧쯧 찼다.


"나 때는 상사가 이런 농담을 하면 재치있게 받아치던 녀석도 있었는데, 요즘 녀석들은 놀리는 재미도 없구만. 쯧쯧."


"죄, 죄송합니다!"


"별 이상한 것까지 다 죄송하구만 그래. 이런 건 죄송할 필요가 없네."


  그리 말하곤 커트베인 장군은 표정을 굳혔다.


"죄송해야 할 것은, 대 라티느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자네들이 아까 투덜거렸던 투정의 내용이어야 할 테지. 안 그런가?"


"…옙!"


"잘 들어라."


  좀 전의 가볍고 유쾌하던 기색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그 자리를 장군의 정돈되고 무겁게 내려앉은 위엄이 차지해 공기를 짓눌렀다.


"우리는 제국의 가장 두꺼운 갑옷이자 가장 앞에 나서는 방패다."


"옙!"


"우리가 있기에, 감히 다른 나라가 우리 라티느 제국을 침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옙!"


"우리가 있기에, 제도帝都의 국민들이 안심하고 밤에 잠을 청할 수 있다."


"옙!"


"스스로 이 자리에 나서는 것을 자랑스러워 해도 모자랄 텐데 그런 치기 어린 불평을 한 것은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다. 맞느냐?"


"…옙!"


  병사들의 군기가 바짝 든 대답을 들은 커트베인 장군은, 그 때가 되어서야 굳은 얼굴을 풀며 싱긋 웃었다.


"허나 이번만은 봐주도록 하마. 내 너희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감사합니다!"


  십년을 감수한 병사들은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도 그러니, 이번엔 대충 완전군장한 채로 연병장 다섯 바퀴 정도만 돌도록 할까?"


"…사, 사령관님. 그것만큼은 제발!"


  제국의 연병장은 제국의 국방력만큼이나 아주 넓은 것으로 유명했다.


"어허, 지금 말실수를 해놓고도 그 책임을 지지는 못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결국 두 병사는 울상을 지은 채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커트베인 장군은 껄껄 웃으며 두 병사의 등을 쳐주었다.


"하하하하, 이것도 농담일세.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 생각해서 부디 말조심하길 바라지. 좀만 더 있으면 다음 교대 병사들이 올 테니, 그 때까지 조금만 더 참길 바라겠네. 알겠지?"


"옙!"


  그렇게 병사들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대답하자, 커트베인 장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벽을 내려갔다.


"…."


  흘깃흘깃, 곁눈질로 커트베인 장군이 성벽을 내려간 걸 확인한 병사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보냈다.


"후우우, 진짜 죽는 줄 알았군."


"그러게 말일세. 커트베인 장군님이라 다행이지 다른 기사님이었으면 그 기사님 벌을 받느니 차라리 보초를 서게 해달라고 애걸복걸 했을 것이야."


  병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샤레느 기사님 같은 사람에게 걸리기만 했어도…, 윽!"


"이 사람아, 상상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 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죽을 것 같아."


"나도 그렇다네."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병사들은 잠시 뒤 다시 껄껄대며 보초를 서기 시작했다.


  방벽 너머의 평원은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다.


  지금껏 100년 간 그러했듯이.


  그 무렵이었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의 눈에, 자그마한 일련의 병단이 점점 커져오던 것은.


"…저게 뭐냐, 대체?"


"잠깐. 저 깃발은…."


  라티느 제국의 여섯 나라 방벽을 향해 망설임 없이 전진하는 의문의 군단.


  그 군단의 위로 자랑스레 나부끼는 군단의 깃발은, 라티느 제국이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체불명의 새로운 인장이 새겨진 깃발이었다.


  인장의 모양이 이 보초를 서던 병사들에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지만.


  두 병사 중 한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말이 씨가 된다더니."


"100년씩이나 안 쳐들어온다지 않았었나, 자네?"


"근데 그게 지금 깨져버렸잖나."


  병사들은 소리쳤다.


"적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