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 눈에 비친건 꽤 큰 파티 연회장의 풍경이었다.


아까 그 고깃집이 꽤 크긴 했지만, 이정도로 큰 연회장이 있을 정도의 공간은 없었던거 같은데.


엘리베이터에서 조심히 내렸다. 


양덕 선배는 계속해서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이제 놓으셔도 괜찮아요 선배"


"안돼요."


"그래도 그 부끄럽지않아요..? 남녀가 이렇게 손붙잡고 있으면.."


"후배님은 내가 싫어요?"


"...잡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선배와 잡담을 하고있을 때, 엘레베이터 근처에 있던 남녀그룹이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다 이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중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너도 얀중다녔어?"


"어? 아.. 응."


내 목소리를 들은 남녀그룹의 여자들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남자들은 모두 얀덕선배 주변에 몰려들었다.


나와 얀덕선배는 인파에 쏠려 서로 떨어지게됐다.


"얀중 다녔었어?! 난 왜 너가 기억이 안나냐. 너같은 애 있는 줄 알았으면 바로 채갔을텐데."


"아니 애는 갑자기 뭐라는거야."


"옆에 있던 애는 여자친구야? 여동생같이 보이던데."


"여동생을 누가 동창회에 데려오냐"


방금까지는 조용했던 여자들이 내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가리고 수줍은 척 웃고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속에서 난 얀덕선배를 눈으로 쫒았다.


어느샌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있다.


음.. 얀덕선배 정도면 충분히 저럴만하지. 오히려 지금까지 저런 대우를 받지 않은게 이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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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주변 여자들의 향수냄새가 코를 찌른다.


대학교에서 충분히 적응했다 생각했지만 아직도 여자들은 거북하다.


"오올.. 몸 좋은데."


"그 머리는 어디서 한거야? 잘 어울리네"


여자들이 갑자기 내 팔뚝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동창회라고 해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만져도 되는건가.


"그보다 너 이름이 뭐야? 내가 얀중애들 다 기억하니까 말해주면 알거같은데"


긴머리를 한 여자애가 질문했다.


이 여자애는 분명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올게왔다.


내가 여기서 내 이름을 말하면 분명 분위기는 싸해지겠지.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다.


이런 분위기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


빨리 내가 누군지 말하고 얀덕선배랑 여기서 빠져나가야한다.


"나 얀붕이야. 너랑 같은 반에 있었잖아."


"어..?"


내 주변 여자애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중 몇명은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혼란스러웠는지 "왜?" "뭔일이야?" 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 눈을 질끔감았다.


이제부터 들려올 반응이 조금 무서웠다.


다른 반 애를 미친듯이 구타했다 그리고 왕따를 당했었다.


분명 그 혐오스런 시선으로 날 보겠지.


모두가 날 욕하겠지.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철없던 그 때의 흑역사를 받아들이자.


지금의 나라면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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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이 적막한 분위기는 누군가의 한마디로 깨졌다.


"너 얀붕이라고? 그 일진새끼 팼던 애?"


조금씩 조금씩 다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누군가는 웃기 시작했다.


"아 애가 개야? 난 속이 후련했는데"


"우리 얀붕이 언제 이렇게 훈남이 됐어?"


"전학 가지말지 그랬어 아쉽게시리."


"우리 얀붕이 이리와 누나가 안아줄게"


"애는 아까부터 왜 이래!"


뭐야.


뭐야 이게.


예상외의 반응에 난 당황했다.


그 누구도 날 혐오스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날 욕하지 않았다.


왜?


너희들도 날 왕따시켰잖아.


아니.. 생각해보면 날 왕따시킨건 일진그룹 놈들이었다.


우리반 애들은 그걸 방관할 뿐이었다.


그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방관이 곧 동조니까, 똑같은 걸까.


내가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한건 알고있다.


질투에 미쳐 누군가를 미친듯이 구타했다.


지금 주변의 반응은 이미 그 모든걸 잊은듯했다.


그냥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라며 묻어가는듯 했다.


난 속으로 안심하면서도 조금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되는 편이 더 낫겠지.


"얀붕이~ 여자친구는 있는감?"


"아니.. 없는데."


여자들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티를 냈다.


"대학은 어디다녀?"


"나.. 그 얀대.."


"오올 우리 얀붕이 머리가 그렇게 좋았어?"


"그러고보니 애 중학교땐 맨날 3등안에는 들지않았냐"


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동창회에 오는건 두 부류라고 했지만 사실 세부류가 아닐까하고.


돈자랑을 하러 온 놈.


돈 꿀 데가 없어서 나오는 놈.


연애하러 온 놈.


질문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여자들이 좀 더 나에게 가까이 붙기 시작했다.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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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붙잡고 팔짱을 꼈다.


"얀덕선배?"


"애들아 잠깐만 길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우리 아직 아무것도 못먹어서 출출하거든"


얀덕선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들이 나에게서 조금씩 떨어졌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돌아갔다.


누군가는 "아까 여친없다 하지 않았나" 라며 중얼거렸다.


얀덕선배 멋있잖아.. 믿고 있었다구.. 젠장..


얀덕선배는 내 팔을 붙잡고 인파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우린 구석진 자리에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선배 고마워요."



"우리 후배님 여자한테 많이 약하네..?"




얀덕선배가 소름돋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귀여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눈.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좋았어요..? 그렇게 여자들이 몰려드니까? 하긴, 당연한가.. 우리 후배님 많이 멋있어졌으니까."


난 침착하게 최대한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선배님이야 말로 남자들 사이에서 기분 좋으셨나봐요"


선배님이 테이블아래에서 나의 다리를 걷어찼다.


"윽.."


"농담이라도 그런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난 후배님 밖에 없으니까."


진짜 무서워 이사람..


*


"그럼 같이 음식을 좀 가지러 갈까요? 후배님."


나와 얀덕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있는곳으로 다가가자 얀덕선배가 다시 나의 팔을 붙잡고 팔짱을 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니까요."


"또 그때처럼 여자들 속에서 있고싶나요오..? 후배님..?"


"선배님의 깊은 배려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


음식을 가지러 가면 중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들의 반응도 아까와 비슷했다.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대학 어디 갔냐고 묻거나,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묻거나...


다들 중학교 때의 날 잊은 듯 그저 친구처럼 말을 걸었다.


이제 어느정도 적응했다.


난 어차피 한번보고 안볼사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은 내게 다가와 조금씩 대시를 하듯 말을 걸었고


남자들은 인맥을 위해서 나에게 전화번호를 묻거나 카톡교환을 하려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자가 접근하는건 심기가 거슬렸는지 얀덕선배가 여자들이 접근할 때 마다 나를 그 무서운 눈으로 째려봤다.


그렇게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과 거의 한번씩은 인사를 한거같다.

 

사실 난 다른 사람과 애기를 하거나 걸어다니는 중에도 시선을 돌리며 얀진이를 찾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동창회에 안온건가.


‘바빠서 못왔을거야…’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올 이유가 없잖아 이러면..'








*


나와 얀덕선배는 음식을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으음~ 맛있네요!"


얀덕선배가 옴뇸뇸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람쥐 같아서 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후배님? 갑자기 왜 웃어요."


"아니 그냥 귀여워서요."


"우물..우물.. 그렇게 칭찬해도 하나도 안기쁘다구요..헤헤."


얀덕선배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거 먹고 슬슬 돌아갈까요."


여기 온 이유가 사라졌으니 난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가는길에 호텔이라도 들릴래요?"


"또 농담을.."


"장난아니고 진심으로 말하는거예요."


얀덕선배의 표정이 변했다.


이건 진심이다.


"그런건 사귀고 나서 해야되는건데."


"사귀면 되죠."


"아니 그게.."


외통수다.


저 목소리로 말하는 선배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나라고 싫은건 아니다.


이런 미인이 나에게 계속 대시하고 사귀자고 고백하는데 어떻게 싫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마음이 정리가 안됐으니까.


그렇게 내가 곤란해하며 말을 더듬을 때 누군가 얀덕선배의 뒤에서 걸어왔다.


"...얀붕이..?"







*


갈색의 긴 생머리를 찰랑이던 미인이 내게로 다가왔다.


얀덕선배가 귀여우면서도 성숙한 몸매를 가진 반전매력이 있다면


이 사람은 뭔가 밝은 분위기가 슬림한 몸매에 어우러져 어딘가 귀여운 인상을 남겼다


그 모습은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어딘가 낯이익다.


조금 변한 것 같아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누군가와... 닮은듯한..


... 얀순이.


얀순이다.


.. 나의 어릴적 첫사랑의 얼굴을 잊을리가 없다.


모든걸 다 줄 수 있을만큼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


.. 그리고 나에게 첫사랑은 절대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줬던 장본인.


얀순이는 나에게 다가와 내 볼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너 얀붕이지? 얀붕이구나! 얀붕이였네 응!"


"나 얀순이야. 기억해? 너랑 소꿉친구였잖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


"... 안녕. 얀순아."


난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으읏.. 응... 안녕."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올랐다.


"후배님..? 이 여자는 누구죠?"


선배님이


"중학교 동창이고 어릴적 소꿉친구였습니다"


"설마 이 여자가 그 때 말했던 그 사람인가요..?"


"네.."


얀덕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귀에대고 속삭였다.


"하아.. 후배님. 자리 만들어 드릴테니 깔끔히 정리해줘요"


"... 깔끔히 못하면 나 미쳐서 무슨짓을 할지 몰라요." 


"..네?"


그렇게 얀덕선배는 자리를 떠났다.


*



얀덕선배가 떠나자마자 얀순이가 내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난 얀순이를 피해서 얀순이의 반대편에 앉았다.


얀순이는 쓴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 요즘 잘 지내?"


그 한마디. 


그 한마디가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왠지 모를 역함이 느껴졌다.


뭔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도 왠지는 모르겠다.


정말 내 자신을 하나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얀순이도 내가 중학교 때 벌인짓 때문에 상처받았겠지.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이랑 똑같은 기분이었을거다.


그도 그럴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구타했으니 당연하다.


.. 그래 이제 모두 정리하자.


내 생각. 마음 모두.


"나야 잘 지내지. 얀순이 너도 잘 지내는거 같아서 다행이네"


난 아까와는 반대로 웃으며 대답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배운 억지웃음.


이젠 꽤나 능숙해졌다고 자신할 수 있다.


얀순이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어딘가 기쁜듯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얀순이의 미소를 보니 다시 그 일진새끼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아라. 모든 감정을 억눌러라.


"그.. 너가 싫으면 대답 안해줘도 되는데.. 방금 그 여자분은 누구셔?"


얀순이가 우물쭈물하며 질문했다.


"중학교 때 알던 선배야."


"여자친구는 아니지..?"


"그냥 친한선배야."


얀순이가 기쁜듯이 활짝 웃었다.


저 웃음을 보고 점점 가슴이 미어진다.


계속해서 그 일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제 다 과거야.  이제 모두 정리해야돼.


적당히 말 맞추고 중학교 때 일은 미안했다고 사과하면 된다.


그리고 자리를 뜨자.


그것뿐이다.





*

[얀순이 시점]


신경써서 꾸미느라 동창회에 조금 늦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주변이 꽤 시끄러웠다.


주위를 둘러보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중학교 때 친했던 일진그룹 여자애들이었다.


... 역겹다.


친한듯이 내게 말을 거는게 역겹다.


얀붕이를 왕따시키면서 나도 왕따 시킨 장본인들이다.


아무일도 없던 듯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그 모습에 속에서 토가 쏠려왔다.


오늘 오기도 싫었던 중학교 동창회에 온건 너희같은 걸레들을 만나러 온게 아니야.


얀붕이를 찾아서 얘기하고, 사과하고, 그리고... 얘기가 잘 되면.. 마음을 고백하고..


그걸 위해 온거야.




*

난 중학교 때 이후로 얀붕이만을 생각했다.


무엇을 하든 얀붕이가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얀붕이는 나에게 엄청나게 잘해줬었지.


난.. 왜그랬을까.


솔직하게 얀붕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면 됐는데.


내가 중학교 시절 얀붕이에게 느꼈던 건 열등감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모든 잘하는 얀붕이에게 난 동경하고 사랑을 느낀거다.


내가 외로워 할 때 마다 내게와서 마음을 채워줬던 얀붕이가... 좋았던거다.


지금 만난다면 모든 걸 말할거야.


사실 좋아했던건 너였다고 그 양아치같던 일진새끼가 아니라고.


"얀순아! 너 그 때 그 범생이새끼 기억나?"


"어..? 범생이?"


"얀붕이말야. 개 오늘 동창회 왔었다?."


얀붕이가.. 왔구나! 


역시 왔었어!


날 만나러 와준걸까?


나에게 아직 호감이 있는건가?


그렇게 자기를 심하게 대했던 나에게 아직도 사랑을 해주는걸까?


그랬으면 좋겠다..헤헤.


시간이 지나면서 날 용서해 준걸까?


참을 수 없어 한시라도 빨리 얀붕이를 만나고 싶어.


"애들아 얀붕이 지금 어디있어?"





*


왼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 


'아 저긴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니 얀붕이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앉아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얀붕이가 맞았다.


저 얼굴을 내가 잊을리가 없다.


난 얀붕이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얀붕이구나'


'얀붕이야'


'날 보러 와줬구나'


'아직 나에게 마음이 있는거구나'


'얀붕아...'


'얀붕아...!'


난 나도 모르게 얀붕이의 양볼을 두손으로 만지작 거렸다.


이 감촉도 그때랑 똑같다. 


"너 얀붕이지? 얀붕이구나! 얀붕이였네 응!"


얀붕이가 당황하며 날 바라봤다.


"나 얀순이야. 기억해? 너랑 소꿉친구였잖아."


얀붕이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 안녕. 얀순아."


얀붕이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놀란 난 두손을 황급히 뗐다.


난 그때 깨달았다.


얀붕이는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걸.


"으읏.. 응... 안녕."


난 힘겹게 대답했다.


얀붕이와 옆에 앉은 여자가 서로 얘기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얀붕이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자리를 떠났다.





*


난 얀붕이의 바로 옆에 앉았다.


그런 날 피해 얀붕이는 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얀붕이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싶다.


그러니 포기하면 안돼.


일단 조금씩 얘기를 해보자


"그.. 요즘 잘 지내?"


"잘 지내지. 얀순이 너도 잘 지내는거 같아서 다행이네"


얀붕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 미소.. 어렸을 때는 항상 내게 지어줬는데.


난 왜 거부한걸까.. 이렇게 상냥한 얀붕이를.


그래도 지금 웃어줬다는건.. 날 조금이라도 용서해준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기세로 그걸 물어보자.


아까부터 계속해서 마음속에 남아있던 궁금증.


아까 그 여자에 대해서.


"그.. 너가 싫으면 대답 안해줘도 되는데.. 방금 그 여자분은 누구셔?"


"중학교 때 알던 선배야."


"여자친구는 아니지..?"


"그냥 친한선배야."


내 입꼬리는 멈출 수 없는 기세로 올라갔다.


이러면 안되는데.. 너무 기뻐.


아직 여친이 없구나 헤헤.


그럼 이제 슬슬 말하자.


이 4년동안 하고싶었던 말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응어리치는 생각들.


모두 전하자.


"저기 얀붕아.. 아직도 날 미워하고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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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내가 왜 미워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역시 얀붕이는 날 용서해준거구나 아까 보였던 차가운 태도는 그 여자 앞이라 그런거야.


으응. 역시 얀붕이는 상냥해.


지금까지 걱정했던 내가 바보같아.


"그..그러면..."


"너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때린 날 용서하기 힘들겠지."


어...?


얀붕이가.. 방금 뭐라고 한거지.


"난 오만했었어. 널 위해 운동도 공부도 모두 성과를 이뤄서 너에게 걸맞은 남자가 됐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 때는 틀림없이 네가 날 좋아해 줄 줄 알았어."


얀붕아..?


"널 곤란하게 해서 미안했고, 너의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해서 미안했어. 그 땐.. 질투심에 미쳐서 그랬었어."


아니야 얀붕아.. 내가 사랑하는건.. 그 새끼가 아니야.


"나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서 헤어진 거지? 그것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머리가 이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혼란스럽다.


얀붕이는 내가 진짜 그 새끼를 좋아하는 줄 아는건가.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얀순아, 나 사실 여기온건 과거의 일을 모두 정리하려 온거야." 


"여태까지 너의 마음도 모르고 널 괴롭혀서 미안했어."


"어..어..아니.. 어어?"


"널 좋아했었어 얀순아. 이젠 널 괴롭게 하지 않을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얀붕아.. 그만해 제발.. 그만해..


나 그때 진심이 아니었어.


그때는 내가 어떻게 됐었나봐..


뭔가 말해야 되는데.. 왜 내 입은 움직이지 않는걸까..




















*

[얀붕이 시점]


모든 걸 말했다.


속이 시원하다.


얀순이에게 솔직하게 사과했다.


내 마음을 모두 말했다.


얀순이가 동창회에 올 줄은 몰랐지만 와줘서 다행이다.


이제 모두 정리했어.


이제 자리를 떠나자.


얀진이를 찾자.


"잘 지내 얀순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얀순이가 내 손을 붙잡았다.


"기다려!"


".. 이거 놔줘. 이제 너랑 만날 일 없으니까.. 사과도 했잖아."


"아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얀순이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순간 얀순이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어? 너 김얀순 아니냐?"


...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우리 앞에 나타나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오랜만이네 얀순아. 잘 지냈냐?"


그 남자가 누군지 난 한눈에 알아봤다.


잊을리가 없지 저 얼굴을.


얀순이의 전남친이었던 일진새끼다.


"이새끼는 누구냐? 새 남친?"


이 남자는.. 달라진게 없는 듯 보였다.


양아치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 껄렁한 말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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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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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웃으며 그 일진새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잘 지내나 보네.  반갑다. 나 기억나?"


"난 너같은 새끼 기억안나는데.. 뭔데 친한척이냐?"


"동창회에 왔으니 니 중학교 동창이겠지. 빡대가리새끼. 하하."


"말하는 꼬라지봐라 뒤지고싶냐?"


"나 얀붕이인데 기억안나?"


그 말을 듣고 일진새끼는 내 멱살을 잡았다.


"얀붕이? 병신같은 새끼가 여긴 왜 왔어"


"이건 좀 놓지? 맞다이 까면 쳐발리는 새끼가."


일진새끼는 그렇게 한참 내 멱살을 잡고있다가


이내 손을 놓았다.


"하.. 지금와서 너랑 맞다이까봐야 뭐하냐.."


난 확신한다.


이 양아치새끼. 쫄았다.


애초에 나와 이새끼의 체급차이에서 말은 다했다.


173도 안되는 키, 작은 몹집, 중학교 때와 다를게 없었다.


빽만 믿고 시비거는 양아치. 


그게 이 일진새끼다.


난 일진새끼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우리 여기 싸우러온거 아니잖아."


일진새끼가 대놓고 빡친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냥 너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 그 때 때려서 미안했다."


그리고 난 일진새끼의 다리에 조인트를 깠다.


"그리고 이건 왕따시절 빚이다. 안아프게 깠으니까 달게 받아 새끼야."


"아윽!"


일진새끼가 아픈듯이 다리를 잡았다.

.

.

.

.

.


자리를 슬슬 뜨려고 하던 찰나 일진새끼가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얀순이 좋아하냐?"


"이미 마음 다 접었다."


"다행이네, 이년 처음은 나였거든.... 꼽냐?"


"야 얀순아. 그 때처럼 한번만 더 대주라!"








*

[얀순이 시점]


이 개새끼가.. 방금 뭐라고 한거지?


얀붕이한테.. 뭘 말한거야?


아니야.. 얀붕아.. 아니야..


나.. 그런게 아닌데..


얀붕이의 얼굴이 굳었다.


아까까진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일진새끼를 상대하던 얀붕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다 이내 쓴 웃음을 지었다.


난 내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그 때처럼 얀붕이를 그냥 보내면 안된다.


그 때처럼 얀붕이가 날 또 떠나가면.. 안돼


난 얀붕이에게 달려갔다.


"얀붕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니까! 아니라니까!"


난 어휘력을 잃고 아니라는 말만을 계속해서 외쳤다.


얀붕이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얀순아. 커플상봉 방해해서 미안했다."


아..아아..


으아..아으으으..아..


아니야..아니야..아니라고.. 그만해.. 이제 그만해..


커플이 아니야.. 사랑한적도 없어.


키스조차 안했어.


처녀도 지켰어.


저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니까. 


믿지마 얀붕아..


나를 봐줘..


얀붕이가 일진새끼의 북부를 찼다.


"그리고 이건 쓰레기를 위한 선물이다."





*

[얀붕이시점]


... 그렇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다 주고.


사랑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 이제 이 일은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


그래도 가기전에.. 이 좆같은 기분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다리를 붇잡고 아픈듯이 끙끙거리는 일진새끼의 북부를 발로찼다.


저건 쓰레기다. 


‘어떻게 본인 앞에서 저런말을 할수가 있는거지..’


바닥에 드러누운 일진새끼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얀순이가 나를 향해 달려온거 같지만 일진새끼 주위에 모여든 인파때문에 중간부터 모습이 안보였다.


결국은.. 그 때랑 똑같다.


마음이 아프다.


울것같다.


그래도 한번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젠 다 끝났다.


이젠 완전히 끝났다.


중학교 때와 똑같은 선택을 했지만 그때와는 달리 속이 후련했다.





*

난 건물 밖으로 나갔다.


휴대폰을 꺼내 얀덕선배에게 전화했다.


몇번의 수신음이 들리고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얀덕선배?"


"흐앗..! 제가.."


"언제부터 저의 여보가 됬냐고요? 이미 전에 들었으니까 다음엔 다른 걸 준비해주세요"


"..기분이 안좋아보이네요. 후배님."


"기분은 괜찮아요. 오히려 속이 후련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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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지마요. 후배님."


어..? 나 울고있었나.


그렇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네.


목이 메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흐느끼며 울고있었다.


"흐윽..흐윽.."


"후배님 왜울어.. 후배님 울면.. 나도 울고싶어지잖아요.. 흐윽..히끅.."


"선배가..흐윽 왜 울어요..흐윽"


난 그렇게 짧은시간 동안 선배님과 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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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이..히끅 됐나요..? 후배..히끅..님"


"선배님이 저보다 더 우셨으면서.."


"그렇..네요.."


"결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못만났어요."


"그런가요? 그건 아쉽네요."


“전혀 아쉽다는 목소리가 아닌데..”


“넘어가요. 후후..”


"지금 어디계세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전 지금 역 앞 던킨도너츠에서 도넛을 먹고있답니다!"


"제가 그 쪽으로 갈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후배님 도넛도 사줄테니까 빨리와요!"


전화를 끊고 역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일진새끼가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리에서 맴돌지만, 얀덕선배랑 같이 울어서 그런지 '그냥 될대로 되라'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얀순이는 잊었다.


‘다시 좋아했던 사람이랑 만났으니 서로 꽁냥대며 놀겠지 뭐.’


그렇게 걸어가면서 난 던킨도너츠 앞에 도착했다.


거울사이로 얀덕선배가 보인다.


그리고 


얀덕선배 옆에.. 누군가 앉아있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멍하니 넋놓고 보게 만드는 청초한 분위기.


저 분위기를, 저 얼굴을 난 기억하고 있다.


저 여자애는..


"얀진이..?






















그..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거 쓰면서 얀붕이한테 감정이입 너무해서 얀순이 처녀로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은 비처녀인줄 알겠지만.


1편에 써놨던 비처녀 경고 지워야겠군요.


p.s 이번편 쓰는게 너무 재밌어서 평소의 2배 분량 써버렸습니다. 기분이 엄청 상쾌합니다.

p.s 이게 이렇게 장편이 될줄 몰랐습니다.

p.s 현재까지는 얀순이 얀데레 각성, 얀덕이 초기증상, 얀진이 ??? 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