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수업 중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질 때, 하필 그때가 정말 무서운 선생님일 때, 나는 턱을 손으로 괴며 책 쪽에 시선을 숙이는 걸 선호한다. 반대 손은 샤프를 꼭 쥐고 마치 필기하는 것처럼 조금씩 움직여주면 아주 좋다. 그러면 조는 게 아니라 마치 필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

 

쿵!

 

굉음이 울리며 나는 책상에 턱을 박은 충격도 잊은 채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손이 미끄러진 것일까, 그것보다 칠판에 내용을 요약해 적고 있던 선생님은 어느새 내 옆에서 악마 같은 얼굴로 날 내려보고 있었다.

 

"김얀붕."

"... 넵."

"내가 방금까지 읽던 부분 이어서 읽어 봐."

 

황급히 교과서를 이리저리 살피며 소설이든 시든 찾으려 했으나 도통 보이질 않았다. 그야 당연히 내가 졸고 있었던 때는 문제를 푸는 쪽이었으니까. 어지간히도 열심히 필기하는 척을 했는 지 빈 칸에 정말로 지렁이가 십여 마리는 기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걸 발견하고는 반 애들이 모두 다 들리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치고 교무실로 따라 와."

"... 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의 뒤를 따라 교무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말이 없으셔서, 진짜 좆됐다는 걸 실감한 나는 답답한 속을 주체 못하여 이리저리 얼굴을 비틀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교무실에 도착한 선생님은 자기 자리에 앉으셔서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학생들을 자주 훈계한다는 걸 증명하듯 그의 책상엔 반성문이 책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야, 솔직히 너네가 이깟 종이 좀 쓴다고 반성을 제대로 하기는 하냐?"

 

선생님은 그 반성문 한 장을 흔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내 수업이 듣기 싫어서 자지는 않았을 거 아냐. 어제 뭐 하다 늦게 잤어?"

"... 그냥 게임하다 늦게 잤어요."

"뭐? 게임?"

 

순간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들고 있던 반성문을 둘둘 말아 내 머리를 몇 번 내리쳤다. 피하거나 막으면 더욱 뭐라 하실 게 뻔하기에 고개를 푹 숙이며 고통을 감내했다.

 

"야, 너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야. 바로 내년에 수능인데 밤 늦게 잠도 안 자고 게임하면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어?"

 

선생님은 잔뜩 흥분한 듯 씩씩 대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죄송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니 선생님도 어느 정도 진정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부모님 전화번호 불러."

"...."

"야, 귀 먹었냐? 부모님 전화번호 부르라고."

 

마치 때릴 듯 위협하려고 하자 순간 움찔한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기, 부모님은...."

 

그러자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선생님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헛기침을 하며 잔뜩 누그러진 기세로 말한다.

 

"그럼 다른 보호자는 없는 거냐?"

"누나가 있긴 한데, 아시다시피 조금 장애를 앓고 있어서...."

"... 아, 그랬지, 참. 그, 저기, 뭐냐. 미안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회피한다. 잠깐 동안 무거운 분위기가 깔린다.

 

"... 너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힘들고 어려울 때일 수록 정신을 차려야 요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네...."

"됐다, 너도 지금 마음 고생이 심할 텐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잠깐 게임에 빠질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그게 길어지면 결국 현실 도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조심할게요."

"그... 알았어, 가 봐. 다음부터 가급적 수업 시간에 졸지 않도록 조심하고. 정말로 졸음이 쏟아져서 조는 건 선생님들이 대부분 이해하는데, 자려고 꼼수부리는 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혼냈을 거다. 너는 그게 먹힐 거라 생각했겠지만 교탁에 서면 그게 꼼수인지 아닌지 다 보여."

"죄송해요."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교실문을 나섰다. 문 너머로 "혹시라도 힘든 일 있으면 상담하러 오고!"라고 외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랄, 너 같으면 틈만 나면 윽박지르는 사람한테 상담 받고 싶겠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씹어 삼키며 교실로 돌아왔다. 정말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더 개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겼다. 전에는 같이 가자던 친구 몇은 나를 외면하고 자기들끼리 폰 화면을 공유하며 게임 얘기로 한창이었다. 내 좆같은 상황을 숨겼다가 나중에 동정을 받는 게 싫어 곧바로 알렸지만 그건 그 시기를 앞당길 뿐이었다. 잠깐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던 그들은 점점 거리를 벌리더니 이젠 그냥 친구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원망하는 건 아니다. 한 번 있는 학창 시절, 불우한 아이의 눈치를 봐 가면서까지 지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도 누나를 보살펴야 하는 이상 괜히 친구들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보다 집안 일에 더욱 신경쓰는 편이 마음 놓인다.

집에 들어가기 전 마트를 들러 간단한 식재료를 샀다. 도중 누나가 좋아하는 과자들이 보여 몇 개 챙겼다. 그러고 돌아와서 도어락을 여는데, 집안에서부터 무언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멈칫하고는 열었다.

 

"얀붕아!"

 

예상대로 문 앞까지 뛰어와 기다리고 있던 누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내 품에 뛰어들었다. 순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문을 닫는다. 위험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는 내 품 안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비비고 있었다.

 

"누나, 안기는 건 좋은데 나 지금 짐 들고 있으니까 잠깐 놔 줘."

 

그러며 머리를 조금 밀어내자 누나는 충격을 받은 듯 올려다 보다가 글썽이기 시작한다.

 

"... 나 싫어진 거야?"

"아니, 싫어진 게 아니라! 짐 정리를 해야 돼서... 아, 여기 누나가 좋아하는 과자 있거든? 잠깐 이거 먹으면서 기다려 줄래?"

 

과자,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걸 꺼내서 흔들자 "와- 먹을래!" 하고 팔을 뻗는다. 신기한 걸 보는 듯 감탄하며 과자 봉지를 보던 누나는 빙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얀붕이는 안 먹어?"

"난 배불러. 그보다 누나는 내가 차려놓고 간 거 제대로 점심에 먹었지?"

"...."

 

방금까지 어떻게든 내 쪽을 보던 누나가 말없이 시선을 피한다. 그 반응에 거실로 향하자 역시나 식탁에는 내가 차려둔 그대로 놓여 있었다.

 

"왜 안 먹었어?"

 

한숨을 쉬며 말하자 누나는 우물쭈물하며 "고, 고기가 없는 걸...." 하고 중얼거린다.

 

"누나는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어? 계란말이도 있잖아. 자꾸 그렇게 편식하면 몸 나빠지는 거 몰라?"

"미, 미안...."

"그리고 내가 현관에서부터 안기지 말라고 누누히 말했지. 넘어질 수도 있다고. 그런데 자꾸 까먹으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 야, 얀붕이는, 내가 싫어?"

 

내 의도는 전혀 모르고 반성하는 태도도 없다. 그 모습에 나는 더욱 열이 올라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어! 싫어, 자꾸 내 말 안 듣고 속이나 썩이고. 안 그래도 내가 오늘 누나 때문에 선생님한테 혼난 거 알아?"

 

간밤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보기 드문 장대비였고 이따금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두려움에 덜덜 떠는 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휴대폰으로 동화를 찾아 잠들 때까지 읽어주었고 결국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아침은 찾아오고 내가 일어나는 시간도 동일하다. 덕분에 수면이 부족해 수업시간에 졸아 선생님한테 갖은 수모를 당한 게 떠올랐다.

 

"... 우, 우윽, 얀붕이가 나 시, 싫어해. 우우...."

 

몸을 웅크려 나를 바라보던 누나가 문득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도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순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느껴졌다.

 

"아, 아아아아냐! 내가 누나를 왜 싫어해? 그냥 잠깐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화냈을 뿐이야."

"... 진짜?"

"그래!"

"진짜 나 안 싫어해?"

"그렇다니까, 아 참. 누나 과자 아직 안 먹었지? 같이 먹을까?"

"... 응, 먹을래."

 

나는 황급히 과자를 뜯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손가락만한 과자를 우물거리며 훌쩍이는 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당분간 닦아주었다.

겨우 진정된 누나는 내가 옷을 갈아 입을 동안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기로 했다. 누나는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옷을 갈아입는 동안은 잠깐 떨어져 주는 게 매너다.' 하고 설득한 끝에 겨우 떨어트려 놓을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나는 지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얼마만의 휴식에 생각하는 에너지조차 아까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보다 문득 시선을 돌렸다. 누나가 방금까지 컴퓨터를 하고 있었는지 바탕화면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누나와 내가 웃으며 브이를 날리는 사진. 누나가 머리를 다치기 전, 같이 놀이공원에 놀러갔을 때 찍었던 사진이다. 분명 저때만 해도 똑똑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는데 머리를 다치고 기억을 잃고 정신연령 또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머무르게 됐다.

한숨을 내쉬는데 문 너머로 "얀붕아- 아직 멀었어?" 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정말, 옷 갈아입는 게 늦어!"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

"그냥, 이것저것. 아, 그것보다 배고프지? 카레해줄까?"

"응!"

 

그렇게 밥을 먹고 청소하고 씻고, 그녀를 재우니 시간은 벌써 10시가 되어갔다. 잠깐 한숨을 돌리기 위해 휴대폰을 켜니 그새 쌓인 카톡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전부 얀순이에게서 온 것이었다. 친했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바빠진 후로 소원해진 친구였다. 얼마 전 갑작스런 그녀의 고백을 거절한 후 더욱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생각했는데.

그냥 휴대폰을 끌까 싶었지만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결국 그녀의 카톡을 확인했다.

 

[읽었네?]

 

계속 카톡을 붙잡고 있었는지 들어가자 마자 이런다. 나는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을 애써 눌렀다.

 

[자꾸 왜 이래? 내가 분명 지금 누구하고 사귈 때가 아니라고 했잖아.]

[지금 사귈 수 없다면 나중에 사귀면 되잖아.]

[그때까지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안 돼?]

[네 사정도 알아.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너 지금 나 동정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보였다면 미안.]

[근데 나는 진심이야.]

[너도 학업과 집안일을 같이 하다 보면 결국 지칠 때가 올 거고, 언젠가는 무엇 하나를 게을리 하게 될 거야.]

[그러면 착한 너는 분명 학업을 게을리하게 되겠지.]

[모아둔 돈도 다 써가지 않아? 달마다 돈이 나온다지만 그걸로 생활비를 감당하긴 부족할 테고.]

[학업을 게을리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여유로울 만큼 돈을 벌기 어려울 거야.]

[그러면 너희 누나도 언젠간 자책하지 않을까?]

[나 때문에....]

[그만해.]

[가만히 있어 주니까 선을 어디까지 넘는 거야?]

[학업 문제든 집안 문제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관여하지 마.]

[게다가 너 사람 좋은 척 조언해주면서 결국에는 자기 좋을 대로 말하는 것뿐이잖아.]

[아냐, 나는 진심으로 너와 네 누나가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그런 사람이 우리 누나를 꼭 짐덩이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미친년. 차단한다.]

 

재빨리 그녀를 차단하고, 톡방까지 나간다. 그럼에도 분이 수그러들지 않아 땅이 꺼져라 한숨이 흘러 나왔다. 잠깐 정신을 가다듬고 열을 식히는데 바로 옆에서 곤히 자는 누나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무언가 악몽을 꾸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동시에 돌을 씹은 듯한 표정이 풀리며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는 내쪽에 달라 붙는다.

 

'학업과 집안일을 같이 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쳐 무엇 하나를 게을리 하게 될 걸?'

 

얀순이가 내뱉은 말이 가시처럼 박혀 머릿속에서 도저히 떠나질 않았다. 최근 나는 집안일과 학업에 지쳐 잠깐의 휴식조차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그 둘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그만 누나한테 큰소리까지 쳐버렸다.

누나를 껴안자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렇게 다 큰 성인이 정신연령이 어린애라는 것에 순간 괴리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녀를 떼어냈다.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잠꼬대를 내뱉는다. 잠깐 누나를 보던 나는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언제 무엇 하나를 게을리 할 지 몰랐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당연히 학업을 멀리하겠지. 그러니까 그나마 괜찮은 지금, 최대한 지식을 쌓아두고 싶었다.

결국 그날 빨리 잘 생각이었던 계획을 무른 채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차단했다고 해서 얀순이가 무언가 특이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학교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내게 대놓고 접근하지 못했고, 하교길에는 그녀를 무시하면 무섭게 쫓아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평탄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던 도중, 언제부턴가 집에 돌아오면 무언가 위화감이 들게 되었다.

집안이 유독 깨끗하게 느껴진다거나, 누나가 분명 내가 산 기억이 없는 과자를 먹고 있다거나. 하지만 물었을 때 별거 아니라며 웃어 넘기는 누나를 보며 나 역시 가볍게 넘긴 게 문제였다.

 

"왔어?"

 

그러고 다음 주, 문을 열었더니 얀순이가 누나와 과자를 나눠 먹고 있었다.

 

"... 네가 왜 여기에?"

"왜긴, 너희 누나랑 친해진 거지 뭐."

"아니, 어떻게 여기에?"

"그야 네 누나랑 친하니까."

 

"맞죠?" 하고 웃으며 누나에게 말한다. 누나 역시 방긋 웃으며 그녀가 건네주는 과자를 받아 먹는다.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야. 하긴 아침부터 학교 끝나고 장 보는 것도 끝날 때까지 혼자 있으니까. 게다가 요즘 너 학업에 집중하느라 집에 있을 때도 누나를 많이 못 봐줬던 모양이고."

 

웃기지 마.

 

"미래를 위해서 학업에 집중한 모양인데, 그만큼 누나가 외롭다는 것도 몰랐어? 내가 있으면...."

"나가."

"일단 얘기를...."

"나가!"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다. 내가 큰소리를 치자 조금 당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벙쪄 있던 얀순이는 곧 누나에게 웃어주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했다.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향하던 그녀는 내 옆에 멈춰서서 "다음에 또 올게." 하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 저, 저기. 화났어?"


우물쭈물하던 누나가 작게 말한다.


"... 쟤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 그게, 네 친구라고 해서... 근데 과자나 그런 걸 나눠주고 나랑 얘기도 잘 통해서...."

"그래서 문 열어 준 거야?"

"... 응."

"내가 모르는 사람이 문 두드리면 어떻게 하라고 했어?"

"... 없는 척하라고."

"근데 왜 문을 열어 준 거야? 만약 강도나 도둑이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누나는 작은 동물처럼 몸을 웅크린다. 불안한 듯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고여 있다. 저 연약함에 자주 속아 몇 번이나 혼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오히려 열이 더욱 뻗쳐 올랐다.


"누나는 항상 그래, 자기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다 부탁하면서 내가 부탁하는 건 싹 다 무시하고. 그래놓고 혼날 것 같으면 불쌍한 척하고. 내가 뭐 많은 걸 부탁했어? 편식하지 않기, 모르는 사람이 문 두드리면 열어주지 않기, 무턱 대고 안겨오지 않기. 다 쉬운 거잖아. 근데 누나는 이 셋 중에서 뭐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있기나 해?"

"야, 얀붕아...."

"누나는 편하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가만히 있어도 밥이 척척 나오니까. 근데 지금껏 내가 왜 이렇게 편할까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

"내가 다 해서 그래, 다! 식사든 청소든 내가 다 해서 누나가 그렇게 편할 수 있는 거라고. 근데 내가 그것만 하는 줄 알아? 나는 학교도 다녀야 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해. 남들은 친구들이랑 놀 때 그 시간도 아까워 집안일하고 공부하는 내 심정을 누나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아니, 안 했겠지. 그랬다면 적어도 내 부탁을 들어주기라도 했을 테니까."


가쁜 숨을 내쉰다. 누나는 "미안... 윽, 얀붕아, 미안, 미안해...." 하고 눈물을 쏟으며 사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내 시야도 어느새 흐릿해져, 나는 차라리 내 약한 모습을 누나가 안 봐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다.


"... 씻고 있는 걸로 밥 먹어. 난 일찍 잘래."


울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분명 속에 있는 응어리들을 모조리 내뱉아 속이 시원해야 할 텐데, 문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누나의 울음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먹구름 낀 날씨처럼 더욱 착잡해졌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면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잘못된 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잊으려 눈을 감았다.


-


숨을 죽인다. 신경이 곤두 서 아주 작은 소리에도 흠칫하게 되고 그럼에도 귀를 기울이며 경계한다. 아주 낮은 자세로 슬금슬금 바닥을 기어 거실 쪽으로 빠져 나왔다. 발목이 오랫동안 줄로 묶여 있었어서 그런지 감각이 희미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생각하여 이를 악 물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만큼 팔을 뻗어 눈앞을 살피며, 조금씩, 그렇게 하여금 대문까지 다다랐을 때, 과감히 잠금을 풀고 문을 열었다.


쾅!


문은 조금 열리는 동시에 그것보다 더욱 빠르고 강하게 닫혔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 위에 따뜻하지만 섬뜩한 무언가 포개져, 그것이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내 손을 쥐어짜듯이 잡아서, 나는 고통과 함께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공포에 전신이 압도되어 이미 저항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 얀붕아, 너는 내가 방심하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구나?"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절대 방금까지 자고 있던 사람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 얀순이인가 하는 걔 만나려고?"


벽쪽으로 밀어붙여진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얀순이가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다른 년이라도 있었던 거야, 응?"


그녀는 이번엔 내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순간 숨쉬기가 불편해져 켁켁거리며 아니라고 계속 부정해 보아도 목을 죄이는 힘이 풀어지는 법은 없었다.

이전에는 평범한 남매지간인 줄 알았던 우리는 내가 얀순이와 친해진 걸 계기로 급격히 뒤틀리고 말았다. 어느샌가 내 휴대폰을 몰래 들여다 보게 됐고, 어디 나갈 때면 같이 가자고 애처럼 칭얼거리게 되었다. 그러다 얀순이를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부터, 그녀의 애착 증세는 점점 심해지더니, 드디어....


"안 돼, 절대 안 돼, 너는, 너만은 절대 못 줘."


이곳에 이제 내 자랑스러운 누나는 없다. 성실하고, 똑똑하고, 인망 좋았던 누나는 질투와 불안에 휩싸여 무엇이 옳고 그른 판단인지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그래, 원하는 거라도 있어? 내가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날 떠나려 했던 거야? 말만 해, 네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나만큼 그녀 또한 내 여름방학을 애태우며 기다렸던 것 같다. 방학식을 마친 그날 나는 3주가 넘도록 감금당하여 그녀의 손에 놀아났다. 그래, 그 손. 분노에 휩싸일 때마다, 죽일 듯 내 목을 조였던. 그것이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이제 누나는 멱살을 놨지만 그녀의 펼쳐진 손이 나를 잡아 먹을 듯 가까워지자 나는 저절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안 돼, 더 이상 목을 조르지 마. 내게 다가오지 마. 안 돼, 그만, 그만....


-


"그만해!"


몸을 벌떡 일으킨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이다, 익숙한 내 방이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것도 망각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곧 꿈이었던 것을 알고는 안도했다.


"... 저, 저기, 큰소리가 나서... 무슨 일 있어?"


누나가 문을 살짝 열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흠칫했지만 곧 고개를 젓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간단히 세안과 양치만 했다. 땀냄새가 조금 나 불쾌했지만 오늘이 금요일인 터라 하루만 참자며 섬유탈취제만 뿌리고 집을 나서려는데 누나가 불렀다. 하지만 학교가 너무 늦었고, 어제의 일도 있고 해서 어색하여 늦었다며 집을 나섰다.

이날은 오전, 오후 내내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수업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누나는 내가 깨워주지 않으면 아침 늦게까지 자곤 했는데, 또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무시했지만 식탁 위에 차려져 있던 구운 식빵과 계란후라이는 분명 누나가 차려준 거겠지.

학교가 끝나고 곧장 돌아가서 사과할 생각이었던 나를 얀순이가 불러 세웠다.


"집에 가는 거야?"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이어서 "그럼 같이 가자, 역시 지쳤지 않아? 식사 정도는 내가 차려줄 수 있는데." 하고 계속해서 내게 관여하려 들자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야, 너 진짜 경고하는데 나대지 마. 한 번만 더 나 없을 때 집에 들어오면 그땐 진짜 가만 안 있을 줄 알아."

"... 너무하네.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썸 타는 관계였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분명 마음 있었잖아. 근데 일방적으로 그만두자고 연락 끊으면 나는 '아 그렇구나.' 하고 단념해야 하는 거야?"

"...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네 말대로 난 지금 학업과 집안일을 병행하기에도 벅차. 그래서 누구하고 사귈 여유따윈 없어."

"왜 나랑 사귀는 게 독이 된다 생각해? 말했잖아. 내가 집안일을 거들어 준다고. 게다가 난 지금 네 누나와 사이도 좋아. 식사 준비든 뭐든 같이 하면 그만큼 네가 학업에 집중할 수도 있고 원하면 쉬어도 돼. 미안해 할 필요도 없어. 내가 자처해서 하는 거니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방학 동안 갑자기 연락이 끊긴 것과 관련 있어?"


상황을 모면할 말을 찾고 있던 때, 그걸 내가 멍하니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인지 얀순이의 손이 내 앞에 놓인다. 분명 의식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가볍게 손을 흔드려는 생각이었겠지만, 순간 누나의 손과 겹쳐 보여 흠칫 놀란 나는 과격할 정도로 뒷걸음질쳤다. 동시에 얀순이 역시 손을 거둔다. 그녀의 표정에 잠깐 당황스러움이 깃들었다가, 먹잇감의 약점을 발견한 짐승이라도 된 양 오만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널 구석까지 몰아붙일 생각 없어.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면 위로 끌어올릴 거야. 봐, 다른 여자였으면 벌써 떠날 정도로 네가 날 밀었는데도 아직까지 끈덕지게 붙어 있잖아? 그만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과 그 가족을 등한시하겠어?"


그녀는 내 옷깃을 잡고 죽 당겼다. 온몸에 힘이 빠진 나는 그대로 튕기듯 그녀의 앞에 섰고, 얀순이의 손은 천천히 다가와 내 목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멀쩡하다는 건 아냐, 솔직히 네가 날 밀어내서 정말 미칠 것처럼 힘들었어. 네 누나에게 심한 말을 한 것도, 잠깐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그랬어. 미안해, 하지만 이런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내 이런 노력과 정성이 갸륵해 보인다면, 오늘은 내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을래?"


내 귓가에 얼굴을 들이민 그녀가 속삭였고,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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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있을 줄 알고 바짝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 얀순이와의 시간은 평범했다. 잠깐 이것저것 입거나 입히며 쇼핑하고, 저녁을 먹고 인기있는 영화를 시청했다. 모든 계산을 그녀가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놀자고 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내야지." 하고 내 의견을 일축하는 그녀의 태도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내 집 앞의 가로등 밑에서 멈춰섰다. 시간이 늦었음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급해진 나는 얀순이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 얀순이가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꼴사나울 정도로 몸이 돌아간 나는 코앞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그만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이제 가게?"

"... 늦었어, 솔직히 지금도 불안해. 이렇게 늦게 들어간 적은 처음이라...."

"알았어. 오랜만에 너랑 노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널 붙잡아버렸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내 옷깃을 붙잡는 그녀의 힘이 더욱 거세졌다. 어느새 내 품 안으로 들어온 얀순이는 까치발을 들어 얼굴을 내게 천천히 들이밀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쳐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은 매혹적이었지만, 그럴수록 누나의 얼굴이 그녀와 겹쳐보여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죄악감이 들끓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얀순이를 밀쳤다. 저질렀다는 생각과 함께 밀쳐낸 다음 그녀의 표정을 마주하기 겁나서 그대로 도망쳤다.

먼저 들어가겠다고 인사는 했지만, 그럼에도 쫓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쉬지 않고 달렸다.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벽에 손을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얀순이와 놀며 즐겁다고 생각한 내가 역겨웠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누나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순간 속이 울렁거려 위액과 함께 그녀를 향한 감정을 토해냈다. 신물이 올라올 만큼 그 짓을 반복했을 때는 경비원이 내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 얼굴을 들여다 본 그는 흠칫하며 나에게 힘든 일이 있었냐며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고, 이건 내가 치우겠다고 하는 경비원에게 허리까지 숙여 감사를 전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올라가 대문을 여니 집안의 고요함이 서늘바람처럼 불어 와 내 전신을 휩쓸었다. 지금 시간은 10시다. 누나가 잘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내가 곁에 있어야만 잠들던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잘 리가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안으로 발을 뻗는다. 그때 무언가 물렁한 것이 밟혔다. 확인해 보니 두루마리 휴지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안쪽으로 발을 내딛을 수록 물렁하고 단단하고 뾰족한 것이 밟혔다.


"누나?"


조심스레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불안해진 나는 불을 키고 미친 듯이 집안을 뒤졌다. 누나는 내 방에 있었다. 거실과 부엌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방은 특히 온갖 물건들이 흐트러져 난장판이 돼 있었다. 그 중앙에서 누나가 힘없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 도둑이라도 든 거야?"


나는 조심스레 흐트러진 물건을 피하며 다가갔다.


"... 얀붕아?"


고개를 든 누나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동시에 생기를 잃었다고 생각한 그녀의 두 눈에 빛이 감돌았다.


"얀붕아, 너 진짜 얀붕이야?"

"나 맞아. 그것보다 괜찮아?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건 아니지?"


하지만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내게 다가와 쓰러지듯 안겼다.


"다행이야, 나는, 네가 날 떠난 줄 알고...."

"내가 누나를 왜 떠나?" 

"그, 그치만, 아침에 급하게 나가서, 늦게까지 안 돌아오, 오길래."


목이 쉬었음에도 꺽꺽 거리며 우는 그녀를 토닥였다. 내가 얀순이와 놀아서 일이 이렇게 됐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죄책감이 어지러울 정도로 솟구쳤다. 문득 나 또한 울음이 터져나와 들키지 않기 위해 누나를 꼭 안아 등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때, 그때 내가 부모님께 여행 가자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윽, 너까지 떠나면, 나는, 나는...."


나는 그제야 누나가 왜 그렇게까지 내게 집착했는지 깨달았다. 나까지 떠나버리면 누나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니까, 그건 나도 똑같다. 누나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나왔다. 이를 악물고 울음소리를 참으려 미칠 듯 노력했지만 종국에는 아이처럼 울음소리를 내었다. 누나는 울면서도 나 역시 슬퍼하자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안해, 이렇게 자상한 누나를, 나는....


'그만해!'


그때, 완전히 공포에 휩싸인 나는 나도 모르게 온힘을 다해 그녀를 밀쳐냈다. 내게 완전히 무방비했던 누나는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는지 근 10년간의 기억을 잃고 지적 장애를 앓게 되었다. 의사의 말로는 그녀의 정신 연령은 10살 남짓이라고 했다.

나는 누나를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착하고, 똑똑하고, 인망 좋았던 누나를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누나가 부모님께 그러한 것처럼, 나 역시 비슷한 죄책감을 그녀에게 품고 있다. 그러니까 내게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릴 자격은 없다. 평생을 누나에게 헌신하며 그녀가 바란 것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어야만 한다.

그게 내가 누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이리라. 얀순이에게는 고마웠다. 그녀 덕분에 내 입장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미 품에 안긴 누나를 더욱 세게 끌어 안으며, 몇 번이고 누나를 불렀다. 지칠 때까지, 그렇게 잠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