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밤이 조금 넘은 시각, 바닐라는 바다 위에 정박한 오르카 호의 복도를 걷고 있다.

 

-----또각-----또각-----

 

콘챠가 잠들고 있는 사이, 바닐라는 조용히 나올 수 있도록 구두굽 소리조차 죽이며 조심스럽게 나왔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안다면 콘챠가 온 힘을 다해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각----또각


 

“응? 바닐라 언니? 여긴 왠 일이야?”

 

닥터가 물었다. 여기는 감금실. 2명의 닥터는 여전히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이 시간이면 졸릴 법도 하지만, 그녀들의 호기심은 그녀들의 성격과 상관없이 신기할 정도이다. 그 똘망똘망한 주황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인다.

 


“… 그냥.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

음료수라도 먹어. 쉬면서 해.”

 

“정말? 음료수도 가지고 왔어?

후후후, 바닐라 언니는 이런 데서 센스가 있다니깐?

야! 언니가 음료수 가지고 왔다! 빨리 와!”

 

새로운 닥터는 동갑내기 친구를 부르는 듯이 다른 닥터를 불렀다. 이러는 걸 보면 자기랑 같은 기종이라 해도 결국은 다른 존재라고 잘만 인식하는 것 같다.

 

“… 에이씨, 한창 재미있는 부분이었는데.

알았어. 금방 간다.”

 


어찌나 집중을 잘 하는지 물도 안 마시고 이 시간이 될 때까지 실험을 진행한 닥터들이었다. 그러니 음료수는 그녀들을 실험에서 빼낼 훌륭한 도구였을 것이다. 방 한 켠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바닐라는 두 명의 닥터와 잠깐의 이야기를 즐겼다. 의자에 앉으면 온 몸과 입까지 구속되어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존재가 방 중앙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주인님. 하지만 그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저 자는 그 인간이다.

 

 

 

“실험은 잘 되가?”

 

“꼴깍---꼴깍--- … … 캬아아~

탄산이 좋긴 하네? 정신이 확 드는데?”


 

“… 마시는 것도 정신 사납워, 얘는.

… …

실험? 뭐… 안정화 단계는 거의 진행됐고, 이젠 최종 단계야. 몇 가지만 조율하면 될 거야.”

 




“… 그래? 그럼 지금 저 사람은 누군 거야?”

 

“아직은 나쁜 오빠!

실험은 마무리 됐지만, 그걸 실제로 진행시키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그래? 

… … 그럼 의식은 완전히 그 인간인 거야?”

 

“그건 또 내가---!“

 

닥터가 신나서 설명을 하려고 하니, 그 옆에서 조용히 홀짝거리며 음료수를 마시던 다른 닥터가 빠르게 자신의 손으로 설명하려던 닥터의 입을 막았다. 갑자기 자신의 얼굴에 손이 올라오니까 놀라서 닥터는 마시던 음료수를 켁켁 대며 간신히 삼켰다. 짧고 간결한 동작은 그 동안 전임 닥터가 얼마나 새로운 닥터의 설명 시도를 막아왔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언니. 얘한테 뭐 막 물어보지 마.

잘못하면 기빨린다.

전에 콘챠 언니도 얘 설명 들어주다가 귀에 피났어.”

 

“야!! 피는 아니거든!! 

콜록-콜록—

그리고! 콘챠 언니 귀에서 언제 피가 났는데!”

 

“아… 그랬냐?

내 귀에서 피가 났나 보다. 이 혁신적으로 명랑한 새끼야.”

 

“그래! 나 혁신적으로 명랑하다!

...

근데 그거 좋은 말 밖에 없는데 욕이야?

왜, 혁신도 좋은 말이고, 명랑도 좋은 말이잖아. 새끼는 좋은 말은 아니지만.”

 


“에휴… 저 저 이상한 감성. 말 돌리는 거 봐라.

니가 그러니까 설명 듣는 언니들마다 귀를 막지.

요약 좀 해서 말해. 요약 좀.”

 

“야!!!! 그럼 너는 뭐가 그리 잘나서 말 끝마다 그래??!!

너 이리 안 와??!!!”

 

먹던 음료수를 놔두고 달려들려는 닥터를 바닐라는 겨우 막았다. 아무리 바닐라가 고급 모델은 아니라지만, 두 팔이면 충분히 잡고도 남을 만큼 작은 닥터 하나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막을 수 있었다. 자기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게 진짜 여동생 같은 기분이었다.

 

“닥터? 화난 건 알겠으니까 음료수라도 먹고 진정해.

기껏 가지고 왔는데 쏟을 뻔 했잖아.”

 

바닐라는 화를 내는 닥터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팔에서 벗어나려는 저항감이 많이 약해졌다.

 

“…씨익…씨익… 지 잘난 맛에 사는 애랑은 나도 질색이야!

… 언니 얼굴 봐서 한 번 봐준다.”

 

“에휴… 그러든지.”

 

한 닥터는 제 분에 씩씩대면서 작은 두 손으로 음료수를 담은 컵을 잡고 벌컥벌컥 마시고 있고, 나머지 닥터는 다크 서클 진한 눈동자와 대비되게 한 손으로도 여유롭게 컵을 잡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다. 전기 자극 실험을 하는데 둘 다 왜 쓰고 있는지 안 어울리게 실험용 고글을 끼고 있었고, 실험복은 어깨 너머로 헐렁이게 걸치고만 있었으며, 머리카락을 공업용 집게 같은 것으로 묶는 알 수 없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이상한 부분에서는 똑같은 둘이지만, 또 이상한 부분에서 다른 것이 바닐라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 아무튼 쟤한테 뭐 물어보지마. 내가 설명해줄 테니까.

의식… 같은 거는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사람 머리가 단순히 전기 자극 덩어리는 아니니깐 말이야.

그 대신이랄까… 기억이나, 감각 수용 등을 담당하는 부위에서는 아직 그 새끼의 뇌파가 흘러나오고 있어.

쉽게 말하면 지금 싸다구 갈기면 그 새끼한테 갈기는 거랑 똑같다는 거지.

뭐, 언니한테는 그 정도면 충분하려나?”

 


바닐라는 닥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닥터는 온 몸이 묶여 있는 저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게슴츠레 뜨고 있는 눈에서는 피곤함이 선명했다. 그녀 스스로도 인간이란 존재를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한에 인간이란 존재를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것을 설명하려는 고통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몸에 익은 것 같았다. 고통에 익숙한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눈빛 같은 것이 바닐라에게 보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음료수 마시면 잠깐 눈이라도 붙여. 

저 사람은 내가 감시할 테니까.

… 애도 많이 피곤했나 봐? ”

 

 

어느 새부턴가 자신의 품 안에서 골아 떨어져버린 닥터. 작은 손은 여전히 음료수 병을 옹골차게 잡고 있었다. 새근새근 이라 하기에는 조금 거친 숨소리지만, 그래도 새—새—거리며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자세는 불편했지만, 바닐라에 품이 꽤나 따뜻했나 보다. 그렇게 따뜻한 품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닥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뭐… 그럴 만도 하지. 벌써 잠도 안 자고 80시간 가량을 실험 했으니까…

에휴… 난 몸도 안 좋은데, 새로 만들어진 애는 왜 이리 빨리 실신하고 지랄이야…”

 

“그럼 너는 안 힘들어?

80시간 넘게 이러고 있었다면서?”

 

“… 힘들지. 근데, 난 이 정도 힘든 건 익숙하거든.

바이오로이드도 생체 리듬은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니까.

호르몬이라던가, 시냅스 내 신경 전달 물질 조절이라던가…

… 나도 이 녀석한테 옮았나. 쓸데 없는 말만 계속…

…”

 

꼴깍거리는 소리가 닥터의 목에서 들렸다. 머쓱해서 음료수만 마시고 있다.




“쓸데 없는 말 아니야.

… 너가 하고 싶은 말이면 가치 있는 말이니까.”

 

“… 그러는 바닐라 언니도 누구한테 배우기라도 했어?

그렇게 오글거리게 말하는 방법?”

 

 

바닐라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그 사람의 얼굴. 지금 자기가 고개를 살짝 들기만 하면 그 얼굴이 보이겠지만, 저 얼굴은 기억 속의 얼굴이 아니다. 그러니 떠올려야만 했다.

 

“그러게. 나도 누구한테 옮았나 봐.”

 


"...하아..." 


닥터는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래도 무언가 답답해서라기 보다는 시원함이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뭔 일이 나긴 했나 보네.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지랄 지랄들을 해도 변함 없이 좆같았던 곳이 이렇게 바뀌는 걸 보면 말이야.”

 


“… 애당초 그 때에는 너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잖아.

지금 이렇게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흥. 내가 이럴 수 있는 것도 저 인간의 명령권이 안 먹히니까 가능한 거지.

리리스 언니가 그러더라.

그 주인님이란 인간이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무슨 프로토콜을 만들어 놨다고 하더라고.

그거 때문에 리리스 언니가 제압도 하고 이럴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저 새끼 명령 때문에 또 개판될 뻔 했는걸.”

 


“그래.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닥터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음료수 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느새 다 마신 것인지, 찰랑거리는 물 소리만 조그맣게 병 밖으로 들린다. 아쉽기라도 한 것처럼 닥터는 입맛을 쩝쩝댄다.

 

“뭐야. 벌써 다 마셨네.

… 그럼 나도 잠깐 눈 좀 붙여야겠다. 언니들이 몸도 안 좋은 사람을 너무 고생시켰어.

언니가 마지막으로 감시해준다고 했지?”


 

“그래. 내가 해줄게. 

들어가서 좀 쉬어.”


 

“그럼… 가기 전에 마무리만 하고....

기다려 봐.”

 


닥터는 일어나 어떤 기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기기를 만지며 몇 가지 조절을 하는 듯 싶더니, 마지막으로 빨간색 버튼을 꾹 누르고는 돌아왔다. 어디선가 커다랗지만 조용히 기계의 구동음이 들렸다.

 

“…!!!!!!!!!!!!!!!!!!!!!!!!!?!!??!?!?!!!!!!!!!으으----읍!!!!!!!!!!!!”

 

 

“… 저 비명 소리 한 번 맛깔나게 듣고 가고 싶었는데, 피곤해서 이걸 못하니 아쉽네.

얼굴에 핏줄 선거 봐. 대가리가 아프니 대가리로 피가 쏠리는 모양이지?

머리 꽤나 아플 거야. 개새끼야.”

 

 

구속된 사내는 철저히 묶여 꼼짝할 수도 없을 입마개 위로 열심히 읍읍 거리며 비명을 질러댄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빨갛게 변했고, 구속구로 가리지 않은 피부 위로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바닐라는 보는 자신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 뭘 한 거야?”

 


“뭘 했다기 보다는... ... 실험은 이제 끝났어. 이거면 언니들이 그렇게 노래 부르던 사람이 돌아올 거야.

그러니 만약 저 인간이 기절 같은 걸 하면 구속구 풀고 어디 침대 같은 곳에 눕혀줘.

언니 방에 데리고 가도 되고.”

 

“…에? 내 방?”

 

“싫으면 말든가.

저 새끼 기절하면 좀 자야 돼. 빨리 끝낸다고 몸 좀 혹사시켰거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 못 하겠으면 못 해도 돼. 그냥 감시만 제대로 하고 있어.

아… 감시할 것도 없으려나?

쩝… 아무튼 얘는 내가 데려간다. 잠자고 있을 때는 그냥 짐짝이야.”

 


 

닥터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닐라 품에 잠든 닥터를 빼내 자신이 끌고 갔다.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닥터는 한사코 자신이 데리고 가겠다만 바닐라의 도움을 만류했다. 감금실 밖으로 나가는 닥터는 나가기 직전에 머리만 빼꼼 보이게 하고는 말을 했다.

 

 

“… 저 새끼한테 하고 싶었던 말 있으면 지금 해.

언니 그러려고 온 거 다 아니까.

그러다가 쟤가 기절하면 다시는 못 할 거야. 마지막이라고.”

 

 

 

 

 



 

빈 감금실. 어린 닥터들의 말싸움이 없으니 실로 고요해진다. 벽에는 아직도 더치걸들이 보이는 듯했다. 바닐라가 직접 비밀의 방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의 방을 청소하며 비슷한 것들을 많이 봐왔다. 자궁이 뚫려버린 어린 바이오로이드라던가, 아니면 폐가 정액으로 가득 차버려 숨도 못 쉬고 죽어버린 시체라던가. 여기 있던 모두가 그랬을 테지만, 그녀 역시 그런 장면들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주인의 방에는 비밀 공간들이 몇 개 있다. 그녀의 주된 일은 그 공간에 있는 바이오로이드의 시체를 꺼내 치우고, 태우는 일이었다. 특히 시체는 따로 처리하는 곳이 있었는데, 바닐라들의 업무는 그것을 버리기만 하는 것일 뿐, 시체를 어디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알고 있었던 것은 주인은 자신의 흰 방이 피로 빨갛게 칠해질 때까지 바이오로이드의 시체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이다.

 

 

“… 그 동안 몇 명이나 죽었었지…? 그 아이가 죽은 이후부터는 세질 않아서 기억이 안나는데…”

 

그랬기에 주인의 방은 항상 철분내가 섞인 피비린내로 진동했었다. 그 냄새를 빼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주인도 꼴에 그 냄새가 방에 배는 것은 싫어했기에 주인이 오고 나서부터 오르카호는 잠수한 적이 없었다.

 

“…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해봐야 겠지.”

 



그녀는 그 인간 앞으로 나갔다. 저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떨렸다. 절반은 공포로, 또 절반은 설렘으로. 자신 앞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수많은 바닐라를 죽고, 태우고, 짜서 그 피로 흰 방을 색칠을 했던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두려움과, 그랬던 자가 무력화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를 만난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안심이 그렇게 만들었다. 또, 자신을 아끼고, 미안해 해주고, 사랑해준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마음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혼합된 결과였다.

 



또각-또각--, 바닐라 특유의 구두굽 소리가 이 넓은 방에 울려 퍼졌다. 유독 크게 들리는 소리에 마음이 상쾌해진다. 이렇게 커다란 구두 소리를 그녀 스스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주인에게 다가갈 때, 사령관실을 걸어갈 때는 양 옆에 바닐라가 한 명씩 더 있었지만, 그녀의 구두굽 소리는 언제나 주인의 고함 소리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리를 묻어버릴 고함은 없다.

 

 

 

“... 

...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정말 뵙기 싫었는데 뵙게 되는군요. 그 표정만 보면 속이 안 좋아져서 말입니다.”

 

“!!!!!!!!!!!!!!!!!..읍..읍ㅂㅂ!!!!!!!!!!!!!!!!”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당신을 다시 볼 일을 없겠지요.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말이나 좀 하려고 왔습니다.”

 

 

“!!!!!!!!!!흡브븝!!!!!!!!”



 

“… 아까까지는 그려러고 왔는데 주인님을 보니까 또 구역질이 나네요. 고작 토하려고 온 건 아닌데 말입니다.

... ...

어차피 기대는 안 합니다만, 알고 게시면 말이라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금 뭐라고 말을 해야 합니까? 

제가 주인님께 뭐라 말해야 죽은 제 자매들이 만족할 수 있을까요?”

 


거대한 기계가 작동을 멈추고, 기계에서 나오는 파동 때문인지, 도구 따위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짖는 것을 본 것 때문인지 핏발을 세우던 인간의 얼굴에도 핏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기계는 조용한 파장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읍으…!!!!!”

 


“그래요. 소리치는 꼴이 꼭 개 같으신 것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예전에도 그러셨는데, 기억은 하시려나 모르겠네요.

이제는 그 고함 소리가 그리워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

 

 

“으… 보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추하십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지성에 어울리는 모습이니 제가 보기엔 어울리긴 합니다만....”

 

“!!!!!!!!!!!!!!!!!!!!!!!!!!!!!!!!!!!!!!!!!!!!!!!”

 



“... 제 말투가 그리도 듣기 싫으십니까?

그러시겠죠. 듣기 편하신 말투는 아닐테니...

근데, 저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주인님의 짐승 같은 참을성으로는 무리겠지만.”

 


바닐라에 말투에 이번에는 또 다른 이유로 인간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구속되어 있지 않은 눈동자를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저희는 주인님께 몇 번이고 살려달라 부탁 드렸는데.

그런데 주인님께서는 끝까지, 정말 저희가 죽어 없어지는 순간까지 나쁜 놈이셨습니다..

전 그 때 처음 들었습니다. 바이오로이드의 골격이 뒤틀리면서 부숴질 때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말이죠..

그걸 주인님께 못 해드리는 게 정말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 몸으로 오실 분이 한 분 계시거든요.”

 


“읍!!!읍!!!!!!!---!!!!”

 

 

“아무튼… 그런 주인님 때문에 저는 단 한 순간도 제 말투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절 죽일 수도 있는 말투를 어떻게 좋아합니까?

그리고, 특히... 최근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는 더 그랬습니다..

 ... ...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말투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주인님께 하는 모든 말이 비꼬고, 뒤틀려서 주인님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느껴지는 군요.

...

… 어쩌면 고마워 해야 하나요? 평생 골칫거리였던 제 말투를 좋아하게 만들어 주셔서.”

 

 

 

“!!!!!!!!!!!!!!!!!!!!!!!!!ㅂ….브ㅡ……!!!!!!!!!!”

 


“그 역겨운 아가리에서 아직도 말이 나오는군요.

구속구가 깔끔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 냄새 나는 입이 열릴 수 있는 거 보면.”

 


“!!!!!!!!!!!!!!!!!!!!!!!!!!!!!!!!!!!!!!!!!!!!!!!!!!!!!!!!!!!!!!!!”

 

인간은 화가 나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그 동안 자신의 감정을 온 몸과 도구로 표현해오던 그였기에, 고작 눈동자 하나는 그 뒤틀린 감정의 소용돌이를 온전히 남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까 제 생각이 더 깔끔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을 주인님으로 모신 걸까요? 제가 생각해도 제가 너무 한심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인님?”

 

“!!!!!!!!!!!!!!읍읍...!!!!!으….읍.....!!...!!!!!!!!!!!!!!!!!!!!!!!!!!!!!!!!!!!!!!!” 


남자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미친 듯이 소리치기만 했다. 물론 그 소리가 구속구에 막혀 들리지는 않았지만 지치지도 않고 소리치기만 한다. 바닐라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말이다.



 

“… 불편해 보이시니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메이드가 할 일이 뭐, 그런 거 아니겠나요? 방 청소만 지금까지 죽도록 해왔지만 말입니다.

 

제가 제조실의 문이 열리고 처음 본 얼굴은 주인님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세상에 나와서 본 것은 저와 똑같이 생긴 다른 바닐라였죠. 

저와 같은 초록색 머리에 똑같은 메이드 복 디자인을 가졌고, 똑같이 하얀 스타킹을 신은 바닐라. 정말 평범한 바닐라…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저희와 다르게 그 바닐라는 웃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멍청하고 마냥 순수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저희와 똑같이 당신 방을 청소하고,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을 등에 짊어지고, 빨갛게 된 벽을 다시 하얗게 닦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신기하게 웃고 다녔습니다.”

 

 

“…. …. …. 후우..후우….

… …

!!!!!!!!!!!!!!!!!!!!!!!”

 

 

 

“… 그래요. 어째, 듣고 계시는 모습이 주인님 같은 쓰레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렇죠.

그래도 그냥 끝까지 들으시길 바랍니다. 주인님 같은 저렴한 쓰레기들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저희들은 전부 그 바닐라가 신기했습니다. 주인님의 방을 청소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왜 그리 실실 웃고 다니냐고.

그랬더니 뭐라 했는 줄 아시나요? 전 그 대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너무 멍청했거든요.”

 

 

 

“!!!!!!!!!!!!!!!!!읍으...읍..!.ㅂㅂ!!!!!!!!!!!!!!!!!!!!!!!!”

 

 

 

 

 

“그냥 웃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다고 합니다.

자기도 아프고, 힘들고, 울고 싶은데, 자기랑 똑같이 생긴 우리들이 슬퍼 보여서.

이런 곳에서는 평생 웃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자기라도 웃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너무 바보 같지 않습니까? 주인님이 만든 지옥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어떻게 감히 웃음을 바랄 수 있었을 까요?

 

… 그리고, 어떻게 그런 아이가 저와 똑같은 바닐라일 수 있었던 걸까요?

주인님께서 계셨을 때, 저는 제 모든 것이 싫었는데. 너무 싫어서 웃음은커녕 울음도 안 났는데 말입니다.”

 

 

“!!!!!…!!!....!!...!..... …. …”

 

 

 

“…개처럼 헥헥 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주인님께서도 이제 지치셨군요. 

그렇게 대책 없이 꽥꽥대기나 했으니 지칠 만도 합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 수가 없네요. 그렇지 않나요?

 

… 전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요?

주인님께서 그녀를 분쇄기에 처박아버렸을 때도 그녀는 저희 앞에서 끝까지 웃다가 죽었습니다. 

분쇄기가 팔다리를 찢고, 부수다가 신경을 건들이고, 그 시린 촉감이 뇌를 파먹을 때까지 웃고, 또 웃었습니다.

전 그렇게 까지 웃고 싶어 했던 그 바닐라가 무서울 만큼 신기했습니다.

 

… 근데. 지금에서야 알 것 같습니다.

최근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을 보니 너무 웃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으니 너무 즐거웠고,

그 얼굴을 보니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웃고 싶었습니다. 주인님 때문에 웃을 수 없게 된 제가 원망스러울 만큼 웃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너무 행복하게 해주는데, 저는 그것에 대해 표현도 못 해주는 것이 미치도록 억울했습니다.


... 그 바닐라도 그냥 저처럼 웃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냥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웃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알았다면 저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

 

“… 제가 행복하다는 것 그렇게 기분 나쁘십니까?

... 

...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바닐라는 그 사람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온 몸이 구속되어 있는 인간은 여전히 덩치가 컸고, 그런 인간을 바닐라는 끝까지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은 경멸과 결의로 가득했다.

 

----짝.

 

“….??!?”

 

살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바닐라가 장갑을 낀 손으로 인간의 뺨을 때렸다.

 

---짝!

---짝!

---짝!

 

몇 번이고 더 울려 퍼지는 소리. 그 소리가 방 안을 시끄러울 정도로 메우고도 남을 때가 되어서야 바닐라는 뺨을 때리길 멈췄다. 인간의 뺨이 새빨갛게 부어 올랐다. 인간은 온 몸이 묶여 있는 채로 그 고통을 속절없이 느껴야 했다.


 

 

“아파? 아프지? 부디 아프길 바랄게. 당신이 아프게 한 거에 비하면 몇 만 분의 일이라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 …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하네.

내가 뭐를 잘못했길래, 뭐가 그리 잘못이었기에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주인이 되어야만 했던 거야?”


 

바닐라는 인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 너머에 비춰진 자신과 그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다시 보일 때까지 진득하게 쳐다보았다. 인간이 행했던 모든 악행들과, 그것들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아야 했던 자신. 그리고 그런 인간이 주인이어야 했던 저주까지 모두 바닐라 자신의 눈에 담으려 애를 썼다.

 

그 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았다. 눈물로 씻어내려야 한다. 그래서 바닐라는 울었다.

 

 

 

“…

… 내가…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가 왜? 진짜 내 잘못이었던 거야?

말이라도 해봐! 내가 잘못이야? 그래서 내가 당신을 만나 거야? 그랬던 거냐고!!”

 

 

눈물이 내릴수록 바닐라는 점점 크게 소리쳤다. 자신을 소중하다고 말해주고, 그렇게 여겨준 그 사람을 생각할수록 지금 눈 앞에 있는 인간과 이 인간이 저지른 그 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던 모든 순간들이 억울했다.

 

----짝!!-----짝!!!!-------짝!!!!!!!

 

그녀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뺨을 때렸다. 울먹이기에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버텨내며 떨리는 손에 힘을 부어 넣었다.

 

 

“내가! 내가!!! 잘못한 거냐고!!

말 해줘 봐! 내가 뭘 했으면 당신 같은 사람을 더 빨리 버릴 수 있었을까?!

내가 뭘 했어야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냔 말이야!!!!!!”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인간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변하다 못해 보라색의 피멍이 보였다. 멍이 들고, 또 들었다. 그랬기에 인간이 아팠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몰랐다. 알고 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짓들을 셀 수 없이 해왔으니까. 그리고, 인간은 여전히 그걸 모른다.

 

바닐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손으로 꽉 쥐면서 말했다. 그녀의 작은 손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인간의 얼굴을 쥘 수 있었다.

 


“… 당신한테 고마워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내가 당신한테 이 말을 할 수 있게 당신이 직접 여기까지 와 준 거니까.”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야!

내 주인님은 그 사람이야! 당신 같은 괴물 따위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빨리 꺼져!! 그 몸은 너 같은 쓰레기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내! 

주인님을! 

돌려줘!”

 

 

 

“!!!!...!!!!!!!!.............!!!!!...............!!!

…!!!!... … …

… …

…”

 

인간은 소리쳤다. 감히 도구 따위가 어떻게 이러냐고. 또 소리쳤다. 신성한 인간님을 모욕하냐고. 계속 소리쳤고, 다시 소리쳤다. 머리가 터지고 손 발에 피가 통하지 않을 때까지 온 몸에 힘을 짜내며 구속구 너머로 들리도록 소리쳤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발악이 닥터가 만든 구속구를 넘어갈 수는 없었다. 명령할 수 없는 인간은 그만큼 연약했고 영악했다.

 








인간은 쓰러졌다. 방을 채우고 있는 기계도 작동을 멈췄다. 그 인간을 붙잡고 있던 구속구는 철컥 소리를 내며 풀려버렸다. 잠들 듯이 기절한 인간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 닥터가 아까 기절하면 입마개를 풀어도 된다 했지?”

 

그녀는 땅에 쓰러진 사령관의 얼굴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아까까지 얼굴을 터질 듯이 붉게 만들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사령관의 얼굴에 손을 대고, 입마개를 풀었다. 아까 뺨을 너무 많이 맞았던 탓일까. 입에서 피가 조금 흘러내렸다.

 

“… 주인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세게 때렸나 봐요.”

 

흰 장갑으로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가의 피를 천천히 지웠다. 흰 장갑은 붉게 변했다. 마치 자신이 닦아야만 했던 주인의 방처럼. 하지만 이제는 닦지 않아도 된다.

 

“장갑이 빨개졌네… 나중에 다른 걸로 바꾸지 뭐.”

 

그녀는 아직 하얗게 남은 부분으로 피를 마저 지워갔다. 그의 얼굴이 조금은 더 하얗게 변했다.

 

 






“주인님….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저를 놔두고 이렇게 주무시다뇨.이건... 예의가 아닙니다....”

‘주인님…. 이제 일어나 주세요. 제발…’

 

 

그녀는 밖으로 말을 뱉고, 속으로 뜻을 삼켰다. 그 둘은 언제나 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주인님은 자고 있고, 바닐라의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붙잡고 있는 손을 통해 바닐라의 속마음은 전해질 것이다.

 

바닐라는 등 뒤로 사령관을 업고 감금실 밖으로 나갔다. 바닐라보다 훨씬 커다란 사령관이었지만, 그럼에도 온 몸을 바닐라에게 맡겨 왔다. 그리고 바닐라는 그런 사령관을 지탱해주며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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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의 방은 그리 크지 않다. 고작 청소부 따위에게 허용된 공간은 클 수 없었다. 그랬기에 바닐라는 언제나 작은 공간을 자신의 절망으로 가득 채웠다. 너무 작은 공간엔 절망 이외에 것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사람 한 명이 절망을 헤치고 들어온다. 꼭 그의 부피만큼의 절망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 규칙적인 호흡을 뱉으며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이었다. 

 

 

“주인님 같이 쓸데없이 커다란 분이 누우시니 제 침대에 누울 자리가 없군요…”

‘방이 너무 작아서 죄송해요… 주인님…’

 

 

그녀의 속마음은 언제나 말과 다르다. 그랬기에 바닐라는 피가 묻은 장갑을 벗고 자신의 따뜻한 맨 손으로 주인의 손을 어루만졌다. 며칠을 묶여있던 그였기에 그 손은 많이 차가웠다. 

 


“주인님을 엎고 오느라 제가 얼마나 힘들었나 아십니까? 땀이 날 정도네요.”

‘등으로나마 주인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미 밤도 늦었고, 씻을 시간도 없으니 이러고 자야 될 수 밖에 없겠군요. 주인님. 불편해도 그냥 참으시길 바랍니다.”

‘처음으로 받은 주인님의 온기를 씻어버리고 싶지는 않네요. 같이 자도 괜찮나요? 주인님?’


 

바닐라 만을 위한 작은 침대 위에 한 사람이 더 올라왔다. 바닐라보다 훨씬 커다랗고 듬직한 그 사람이 몸을 펴고 침대에 눕자, 바닐라는 자신의 침대 구석에 끼어서 누울 수 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입고 있던 메이드복, 주인을 데리고 오면서 흘린 땀, 좁은 방 한 켠에 두 명이 함께 누워있으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숨결들이 모이고 한데 엉켜 서로를 젖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바닐라는 왠지 모르게 행복했다.

 


“내일은 주인님도 반드시 샤워를 하셔야겠습니다. 

… 그런 몸으로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시겠군요. 제가 특별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인님과 함께 이렇게 몸이 젖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니네요. 같이 샤워해드리면 좋을 텐데…’


 

초록색 머리카락이 그의 콧바람에 흩날릴 정도로 바닐라는 자신의 얼굴을 주인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생긴 것은 이전 주인과 똑같았지만, 그럼에도 평화롭게 자고 있는 모습과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주인님이다.


 

주인님의 잔잔한 콧바람이 바닐라의 머리 속을 씻겨낸다. 이렇게 고요하게 자고 있는 주인님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지만, 주인님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꾸 날카로운 말투가 튀어나오는 것이 너무 싫었다.

 

 

 

‘… 언제까지 이 따위로 말할 거야?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려!’

 

자신이 이 말투의 늪에서 벗어나갈 시간은 지금이 유일하다. 그것은 바닐라가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주인이 돌아오면, 또 다시 그 말투가 나올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양 뺨을 착착 소리가 나가 쳤다.

 

 

 

 

“으… 아프네…”

 

빨갛게 상기된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며 바닐라는 주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본다. 아까 너무 세게 쳤었을까? 주인의 볼은 여전히 피멍이 들어있었다.

 

 

 

 

“…제 말투… 듣기 싫으시겠죠. 

뭐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만들어져 버린 걸.

저도 제 진심을 전하고 싶은데 바보 같은 주인님께서 그걸 아시긴 하려나 모르겠네요.

그거 때문에 몇 날 며칠을 고민했는데…”

 

만약 주인이 돌아오고 나면, 자신이 죽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주인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 준다면. 그렇다고 해도 바닐라는 여전히 독설을 뱉고, 주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것이고, 이건 또 다시 아무렇지 않게 반복될 것이다. 그 동안 그저 숙명처럼 살았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다. 바닐라는 자신이 싫어졌다.

 

 

“… 어쩌면 지금 말고는 없을지 모르겠네요.

부디… 그냥 그렇게 주무시고 계십시오. 주인님을 보면 저도 모르게 제 말투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 그래. 그냥 혼잣말이야. 혼잣말. 주인님은 앞에 안 계셔. 그냥… 혼잣말이야…’

 

바닐라는 크게 숨을 셨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말. 그를 만났을 때 몇 번이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말. 자신의 진심을 그가 자고 있을 때만이라도 말하려고 했다. 하다 못해 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주인의 콧바람이 자꾸 자신의 머리를 간질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닐라는 두 눈을 꼭 감았다.

 

 

 

“… 주인님께서는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가요?

들을 사람이 없는 말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닐라는 그의 와이셔츠를 두 손으로 아련히 잡았다. 그 동안 갈아 입지도 못한 옷일 텐데, 어쩐지 거기서 나는 그의 채취가 미울 정도로 슬펐고, 기뻤다.

 

 

“… … 그러고 보니 주인님이 가시고 나서 음성 모듈을 꺼본 적이 없네요.

원래 이렇게 오래 켜두고 다니지 않는데…

… 그렇게 듣고 싶어 하셨던 제 목소리 얼마든지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오세요. 주인님…”

‘제발… 제발… 지금은 방해하지마… 제발…’

 

 

모듈은 바닐라의 영원한 족쇄였다. 주인 앞에서 자신이 내려 했던 모든 말들은 최후에 저주 받은 모듈을 거쳐 가시가 돋치고, 날카로이 연마되어 입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끊임없이 그저 혼잣말일 뿐이라 생각하며 모듈의 그림자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방 안을 아찔할 정도로 채운 주인의 향기, 손 끝으로 느껴지는 주인의 젖은 와이셔츠의 축축함, 함께 있기에 느껴지는 주인의 온기들이 계속 그 그림자를 키워갔다. 

 



뇌수를 찌르고 정신을 잃게 할 만큼 진한 주인의 흔적이 바닐라에게는 세상 어떤 것보다 시리고 아팠다. 모듈이 그녀의 말 끝에 붙여주던 가시는 이제 그녀 스스로를 찌르고 있었다. 주어진 천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 하지만 그럼에도 바닐라는 기뻤다.

 

“… … 조금… 참기 힘드네요…

주인님도 이런 것을 버텨왔던 거였을 까요…”

 

 

아프면 주인의 옷자락을 더욱 애달프게 잡았다. 그러면 더욱 머리가 시렸고, 다시 젖은 옷의 끄트머리를 세게 잡았다. 끊임없이 아프게 만드는 미련함의 순환이었지만, 바닐라 자신도 왜 그렇게 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주인이 다시 일어나면 아프지 않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옷자락 너머로 바닐라의 떨림이 느껴져 온 것이었을까, 바닐라의 주인님은 몸을 뒤척이다가 바닐라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좁은 침대에 어떻게든 같이 있으려는 몸부림으로 그는 바닐라의 몸 위로 팔을 얻었다. 아주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바닐라는 완전히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부분만을 제외한다면 그의 온 몸은 이미 바닐라를 향해 웅크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바보 같은 주인님…

지금 얼마나 아픈 지도 모르고… 하아…”

 

바닐라의 주변은 온통 주인의 채취로 가득했다. 모듈은 바닐라의 머리를 더욱 울리게 했고, 더욱 강해진 고통을 바닐라는 심호흡으로 간신히 잠재우고 있다.

 

 

“하아… 하아… 하아…

… 어깨는… 피고… 다니시죠… 주..인니…ㅁ…

그러는…게 … 더 멋있으시… 답니다…

…!!”

 

자신의 모듈을 거절하는 대가는 생각보다 아팠다. 바닐라는 머리를 쥐어 싸매며 작게 신음했다. 그래도 몇 분 가량 심호흡을 하고 나면 다시 잠잠해졌다.


주인은 모든 힘을 다해 바닐라에게 다가갔고, 이제 아주 조금 남은 둘 사이의 틈은 바닐라의 몫이었다. 다가가면 아플 것이다. 멀어지면 아프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모듈이, 트라우마가 자신을 선택의 기로에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 바닐라는 크게 호흡하고 그의 주인에게 조금 다가갔다. 침대 위에서, 주인의 팔이 자신을 안고 있는 지금, 꼬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가갈수록 주인에게 말을 걸기 힘들 것이다. 더욱 강해진 주인의 흔적들이 모듈을 각성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바닐라는 누구보다 이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다가갔다.

 


 

 

 

 

‘.... … …

… 이 정도 거리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아프겠지…’

 

바닐라는 주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그녀의 주인과 그녀 사이에는 빈 공간이 없다. 그저 그녀와 주인은 온 몸으로 맞닿아 있을 뿐이다.

 

 

“… 주인…님…

바보… 같은… 주인…님…

원래… 제가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진 않는데…

오늘…은 좀 멍청해지고… 싶네요…

… 하아… 하아… 하아…”

 

바닐라는 아픔을 참다 못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기뻤다. 자신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만큼 너무 아팠다. 아픔은 꼭 기쁨에 비례하게 커져갔다. 반대로 주인에게 안겨 있음에 대한 기쁨도, 아픔과 함께 커져갔다.

 

 

“…하아… 하아…

바보… 진짜… 바보…”

 


"... ... ..."


 

“제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라 했잖아요….

같이 다니지도… 못할 사람이… 하… 하지도 못할…. 약속은… 왜 해서…

바보… 진짜…

… 근데… 이렇게 말하는… 저도 바보네요…

이렇게… 아플 줄… 알아도… 계…속 안기는… 바보...

주인…니…ㅁ… 없…으면 살… 수도 없는… 바보… 바…ㅂ..ㅗ….”

 


바닐라는 너무 아팠다. 자신의 진심을 말하는 것도, 이렇게 아프게 말해야 하는 것도, 주인님이 듣지 못할 거라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마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것도. 그녀 스스로 직감했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이제 자신도 곧 쓰러져 주인의 옆에서 곤히 잠들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랬기에 정말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그 말을 했다.

 

 

“… 사랑…합…니다… 주인님…”

 

바닐라는 최대한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 동안 지어보았던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파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지만, 그럼에도 웃었다. 창가로 비춰오는 달빛이 눈물을 반짝이게 했다. 그렇게 그녀는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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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으… 뭐였…지…?

지금…은… ??’

 

점점 의식이 돌아오던 나는 조금씩 눈을 떴다. 잠들었던 몸에 힘이 근육을 타고 조금씩 흘러 들어가는 것이 점점 느껴졌고, 몸의 신경계의 통제권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은 아무리 눈을 떠도 암흑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암흑 너머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 아! 아파라…”

 

눈을 뜨기도 전에 느껴지던 것은 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고통이었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면 조금 아팠다. 언제 이렇게 맞은 거지? 그 동안은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 아프기는커녕 감각조차 느껴본 적이 없으니.

 

사실, 그 동안은… 뭐랄까, 사라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내 몸이 있었고, 그 철충이 무언가 뱉어내고 나서 내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내 몸을 제외한 모든 곳이 캄캄해졌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내 몸을 천천히 덮어갔다. 그 벌레 같은 것이 내 몸을 점점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떻게, 발버둥치니까 어둠이 조금 물러났다. 그래서 더욱 세게 발버둥쳤고, 어둠은 계속 나를 갉아 먹었다. 시간 개념조차 희미해진 곳에서 나는 계속 기어 다니는 어둠과 싸웠고, 그렇게 한참을 버텼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돌아왔다.

 

 

 

“… zzz … zzz”

 

“… ?”

 

내 품에서 무언가 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몸의 통제권을 온전히 가져오고 나서 눈을 떠보니 그것을 바닐라였다. 땀에 젖은 와이셔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내게 착 달라 붙어서 자고 있었다. 얼굴 표정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 퍽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같이 안아주었다. 자고 있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하지만 그녀가 준 힘보다 더 세게 안아주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몸이 말을 잘 안 들었다. 그래도 그녀를 안아주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으… 으…. …

… 주인님… 안아… 주세요…”

 

 

…?  잠꼬대였나. 순간 바닐라가 말을 건 줄 알았다. 하긴, 바닐라가 이런 귀여운 말을 할 리가 없지. 몸을 꼼지락 대면서 내 품을 파고 드는 이 귀여운 아이 때문에라도 나는 나갈 수가 없었다. 침대가 좁아도 바닐라가 너무 달라 붙어 있어서 그리 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닐라 입으로 나올 수 없는 말을 들은 나는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사실 방 안이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다. 옷가지들은 방바닥에 난잡하게 뿌려져 있었고, 서랍은 열려있는 채로 정리 되지 않은 내용물들을 보이고 있었다. … 깔끔한 방은 아니었다. 그래도 내 품에 안겨 있는 바닐라의 냄새와 같은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기에 기분은 좋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바닐라 방에서 자고 있는 거지…?

그 철충은 또 뭐였고…

하… 뭔 일이야. 이게…”

 

 

 

“…주…인…니..ㅁ…?”

 

내가 바스락 거리는 걸 들었는지, 바닐라가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 보았다. 초록색 단발 머리 아가씨는 눈을 비비는 것도 귀여웠다.

 

“아… 일어났어? 바닐라?”

 

 

 

“… … … 

… !!!!!!!!!!!!!

…주…주…. 주….주이…ㄴ님??”

 

바닐라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고, 입은 오물오물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사람 가슴 아프게…”

 

 

 

“… … 자… 잠시… 잠시만….

… 그… 마… 맞나요…? 

아… 아니지, … 흠흠!”

 

바닐라는 빠르게 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품에서 한참을 자고 있었기에 머리도 그렇고 옷 매무새도 엉망이었다. 그걸 작은 손으로 열심히 다듬었다.

 


“… 주인님의 신원 확인을 위해 명령권 이행 프로토콜의 인증이 필요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콘챠 언니를 불러…”

 

바닐라는 내가 정해둔 프로토콜 인증 절차를 위해 콘스탄챠를 부르려 했다. 리리스에게 이 프로토콜은 메이드들 전부에게 알려두라고 말 했었을 텐데… 아마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인증을 받을 거면 자기 언니한테 받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건가? 괘씸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자기인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 같아서 바닐라가 괘씸해졌다. 인증? 그건 나중에 또 하면 되지 뭐.


 

“그럼 잠시…

…꺄악?!”

 

나는 누워있는 나를 넘어가려고 일어나는 바닐라의 손을 붙잡아 다시 내 팔에 눕혔다. 바닐라는 내 팔을 베고는 누워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초록색 눈동자를 그 동안 본 적 없는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가 미처 지우지 못한 눈물 자국도 보였다.

 

“인증? 일단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되나? 바닐라?”

 

“그… 그러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실 거면…”

 

“안 되는 게 아니면 그냥 할래.”

 

나는 남아있는 팔로 내 품에서 숨소리를 내며 내 볼을 콧바람으로 간질이는 귀여운 바닐라를 덮고 안았다. 팔에 힘을 주면서 바닐라를 내 품 안에 완전히 덮이도록 만들었다. 바닐라의 심장 울림이 그녀의 몸을 타고 내게 맞춰졌다. 우리 둘 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랑해. 바닐라.

세상 누구보다도.”

 

 

 

“… … 

…”

 

“저… 바닐라? 괜찮아?”

 

“… … 짜… 님이야…”

 

“…응?”

 

“진짜… 진짜 주인님이야…

…”

 

“네네, 진짜 주인님이…

…아야!!”

 

바닐라는 갑자기 세게 나를 안았다.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힘은 어디 안 가는지 순간 숨이 못 쉬어질 만큼 강한 힘이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해야 겨우 정상적인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 바닐라? 괜찮아?”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바닐라는 내 품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더 파고 들어갈 틈도 없는 내 품에 더 들어가려고 했다. 바닐라를 안고 있던 내 팔이 조금 무안해진다.

 

“어… 음… 좋아해주니까 다행이네…”

 


 

“주인님… 바보 같은 주인님… 바보 같은 주인님…

… 바보 주인님은... 제가 지금 무슨 기분일지 전혀 모르겠죠?

그래요... 계속 그렇게 모르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진짜 멍청한… 우리 주인님”

 

그렇게 바닐라는 한참을 울며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분명 바닐라를 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은 나였는데, 이제는 바닐라가 나를 가지 못하게 막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바닐라의 향기가 코에 익숙해지고 그녀의 힘이 편안해질 때까지 한참을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는 바닐라도 날 주인님이라 불러주는 구나?

그 동안 ‘당신’이라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 이 여자, 저 여자 다 좋아하는 호색한 주인님이랑 다르게

저는 주인님을 바꾸는 게 시간이 좀 걸려서 그랬습니다.

불만이십니까?”

 

“불만은 무슨.

이제라도 제대로 주인님 취급 해주면 나야 고맙지.”

 


 

“… 그러면서 은근슬쩍 더 껴안는 건 뭡니까?

주인님의 팔이 무겁다는 건 생각 못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럼 바닐라는 내가 안는 게 싫었어?”

 


“… 싫은 건… 아니지만…

… 쓸데 없는 것만 실력이 느셨군요. 주인님.”

 

“쓸데 없다니? 뭐가 쓸모 없는 건데?”

 


“… … 직접 생각해보시죠. 주인님.

뭐… 주인님의 저렴한 지능을 생각해보면 조금 무리일 지도 모르겠네요.”

 

“흠… 그러게? 뭘까? 쓸모 없다는 게?

바닐라랑 더 붙어 다니는 실력을 말하는 걸까?”

 

“…”

 

“아니면… 바닐라의 말로 상처 받지 않는 방법?”

 

“…”

 

“… 그것도 아니야?

그럼… 바닐라의 본심을 알아차리는 방법?”

 



“… 그럼 지금 제 본심이 뭔지 말해보시죠. 주인님.”

 

“흠… 갑자기 그렇게 말하라니까…

글쎄? 땀에 젖은 내 와이셔츠가 기분 나쁜 건가?”

 


“(… 하여간 바보라니까…)”

 

“응? 뭐라고?”

 

“아닙니다. 바보 같은 주인님.

지금 제가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물론, 주인님의 수준에서는 그게 최선일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내 품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바닐라는 고개를 픽 돌리며 말한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이런 말 하나하나에 가슴 아프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런 바닐라의 뾰루퉁한 표정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내 품에서 곤히 자면서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이제 철회해줘야 하는 말이 있지 않아?”

 

“네? 뭐를 말입니까?”

 

“바닐라랑 같이 다닌다고 했던 그 약속.

지금 지키고 있잖아. 약속 지키면 바보라는 말 취소해준다고 했잖아.”

 

“… 진짜로 약속 지켰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짠데? 나 진심이야.”

 

“… 진짜 바보네요. 주인님은…

그 동안 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손 쓸 수도 없는 바보.”

 


“???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됐네요. 그건 나중에 언니한테나 들으시면 됩니다. 바보 주인님.

… 앞으로 그 약속. 지켜 주실 겁니까?”

 


“그럼. 난 했던 약속은 지킬 거야.

바닐라가 어디를 가든.”

 

난 진지한 얼굴로 바닐라를 보았다. 바닐라는 그런 나를 고요히 쳐다봐주었다. 그 눈에 아직 묻어 있던 눈물 자국이 아침 햇살에 비춰지며 빛을 한 바퀴 돌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바닐라가 살짝 웃은 것 같기도 하다.

 



“… …

… 그래도 아직은 약속 지키시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철회는 못 해드리겠네요. 아쉽게 되었습니다. 주인님.”

 

 

“응?! 그러기야? 바닐라??

보통 이런 분위기에서는 철회해주고 용서해주는 거 아니야??”

 

“약속은 약속입니다. 주인님. 부디 생각은 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힝… 너무한데…”

 

 

우울해하는 나를 보더니 바닐라가 웃으며 말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바닐라의 맨 손을 만져본 적이 있었던가…?

 



“… 쓸데 없이 그렇게 침울하게 계시지 마시죠. 주인님.

어깨가 축 쳐지면 보기 흉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그 대신이랄 건 없지만…”

 

바닐라는 내 얼굴에 대고 있는 손에 힘을 주더니 내 얼굴을 자신에게로 가져다 대었다. 내 품 안에서 스르륵 움직이며 자신의 얼굴도 내 얼굴로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쪽.

 

어디선가 달콤한 키스 소리가 들렸다.

 

 

“…?!!!!???”

 

“이… 일단 이걸로 참으시죠…

… 많이 양보해드렸습니다….”

 

“…? … 응???”

 

“… 주인님?”

 

“… … 응???”

 


“뭐… 뭐라고 말이라도 하시죠!

보통 이런 거는 남자가 먼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분위기를 모르는 건 제가 아니라 주인님이시네요!

그런 주인님이랑은 별로 같이 있고 싶지도 않습니다!”

 

 

… 뭐였지??? 키스한 건가? 바닐라가? 나한테??

 


“으… 진짜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으시면 저는 일하러 가볼겁니다?!

진짜로 가요?!”

 

내 품에서 슬쩍, 나가려는 듯이 바닐라는 안고 있던 내 팔을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묘하게 일어나는 속도가 느렸고, 계속 힐끗 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터질 것처럼 빨갛게 변해있었다.


 

“… 아!

가긴 어딜 가!?”

 

“… 흐엑?!”

 

왠지 데자뷰 같은데, 다시 일어나려던 바닐라를 붙잡아 내 팔을 베게 하고 꽉 안아주었다. 이제는 내 품이 자기 집인 것마냥 내 품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편안하게 찾을 수 있게 된 바닐라다.

 

“… 가려는 사람을 잡고는 뭐 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괘씸하게 자기만 애정 표현하고 가려는 나쁜 아이는 못 보내주지.

나는 아직 내 애정의 절반도 표현 못 했는데.”

 

“… 발정이라도 나신 겁니까?”

 

“글쎄…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 그… 그런 건…

… 제 주인님이란 분이 이렇게 음란한 분인 줄은 몰랐는데요…”

 

“그런 주인님은 싫어?”


 

“… …

… 이렇게 능글 맞은 주인님은 별로입니다.”

 

“그래? 그럼 앞으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해줄게.

사랑해. 바닐라.”


 

“…!!!!!! 그… 그런 건 갑… 갑자기..!!

… 그런 게 능글 맞다는 겁니다!! 이 음탕한 주인님!”

 

“흠… 내가 말한 사랑에 음탕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걸?”

 


“… 그… 그런 게 있다고 말하면서 사랑 고백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마 진짜로 주인님의 머리로는 분위기라는 걸 이해 못하는 겁니까?!”

 

“농담이야. 농담.

난 바닐라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 진짜… 바보 주인님…”

 

“바보 아닌데…”

 

“… 원래 바보는 자기가 얼마나 바본지 모르니까 바보입니다. 주인님.

자기가 뭘 모르는 지도 모르시죠? 주인님은.”

 

“원래 자기가 뭘 모르는 지는 모르는 거 아닌가…?”

 

“됐네요. 여기서 더 하면 또 우울해지실 게 뻔하니 그만하죠.

그냥 주인님은 저를 안고만 계시면 됩니다. 그거면 적어도 멍청해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네… 그러도록 하죠…”

 

 

 

 

‘(그리고… 그거면 충분합니다… 주인님.)’

 

“응? 뭐라고 했어? 바닐라?”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기억 안 나십니까?”

 

“… 안고만 있으라고 했습니다…”

 

“네. 그건 기억하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주인님.”

 

그렇게 우리는 계속 안고만 있었다. 벌써 몇 십 분은 넘게 안고 있었다. 슬슬 팔이 저려오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안고 있는 편이 더 좋았다. 알게 모르게 내게 미소를 흘리는 바닐라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고통쯤은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피곤함보다 나를 보는 것에 대한 기쁨을 우선해주었다. 그 표정 너머로 나를 향한 애정을 볼 수 있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안고 있을 수 있었다.

 

 

 

 

 

 

 

 

“… 이제는 정말 가야 할 시간입니다.

굼벵이 같은 주인님도 일어나셔야 합니다.”

 

“아쉬운데…

더 안고 있으면 안 되?”

 


“안 됩니다. 분명 다른 자매들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주인님 정도 되면 그런 건 미리 알고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뭐… 계속 안고 있으려는 게으른 모습이 더 주인님답긴 합니다.”

‘(그런 주인님이 더 좋긴 하지만…)’


 

“…? 아까부터 왜 그렇게 혼잣말을…”

 

“혼잣말은 혼잣말인 이유가 있는 겁니다. 주인님.

굳이 신경 쓰시지 마시죠.”

 

“네…”

 

“아무튼 이제는 일어날 겁니다.

이번에는 진짜 막지 마세요.”

 


바닐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났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아쉬움을 흘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말 나갈 생각인지, 일어나 방에 걸린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옷을 다듬어 메이드다운 차림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메이드 복 같은 걸 입고 잤으니 옷의 이곳 저곳 구겨져 있는 부분이 있었다. 자기도 그런 것들 것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옷을 다듬는 손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갔다.

 

등 쪽의 구겨진 부분이 있었는데 팔이 닿지 않아서 바닐라가 낑낑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직접 가서 옷을 펴주었다. 등에 갑작스럽게 내 손이 닿자 바닐라는 순간 놀랬지만 이내 잠잠해져서 내 손길을 받아주었다.

 

 

“… 메이드에게 이런 걸 해주시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주인님.”

 

“왜? 내가 보기 힘들어서 그냥 그런 건데. 뭐.”

 

“주인님이 힘드실 때 이런 걸 해드리는 게 제 역할인데, 제가 이런 걸 당하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그래. 미안, 미안. 그래도 싫지는 않지?”

 

 

 

“또 또 그런 질문…

… 후우… 아닙니다.

그런 질문으로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게 주인님의 나쁜 버릇인 것 같으니 제가 참아야죠.”

 

“그런가? 가지고 놀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바닐라가 싫어해주지 않았으면 하는 내 본심이 나온 거야.”



 

“그게…! …

…무슨... 본심....

...

...

… 아뇨. 됐습니다…”

 

 



바닐라는 말이 없었다.

 

“…”

 

“… 바닐라? 화났어?”

 

“…”

 


뭐지? 보통 이러면 또 미안해 한다며 어깨를 펴주거나, 쓸데 없는 소리나 했다고 구박을 주거나 할 텐데 이번에는 유독 말이 없다. 바닐라는 말 없이 거울을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가만히 메이드 복의 구겨진 부분을 조물거리며 펴주고 있었다.

 

 

“주인님.”

 

“응? 왜?”

 

“… 그렇게 편하게 본심을 말한다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 본심? 그냥 말하다 보면 나오는 거니까 딱히 감흥이랄 건…”

 

“장난치지 마시고. 진심으로.”

 

거울 너머로 슬쩍 보이는 바닐라의 눈은 진심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은 동시에 나를 쳐다보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분이었다.

 

 

 

“… 글쎄. 그렇게 말해도 뭐라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가요…

…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그냥 옷이나…”

 


“그래도. 한 가지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네.

나는 보통 어떻게 본심을 말할지 생각하지는 않아.

그보다는… 내 본심을 어떻게 전할 지 걱정하지.”

 

 

 

“… 어떻게… 전할 지…를 말입니까?”


 

“응.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다고 말하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전부.

 

나는 바닐라를 너무 사랑해. 정말이야. 표현하지 않으면 버티질 못할 정도로.

하지만 가끔 바닐라가 말하는 게 정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바닐라의 말투가 듣기 편한 건 아니긴 해. 하지만 그게 바닐라의 본래 뜻이 아니란 걸 알기에 버틸 수 있었어.


… 그런데 정말로 바닐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정말로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내가 정말로 멍청해 보이면 어쩌지.”

 




“… 그렇습니까…”



 

“… 그래. 조금 멍청해 보이긴 하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나도 두렵더라고.

… 내 본심을 제대로 전한 것이 맞을까? 바닐라가 내 마음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런 걱정이 계속 들더라고.”

 


“…”

 


“바닐라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잖아?

근데… 어쩌면 나도 그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때가 많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 둘 중 뭐가 더 안 좋은 걸까?”

 


“… 물어보시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이게 내 진심이긴 한 걸까?”

 


“…”

 


“바닐라에게 본심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그 본심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많이 힘든 일이라는 건 알 수 있겠더라.”

 


“…”


 

“어때? 대답이 되었을까?

그런 점에서는 바닐라가 말한 대로 바보였나 봐.

다른 사람이 내 본심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는 바보. 난 바닐라랑 다르게 말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말이야.”

 


“… 그러네요.”

 


“응?”

 




“맞아요. 주인님.

주인님은 진짜 바보네요. 저희에게 그렇게나 말해놓고 고민하는 게 고작 그런 거라는 게.”

 

“… 그렇긴 하지?”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말하다 보니 옷의 구겨진 부분도 전부 펴주어서 그냥 옷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내 입으로 뱉고 나니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고개 들기가 조금 부끄러웠다.

 

그러던 때에 바닐라가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내 양쪽 뺨에 손을 착 대고는 내 고개를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보도록 만들었다. 내 뺨을 모으는 바닐라의 손길에 따라 입이 오물아졌다. 양 뺨의 아픔이 찌릿하며 내 정신을 가다듬게 만들었다. 뺨에 멍이라도 들었던 걸까? 나를 쳐다보는 바닐라의 얼굴이 너무 선명했다.

 

 

“정말 바보 같은 주인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네요.”

 

“구… 구래…?”

 



“네. 바보 같은 주인님.

그래도 그런 주인님이 최선을 다해서 진심을 말해주신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 그러니 바보 주인님이 착각하지 않도록 가끔은 저도 제 본심을 말할 필요가 있겠네요.

사랑합니다. 나만의 주인님.”

 



 

… 나는 바닐라의 본심을 들었다. 날이 좋아서, 햇살이 들어서, 바닐라의 눈물 자국이 너무 기가 막힌 자리에 있어서, 혹은 그 눈물 자국에 새로운 눈물이 자라고 있어서, 바닐라의 얼굴이 유독 환해 보였다. 나보다 작은 몸을 일으켜 나를 붙잡고 있는 애처로운 손이 떨리고 있었기에 바닐라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바닐라의 얼굴을 잡았고, 그렇게 내 얼굴로 끌어들였다. 아까의 복수를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키스를 권했다. 바닐라가 그렇게 원하던 신사 같은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바닐라는 그런 나를 받아주었다. 혀를 섞지는 않았지만 깊고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키스를 했다. 나도 그랬고, 바닐라도 그랬고, 서로를 보내기 싫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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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아파야 했다. 바닐라는 분명 아파야 했다. 자고 있는 주인의 곁에서조차 자신의 본심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팠다. 이번에는 심지어 본인의 앞에서 말을 했다. 멀쩡하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본인 앞에서 대화를 해야 했다. 자신의 본심이 온전히 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이걸 모듈이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아파야만 했다. 바닐라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합니다. 나만의 주인님.”

 

하지만 왜인지 아프지 않았다. 저 사람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있어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자신은 지금 아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아파서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눈물이 나오게 기쁘고 웃음이 난다는 것이었다.

 

---쪽.

 

그가 자신에게 키스했다. 단순히 키스하는 것만으로는 아쉽지 않게 계속, 그가 팔에 힘을 줄 수 있는 동안은 계속, 그가 키스해주었다. 바닐라의 촉촉한 입술이 다른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들렸다. 그의 눈은 이전 주인과 달랐다. 분노와 오만만으로도 간단히 가득 차버리던 이전 주인의 눈동자와 달리, 지금의 주인의 눈은 사랑과 애정, 동정, 자비, 용기, 설렘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그 때에 가서야 바닐라는 깨달을 수 있었다. 단 한 번 말할 수 있었던 이 본심은 너무나 커다란 아픔을 가지고 왔다. 주어진 천성이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필연적인 아픔이 따라 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행동 속에서 고통은 잦아들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던 애정과 사랑이 섞여 모듈이란 천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이 슬프게 보였다. 그 슬픔은 동정이나 그런 것을 초월한 사랑이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하나의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의 얼굴. 어떻게 그런 얼굴을 보고도 아플 수 있겠는가? 바닐라는 태어나 처음으로 저주스러운 말투를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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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바닐라에서 폭주해버렸네... 3만자 ㅎㄷㄷ

원래 이거 다음에 것도 쓰고 하고 해야 하는데 그래도 바닐라는 마무리해야 될 것 같아서 쓰긴 썼음


학교 다시 하는 게 너무 개같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쓰긴 써야지.

라붕이들한테 개추 받은 게 몇 갠데. 다만 전처럼 하루 이틀에 하나씩 올리거나 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원래 전편에 리리스의 모습이 주인님 잃어버린 정신병자같이 보이게 하는 게 목적이긴 했는데

다시 보니까 다른 지휘관들이 너무 찌질해 보여서 안타깝긴 해슴. 정신병 걸린 리리스에 너무 몰두했나.

그냥 거기서 몸 가장 멀쩡한 애가 리리스여서 지금은 지휘관 5명이랑 싸워도 리리스가 비슷비슷하게 싸울 수 있는 거라 생각해주셈.

리리스 너무 미워하지는 마.


그러니까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