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지면 두 가지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적응하거나, 적응하지 못하거나. 물론 별것 아닌 시덥지않은 일들마저 적응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적응을 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도저히 적응을 못 했다고 한다면? 마치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취사선택 하듯이 말이다.내가 처음 사랑했었던 사람이 마침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 줄 것이다.


나와 그녀는 별 볼일 없는 시골에서 자랐다. 당시에 우리는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지만 그때도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잦은 전쟁과 귀족을 포함한 군벌들 간의 살벌한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해 수도는 시끄러웠지만 시골 변경에 있는 내가 살던 곳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높은 산골에 있었던 우리 마을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고 귀족이라곤 공납품을 받으러 오는 최하위 귀족이나 이따금씩 변경으로 모험을 온 모험가 무리에 속해있는 귀족들 말고는 구경도 못했다.


그런 산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바로 나였고 소녀가 바로 내가 사랑했었던 그녀였다. 통통한 볼살에 한손에는 줄기를 꼬아서 만든 인형을 가지고 오라비에게 물려받은 헐렁한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곤한다. 이웃집에 살았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철없는 개구장이인 나와 소심한 성격의 그녀였기 때문에 대부분 내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끌고 다니는 형태였지만 그녀도 딱히 싫어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했다. 그 미소를 보면 분명히 거짓된 미소는 아니었을 테니까. 나와 함께 놀면서 그녀도 점점 내성적인 성격에서 개구장이로 변했고 가끔은 사고도 쳐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불려가서는 같이 볼기를 맞으며 혼나고 엉엉 울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당연히도 농민이었고 그녀의 아버지 또한 원래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농민이었지만 어느날 방문한 상인과 함께 수도에 다녀오더니 자신도 상인을 하겠다며 농지를 다른 농가의 농지를 상속받지 못한 차남에게 팔아넘겨 밑전을 확보하고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이따금씩 찾아오곤 했다. 처음엔 이전에 미리 해 놓았던 농작물로 간신히 연명했다고 하지만 점차 벌이가 좋아진 것인지 이따금씩 집에 들러서 돈과(이런 산골에선 마땅히 쓸 곳도 없었지만) 좋은 식료품과 옷가지들을 주고 한동안 있다가 다시 떠나는 것을 반복했다. 당연히 형편이 좋지 않은 나는 어느정도 나이를 먹고부턴 농사를 짓는 것을 도왔지만 그녀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농사나 짓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우리 산골은 기후가 좋아서 일년 내내 농사를 짓는 곳이었기 때문에 근처의 도시에서 자주 마차가 오고가곤 했다.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와 마차에 올라 도시에 처음 가서 다시 돌아온 날에 조그만한 아이가 그 동네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화려한 교복을 입고 돌아온 것은 꽤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농사일이 고되서 전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일 수는 없어서 이야기를 나누는게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즐거웠다. 그녀가 학교에서 사람들을 사귄 이야기를 듣다보니 난 그들을 본 적도 없는데 마치 일면식이 있는 사람인  것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난 평생을 글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살아갈 처지였지만 그녀 덕분에 글자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가 처음 보는 단어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그녀가 내게 건네곤 했던 책들과 동네의 어르신들에게 자주 물어봐야만 했다. 나는 농사를 지으러 가기 전에 그녀를 마차까지 바래다 주고 농사가 끝나면 마차가 도착하는 곳에 가서 그녀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간지 3년에서 4년쯤이 될 무렵 그녀는 어릴때에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릴땐 사내아이 마냥 짧았던 머리카락도 길어져서 어깨를 넘어 등을 뒤덮을 정도였고 이따금씩 우리끼리 만들어 놀곤 했던 진흙인형 같았던 얼굴도 성숙해져서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가슴은 튀어나왔고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녀가 천천히 변하는 것을 보고도 별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점점 매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에 내심 연정을 품었다. 우리는 때때로 벌어지는 사고 때문에 꽤나 로멘틱한 상황도 마주하곤 했다. 농사에 지쳐서 그녀와 함께 잠을 청하다가 눈을 떠 보니 늦은 밤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말 오랜만에 밤하늘을 본 것 같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날이라 별빛이 쏟아지듯이 비춰지고 있었는데 그녀도 그런 광경은 오랜만인지 눈을 반짝이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내 시선에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뭐...대부분은 우리가 장난을 치다가 뒤엉켜서 몸이 섞였는데 굉장히 민망하게 되었는데도 서로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던지...하는 경우긴 했다.



그래도 그녀의 마음속에 남자로써의 나는 없었던 것인지 그녀는 학교에서 잘생긴 것으로 유명한 남학생들의 이야기를 종종 꺼내곤 했다. 원래 학교라는 곳은 귀족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하지만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해지던 때였는지라 그녀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돈만 낸다면 누구나 입학이 가능 할 정도였으니까. 잘 먹고 잘 자란 사람들이니 당연히 멋있고 잘 생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표정이 어두워 지는 것을 감추려고 꽤 노력을 많이 했다.



평생 이 시골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 덕분에 나는 농사를 쉬는 날에 도시에 가 본적도 있다.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도시의 모습을 본 나는 수도의 광경은 도저히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도시에 갔을 때에는 마침 휴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거대한 성당에서 흰색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종교적인 물건들을 들고 도시를 행진하는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가 향해있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행렬중에 유독 한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은 남자였다. 피부는 하얗고 오똑하게 서 있는 콧날에 장발의 금발,마치 여성같은 입술에 날렵한 턱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잘 안갈 정도였다. 그녀가 자주 얘기하던 남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분명히 저 사람에게 연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꽤나 마음이 울적했다.


그 날, 그녀의 교복이나 그 도시에서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입고다니는 것 만큼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때가 타 있는 옷이 아닌 그래도 꽤 괜찮아 보이는 옷을 그녀가 사 주었다. 처음 입어보는 형태의 옷이라서 걸음걸이가 어색했었다. 그리고는 도시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손으로 집어먹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가 눈치를 주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내가 식사를 하는 것이 굉장히 특이해 보였는지 힐끗 훔쳐보고 있었는데 아마 식사예절을 지키지 않아서 비위가 상한 모양인지 표정이 그닥 좋지 않았다. 나는 처음 보는 식기들을 어색하게 잡으면서 식사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능숙하게 나이프로 음식을 썰어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언젠가부터 그녀는 어째서인지 나와 함께 있을 때에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때때로는 답답함을 표하기도 했다. 아마 그녀의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고 도시에서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자신은 마차를 타야 해서 수업이 끝나면 헐레벌떡 돌아와서 이 시골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칠 기회가 없다는 것도 포함이었다. 점점 불만이 거세지고 나는 그저 그녀의 푸념을 들어 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녀가 도움을 청해 왔다.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가 장사가 잘 되어서 도시로 이주를 가서 살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평생을 지내왔던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만이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서 도시로 갈 수 있도록 꽤나 무거운 짐을 마차가 오는 곳 까지만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영영 떠나버린다는 생각에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이런 거지같은 곳에서 더이상 지내기 싫어! 나도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제발 좀 도와줘!"


라고 그녀가 말하는 순간 마치 내 모든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서의 삶도,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의 오라비와 동생들도, 그리고 나와의 추억도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그날 그녀를 떠나보냈다. 꽤나 오랫동안 가슴속에 머물렀던 사랑이지만 허무하게 끝났다. 아니, 한동안은 가슴이 정말로 아팠다. 농사도 건성으로 지어서 아버지에게 자주 혼났고 밥도 목구녕으로 제대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결국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을 느낀 나의 아버지는 내심 눈치를 채신 것인지 그렇게 한참을 지내던 어느날 술을 가져와 나와 함께 마시며 말씀하셨다. 그녀의 아버지, 지금은 상인이 된 그분은 돈으로 벼슬을 사서 하급귀족이 되었다고. 원래 있던 처자식 중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거스르지 않은 것은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와 오라비, 동생들은 버려지고 그녀의 아버지는 좀 더 높은 신분을 가지기 위해 명예가 있지만 가난한 귀족 집안과 재혼을 했다고. 난 당연히 그녀의 가족들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버려진 그녀의 가족들이 가여워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었다.


다음날 오랜만에 그녀가 원래 살던 집에 찾아가 보니 마치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집마냥 문짝은 너덜너덜하고 창문은 깨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보내왔던 돈으로 샀던 동네에서는 꽤나 좋은 편에 속했던 가구들도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은 그 집에 아직 부러지지 않고 남아있던 식탁 앞에 앉아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회상했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키가 작아서 시선이 더 낮았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도 그 책상에 앉아서 가끔씩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식기는 전혀 쓰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녀의 어머니가 교복에 음식이 묻는다며 기왕 식기를 사 놓았으니 그걸로 먹으라고 그녀에게 잔소리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그 집에서 나왔고 다시는 그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


원래 썻던건 논픽션에 가까운 거라서 더 이상 쓰기가 좀 그렇더라. 그래서 다른걸로 짜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