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지도는 2020년 파키스탄 정부에서 발간한 파키스탄 지도다.

단순히 지도만 보면 카슈미르 전체를 자기네 땅으로 집어넣은 지극히 평범한 파키스탄 지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도 오른쪽 아래에 뭔가 이상한 게 있다.

보아하니 인도 영토에 둘러쌓인 월경지 같아 보이는데 왜 파키스탄은 저 월경지를 자신들 영토로 그려놓은 것일까?


저 월경지의 이름은 주나가드(Junagadh).

인도 구자라트 주에 속해있는 곳으로 영국령 인도 제국 시절 주나가드는 영국의 직할령이 아닌 인도 제국의 565개 토후국 중 하나에 속한 토후국이었다.

이 주나가드 토후국을 다스리던 왕가는 바비(Babi) 가문으로 본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파슈툰계 귀족 가문이었다가 무굴 제국 시기 인도에 들어와 구자라트 지역에 정착해 토후가 된 것인데 주나가드 말고도 구자라트에 있던 다른 토후국인 라단푸르(Radhanpur), 발라시노르(Balasinor), 마나바다르(Manabadar) 역시 다스리던 꽤나 잘나가던 가문이었다. 그리고 무릇 인도 반도에 알박기한 대부분의 무슬림 토후국이 그렇듯이 주나가드 또한 인구의 절대다수(약 80%)가 무슬림이 아닌 힌두교도였다.


아무튼 영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무슬림 토후가 힌두교도 신민을 다스리는 평범한 토후국이었던 주나가드에도 격변의 시기가 찾아왔다.


2차대전 이후 영국이 인도 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인도의 무슬림들은 독립 예정인 힌두교 국가 인도와의 별개의 무슬림 국가의 수립을 요구했고 유혈 충돌 끝에 영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별개 독립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말인즉슨 인도 제국 내 565개 토후국에게도 인도 혹은 파키스탄의 일부로 가담한다는 선택의 시간이 왔다는 뜻이었고,

이에 토후국을 다스리던 토후들은 각자 자신들의 새로운 조국으로 인도 혹은 파키스탄을 자유롭게 선택했는데,

이 때 인도 영토 내부에 위치한 토후국의 경우 지배자가 무슬림이더라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힌두교도이고 인도 영토에 둘러쌓인 현실을 감안하여 인도에 가담하는 선택지를 고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주나가드의 토후 무함마드 마하바트 칸 3세는 3면이 인도에 둘러쌓이게 되었음에도 파키스탄에서 파견한 무슬림 연맹의 설득으로 파키스탄에 가담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당연히 절대다수였던 힌두교도 주민들은 토후의 결정에 거세게 반발했고 인도의 마지막 부왕이자 인도-파키스탄의 영토 분할을 집행하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 역시 영토의 통일성을 위해 파키스탄과 인접한 토후국만이 파키스탄에 가담할 수 있다는 원칙에 위배된다며 우려를 표명했으며 인도 정부 역시 계속해서 설득을 시도했으나 토후의 결정은 변함이 없었다.

사실 인도 제국을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할 때 토후국이 인도나 파키스탄 중 어디에 가담할 지는 전적으로 토후의 선택에 맡긴다고 정했기에 마운트배튼 경이나 인도 정부 역시 토후의 결정에 태클 걸 여지가 없긴 했었다.


그렇게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 자치령이 수립된 그 다음날이자 인도 자치령이 수립된 8월 15일, 주나가드는 파키스탄으로 편입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9월 16일 파키스탄 정부는 주나가드의 파키스탄 편입 청원을 수용하였다.

그러자 인도는 주나가드의 파키스탄 편입은 주민들의 여론을 무시한 토후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무효임을 주장하며 본격적으로 실력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주나가드와의 국경을 봉쇄해 주나가드로 물자 반입을 차단하였고 주나가드에서 망명온 인사들로 하여금 뭄바이에 임시정부를 꾸리고 주나바드의 '해방'을 요구하는 여러차례의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는 등  주나바드 침공을 위한 빌드업을 짜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토후 무함마드 마하바트 칸 3세는 가족 및 측근들과 함께 파키스탄으로 망명했고 총리인 샤 나와즈 부토가 토후가 떠난 빈자리를 맡게 되었다.

인도의 침공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부토는 본국에 지원을 요구했지만 파키스탄 본국은 묵묵부답이었고 곧바로 11월 9일 인도 정부는 주나가드에 군대를 진입시켜 주나가드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주나가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2월 20일에 인도 정부의 감시 하에 주나가드의 인도/파키스탄 편입을 놓고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는 (인도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파키스탄 편입이 91표, 인도 편입이 19만 870표가 나오면서 주나가드의 인도 편입이 결정되었다,

인도 정부는 합병한 주나가드를 사우라슈트라(Saurashtra) 주에 편입하였고 1956년 사우라슈트라 주를 봄베이 주에 편입하였다. 이후 1961년 봄베이 주를 구자라트 주와 마하라슈트라 주로 분할하면서 주나가드는 구자라트 주에 속하게 되었다.

대놓고 영토를 빼앗긴 파키스탄은 주나가드의 주민투표가 인도 정부가 독단적으로 벌인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주나가드 문제를 UN에 제소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기도 전인 같은 해인 1948년에 카슈미르에서 주나가드는 '따위' 수준으로 보이는 대규모 분쟁이 발발했고 이윽고 주나가드의 영유권 분쟁은 카슈미르 문제에 완전히 묻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파키스탄은 주나가드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있지 않고 있다. 이 글 맨 위의 지도가 바로 그 증거.


아무튼 중요한 점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 대해서만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3줄 요약

1. 인도-파키스탄 독립 당시 주나가드의 토후가 파키스탄에 가담함

2. 빡친 인도가 주나가드를 점령한 다음 주민투표로 인도로 합병함

3. 파키스탄: 미쳤냐 ㅅㅂ럼아 인도: 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