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1화: https://arca.live/b/regrets/23805175

2화: https://arca.live/b/regrets/24107633

3화: https://arca.live/b/regrets/2442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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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할 날이 올 거야.

 그리고 나, 여자친구 있어.  난 너에게 더는 메일을 쓰지 않을 거야.

- 엣....


멍하니 있는 너를 내버려 두고, 외투를 챙겼다.

갑작스럽게 내게 호의를 드러내는 너의 행동이, 울고 있는 너의 모습들이.

더는 나를 그 자리에서 더 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으나 도착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어,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울고 있는 너를 두고 뒤를 돌아서는 꼴사나운 이별이었다.

너와의 이별은 멋지게 끝내고 싶었는데. 적어도 너와의 과거 청산은 개운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너란 여자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였다.

그에 비해 나는 부족한 남자였다.

내 추억 속에 남아있는 너의 모습을 두고 상상해왔던 성인의 너는 역시 아름다웠다.

그래서, 너와 더는 인연을 끊고 싶어 허세를 부렸다.

아직 사귀는 단계도 아니고, 그저 썸만 타고 있는 후임 여직원과 연인 관계라고.

이게 내가 너에게 느꼈던 열등감과 배신감에 대한 찌질한 복수였다.

난 생각보다 옹졸하고, 비겁하고, 겁쟁이에게 속이 좁은 놈이었던 건인지도 모른다.


집 근처로 도착해, 금요일에 매일 혼자 술 한 잔 기울이는 기사 식당으로 들어가서 술안주용 돈가스와 소주, 맥주를 한 병씩 시켰다.

내 찐따 같음과 찌질함의 조롱을,

그리고 너의 앞날이 잘되기를 빌며 잔을 비웠다.

한 잔 두 잔 비워내는 소맥 잔들을 바라보며, 내 속을 비워냈다.


*****


네가 돌아가고 나서, 객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너라는 존재를 찾아 헤매다가 이제서야 돌아왔는데.

차갑게 거절 당했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호텔 객실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약간은 어두워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야 할 호텔 조명이 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너에게 차였음을,

바보같이 지낸 지난 세월 탓에 더 이상 너는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바닥에 토할 것 같이 느껴졌다.

심장이 뽑혀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너를 쫓아가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 어째서?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대시해 보았다가 거절당한 적이야 수없이 많았다.

은근히 정조와 연애에 관해서는 꼰대 같은 남자들이 많았으니까.

자기들 하반신은 맘대로 놀리면서, 여자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놈들.

그렇기에, 연애에 대해서만큼은 난 무게감을 두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화장실 변기로 달려가서 토를 했다.

오늘 그와 같이 식사한 내용물들이, 그대로 나왔다.


*****


숙취로 인한 두통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회사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으며 거울을 보았다.

면도조차 제대로 못 했는지, 턱에 절반만 깨끗하다.


- 주임님, 뭐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뿔테 안경 밑으로 다크 서클이 짙게 깔린 후임이 믹스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묻는다.


- 세상 사는 게 좋은 일이 몇이나 된다고. 주말에 술이나 마셨지 뭐. 근데 너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 쌓였던 드라마 몰아서 보고, 롤하고, 잤어요.

- 그래서 님 티어가?

- 어제 플래 달았어요.

- 풉


커피 믹스가 코로 넘어가버렸다.

겉만 여자지 속은 남자 중학생이랑 다를 게 없다.

아직도 원피스 매화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부터 포켓몬스터 신규 버전 나올 때마다 구매하고 플레이해서 꺼무위키 수정하는 것까지.

예전에 알던 포켓몬스터가 아니고 이상하게 생긴 애들이 많아져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주임님은 롤 안 하세요?

- 난 롤 잘 몰라서 플레이하면 패드립만 듣는데? 버섯 심는 거랑 실명 다트랑. 이상한 고양이 캐릭터 골라서 가만히 있는 거 해. 

   아, 가끔 구르는 캐릭으로 구르기만 써.

- 사람이세요?

- 그전에 넌 여자가 아닌 거 아닐까?


후임이 신고 있는 삼선슬리퍼로 무릎을 신나게 걷어차였다.


- 그나저나 오늘 회식인데요.


대체, 이 회사는 왜 월요일에 회식을 하는 거야. 미친놈들.

회식을 그렇게 하고 나면, 여직원들은 대부분 그날 오전 반차를 쓰던가 지각을 하고, 남자 직원들도 일하다가 얼굴 처박고 잔다고.

할 거면 적어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하란 말이야.


- 술 좀 깨셔야 할 거 같은데요. 잠시 쉬죠, 주임님. 오후에 할 일없는 거 같은데.

- 할 일 많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어디 가세요? 할 일 많다면서요?

- 일하기 싫어서. 나와, 커피 사줄게.


카페로 향하자 후임이 쫄랑쫄랑 쫓아온다.

역시 사람과 대화할 때 분위기 좋게 만들려면 무언가 먹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도 돈을 먹이는 거겠지.

후임이 정말 중학생 같다고 느껴지는 게, 쓴 거를 정말 못 먹는다.

예를 들자면, 지금 커피 시킬 때도 쓴 거 못 먹는다면서 카라멜 마끼아또만 마신다.

가끔 아메리카노 먹을 때면 그건 크레이프나 가나슈 케이크 같은 후식을 시켰을 때뿐.

덕분에 토실토실한 기니어피그 한 마리를 보는 기분이다.


- 살 안 쪘어요!

- 아무 말 안 했어.


*****


갑작스럽게 외근이 잡혀 버렸다.

그것도 긴급 메일로 금요일 한밤중에 왔다.

외부업체와의 회의로 원래라면 부장 1명과 차장 2명이 참석해야 하는데.

부장은 장례식 참석, 차장1은 휴가, 차장2는 병가.

그래서 업무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나와 후임이 참석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변경되어 버렸다.

월요일에 회의였기 때문에, 회의 자료 준비로 주말 출근을 해야만 했다.

원래 참석해야 할 사람들이 자료 준비를 주말에 하기로 했었다며, 결국 처음부터 다 만들어야 했다.

야근 멈춰, 제발.

주말 출근도, 젠장.

후임에게만큼은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일요일 오후에만 집에서 자료 정리를 부탁했고, 나는 토요일 밤샘하고 일요일 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 날 아침, 차를 끌고 출근하자 후임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 주임님 차 있었어요?!

- 마트 짐 운반용이다. 외제 차도 아닌데 뭐. 운전만 할 줄 아는 거지 아직도 내비보고도 헤맨다.

- 개털일 거 같은 주임님이 이딴 회사 연봉으로 차를 굴리고 있었다니...

- 너처럼 집돌이 집순이로 살면 돈은 쌓인다. 롤 스킨에 돈 지르지 말라고.

- 주임님이 운전도 할 줄 아는 남자였다니...

- 아니, 대체 내가 뭐 때문에 운전도 못 하는 남자라고 생각한 거냐.

- 제가 운전면허 없으니까요. 아, 자존심 상해.

- 때린다.

- 폭력 멈춰! 근데 차가 지저분하네요.

- 세차 했는데 빌어먹을 미세먼지 탓이다. 사탕 먹을래?

- 박하사탕, 목캔디, 호올스……. 왜 다 이딴 사탕뿐인가요?

- 잠 깨려고.

- 저, 잘 테니까 알아서 깨워주세요. 아, 주임님이 졸음 운전하면 때려드릴게요.

- 때리지 말고 날 깨워 얌마.


후임이랑 있으면, 한 마디면 끝날 대화들이 두 세배로 부풀려져서 뒷골이 댕기고 피곤했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지만.


*****


회의는 의외로 빨리 끝났다.

의외로 후임이 업무를 할 때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서 말이다,

영업팀에서 똥 싸질러 놓은 계약 건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문제들을 제기하여, 무리한 요구들을 잘라내고 우리 회사 쪽에서는 하면 손해였던 없던 업무들을 상대 업체에 업무 넘기는 것으로 잘 마무리 지었다.

부장에게 전화했더니 수고했다는 4글자와 회의록은 내일 오후까지 제출하라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 수고했다. 어디로 가면 돼? 집 근처까지는 데려다줄게.

- 핫?! 설마 주임님, 제가 사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서...

- 두고 간다.

- 아아아아아아아아! 같이 가요!


...뭐지.

내비게이션 찍어서 가고 있기는 한데.

가면 갈수록, 딱 봐도 고급스러운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외제 차들이 영화 분노의 질주마냥  아파트 인근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긁으면 엿된다.

차선 바꾸는 것도 느릿느릿하게 양보하면서 최대한 천천히 운전했다.


- ...너 정말 여기 살아?


우리 회사 연봉으로는 평생 벌어도 못 사는 아파트들,

그곳이 후임이 사는 곳이었다.


- 왜요? 아, 설마 여기 운전 안 되는 곳이에요?

- ...여기 살 정도면, 굳이 우리 회사 안 다녀도 되는 거 아냐?

- 제 부모님이 부자인 거지 제가 부자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먹고살기는 해야 하니까요. 뭐 용돈이야 받지만.

 아, 우리 집 주차장에 차 세우시고, 같이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여기 근처 맛집으로 생선구이 집 있어요.


*****


- 부모님 직업이 어떻게 되시는데?

- 아버지는 얼마 전까지 언론사 부장이셨다가 퇴직하셨고, 어머니는 음대 교수세요.

 아버지한테 등 떠밀려서 적성에 맞지도 않는 언론학과 다니다가 이공계 넘어왔어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 다니게 했었고요. 아, 그래도 체르니 시리즈는 다 뗐어요.


생선 가시들을 열심히 발라 먹고 있는 후임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와 눈이 마주치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 왜요? 제가 다르게 보이시나요? 훗.

- 아니, 내 친구 생각나서.

- 친구가 왜요?

- 내 친구 중에, 완전 재능충인 애가 있었거든. 어떤 대회 나가더라도 상은 받고 오는. 

   예고생도 아니었는데 콩쿠르 대회 나가서는 입상하고 오던 애가 있었어.


너는 사생대회 나갔다 오면 미대 진학하라는 소리를 들었고, 피아노 대회 나가면 음대 진학하지 않냐는 소리를 들었었지.

그런 아이였는데.

결국에는 둘 다 안 갔지. 신기하게도.

후임은 내 이야기에 무언가 짜증이 났는지, 생선 발라내는 것을 포기하고 된장찌개를 퍼먹기 시작했다.


- 재능충들 다 나가 죽었으면. 아, 그런 면에서는, 선배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긴 하네요. 저 같은 여자도 상대해주고.

- 그야 잘 대해줘야, 나한테 뭔가 돌아오는 게 있을 거잖아? 후임 잘 대해줘야 나도 뭔가 얻어먹는 거지.

- 내일부터 대충 일할게요.

- 죄송.


*****


식사를 마치고 소화 좀 하자며 후임이 산책을 권했다.

계절은 어느새 봄의 끝자락이 되어 있었지만, 해가 지고 나면 여전히 날씨는 쌀쌀했다.

석양이 지는 하늘과 잘 정비되어 있는 인도의 풍경은 아늑한 기분을 주고 있었다.

후임은 기분이 좋다는 듯, 내 옆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제대로 저장되지 않고 있었다.

네가 울던 모습을 두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려서, 여전히 내 마음에는 가시가 박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후임이 발걸음을 멈추는 것에 맞춰 나도 멈춰 섰다.


- 에, 에엑? 아빠, 엄마? 왜 여기 있는 거야?!


응? 엄마?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노부부가 서 있다.

후임이 늦둥이인 걸까. 아빠, 엄마라고 했으니 후임의 부모님이겠지만 조부모님으로 보인다. 


- 근처 산책하다 왔지. 근데 누구니?


그분들이 나를 바라보자, 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그저 직장 상사입니다. 외근하고, 저녁 같이 먹은 후 데려다주는 길입니다만.

- 아아, 당신이군요. 요즘 우리 아이가...

- 아아아아! 조용히 해!


후임은 곧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내 발목을 시원하게 한번 걷어차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로 뛰어 올라간다.

그녀가 도망친 곳을 노려보며 발목을 붙잡고 있는데,  아버지 쪽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 잠시, 커피나 한잔 하고 가요.


뭐지.

갑작스럽게 후임의 부모님에게 붙들려서 근처 카페로 끌려왔는데, 불편해 죽을 것 같다.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벌벌 떨면서 들어 올리고 입에 가져다 대었다가 땠다를 반복했다.

코피가 코로 넘어가는 건지 입으로 넘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두 분은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아버지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 우리 딸 어떻게 생각하나?

- 푸훕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코로 뿜으면서 한참 동안 재채기를 하고 티슈의 커피 섞인 코를 풀었다.


- 저, 전 그냥 직장 상사이고 그다지 친한 관계는 아닌지라....아, 혹시 악평이라도 하나요? 그럼 죄송합니다만....

- 하루 종일 직상 남자 상사에 대해서 떠들어대서 궁금했거든요.우리 애가 남자랑 저렇게 웃으면서 대화하는 것을 내 20년 평생 본 적이 없어요. 애초에 친구도 없는 애거든요.


...어머니 맞는 거지? 아니 그보다 후임 녀석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어머니 쪽에서는 손수건을 꺼내 잠깐 눈가를 닦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후임은 어렸을 때 낯을 많이 가리고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과는 한마디도 못 하는, 내 어렸을 때와 같은 모습.

그 성격 탓에, 중학교 때 다른 여학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했다.

그 나이 때는 그런 법이다. 

들판에 있는 온순한 양은 늑대에게 좋은 먹잇감이듯이, 약하게 보이는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괴롭힘에 대상이 된다. 

당연히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었고, 원래 멘탈이 약했던 후임의 정신 상태는 한계가 곧바로 와버렸다.

상대방의 생각 없는 돌팔매질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상인 법이다. 

후임은 방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아서, 중학교 졸업장만 딴 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배우던 피아노도, 무대에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진학 대신 검정고시를 본 후 수능을 쳐서, 간신히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언론학과를 들어갔지만, 여학생들의 눈초리가 무서워서 포기하고, 남학생들이 많은 이공계로 전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후임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 대었고, 아버지는 아무 대답 없이 부인의 어깨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 우리 애를 잘 부탁하네.

- 잘 부탁합니다.


무슨 학생 부탁받는 교사의 느낌이다.

나도 보잘것없는, 위에서 시키면 후임 갈궈야하는 직장 상사일뿐인데.


*****


다음날.

출근해보니 먼저 도착해 있는 후임님께서는 어째선지 상당히 차려입고 왔다.

매일 입고 오던 펑퍼짐한 바지 대신 치마와 스타킹을,

즐겨 신던 흰색 컨버스화 대신 굽 있는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다.

발이 아픈 건지 구두에 발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발바닥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자 중학생이 어른의 옷을 억지로 입고 화장한 듯한 꾸밈이라 매우 어색하지만 나름 귀여웠다.

뿔테 안경을 벗은 채, 눈에 콘택트렌즈를 끼기 위해 바둥거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렌즈 끼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안경을 썼다. 

안경 썼을 때는 몰랐는데, 눈동자가 상당히 크고 예쁘다.

펑퍼짐한 옷들만 입고 다녀서 몰랐던 건데 의외로 몸매가...살찐 게 아니라 글래머였던 거였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어제 부모님이 이상한 소리 하지 않았죠?

내 앞에 몸을 살짝 내밀며 말을 하자, 컴퓨터 키고 업무 준비하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 그냥, 널 잘 부탁한다고 했다. 무슨 학교 담임 선생님처럼.

- ..할 말 없어요? 저보고?


내가 후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곧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간다.


- 아, 어제 수고했어.

- 그거 말고요...

- 생선구이, 맛있더라.


결국 그날, 아침부터 신나게 발을 짓밟혔다.


- 어디 두고 봐요. 저, 집착 심하니까.

- 평소처럼 귀엽기만 한데 뭐. 아, 구두 대신 슬리퍼 신고 있어. 회사 복도 위험하니까.

- 으으...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후임이 짧았던 단발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것도.

매일 후줄근한 정장 대신 깔끔한 오피스룩을 입고 오며, 더 이상 뿔테안경을 쓰지 않게 된 것도.

다만 변함없는 점이라면 여전히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 

내가 다른 여직원과 회의하고 있으면 인상을 쓰면서 기어코 들어온다는 등.


*****


아싸였던 내가 간신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어 입사하게 된 중소기업인 회사.

사내에서의 내 평가는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누구와도 인맥을 만들지 않고 시키는 업무에만 매달렸기에, 거기다 정규직 전환이 된 케이스라 뒷담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른 부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 때도, 벌벌 떨며 걸었다

때로는 억울하게 내 업무 실수로 몰린 험담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학창시절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모든 게 내 탓이라 생각했다.

.들려오는 대화들이 모두 나를 향한 비난이란 생각에,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 


부서 변경이 되면서, 내게도 직장 선임이 생겼다. 

인수인계를 그저 워드 문서로만 확인해야 하고, 스스로 업무 방법을 터득해야 된다며 매일 불평만 해대는 사람.

입사하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도, 당당하게 혼자 밥을 먹거나 타 부서와 싸우는 사람.

거기서 만났다.

나의 운명의 사람을.


처음에는 나를 데리고 일 얘기만 했기에, 불편했다.

밥 먹을 때에도 그와 마주 앉는 것이 두려워서 대화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으나, 혼자 내 자리에서 밥 먹고 있는 나를 보면 편의점 도시락을 사와서 내 옆에 앉거나, 또는 날 데리고 카페를 향하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 포기 이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함이 그에게 존재했다. 


그는 어떻게든 내가 타 부서 지원 업무까지 떠맡는 것을 부장들에게 달려가 협의하여 해결해주었다. 

그가 과부하가 걸리도록 업무를 하더라도, 나까지 피해가 오는 것은 막아주었다. 

여기 어차피 좆소이니, 너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눅 들 필요가 없다면서, 용기를 주었다. 

업무나 회사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와 같이 행동해주었다. 

그의 옆에 있을 때에는 왕따를 당했던 시절 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난 그에게 반해 있었다.

그가 없는 생활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다시 소통을 하게 된 부모님에게 언제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조금 꾸미고 오자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차갑게 거절했고, 다른 여사원이 그에게 달라붙지 않는지 따라다녔다.  

나만의 왕자님.

아무에게도, 안 줄거야. 아니 못 줘. 내 거니까. 


*****


네가 떠나간 이후.

그동안 네가 보냈던 메일들 하나하나마다 답장을 보냈다. 

답장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내가 보내는 메일을 읽어주기라고 하길 바라며, 정중한 사과문에서부터 비굴하게 애원하는 내용에 메일들을 보냈다.

내 지저분한 과거, 그리고 네가 느꼈던 배신감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날 조금이라도 용서해주기를 바랬다.

어렸을 때에 희미했던 우정이라도 되살아나주길 바랬다.

하지만 수신 확인이 되지 않는 메일들을 보며, 이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보내도 읽지 않는 스팸 메일처럼, 

나란 사람은 너에게 그런 존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