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나가! 이 빌어먹을 종이 쪼가리들 가지고 꺼져버리라고!”



흩날리는 서류들, 지랄맞은 고함소리, 저 한구석탱이에 쏟아진 홍차, 그리고 시가 냄새. 늘 반복되는 상황이다. 저 미친년한테 맞춰준답시고 몇 년을 반복한 상황 말이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겠나? 몇 년을 이 짓을 했는데, 그 정도면 알만하지 않아? 내가 그리도 만만히 보이나 보지?”



“아닙니다 장관님. 장관님 결제가 꼭 필요한 부분이어ㅅ,”



짝! 하고 울리는 소리와, 뒤이어 올라오는 얼얼한 통증. 여느 날과 마찬가지인 일상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녀는 한손을 들어올리고 있고 나는 얼굴이 돌아가 있는 식으로 말이다.



 “닥쳐! 내 앞에서 그딴 식으로 변명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꼴도 보기 싫은 쓰레기들 가지고 당장 내 집무실에서 나가라고!”



 “…알겠습니다 장관님.”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니 오늘 하루는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다. 방바닥에 엎어진 홍차 냄새와 함께 살짝 피냄새가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방금 맞을 때 입 안이 터진 것 같다. 



땅에 떨어진 서류들을 대충 싹 쓸어 담고,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져나와 보니 벌써 바깥에 가로등이 켜진 게 보인다. 저 미친년한테 이 보고서를 올린다고 몇 시간을 지랄했는데, 역시 다 헛짓거리였나보다.



나도 뭐 올리고 싶어서 올린 줄 아나? 그놈의 갈리폴리인지 롤리폴리인지 하는 전투 참전 용사들 보상금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린 거고, 그마저도 최대한 조심히 쓴 게 그건데. 생각할수록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개 같은 년이 진짜. 



 우울한 내 모습이랑 딱 맞게, 저 거지 같은 하늘도 우중충함으로 가득 들어있다. 아침부터 눅눅한 구름이 껴있더니, 지금은 비까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다. 다행히 저 앞에 택시가 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홀딱 젖은 생쥐 꼴이 될 뻔했다.



 “베이커가 51번지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손님. 그런데 손님 얼굴이…?”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제발 아무 말 하지 말고 갑시다.”



 내 볼 상태가 예상보다도 더 심했나 보다. 일면식도 없는 택시기사 양반이 걱정할 정도인 걸 보면 말이다. 



 이 빌어먹을 비서 일을 시작한지도 벌써 3년이 지났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서러운 날인것 같다. 저 미친년이 뺨을 때린 거야 한두 번이 아니긴 했지만 이번 거는 진짜 단단히 빡쳤나보다. 



 “하… 내가 미쳤지… 내가 왜…”



 3년 전에 저 미친년 비서로 자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서라는 것들이 1년도 안 지나서 수없이 갈아치워졌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올리비아 처칠, 해군부의 저 불독 년은 사람 잡아먹을 빌어먹을 성격이 문제다. 시시때때로 기관차같이 흥분을 하고, 겨울철 꽁꽁 얼어붙은 템스강 마냥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위로 좀 할라치면…



 “다 왔습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우중충하게 고여 있는 저 물웅덩이 같은 우울증을 사방에 튀겨대며 같이 사람을 끌어내려 버리곤 한다. 마치 지금 지나가는 택시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간 것처럼 사람 마음 깊숙한 곳까지 우울감으로 적셔버린다.



그래놓고 정작 자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을 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이 굴면서, 오히려 독설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보처럼 치부하는 것이다. 그 짓을 벌써 3년을 당했다. 



이젠 정말 지쳤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할 수는 없지. 마침 프랑스에 있는 친구가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하던데 이 기회에 그냥 그만두자. 그만두고 새 광명을 찾는 거다.



직장인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게 사직서다. 내일 그 여자 책상에 탁 하고 던지고, 인수인계 끝나는 대로 이 우중충한 나라를 떠나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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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다잡고 출근하니 이 얼마나 상쾌한가! 비록 그 여자 앞에 사직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 지긋지긋한 일을 끝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개 같은 년, 그 고운 얼굴이 어디까지 일그러질지 기대가 된다.



하늘도 내 결단을 응원하시는지, 어제까지만 해도 비를 퍼붓던 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깔끔하다. 주님께서도 나의 사직서 제출을 바라심이 틀림없다. 



즐거운 미소를 품으며, 비서관으로서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집무실로 들어가니, 마침 그녀도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반겨줬다.



“아, 이제 왔나? 마침 잘됐군. 어제 내가 했던 그… 행동말이야? 내가 아무래도 조금 심했었던 것 같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제 일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나 있을 줄 알았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 말도 안 한다. 이 또한 사직서를 내기에 완벽할 상황을 조성하시려는 주님의 뜻이 분명하다. 자기 행동이 심했다고? 저 여자가 자기 행동을 반성할 리가 없지. 



“미안하다는 거였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 달라는 거라네. 그냥 맨입으로 넘어가려는 것도 아니야. 여기 자네를 위해서 선물도 가져왔어.”



선물? 웬일인가 싶어 가만히 듣고 있으니, 그녀가 자기 책상 위에 있던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준다. 내 손 위에 얹어주고는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볼이 빨갛게 물들면서 다시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 자네가 어제 생일이었지 않나? 원래는 어제 선물로 주려고 준비한 거였는데, 하필 그 보고서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못 준 거였네. 내가 미안하네. 사실 생각해보면 그 보고서도 자네가 날 위해서 대신 뒤치다꺼리를 해준 거였을 텐데…”



지금 이 여자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뭐라고 자꾸만 말을 하고는 있는데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생일 선물? 어제가 내 생일이었구나. 그런데 그걸 저 여자가 어떻게 아는거지? 내가 예전에 말해줬었던가?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저 여자가 흘러가는 듯이 내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봤었지. 그때 말해줬었구나. 그때는 그걸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이거 때문이었구나.



“…자네랑 내가 만난 것도 벌써 삼 년이나 지났지 않았나?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네가 나를 위해서 일을 해온 게 많았고, 물론 모든 게 성에 찬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봤던 비서들 중에는 제일 성실했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자네에게 여태 해준 게 많지 않더군.”



“…네.”



“그래서 이번 생일이라도 한번 챙겨주고자 이렇게 준비한 거라네. 원래대로라면 어제저녁에 주려고 했는데, 어제 내가 화를 너무 심하게 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못 챙겨줬네. 다시 말하는 거지만, 정말 미안하네.”



말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얼굴에는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는 게 보인다. 기대, 설렘, 걱정, 두근거림. 날카롭던 눈매도 가리지 못하는 푸른 눈 속의 호수가, 요동치고 흔들리고 있다.



주체하지 못 하는 듯, 한쪽 손끝으로는 홍차 잔 끝을 쓸어 당기며, 안절부절못하는 눈길은 고정하지 못한 채, 도톰한 입술 사이로 쉴새 없이 이런저런 말들만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자네 같은 남자들이 도통 무슨 선물을 좋아할지 잘 몰라서 말이지. 고생 좀 했다네. 그래서 일단 생각해본 게 그거였어. 한번 열어보게.”



그녀의 말을 들은 그제야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자그마한 반지가 하나 있었다. 파란 보석이 달린 금반지가.



“나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둘 다 눈 색깔이 푸르지 않나? 그 점을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이라네. 저 보석과 금의 불변성처럼, 우리 둘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거네. 자, 이리 손을 줘 보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왼손을 붙잡고는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언뜻 보이는 그녀의 왼손에는, 나와 같은 푸른 빛의 반지가 약지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 됐네. 후후, 이거 아주 잘 어울리는데 그래? 오늘은 특별히 할 일이 없을 텐데, 업무를 빨리 마치고 어제 못한 생일 기념 파티라도 자그맣게 하는 게 어떤가? 마침 내가 아주 좋은 식당을 예약해뒀거든.”



내 손에 반지를 끼운 게 아주 대단한 일이었다는 양, 그녀는 기뻐하며 내 손을 놓아줬다. 그러고는 다시 조잘거리면서, 그 식당의 무슨 메뉴가 특히 마음에 들 거라고, 나를 위한 특선 메뉴를 주방장에게 주문해놨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이 어제의 히스테릭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잠시 본분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내가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런 점에서 자네도 아주 좋아할 만한 메뉴야, 특히 그 새끼 양 갈비 구이는,”



“장관님, 제가 실은 드릴 게 있어서 말입니다.”



아주 행복한 듯이 계속 이어지는 말을 잠시 끊고, 그녀의 책상 위에 종이봉투를 놔둔다. 그리고 그 위에 곱게 빼서 상자에 다시 넣은 반지를 올려놓는다. 물론, 사직서라는 봉투 겉면의 제목이 가려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오늘부로 올리비아 처칠 해군부 장관님 비서직을 사임하겠습니다.”



그녀의 웃는 낯이 그대로 멈추고,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이 의문부호로 가득 차오른다.



“뭐…라고?”



“사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선물 준비해주신 건 고맙습니다만, 제 생일은 ‘어제’였기 때문에, ‘오늘’ 주시는 이 선물은 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녁 약속도 죄송하지만 같이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윽고 일그러지고 굳을 대로 굳은 얼굴, 뭐라 말을 할 줄도 모르겠다는 듯이, 눈에는 물기가 가득 차올라 누군가 툭 하고 치기만 하면 펑 터질 것만 같다.



“여태까지 저같이 못난 비서관이 같이 일하게 돼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다음 비서는 부디 저보다 훨씬 나은 이를 만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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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주면... 고맙고...